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서유럽 6개국여행을 다녀왔다. 10여일의 결코 짧지 않은 여행에 내가 신주단지 모시듯 하기로 한 것은 손에 들어오는 작은 노트와 볼펜 한 자루. 유럽의 문화역사기행을 통해 아둔한 기억력을 대신해 건질 건 다 건지고 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중간중간 2-3시간씩 남는 짜투리(이동시간)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생각해 보니 책밖에 없을 것 같다. 주구장창 풍경을 보는 것도 그렇고 옆사람과 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을테니 말이다. 또한 11시간 동안의 비행기안에서 할 것은 잠과 책읽는 것 뿐 무엇이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두권의 소설책과 한 권의 사회과학 평론서를 선택했다. 김 별아의 '가미가제 독고다이', 천 명관의 '고령화 가족', 그리고 유 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 책들을 다 읽었는가? 글쎄? 글쎄!
먼저 출발하는 비행기 안에서 '고령화 가족'을 읽었다. 11시간의 지루한 비행을 견뎌내는데 소설책 만한것이 있겠는가? 다들 잠을 자거나 비데오 한편 보고 있을 때 나 홀로 외등을 켜고 독서 삼매경에 빠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물론 눈이 건조해지고 충혈이 되는 부작용도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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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지지리도 못난 40-50대 3남매가 각각의 삶에서 실패를 맛 보고 70대 어머니 집에 들어 앉게 되는 사연부터 시작된다. 52세 조폭 출신 형은 전과5범으로 나름 사업에 실패해서 제일 먼저 들어 앉게 되고, 48세 영화감독인 나는 한 편의 영화로 대박스런 쪽박을 차게 되고 그야말로 인생 막장까지 간 연후에 엄마집에 들어가게 된다. 45세 카페여주인인 여동생은 두번째 남편과 대판 싸우고 끝내 이혼을 한 다음에 고딩 딸과 함께 엄마집에 입성하게 된다.
소설은 현실을 반영한다. 패자부활전 없는 승자독식의 경쟁체제하에 직면해 있는 우리의 현실을 소설은 구체적인 가족사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밑바닥 인생은 누가 비루하고 던적스럽다고 했던가? 그래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연민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일까? 바로 이 가족이 그렇다. 형과 동생이 반말를 해대며 주먹질을 일삼고 여동생이 바람 불어 밖으로 돌고 고딩 딸이 가출을 한다. 작은 삼촌이 조카 돈을 삥치고 큰 삼촌이 조카 팬티를 갖고 수음을 한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비관하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처연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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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엄마는 열심히 자식들을 식탁에 모이게 하고 열심히 밥도 해대고 고기도 굽는다. '그래도 지금이 낫다'라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사실 이들 삼남매의 아버지는 다 다르다. 형은 재혼한 아버지에 딸린 자식이였고 여동생은 어머니가 바람 나서 난 자식이였다. 형의 비뚤어짐은 바로 어머니의 외도장면을 보고 난 부터였다. 그래도 아버지는 어머니를 건사했고 어머니는 자식들을 나름 굿굿이 키우고 자신의 삶을 살아냈다. 그리고 지금 엄마로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즉 자식들을 위해 밥해 주고 재워 주는 것이다.거기에 행복을 느끼는 듯 했다.
