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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의 논리: 3. 명제, 4. 이원성, 5. 의미.
- Gilles Deleuze, Logique du sens, Minuit, 1969, pp. 22-35, 36-40. 4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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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계열 : 명제 de la proposition 22-35
명제에는 첫째, 지칭화(désignation) 즉 지시화(indication)이다. 둘째, 주체와 연관된 표명화(manifestation), 셋째 차원에 기호화[작용](signification), 넷째을, 의미(sens)이다.
의미가 있다는 것은 무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려면 첫째 공통의 조건이 있어야 한다. 둘째 사건이 있어야 한다. 셋째 말하는 이(주체)가 있어야 한다. 넷째 문장은 사실들로서 이어짐이 있어야 한다.
제4계열 : 이원성(des dualités) 36-40
첫째 큰 이원성은 원인과 결과 사이, 물체와 비물체 사이인데, 전자는 인식적이며, 후자는 현존적이다. 이원성의 기원은 페라스와 아페이론에 있고, 어느 쪽은 원인으로 삼느냐가 도덕과 종교에 걸친 문제이며, 둘 중에 하나를 실재로 보면 다른 하는 비실재성(모방체 또는 상징체)가 된다. - 이원성은 분할의 의미에서 단어(용어, 항목)에서도 있고 문장에서도 있다. 이런 이원성이 파라독스를 생겨나게 할 것이다. 분할의 각각은 계열을 만들 수 있고, 두 계열들 사이에는 대칭도 평행도 아님에도 의미상으로 비유 또는 유비를 만든다. 이 유비에서 시적 상상이 활발하며, 유비상 하나는 진실인 것 같고 다른 것은 허구인 것 같으나, 실제로는 둘 다 계열이라는 점에서 비물질적이며, 달리 말하면 원인에서 여러 갈래의 계열들 중에 서로 상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계열일 뿐이다.
제5계열: 의미(du sens)[의 역설들] pp. 41-49.
이원성이라기보다 분할에 의한 각각의 계열들은 계열들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그 계열들이 상응 또는 유비의 계열들 사이에서, 원인의 동일성이라고 하더라도 계열에서는 서로 의미를 달리한다. 의미의 차이는 원본을 설정하지 않으면 양자가 모두 의미있고 대등하게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계열들은 파라독스를 생산한다.
신아이스테시스로서, 즉 공감성으로서 일반화가 성립하기 위해 계열들은 서로 다른 일반화작업을 한다. 하늘은 푸르다(靑) 하늘은 검다(玄)는 둘 다 다른 일반화일 뿐이다. 인성이 착하다 훌륭하다도 마찬가지이다. 착하다고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맞다 틀리다라는 진위에 관한 대상(인물)이 아니라 그런 작동(행동)이이 있다는 것이다. 각 계열들의 귀결들 사이에는 계열의 과정이 다르면 다를수록 여러 파라독스들이 생산된다.
크게 네 종류를 구별하는데, 1) 퇴행의 파라독스 즉 무한 증식의 파라독스: 프레게(Gottlieb Frege, 1848-1925)의 역설. 2) 불모의 이중화의 역설 즉 건조한 반복의 역설(paradoxe de la réitération sèche): 스토아학파의 역설, 3) 중성 즉 본질의 제3상태(La neutralité ou tiers état de l'essence): 도트르꾸르의 역설 환상적 역설, 중성의 역설 아비센(Avicenne, Ibn Sina, 980-1037)의 역설. 4) 불합리의 역설, 즉 불가능한 대상들의 역설(Paradoxe de l'absurde, ou des objets impossibles): 마이농의 역설이다.
* 소크라테스(Socrate, 전469-399)야 말로 ‘삶이 철학’‘이었다. 저자거리 일상인에서부터 당대의 최고의 지식인들에까지 찾아가 배웠고, 그 배움의 길을 함께할 사람을 찾아 고등학교 앞에서 젊은이들을 만나기를 기대하였고, 이방인들로부터 아테네에 들어온 새로운 지식을 수용하기를 잊지 않았다. 말하자면 깊이에서 높이까지 다양하게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루었다. 그의 관심만큼이나 후신들의 계열들을 다양하다. 크게 보아 상층의 플라톤이 있고, 표면의 다양성에는 적대적 나라 페르샤로 가서 왕자를 가르치는 크세노폰(전430경-v.355), 메가라의 에우클레이데스(Euclide de Mégare, 전450경-전366경), 퀴레네 학파의 아리스티포스(Aristippe, 435-356) 등 다양하며, 심층적으로는 헤라클레스를 닮으려는 안티스테네스(Antisthène, 전444-365) 등도 있다. 그 중에서 한 계열인 플라톤이 서양철학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 플라톤도 스승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를 잘 알았을 것이다. 박홍규에 작품 독해에 따르면, 플라톤은 그 과정과 과업에서 두 갈래의 길이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두 가지, 즉 페라스와 아페이론을 – 후대철학자들의 주제로서 정지와 운동, 공간과 시간, 잘라짐과 이어짐, 닫힘과 열림, 정의된 범주와 미친 생성 – 평생 다루었다. 앵글로색슨 철학이 페라스, 정지, 공간 등을 철학으로 간주하고, 아페이론, 운동, 시간 철학이 아닌 악으로, 허무로, 비신앙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 피해를 우리나라가 일본을 통해, 그리고 미국을 통해 그대로 받아왔다. 이제 그 탐만치를 벗어날 때가 되었다. 우리 입말로 쓴글로 철학하기가 60여년이 체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가 제대로 철학한 것도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 과정을 탐구하고 시대마다의 환경과 생산력의 변화에 따른 변천과정을 탐색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이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원자론의 유물론, 관념연합론의 범주들와 판단론 등에 파묻혀 지내는 이항대립적 사고에 대한 비판으로 보인다. 이런 읽기는 새로운 시대에서 새로운 철학에 앞서서, 삶에서 공동체(공산주의)를 어떻게 성립시킬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나중에 공동체주의로서 노마드를 이야기 할 것인데, 그 자신은 노마드가 아니라, 연구실의 은둔자 또는 동굴혈거인처럼 지냈다. 움직이지 않고서도 우주와 함께 움직인다는 것을 설파하는 것이 동양 고대의 도가이거나 인도의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인류가 동지애로서 사는 방식은 언제나 어디어서든지 자연의 흐름을 깊이 이해하면서 사는 것이리라. 들뢰즈는 학위 논문을 철학 전공자들에게 보낸 글이라면, 이 의미논리는 일반인들에게 전하는 단편소설집과 같다. 관심 있는 어느 부분을 끄집어내어 읽어도 좋다. 앞과 뒤, 이것저것을 읽어서 반이 계열의 문제거리를 읽었다면, 총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볼 필요가 있다. 옴니버스로 된 연작 단편소설집처럼 읽어보기를 바란다.
