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제국?
오늘날 '제국주의자'라는 말은 거의 최고의 정치적 욕설이다.
이보다 심한 말은 '파시스트'밖에 없다.
제국에 대한 현대의 비판은 대개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1. 제국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수많은 피정복 민족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결국 불가능하다.
2. 설사 그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실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국은 파괴와 착취의 사악한 엔진이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은 자결권이 있고 다른 민족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된다.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1번 서술은 난센스에 불과하고, 2번은 큰 문제가 있다.
실제 제국은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었다.
이 시기에 살던 인류의 대부분은 제국에 속해 있었다.
제국은 매웅 안정된 형태의 정부다. 대부분의 제국은 반란을 너무나 쉽게 진압했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대개 외부의 침공이나 내분에 따른 지배 엘리트의 분열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복당한 민족이 제국의 지배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기록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대부분은 수백 년에 걸쳐 복속 상태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제국에 서서히 소화되어 고유의 문화가 흐지부지 되는 게 보통이었다.
가령 기원후 476년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마침내 무너졌을 때,
누만시아, 아르베르니, 헬베티아, 삼늄, 루시타니아, 움브리아 , 에트루리아 종족을 비롯해
(아르베르니는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에 살던 고대 종족, 움브리아는 고대 이탈리아 중북부,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중부)
수세기 전 로마에 정복당했던 민족들은
커다란 물고기 속에서 나온 성경 속 요나와는 달리 가리가리 찢긴 제국의 시체에서 살아나오지 못했다.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스스로 그런 국가의 국민이라고 믿었고 그 나라의 언어를 썼고
그 나라의 신을 섬겼고 그 나라의 신화와 전설을 읊었던
사람들의 생물학적 후손들은 이제 로마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숭배했다.
많은 경우 하나의 제국이 무너진다고 해서 피지배 민족들이 독립하는 일은 드물었다.
옛 제국이 붕괴하거나 후퇴한 자리에 생긴 진공에는 새로운 제국이 발을 들여 놓았다.
가장 명백한 예가 중동 지역이다.
국경이 어느 정도 안정된 많은 독립국들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는
현재 그 지역의 정치적상황은 지난 수천 년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었다.
중동에 마지막으로 이런 국면이 조성된 것은 기원전 8세기, 거의 3천 년 전의 일이었다.
기원전 8세기 네오 아시리아 제국이 발흥한 이래
20세기 중반 대영제국과 프랑스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
중동은 마치 이어달리기에서 다음 주자에게 넘겨지는 바통처럼
한 제국의 손에서 다른 제국의 손으로 넘어가는 일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가 마침내 그 바통을 떨어뜨렸을 즈음에는
이미 아람, 아몬, 페니키아, 필리스티아, 모아브, 에돔을 비롯해
아시리아에 정독되었던 민족들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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