이 소설의 핵심은 후반에 있다. 바로 가족의 해체. 형은 가출한 조카의 행방을 찾기위해 찾아간 조폭 두목의 눈에 들어 빠찡꼬 바지사장이 된다. 형은 이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위험을 감행하고 돈을 챙겨 사랑하는 여자와 해외로 튄다. 나는 형을 찾아 내라는 조폭의 가혹한 폭력을 당하면서도 '어떤 이유'로 불지 않는다. 그리고 미국에서 마음의 상처를 입고 돌아온 옛 연인과 새살림을 꾸린다. 여동생은 큰 오빠의 도움으로 찾은 가출한 딸과 화해한다. 그리고 새롭게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새가정을 꾸린다. 딸도 결국 엄마를 따라 간다. 결국 자식들은 어머니의 품을 다시 떠나게 되고 엄마는 그 옛날 자신의 애인이였던 노인과 동거를 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그 어느 지점에 엄마는 돌아 가신다. 이렇게 평균나이 49세의 고령화 가족은 탄생되었다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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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고 묵지근해진 목을 돌리고 자외선 햇빛이 강해 닫혀 있는 창문 가리개를 살짝 열어 창공을 바라본다. 여전히 대낮이다. 해는 비행기 저편 뒤쪽에서 쫓아 오고 있고 비행기안은 외부 빛을 차단한 채 한밤중에 놓여 있다. 빈자리가 많이 남아있는 비행기안은 여유롭기 까지 하다. 내 앞좌석에는 아들이 목배게를 하고 머리를 뒤로 옆으로 젖힌 채 입을 헤 벌리고 자고 있다. 건너편 보도쪽에 나란히 앉아 있는 모녀는 마치 친구같이 서로 머리를 맛대고 정겹게 잠을 청하고 있다. 이 가족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까? 이 가족을 탄생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탄생하고 해체되었을까? 또 이 가족의 해체를 통해 또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만들어 질까? 이 가족이 내게 세상의 중심이겠지. 이들은 진정 나를 만남으로 행복할까? 그리고 나는 행복한가? 이 가족이 해체된다고 이 세상이 눈 하나 깜작할까? 이쯤에서 눈 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이 든다. 인생은 참 부질없을 수 있다. 참으로!!!..휴~
인생이 부질없다는 것은 내가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는 자각에 연유한다. 또한 내가 그래도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존재감을 갖기 때문이기도 하다. 존재감이 있어야 바로 존재감을 잃어 버릴 때 부질없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질없을 수 있다는 나의 감상은 아직은 내가 이 가족에게서 어떤 존재감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겠지. 결국 부질없겠지만 그래도 존재감있게 살려고 하는 것이 부질없다고 내질러 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라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렇게 살아내고 있지 않는가? 바로 가족의 해체를 통해...그와 동시에 가족의 탄생을 통해....죽음이 있고 삶이 있고 그것의 반복으로 수백만년의 역사를 우리 인류는 쓰고 있지 않는가.
오후 2시에 인천을 출발한 비행기는 해를 뒤에 두고 쫒기듯이 서쪽으로 시속 900 km로 날아 갔다. 11시간이 흘러 오후 5시경에 런던에 도착했다. 8시간의 시차가 아직도 낮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아주 묘했다. 지금 보령에서는 잠을 잘 시간인데 말이다. 촌놈이 지구자전 현상을 몸소 느끼고 있으니 정말 출세해도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남 터미널 수준의 히드로 공항을 빠져 나와 일행은 관광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을 했다. 버스안에서 우리를 이끌 가이드의 정식인사를 들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느낀 바는 사람구경하는 것도 관광이다 싶다는 것이다. 관광이 여행이 되고 탐방이 되기 위해서는 내 오감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에도 꽂히도록 해야할 터이다.
'고령화 가족'소설 책은 가방 저 구석속에 밀어 넣고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를 꺼내 든다. 이 책을 만지작 거리며 어아직도 밝은 영국 시내를 바라보고 있자니 옆에서 쿠사리 한 마리가 날아 온다.
"여행이나 잘 하셔~ 책은 무슨~"
"맞어~ 놀러와서도 책 보냐?"
엥? 한마리가 아니라 두마리네 하고 쳐다보니 아들 놈(?)과 따님(!)이 히히~거린다.
"맞다..맞어~ 우리 아들 놈과 따님과 노는게 남는 거지"
쿠사리 두마리에 피사리 한마리가 날라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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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천 명관
2003년 소설「프랭크와 나」로 데뷔
문학동네 신인상 수상
2004년 문학동네 소설상 수상
영화각본 :「이웃집 남자」, 「북경반점」, 「총잡이」,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등
저 서 :「고령화 가족」, 「유쾌한 하녀 마리사」, 「고래」 등
경 력 : 문학동네 「사신과의 하룻밤」 연재
첫댓글 형님은 독서의 달인 이십니다./ 그렇게 좁은 비행기 안에서 독서를 다하시고....
역시 가족의 구심점은 어머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군요.
마노라 내일은 집에 갈께. 그런데 메아리가 북상해서 ?
왜 안 보이시나 했더니 여행 중이셨네요.
저도 런던에 한 달 동안 머문 적이 있는데, 다시 가 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도시였어요.
즐거운 추억 많이 만드셨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