자아, 세계, 신 이라는 삼원성에 맞추려는 하나의 패거리가 아니라, 1) 사고가 아닌 사유가 무엇인지를 반성하고 성찰할 때이다. 2) 그 사유가 삶에서 ‘뭣’을 행하면서 그 작동을 이야기 하려는가?에 있다. 삶이 먼저다. 3) 사고보다 사유, 이론보다 실천, 공시태보다 통시태, 이러한 것은 기억(무의식)의 과정들, 여러 생명체들의 이야기들, 여러 터전의 역사들을 탐색하고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들뢰즈는 이런 세 가지 방향(의미)을 입말과 쓴글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56LK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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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계열 : 명제 de la proposition 22-35
[현재 여기 있지 않는 것에 대한 언설이 많이 있다. “엘리스는 구슬 만하게 줄었다.” 이것은 지칭도 표명도 표지도 아니지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를 읽은 사람에게 의미있다. 우리가 보기에 의미는 첫째, 명제가 의미가 있으려면 공통의 조건이 있어야 한다. 공통의 조건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이다. 이 조건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 둘째, 가능적인 사태가 있어야 한다. 엘리스가 줄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칭될 수 있는 사건이 필요하다. 풍선이 줄어든 것이든, 생명체가 축소에서 확대되었던 것을 보고 역순으로 생각했던, 사건이 필요하다. 셋째, 말하고 하는 이, 주체가 무엇을 말하려는 것에 대한 표상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는 주체의 표현의 비유와 은유에 대한 관점이 있다.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표현했는가? 수학적 논의, 생물학적 논의, 무의식의 논의, 사회적 논의 등의 위상이 있다. 관점은 그 사람의 특유의 것이다. 넷째, 문장은 사태이다. 사태는 단면의 이어짐이다. “엘리스는 8살 어린이다”와 “그녀가 손톱크기의 구슬로 줄어들었다”라고 한다면, 두 문장 사이에 간격은 매우 크다. 수학적 환원의 논리가 필요하거나, 실재 시간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가능성이란 문제가 아니라 함축관계이다. 왜 이렇게 표현해도 사람들이 의미 있다고 여길까? 사람들은 일단 무의미가 아니라는 전제 위에 있을 것이다. 왜? 단어와 사태에는 이미 존재가 깔려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이 인정이 착각의 논리의 한 축이다. 그러면 인정하지 않지만, 발설자의 의도가 들어있는 의미의 논리의 한 축이다. 즉 이상 또는 환영의 논리이다. 이 논리가 사람들에게 착각의 논리만큼 영향을 주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착각이 있기에 이상의 논리가 있는가? 아니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현실을 벗어나서 미래에 관점을 두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을 바꾸어 새롭게 현실을 재단하려는 관점에 있을 것이다. (41NLB)]
지칭화, 표명화, 표지화{기호화}: 이것들의 연관들과 순환성 22-35
- Désignation, manifestation, signification: leurs rapports et leur circularité
22 사건-효과들과 언어 심지어는 언어의 가능성 사이에 본질적 연관이 있다. .. 그러나 명제들 속에는 많은 연관들이 있다. 이 들 중에, 표면효과들 즉 사건들에 부합하는 것은 어느 것일까? [넷째가 의미(sens)의 논리일 것이다.] (22)
많은 저자들은 명제 속에서 구별된 세 가지 연관을 인정하는데 일치한다.
첫째는 지칭화(désignation) 즉 지시화(indication)이다. 이것은 명제가 하나의 외적 사물의 상태(즉 자료 datum)와 연관이다. 사물의 상태는 개별화되어(individué) 있고, 그것은 이런저런 물체, 물체의 혼합, 질과 양들, 관계들을 포함한다.
지칭은 단어자체들과 개별적(particuliers) 이미지들과 연합에 의해 작동한다.
지칭하는 직관은 다음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이거야(c'est cela), 이거 아냐(ce n'est pas cela). 문제는 단어와 이미지들의 연합(associacions)이 원초적인지 파생적인지, 필연적인지 임의적인지 아는 것이 문제인데, 그 문제는 아직 제기될 수 없다. .. 명제 속의 단어들 또는 언어적 부분들(particules, 소사)은 모든 경우에 이미지를 선택하기 위한 빈 형식으로 사용된다.
사람들이 이것들[단어들]을 보편적 개념들로 취급하는 것은 잘 못일 것이다. 이것들은 형식적 특이자들(singuliers)이고 순수 지칭표들(designants), 즉 방브니스트(Venveniste, 1902-1976)가 말하는 지시사(indicatuers)이다. 예로서 이것, 저것, 그, 여기, 저기, 어제, 지금 등이다. 고유명사 또한 지시사 또는 지칭표이다. (22) [첫째의 진위 문제는 대응시켜 보면 안다. ]
23 명제의 둘째 연관은 자주 표명화(manifestation)이라 이름 지어진다. 명제가 말하고 표현하는 주체와 명제의 연관을 말한다. 그래서 표명은 욕망과 신념의 발언(l'énoncé)로서 표현되는데, 욕망과 신앙은 명제에 상응한다. 욕망과 신념은 인과적 추론(inférence)이지 연합이 아니다. (23)
고유명사가 특권적 지시사(indicatuer)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Je)는 기초적 표명화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 의존하는 다른 표명화들 일 뿐만 아니라, 그 나(lui)와 연관되는 지시사들의 일체이다. (23)
표명[작용]의 우선은 언어분석에서 확인된다. 왜냐하면 명제 속에는 특별한 부분들(particules)[단어]로서 표명표(manifestants)가 있다. 즉 나(je), 너(tu); 내일, 늘(toujours); 다른 곳, 도처에 등이다. 고유명사가 특권적 지시사인 것처럼, 나(Je)는 기초적 표명표이다. 둘째는 진리와 허위 [진위문제]가 아니라, 진솔성과 속임수 [정체성, 동일성] 문제이다. (24) [다음 행위에도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고 진솔하게 대할 것인가에 있다. 욕망과 신념이 그 실행에서 진솔하게 이루려고 했느냐를 물어야 할 것이다.]
24 우리는 명제의 셋째 차원에 기호화[작용](signification)이란 이름을 할당해야겠다. 일단 보편적 또는 일반적 개념과 단어의 연관을 말한다. 즉 단어가 개념의 함축들과 관계하는 통사적 연결을 말한다. (24)
언어학적 기표들은 따라서 본질적으로 “함축하다” 와 “그러므로”이다. 함축(implication)은 전제들과 결론 사이의 연관을 정의하는 기호(signe)이다. (24)
증명이라는 말을 좁은 뜻으로 삼단논법이나 수학적 증명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며, 도 확률성들의 물리 의미나 약속들과 참여들의 도덕적 의미에서 이해해서도 안 된다. 도덕적 의미에서 결론의 단언은 결국 약속이 효과적으로 지켜지는 순간에 의해서 표상[재현]되기 때문이다. (24)
이렇게 이해된 기호 또는 논증의 논리학적 가치는 더 이상 함축들의 가언적 양식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조건 즉 한 명제를 진리 “일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조건들의 집합니다. (25)
따라서 진리의 조건은 거짓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부조리(l'absurde)에 대립된다. 부조리란 기호작용 없는 것(sans signification)이고, 진리도 거짓일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 (25)
[세 가지는 진리와 허위, 진솔성과 속임수, 진리조건과 부조리 사이의 상관관계 문제이다.]
