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아함경에서 법은 세속법[인연법]과 가장 공한 법의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음을 살폈는데(법의 두 측면(3), 인연법과 공한 법), 이 글은 그것과 관련하여 무상ㆍ비아/무아와 공의 관계의 문제에 대하여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
어느 스님의 반야심경의 설법에서 무상과 무아를 합하여 공이라 한다고 했다.
‘비아/무아’는 비분별ㆍ무자성과 상응하므로 당연히 공힌 법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상’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1.
먼저 비아/무아와 공의 관계를 보기로 한다. 사람들은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고, 코로 냄새를 맡고, 혀로 맛을 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마음으로 법[일, 현상]은 보고서는 어떤 느낌과 생각과 의도를 일으킨다. 그리고는 눈과 마음, 빛깔과 현상, 느낌과 생각과 의도 등을 나이며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나의 눈, 내가 본 빛깔, 나의 느낌, 나의 생각, 나의 의도 등이라고 말하면서 그것들에 집착한다.
그러나 아함경에서는 그것들이 나이며 내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한다. 그것들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며, 공하고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라고 한다.
무아는 모든 비아들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곧 이것도 나가 아니고 저것도 나가 아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나랴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나가 없다. 곧 무아이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본다면, 아함경에서 비아/무아는 공한 법에 속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이제 무상과 공의 괸계를 보기로 한다.
아함경에서 보면 ‘무상’을 공한 법에 속하는 것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첫째, 유위법의 ‘생기고 머무르고 달라지고 없어진다’는 것은 ‘무상’의 모습을 나타낸다. <잡아함경_1028. 질병경 ①> 에서도 “내 이 몸은 무상(無常)한 것이요 유위(有爲)의 것이며, 마음을 인연하여 생긴 것이다.”라고 하였다.
둘째, <잡아함경_86. 무상경>에서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며,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라면, 그것은 변하고 바뀌는 법이다.’라고 했다. 또 <잡아함경_368. 삼마제경> 에서는 “‘이 모든 법은 무상한 것이고, 함이 있으며[有爲}, 샘이 있다[有漏]’고, 이와 같이 사실 그대로 밝게 드러나느니라.”라고 하였다.
셋째, ‘무상의 불을 끄기 위해서는’이라는 내용을 담은 경들과 ‘불타는 것’에 관한 경들의 내용을 함께 생각해 보면, 무상이 ‘나라는 생각’ 등과 같은 위치를 차지함을 알 수 있겠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아함경에서 ‘무상’은 ‘괴로움’과 ‘유위법ㆍ유루법’과 같은 계열의 것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무상은 세속법이며 가장 공한 법에 속하는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무상’이 공한 법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 까닭은 아함경에서 찾을 수 있겠다. 아함경에서는 ‘무상’을 ‘항상’과 대랍하여 말하고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첫째, 앞에서 말한 스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사람들은 보통 어떤 사물이나 일들이 실제로는 항상한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항상할 것이라 믿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니,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것들은 무상한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보면 무상하다는 생각은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에 비하여 공한 법에 가까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불교의 법은 거의 유(有)의 계열과 무(無)의 계열의 대힙으로 되어 있다. 그러한 체계에 맞추어 생각한다면 무상은 당연히 ‘무상[無相], 무아, 무위, 무루, 무생, 무쟁’ 등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함경에서는 무상하다는 생각도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과 마찬가지로 괴로움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무상하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야 하며, 나아가 괴롭다는 생각이나 항상하다는 생각이나 항상하지 않다는 생각들은 모두 나가 아니며 내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무상하다는 생각도 항상하다는 잘못된 생각과 마찬가지로 세속법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공한 법에 속하는 것은 ‘무상’이 아니라 ‘무상’에 대립하는 ‘비무상’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좀더 정확히는 ‘무상비무상’이라고 해야 할까?
3.
<잡아함경_1. 무상경>의 끝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5음은 무상하다고 괸찰하라.)
‘무상하다’고 관찰한 것과 같이,
‘그것들은 괴로움이요, 공하며, 나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는 것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여기서 위의 논의를 받아들인다며, 무상과 쾨로움, 공과 비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사람들은 5음은 본래 무상한것인데 '항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고는 또 괴로워한다.
또 5음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다.
그러나 5음은 공하고 나가 아니다. (또 내 것도 아니다.)
따라서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5음에 집착하지 말고 그것들을 떠나야 한다.”
[덧붙임]
<증일아함경_36. 청법품[5]>에서는 ‘모든 부처님은 무상하고 공하며 무아이다’라고 한다.
이 경우의 ‘무상’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부처님도 유위법과 무위법의 두 측면으로 나누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모든 부처님은 무상하다’는 유위법의 부처님을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004.11.20, 수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