<세 가지의 순환성> [이것은 역자가 붙인 문단 제목이다: 왜 순환성의 제목을 달았을까?]
25 이번에는 기호화는 표명화와 지칭화에 우선 하는가 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 표명화가 지칭화와 연관에서 우선한다는 것 ... 이것은, 비록 침묵의 파롤이라 할지라도, 파롤(parole)의 관점이다. 파롤의 질서에서 시작하는 것은 나(Je)이며, .. 이 질서에서 나(Je)는 지칭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기호화에서도 우선한다. (25) [주어 관점은 파롤이다]
이런 이유로 데카르트는 이성적 동물이라는 인간의 정의를 코기토라는 규정작업에 대립시킨다. 왜냐하면 이성적 동물이라는 정의는 기호화된 개념들의 명시적 전개를 요구하기 때문인데(동물이란 무엇인가? 이성적이란 무엇인가?), 반면에 코기토라는 규정작업은 말해지는 것과 곧바로 이해되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25)
26 표명화는 지칭화와 기호화에 관련해서 우선하며, 이 우선은 파롤의 질서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데카르트의 코기토... (26) [표명화 우선은 기본적으로 자아의 문제이다]
그러나 기호화가 가치있고 스스로 전개될 수 있는 다른 질서가 있다면, 기호화는 표명화보다 우선하고 표명화를 기초한다. 이 질서는 랑그(langue)의 질서이다.(26) [문장의 추론은 개인의 랑그의 차원이 아니라, 마치 산술의 연산을 다루듯이, 지성이 다루는 기호 또는 함수의 사용 양식이다.] [랑그의 기호화는 개념적 일반화의 견해이다. ]
26-2 기호화가 지칭화에 우선이라는 생각는 미묘한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donc)라고 말할 때, 즉 하나의 명제를 결론지어진 것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그 명제를 확언의 대상으로 만든다. (26) [우리가 일상에서, 이야기에서 “하여튼”이란 말 뒤에 발언자가 결론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다. 이 결론은 전제와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독립적이고 확실한 사건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러나 이를 위해 두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 하나는 전제가 효과적으로 참인 것으로 제기되어야 하며, 그리고 전제 자체를 가정된 것으로 지칭된 사물의 상태에 연관시기 위하여 순수 함축의 질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전제 A와 B가 참이라가 가정하더라도, 우리는 문제의 명제 Z를 결론 지울 수 있는 것, 즉 함축과 독립적으로 명제 Z를 그 자체로 긍정할 수 있는 것은 A와 B가 진리이라면 명제[Z]도 이번에는 진리로 인정한다. (27)
이 역설은 논리학의 핵심에 속하며, 논리적 함축과 기호 작용에 관한 모든 이론을 위해 결정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이 역설은 루이스 캐럴이 “거북이가 아킬레우스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유명한 원문에서 사용한 역설이다. (27)
[하여튼 그 여인은 착하다: 착하다는 전제의 사실(대상과 사건)이 있어야 하고, 또한 전제들(A와 B)이 진리와 함축관계가 아니라도 진리이어야 한다는 조건이다. - 전제가 부정이면 결론도 부정이지만 전제가 진리이라고 결론의 명제도 진리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 전제들을 다 모아도 결론의 진리를 결정할 수 없을 경우에 파라독스이다. (41NLB)]
다시 말해, 기호화는 등질적이지 않다. “함축하다”와 “그러므로”라는 두 기호는 완전히 이질적이다. (27)
[영미분석의 의미론에서 전건과 후건의 관계가 여기서 기호화라고 할 수 있다. 전건과 후건에는 인관문제가 들어있는데 비해, 들뢰즈는 생성된 명제의 범위와 위상에 따른 의미는 앞선 명제에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성되는 다른 명제들과 연관에서 지위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56LLA)] - [지칭화=대상화, 표명화=주체화, 기호화=표면화(모방화), 의미=생성으로 볼 수 있을까? - 기호화가 문제인데, 기호화는 여러 방식으로 등장한다. 퍼스가 고민했을 것이다.]
명제의 네 번째 차원은 존재하는가? Y-a-t-il une quatrième dimension de la proposion?
27 지칭화에서 표명화로 그리고 나서 기호화로, 또한 기호화에서 표명화로 그리고 지칭화로 가면서, 우리는 명제의 순환인 순환 속에 끌려든다. .. 세 차원에서 의미(sens)라는 넷째 차원을 덧붙여야 하는가를 아는 문제는 경제적이고 전략적인 문제이다. .. (27)
그러므로 이것은 권리상(de droit) 문제이지 사실상(de fait) 문제가 아니다. (28)
그러나 사실의 문제도 있고, 이 문제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의미란 지칭화, 표명화, 기호화라는 세 차원 중에 하나에 위치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우선 지칭화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 / 브리스 파랭(Brice Parain, 1897-1971)이 그리스 철학 속에 .. 파라독스를 센 바 있는데 .. 수레가 입으로 통과하는 것을 어떻게 회피할 수 있는가? / 루이스 캐럴(Carroll)은 어떻게 이름이 응답자를 가질 것인가? (28)
분명한 것은 모든 지칭화가 의미를 가정한다는 것이고, 사람들은 모든 지칭화에 작동하게 하기 위해 의미 속에 단번에 정착한다는 것이다. (28).
28 의미와 표명화를 동일시하는 것은 성공할 기회가 더 많다. 왜냐하면 지칭자들 자체가 명제 속에서 현시되는 ‘나’(Je)의 함수[주어의 역할]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28)
엘리스 “당신은 누군가 당신에게 말할 때만 당신도 말한다면, 아무도 아무것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말하면 들어야 한다. 주체가 둘이 동시에 있을 수 없다.] 이로부터 의미는 스스로를 현시하는 존재의 신념(또는 욕구) 안에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으리라. 험프티 덤프티 “내가 하나의 단어(mot)를 사용할 때, 그것은 그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바를 원하는 것이지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 (28-29)
자, 우리는 다시 순환 속으로 들어가 있으며, 캐럴의 역설에 만나게 된다. 거기서 표지화는 마지막 근거라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으며, 환원불가능한 지칭화를 선전제로 하는 것이다. (29)
그러나 동싱에 이런 상위 조건을 우리는 단지 진리라는 명제를 위한 가능성으로서 정의한다. 한 명제가 진리일 수 있는 가능성은 명제 자체의 가능성의 형식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 가능성의 형식들은 여러 가지이다. 논리적 가능성, 기하적 가능성, 대수적 가능성, 물리적 가능성, 구문론적 가능성‥… (29)
그래서 이제 참의 조건은 개념적 가능성의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질료(matière)로서 또는 관념적 층(couche idéelle)으로서, 다시 말해 표지화로서가 아니라 의미로서 정의 될 것이다. (30)
의미, 표현, 사건 Sens, expression et événement 30
30 의미(sens)는 명제의 넷째 차원이다. 스토아학파는 사건과 더불어 의미를 발견했다. 의미는 명제로부터 표현된 것(l'exprimé)이며, 사물들의 표면에 있는 비물체적인 것이며, 환원할 수 없는 복합적 본징/성질(entité complex)이며, 순수 사건이다. 이 순수사건은 명제 속에 안에 있거나(insister), 하부에 있는(subsiter) 것이다. (30) [환원할 수 없다는 시간적 생성이다.]
스토아학파 다음으로 [이 발견은] 둘째로 14세기에 오캄(Guillaume Ockham 1280-1348)과 리미니(Gregoire de Rimini, 1300경-1358), 오트르꾸르(Nicola d'Autrcourt, 1299-1369), 셋째 19세기에 .. 마이농(Alexlus Meinong 1853-1920)... 스토아는 플라톤철학의 전복을, 오캄은 보편자들의 문제에, 마이농은 헤겔과 그 후계자들과 투쟁했다. (30)
문제는 다음에 있다. 어떤 것[이 무엇], 즉 알리키드(aliquid)가 있는가? 이 무엇이란 명제와 명제의 항들과도, 명제가 지시하는 대상 또는 사물의 상태들과도, 체험된 것, 표상 또는 명제 속에 표현된 것의 정신적 활동과도, 개념들 또는 개념들 또는 기화화된 본질과도 혼동되지 않는 것이다. (31)
스토아학파는 의미를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어도, 물체도, 감각적 표상도, 합리적 표상도 아니다. 게다가 아마도 의미는 중성적(neutre)이며, 일반과 특수, 보편과 단일, 비인칭과 인칭에도 아주 무관하다. (31)
매 시기마다 이 논쟁은 반복되었다. - 라미리를 논박했던 앙드레 드 뇌프샤토(André de Neufchâteau, ?-1400경) 와 피에르 델리(Pierre d'Ailly, 1351–1420), 마이농을 논박했던 브렌타노(Brentano, 1838-1917)와 럿셀(Russell, 1872-1970) - 사실 이 넷째 차원을 드러내려는 시도는 루이스 캐럴(Carroll, 1832-1898)의 스나크(Snark) 사냥과 좀 비슷하다. 아마도 그것은 사냥 자체일 것이다. 그리고 의미는 스나크일 것이다. (31)
단어들, 사물들, 이미지들, 관념들에 만족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대답해주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의미가 현존한다고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의미는 효과가 없고, 되돌릴 수 없고, 비생산적인 찬란함(splendeur)에 싸여있기 때문이다. (31)
따라서 사실상(en fait) 우리가 명제의 일상적 차원[지칭, 표명, 표지]들을 이끌어 가는 순환으로부터 출발해 간접적으로만 의미를 추론해 낼 수 있다고 우리는 말할 것이다. 의미의 차원이 그 자체로서, 그 환원 불가능한 모습으로, 나아가 명제의 독립적이고 내적인 모델을 활성화시키는 생성의 힘과 더불어 등장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뫼비우스 띠처럼 그 원환을 찢을 때, 그것을 길게 펼칠 때 그것을 쭉 펼 때 뿐이다. (31)
의미의 논리는 경험주의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더 정확히 말하여 이 경험주의는 [플라톤의] 이데아(Idée)에 빠지지 않고서 가지적인 것의 경험차원을 넘어서며, 또한 길게 펼쳐진 경험의 한계에서 환영(fantôme)을 추적하고 또 환기하고 생산할 줄 아는 경험주의이다. (32)
32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이 궁극적인 차원을 표현(expression)이라 이름 지었다. 이 표현은 지칭, 표명, 증명(démonstration)과 구별된다. 의미는 표현된 것(l'exprimé)이다. 후설은 마이농 못지않게, 스토아적 영감의 생생한 원천을 재발견하였다. 후설에서 .. 지각의 노에마(noème perceptif) 즉 지각의 의미(sens de perception) ... 순수 겉모습(pure apparence) .. 그대로 지각된 것 (le perçu comme tel) .. 이것을 우리는 하나의 감각적인 자료(donné) 또는 성질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각 행위의 지향적 상관체로서 객관적이고 관념적 단위(unité idéelle)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노에마는 지각 속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명제 속에 현존하는 다른 지위(statut)가 있다. (32)
나무가 푸르러진다(L'arbre verdoie)는 나무의 색깔을 의미하는 것이고, 나무가 나무로 자란다(l'arbre arbrifie)는 나무의 전반적 의미가 아닌가? 노에마는 순수 사건, 즉 나무의 사건과 다른 것인가? (후설은 용어의 이유들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겉모습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름 아닌 표면의 효과가 아닌가? ... 현상학은 표면효과에 대한 이러한 엄밀한 과학인가? (33)
의미의 이중적 본성 Double nature du sens: exprimable de la proposion et attribut de l'état de chose, insistance et extra-être.
33 의미 또는 표현된 것의 복합적 지위에 대해서 검토해보자. 한편으로 그 지위는 자신을 표현하는 명제 밖에서 현존하지 않는다. 표현된 것[의미]는 그 표현 바깥에 현존하지 않는다. .. 다른 한편 그 지위는 명제와 전혀 혼동되어서 안 된다. 그것은 완전히 구별된 객체성(objectité)이다. (33)
명제의 속성은 술어(predicat)이다.[나무는 푸르다] 사물의 속성(attribut)은 푸르러지다(verdoyer)는 동사이다. .. 이와 반대로 논리의 속성은 물리적 사물의 상태 또는 상태의 관계도 아니다. 그 속성은 존재도 아니고 존재의 자격도 없다. 그것은 일종의 열외-존재(extra-être)이다. .. 녹색(vert 형용사)은 하나의 성질이며, 사물의 혼합체이다. .. 반대로 푸르러지다(verdoyer 동사) 사물 속에 성질이 아니고, 사물로부터만 말해질 수 있는 속성(attribut)이며 명제 밖에서는 현존하지 않은 속성이다.(33) [속성의 3차원 문장 속에서 사물 속에서 그리고 논리 속에서, 첫째는 부가적이고, 둘째는 사물의 상태변화이며, 셋째는 기호적이다. 들뢰즈는 의미 논리에서 변화의 논리를 말하고자 한다. (41NLB)]
우리는 출발점에 되돌아온다. 의미는 명제 밖에 현존하지 않는다. (33) [의미는 세차원 다른 차원으로 여기지만, 그래도 명제 속에서 다룰 수밖에 없다.]
33 그러나 여기서 두께 없는 [표면효과이기에] 두 면(deux faces)이 공존한다. .. 의미는 명제로부터 표현할 수 있는 것 또는 표현된 것이며, 사물 상태의 속성이다. 의미는 한 면은 사물로, 다른 한 면은 명제로 향한다. (33-34)
의미는 정확히 면제들과 사물들의 경계(frontière)이다. 의미는 그 무엇(aliquid), 열외존재이자 동시에 내속 존재이며, 내속에 부합하는 최소 존재이다. 이런 의미에서 의미는 사건(événement)이며, [사건일 때] 사물의 상태에서 사건을 사건의 시공간적 효과와 혼동하지 않는 조건에서이다.
장 가테뇨(Jean Gattegno, 1935-1994)는 캐럴의 이야기들과 고전적 요정이야기들의 차이를 정확히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캐럴의 경우 발생하는 모든 일은 언어 안에서 그리고 언어에 의해서 발생한다. .. 루이스 캐럴이 그의 저작들을 위치시키는 것은 바로 의미-사건의 평면세계평면세계(monde plat), 즉 표현할 수 있는 것-속성의 이다.(34)
캐럴의 논리학적 저작들이 직접적으로 표지(signification 기호작용), 논리적 함축과 결론들에 관련되며 단지 간접적으로 의미에 관련 .. 심지어 기호화는 파라독스를 생산한다. [논리적 파라독스] ... 그의 환상적 작품들이 무매개적으로 의미(sens)에 관련되며, 역설의 잠재력(puissance du paradoxe)에 연관된다. [환상적 파라독스]
이 의미의 두 상태[수학적 : 환상적], 사실상과 권리상, 후천적과 선천적, 하나[후자]는 명제의 순환으로부터 의미를 간접적으로 추론하며, 다른 하나는 명제들과 사실들 사이의 경계선을 따라 순환을 펼침으로서 의미를 자체로서 나타나게 한다. (35) (41NLB)
제4계열 : 이원성(des dualités) 36-40
[선승이 달을 가리키며, “저것을(cela) 보라”고 할 때, 달과 손가락은 대상과 지칭의 관계가 아니라, 지시체와 의미의 문제이다.]
신체[물체]-언어, 먹기-말하기 Corps-langage, manger-parler
36 첫째 큰 이원성은 원인들과 결과들, 물체적인 사물과 비물체적 사건들이다. .. 그래서 루이스 캐럴의 작품을 관통하는 대안이 나온다. 먹다 인가 말하다 인가. 실비와 브뤼노에서 대안은 “약간의 먹거리 몇 조각”인가 또는 “세익스피어 몇 조각”인가 이다.(36)
먹는다, 먹히다, 그것은 신체[물체]들의 작용의 모델이며, 신체들의 깊이있는 혼합의 전형이며... 물체들의 공존의 양태이며.. 그러나 말하다, 그것은 표면의 운동, 이상적 속성(attributs idéaux)들의 운동, 또는 비물체적 사건들의 운동이다. (35)
말더듬이(bégaiment)가 실언(gaffe)을 대체하고, 피상적 환영(phantasme)이 심층의 환각(hallucination)을 대체하며, 가속화된 미끄러짐에 대한 꿈(rêves)들이 난처한 매장과 흡수의 악몽(cauchemars)으로 대체 된다. (37)
두 종류의 단어 Deux sortes de mots
37 그러나 둘째의 이원성, 즉 신체-언어, 먹기-말하기는 충분하지 못하다. (37)
사물들과 명제들은 근본적인 이원성을 형성하기보다는 의미를 경계선으로 해서 맞붙어 있다. 이 경계선은 그들을 혼합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을 통합하는 것도 아니다. (37)
이 이원성은 두 측면으로, 즉 각자 안에서 두 항으로 반영하다. 사물의 측면에서, 한편으로 사물들을 구성하는 물리적인 성질들과 사물들을 구성하는 실질적 관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 비물질적 사건들을 나타내는 이상적 논리적 속성들이 있다. 명제의 측면에서, 한편으로 사물의 상태를 지칭하는(degigner) 명사들과 형용사들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사건 즉 논리적 속성을 표현하는(exprimer) 동사들이 있다. [정신은 이렇게 해서 우리가 금방 제시했듯이 1. 성질들, 2. 형태들 또는 본질들, 3. 작용들이라는 세 종류의 표상들에 이른다. .. 이 세 가지 관찰 방식에 언어의 세 가지 범주가 대응한다. 그것은 언어의 원초적인 요소들인 형용사들(adjectifs), 실사들(substantifs), 동사들(verbes)이다. (Bergson, EC 303)]
[명제의 측면에서 또한] 한편 특이한 고유명사들과 일반실사(substatifs) 일반형용사들, .. 다른 한편 동사들이 있다. .. 험프티 덤프티는 두 종류의 단어(mot)를 구별한다. “어떤 단어들은 특성이 있지 동사들이야. 그것은 제멋대로야(fiert). 사람들은 형용사와 더불어서는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지만, 동사와 더불어서는 그렇지 못하지. 그렇지만 나(자아, moi), 그 나는 내맘대로 나를 모든 것으로(tous) 사용할 수 있다! 불가침투성!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야.” (37)
험프티 덤프티는 사건의 불가통과성(impassiblilité)을 물체의 행동과 수동에 대립시키고, 의미의 공통불가소비성(inconsommablilité)을 사물의 소비성에, 두께 없는 비물체의 불가침투성(impénétrabilité)을 실체들의 혼합과 상호침투에, 표면의 저항(resistance)을 심층의 몰랑몰랑에, 간단히 말해서 동사의 제멋대로(fierté)[변화]를 실사와 형용사의 친절에 대비시킨다. (38)
험프티 덤프티처럼 이 둘 경계에 앉은 자는 이 둘들을 마음대로 다루는 자이며, 이 둘의 차이를 접속(articulation)하는 불가침투의 지배자이다. (38) [험프덤은 경계선에 있지만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경칩(charnière)같은 자이다. 이 둘의 연결자이다. 위에서 말한 자아(moi), 즉 ‘나’는 이 양자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둘 다를 마음대로 다루는 자이다. 영혼과 신체, ‘말하다’와 ‘먹다’를 둘 다 동시에 다루는 경계자는 입(bouche)이다.]
명제의 두 차원: 지칭과 표현, 소비와 의미 Deux dimensions de la proposition: les désignation et les expressions, les consomations et le sens
38 이원성에 관한 우리의 결론은 크라틸로스의 가설로 돌아가는데 있지 않다. 명제에서 이원성은 명사의 두 종류 사이에, 즉 정지의 명사와 생성의 명사 사이에 있지 않고, .. 명제 자체의 두 차원 사이에, 즉 지칭(désignation)과 표현(expressions) 사이, 사물의 지칭과 의미의 표현 사이에 있다. 거기에 거울의 두 측면처럼 있으나, 한 측면에 있는 것은 다른 측면에 있는 것과 닮지 않았다. [이 이원성은 마주 본다고 말할 수 있지만 거울처럼 대칭이 아니다. 맘과 몸은 번역가능하다고 하더라도 대칭은 아닌 것과 같다.(41NLB)]
이 이원성은 이제 명제 내부로 들어간다. (38)
두 계열 Les deux séries 38
생쥐는 영주들이 정복자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en. William the Conqueror, 1027-1066)에게 왕관을 얹어주려고 계획했을 때, “대주교는 그것이(cela) 옳다는 것을 알았다(trouva 찾았다)”고 말한다. 오리는 묻는다. “뭘(quoi) 찾았다는 거지”. “그걸(cela) 찾았다니깐, 생쥐가 매우 화가 나서 대꾸했다. ..” .. [오리에게] 그것은 지시체(le désigné)로서 먹히는 것 또는 먹힐 수 있는 것이다. .. 엘리스는 자신의 음식밖에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 (38-39)
그래서 그것(cela)을 둘러싼 애매성은 지칭과 표현의 이원성을 따라서 분배된다. 명제의 두 차원은 두 계열로 조직화되고, 이 두 계열은 그것(cela) 만큼 애매한 용어 속에서 무한에서 수렴된다. 왜냐하면 두 계열은 끊임없이 길어지는 경계에서만 서로 만난다. 한 계열이 “먹는다”는 방식을 취하며, 반면에 다른 계열을 “말하다”는 본질을 추출한다. (39) [물론 계열이 짧아도 만나고, 길어서 만난다면 무한에서 만난다. 그러나 이 둘은 동시에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고 동일하지는 않다. 먹는다-말하다(몸과 맘의 두 계열)는 서로 다른 계열이지만 입에서 만난다.]
캐럴의 시에서, 하나는 소비할 수 있는(consommable) 지칭하는 대상에 다른 하나는 여전히 표현할 수 있는 의미에, .. 이 두 차원은 오직 하나의 비의적 단어(mot ésotérique) 속에, 즉 동일화할 수 없는 알리키드(aliquid non identifiable) 속에 수렴된다. 그래서 스나크(Snark)라는 후렴구가 반복된다.(39) [비의적 단어 즉 맙소사(oh my god)속에 뭍혀버린다. 즉 부정성 속에 뭍혀버린다.]
“너는 그것을 골무를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고 조심성을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어. 너는 그것을 포크를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고 희망을 가지고 추적할 수도 있어” .. 더 전형적인 것은 실비와 브르노에 등장하는 정원사의 노래이다. ..“그는 자신이 ...을 보았다고 생각했네(pensait) ...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인 것을 깨달았네(s'aperçut)”
그는 피리소리에 맞춰 춤추는
한 마리의 코키리를 보았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아내의 편지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는 말했네, 마침내 나는 삶의
고통을 깨달았노라고.
그는 호롱불 주위로 날개짓하면서
날아가는 알바트로스를 보았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한 닢의 페니로 살 수 있는 엽서라는 것을 깨달았지.
그는 말했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겠어, 밤이 너무 습하니깐.
그는 자신을 로마 교황으로 묘사한
하나의 논증을 보았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다시 한 번 보았을 때, 그는
그것이 글이 새겨져 있는 비누 조각인 것을 깨달았지.
그는 말했네, 낮은 목소리로 정말 소름끼치는
사건이야 모든 희망을 접어버리자. (40) (41NLB)
제5계열: 의미(du sens)[의 역설들] pp. 41-49.
무한정 증식 La prolifération indéfinie 41
41 그러나 의미가 사물들과 명제들, 실사들과 동사들, 지칭과 표현들 사이에 대립시키는 이원성의 두 항들 중 하나인 것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둘 사이의 차이를 가름이기도 하고 접속시키는 것이기도 하는 경계선이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자신에 알맞는 불가침투성이며 또한 스스로를 반사하는 불가침투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일단 내부에서 일련의 새로운 역설들 자신 속에서 스스로 전개한다. (41) [의미가 경계가 아니라 고유성이 있다.]
* 퇴행의 파라독스 즉 무한 증식의 파라독스 41 [프레게의 역설]
내가 어떤 사물을 지칭할 때, 나는 여전히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그송이 말했듯이, 사람들은 소리에서 이미지로 이미지에서 의미로 가지 않는다. 사람들은 단번에 의미 속에 자리 잡는다. .. 의미는 내(je)가 말하기 시작 할 때, 항상 선전제되어 있다. 나는 이 선전제없이 시작할 수 없다.(41) [물질과 기억 3장에서 생명체는 일반관념(MM 177)을 지니고 있다.]
퇴행은 말하는 자의 가장 큰 무능임과 동시에 언어의 가장 큰 잠재력(puissance)이기도 하다. (41)
언어적 본질의 무한 증식은 프레게(Gottlieb Frege, 1848-1925)의 역설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이것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역설이기도 하다. .. 엘리스와 기사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42)
42 텍스트는 .. 일련의 유명론적 본징/본질(entité nominale)을 구별한다. .. 1) 그 노래는 실재상으로(en réalité) “울타리에 앉아”는 이름이다. .. 2) 둘째 이름은 “길과 방법”, 이것은 2,3,4,5절의 주제이다. .. 3) 그 실재 이름(nom réel)은 “늙은 이” ... 4) 이 넷째 이름은 그 노래의 이름이 불리는 바, 그래서 “대구의 눈”이다. (42)
43 캐럴의 분류에는 네 가지의 이름이 존재한다. [n1] 노래의 실재로서 이름, [n2] 이 실재를 지칭하는 이름, 또는 노래를 지칭하는 이름 또는 노래가 불리는 바를 표상하는 이름, [n3] 이 이름의 의미, 새로운 이름 또는 새로운 실재를 형성하는 이름의 의미, [n4] 새로운 실재를 지칭하는 이름, 그러므로 노래의 이름의 의미를 지칭하는 이름, ..
사실상 앞서서 문제가 있었다.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이름은 그것의 의미를 지시하는 다른 이름으로 이어지며, 이러한 과정은 무한히 계속된다. 캐럴의 분류에서 이러한 상황은 n2와 n4에 의해서만 드러난다. n4는 n2의 의미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43)
43 이러한 간단한 표현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등장한다. .. 엘리스와 공작부인 .. 엘 “내가 보기에, 경기가 이제 더 잘 될 것 같아요.” 공작부인은 “맞아, 이것의 도덕(morle 기운)이 있지. 오! 그것은 사랑, 세계(monde)를 돌게 했던(tourner) 사랑이다.” 엘리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죠, 각각이 자기 자신의 일에 몰두할 때, 세상(monde)은 둥글게 돌아간다고(tourner).” 공작부인은 “그래, 그것은 거의 똑같은 것을 말하는 거지... 그리고 이것의 도덕이 있지. 의미를 잘 살펴보세요(prendre soin). 그리고 소리들은 그 스스로 조심한다.(prendre soin)” [prendre soin의 두 의미, 사물에 대해 돌보다 손질하다. [건강에] 신경을 쓰다 조심하다. - 도덕적으로 말하는 의미를 곰곰이 살펴보면 말하는 사람은 소리를 신경써서 조심한다.]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명제 속에 대상을 만드는 것, 그것은 “의미를 잘 살펴보세요(prendre soin)”라는 것은 명제들이 “소리들은 그 스스로 조심한다.(prendre soin)”처럼 증식하는 조건에서이다. [이것은] 의미의 논리하고 윤리 도덕 및 도덕성하고 사이에 서로 깊은 연결을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이다. (44)
불모의 이중화 Le dédoublement stérile 44 [스토아의 역설]
* 불모의 이중화의 역설 즉 건조한 반복의 역설(paradoxe de la réitération sèche)
이 무한 퇴행을 벗어나 수단이 있다. 그러나 [이 수단이란] 명제를 고정시키는 것, 명제을 부동화 하는 것, 그리고 곧 바로 명제로부터 얇은 막 같은 의미를 추출하는 것 ... 그러나 이 차원없이[퇴행의 중단없이] 지낼 수 없다는 것, 거기에 도달하는 때부터 그것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것, 이것이 의미의 운명(destin)인가? (44) [어디선가 무한 퇴행을 멈추지 않으면 의미가 부정형이 된다. 이 멈춘 지점에서 생명의 이름의 경우에 분신(double) 또는 화신(avatar)개념이 생긴다. 부처는 아바타의 한 개념화이다. 즉 관세음보살, 약사여래, 지장보살 등등 화신의 개념들이 생긴다.]
명제의 중성화된 분신(double), 즉 건조한 환영(fantôme), 두께없는 환상(phantasme)을 이끌어 내는 것 이외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의미가 명제 안의 동사에 의해 표현되었을 때 사람들은 이 동사를 부정 형식, 분사 형식, 의문 형식으로 표현한다: 신-임(Dieu-être), 하늘의 푸름(l'étant-bleu du ciel), 하늘은 푸른가?(le ciel est-il bleu?) 의미란 긍정에도 부정에도 중지(suspension, 중단)을 실행한다. (44)
[이정우 phantasme를 환각, fantôme을 환영, hallucination 환상으로, 우리는 phantasme을 환상, fantôme을 환영 hallucination을 환각으로 번역한다.]
사물의 상태의 속성으로서, 의미는 열외존재(extra-être)이고, 그것은 존재에 속하기 보다 비존재에 알맞은 이뭣꼬(aliquid)이다. (44-45)
의미-사건의 불모성이야 말로 스토아 논리학의 가장 괄목할 만한 점들 중 하나이다. 물체[신체]들만이 능동적이고 수동적이다. 능동과 수동의 결과물인 비물체적인[비신체적인] 것은 그렇지 않다[수동적도 능동적도 아니며, 즉 영향을 입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스토아학파의 역설이라 부른다. 표현된 것의 찬란한 불모성의 선언을 노에마의 지위를 확인하려고 한 후설에까지 이른다. (45) [표현된 것 - 버클리의 ‘지각된 것’처럼 물질적인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사유의 스크린에 올려진 영화적 평면이다.]
후설은 이덴에서, 표현의 층은 - [들뢰즈가 보기에] 이것은 후설의 독창성이다. “이 표현의 층이 만일 표현을 다른 모든 지향성들에 정확히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층은 생산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만일 사람들이 [생산적이기를] 원한다면, 그 층의 생산성, 그 층의 노에마적 행동은 표현한다(l'exprimer) 속에 소진한다(s'épuiser).” (45) [소진한다는 같은 의미로, 말라버린다, 건조하다, 불모이다.] -
45 명제의 추출물로서, 의미는 명제에 독립적이다. 왜냐하면 그 의미는 명제의 긍정과 부정의 중간에 매달린 것이며, 그럼에도 명제의 소멸하는 분신(double)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 사라지는 분신의 예로서] 캐럴의 고양이 없는 미소, 또는 촛대 없는 불꽃 등이 있다.(45)
그리고 무한 퇴행과 불모의 이중화라는 두 역설[프레게 역설, 스토아 역설]은 양자 택일의 대안의 항들, 하나거나 또는(ou) 다른 하나라는 항들을 형성한다. (45)
어째든 루이스 캐럴은 두 역설이 하나의 대안을 형성한는 것을 생생하게 의식하였다. 엘리스에서 인물들은 눈물의 바다를 마르게 되기(se sécher) 위하여 두 가능성을 가졌다. .. 생쥐의 이야기를 듣거나 또는 코커스(Caucus) 경기에 참가하는 하는 것이다. .. 이 모든 방식으로 보아, 건조(sécheresse)란 나중에 침투(투과)불가능성이라고 불린다. (45)
중성 즉 본질의 제3상태 La neutralité ou tiers état de l'essence [도트르꾸르의 역설]
둘째 역설은 이번에 우리를 필연적으로 셋째 역설로 던져버린다. .. 의미는 질, 양, 관계, 양상의 측면에서 서로 대립하는 명제들에 있어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머문다. (46) - [칸트의 오성의 판단과 범주. / 판단의 경우에서, 양: 보편, 개별, 특수(특이자), 질: 긍정, 부정, 무한정, 관계: 정언, 가언, 선언, 양상: 가능, 현존, 필연, / 카테고리 측면에서 양: 통일성, 다수성, 총체성, 질: 실재성, 부정성, 한계성, 관계: 내재-실체, 원인-의존, 공동성, 양상: 가능-불가능, 현존-비현존, 필연-우연.]
우선 긍정과 부정이란 질(qualilté)의 경우.. “신이 존재한다”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지시 대상의 현존에 연관하여 의미의 자치성 덕분에 동일한 의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14세기 미꼴라 도트르꾸르(d'Autrécourt, 1299-1369)가 말한 환상적 역설이며, 비난의 대상이다. "contradictoria ad invicem idem significant"(모순 된 것이 서로 같은 것에 서술된다) (46)
46-2 양(quantité)의 경우: 모든 인간은 백색이다. 어느 인간도 백색이 아니다...
관계(la relation)의 경우: 의미는 역전된 관계에서도 동일한 것으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 (46)
47 결국 양상(la modalité)의 경우: ... 사건이 [가능적 또는 실재적이라고 말하듯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가? 사람들은 우발적 미래의 역설을 상기한다. .. 스토아학파는 필연성을 비켜가기 위하여, 필연이 아니라 숙명(le fatal)을 긍정하기 위하여 놀라운 것을 만들었다. (47)
왜냐하면, 모순율은 한편으로 지칭화 효과의 불가능 과 표지화[기호화] 조건의 최소화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순율은 아마도 의미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 [콰인의 지시 명사 불가능성, 소쉬르는 이미 기표가 물체와 연관이 없다고 못 박았다.] 그것은 가능도 실재도 필연도 아니고 오히려 숙명적(fatal)…. (47)
바로 모든 것이 언어를 경유하여 언어 안에서 초월되기 때문에, 캐럴의 일반적인 기법은 사건을 두 번: 한번은 그것의 존속의 터전이 되는 명제 안에서, 또 하번은 표면에서 터전이 되는 사태 안에서. 그리고 한편은 그것을 명제에 관련시키는 노래의 짝 안에서, 또 한번은 그것을 존재들에 사물 즉 사물들과 사태들에 관련시키는 표면 효과 안에서. (47-47)
48 명제의 양상들로부터 독립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이 중성의 역설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철학자 아비센(Avicenne, Ibn Sina, 980-1037)은 본질의 세 가지 상태을 구분하였다. 보편(universelle)과 단일(singulière) ... 동물은 동물자체이외의 것이 아니다(animal non est nisi animal tantum). 본질의 첫째 상태는 명제에 의해 표지화(기호화)된 본질 .. 둘째 상태는 명제에 의해 지칭화된 본질 .. 셋째는 의미로서 본질, 표현된 것으로 본질이다. 언제나 건조성에서 동물 자체(animal tantum), 불모성 또는 찬란한 중성. ... [이것은] 간단히 모든 대립에 무차별적(indifférente)이다. (48)
[이 무차별이란 점에서] 순수 사건의 지위 그리고 숙명의 지위가 있는가? .. 사적도 공적도 아닌, 집단적도 개체적도 아닌 ... 모두가 동시적이기 때문에 이 중성(neutralité) 속에서 그 만큼 더 무섭고 능력있는 지위가 있는가?(48-8-49) [동사의 부정성 속에서]
[레미제라블(1862)에서 쟝발쟝의 계열은 미래의 계열인데 비해, 경감 쟈베르의 계열은 과거의 계열이다. 이 두 계열은 현실(actuel)에서 역설적이다. 과거는 미래에서 보아 정지이다. 미래의 역동성이 세상을 바꾼다.]
불합리 즉 불가능한 대상들 L'absurde ou les objets impossibles [마이농 역설]
* 불합리의 역설, 즉 불가능한 대상들의 역설(Paradoxe de l'absurde, ou des objets impossibles).
이 역설로부터 또 하나의 역설이 나온다. 모순적 대상들을 지시하는 명제들은 그들 자체 의미를 가진다. ... 이 불가능한 대상들, 둥근 사각형, 너비없는 물질, 운동하는 영속(perpetuum mobile), 계곡없는 산 등은 “나라 없는” 대상들이며, 존재 바깥에 있는 대상들이다. .. (49)
우리는 이 역설을 마이농의 역설이라 부른다. .. 불가능한 존재들은 예외-현존자들이고, 최소치로 환원되며, 그리고 명제 속에 그러한 것처럼 내속되어(insister) 있다. (49)
(41NLC) (정리 12:31, 55LKD) (15:07, 55LLD)
# 참조***
428 플라톤(Platon, Πλάτων / Plátôn, 전428/427-전348/347) 고대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소피스트들을 정력적으로 비판했다. 소크리테스의 제자.
106 키케로(Cicéron, en lat. Marcus Tullius Cicero, 106-43), 로마 국가인물, 연설가, 변호사, 철학자, 작가. De fato, 9
O
980 아비센(Avicenne, Ibn Sina, 980-1037), 의사,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알 파라비(Aristote et Al-Fārābī)다음으로 셋째 스승이라 불린다.
1027 정복자 기욤(Guillaume le Conquérant, en. William the Conqueror, 1027-1066)
1285 오캄(Guillaume d'Ockham ou Guillaume d'Occam, 1285경-1347)(1280-1348) 의미(sens)발견자. 유명론자. Summa totius logicae 1323 Summulae in libros Physicorum (Exposition sur les livres de la physique d’Aristote 1323-24) Quodlibetales (Questions sur divers sujets) 1324-25
1299 오트르꾸르(Nicolas d'Autrécourt, 1299-1369) 유명론 철학자. 오캄의 견해를 취한다.
1300 리미니(Grégoire de Rimini, Grégoire d'Arimino, 1300경-1358) 성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을 따르는 은둔자, 철학자. 유명론자. 마지막 스콜라철학자중의 한 사람이다. 엘리(Hubert Elie, s.d.)가 1936년 그에 대한 박사논문을 발표했다.
13??, 노프샤또(André de Neufchâteau, ?-1400경) 14세기 스콜라 철학자. 였습니다. 로렌 출신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오뜨르꾸르(Autrecourt)와 리미니(Rimini)의 반대자.
1351 델리(Pierre d'Ailly, 1351–1420) 프랑스 신학자, 점성술사, 로만카톨릭 추기경,
1596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철학자. Le Discours de la méthode pour bien conduire sa raison et chercher la vérité dans les sciences, 1637
1838 브렌타노(Franz Clemens Brentano, 1838-1917) 독일 철학자, 카톨릭 심리학자. 교황무오류론자. 경험적 입장의 심리학(Psychologie vom empirischen Standpunkt, 1874).
1848 프레게(Gottlob Frege, 1848-1925) 독일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뜻과 지시체(Uber sinn und Bedeutung, 1892)
1853 마이농(Alexius Meinong 1853-1920) 오스트리아 수학자, 신학자, 철학자. 후설과 마찬가지로 브렌타노(Franz Brentano, 1838-1917)의 제자이나 브렌타노와 반대입장.
1859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 독일 철학자.
1872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 영국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 인식론자, 정치가, 도덕론자.
Signification et vérité, Flammarion, 1990 [ An Inquiry into Meaning and Truth.1940.]
1884 질송(Étienne Henry Gilson, 1884-1978)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중세철학 전공 존재와 본질(L’Être et l’essence, 1948)
1897 브리스 파랭(Brice Parain, 1897-1971) 프랑스 철학자, 수필가. 1925년 소비에트연방 체류 공산주의자. 플라톤 로고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 Logos platonicien (1942), 언어의 본성과 기능에 관한 탐구(Recherches sur la nature et la fonction du langage (1942), 변증법에 관하여(Sur la dialectique (1953),
Hubert Elie(s.d.), Le Signifiable Par Complexe: La Proposition Et Son Objet Gregoire de Rimini, Meinong, Russell, 1937.
1891 카르납(Rudolf Carnap, 1891–1970) 독일 언어철학자, 1935년 이후는 미국에서 활동. 비엔나 서클, 논리실증주의자. 의미와 필연성: 의미론과 양상논리 연구(Meaning and Necessity: A Study in Semantics and Modal Logic, 1947) .
1902 방브니스트(Émile Benveniste 1902-1976) 본명(Ezra Benveniste) 시리아 엘렙 태생. 1924년 프랑스 국적을 갖다. 프랑스 언어학자. 파리언어학회(la Société de linguistique de Paris) 사무총장을 지냈다(1959-1970). 1969년 실어증에 걸렸다. 일반언어학의 문제들 1(Problèmes de linguistique générale, 1, 1966), 일반언어학의 문제들 2(Problèmes de linguistique générale, 2, 1974)
1902 쉴(Pierre-Maxime Schuhl, 1902-1984) 프랑스 철학자. 고대철학사 교수. 지배자와 가능성들(Le Dominateur et les possibles, 1960)
1906 강디약(Maurice de Gandillac, 1906-2006) 프랑스 철학자, 철학사가. 9세기에서 14세기 학술 운동(Le Mouvement doctrinal du IX au XIVé siècle, 1951)
1908 로트만(Albert Lautman, 1908-1944) 오스트리아-루마니아 유대계 혈통,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 레지스탕스. Essai sur les notions de structure et d'existence en mathématiques, Hermann, Paris, 1938, 159 p.
1908 빠리조(Henri Parisot, 1908-1979) 프랑스 번역가, 편집자. 많은 번역 중에서 Lewis Carroll, Les Aventures d'Alice au pays des merveilles(1952년 번역),
1926 브네웅(Robert Benayoun, 1926-1996) 프랑스 작가, 비평가, 영화인. 넌센스의 일화집(L'Anthologie du non-sens, 1957).
1933 꾸메(Ernest Coumet, 1933-2003) 프랑스 과학사가, 인식론자. 코이레센터 세미나 참석자.
1935 장 가테뇨(Jean Gattégno, 1935-1994) 영어로 교수자격 통과, 루이스 캐럴 전문가. 8대학에서 강의, 프랑스 지성인, Lewis Carroll: une vie, 1984 L'Univers de Lewis Carroll,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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