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정담(古宅情談), 고택에서 나누는 정겨운 대화. 지난 주말 현충사 충무공 옛집-고택에서 ‘칼의 노래’ 작가인 김훈의 강연회가 열렸다.
김훈은 1980년대 중반, 한국일보에 재직할 당시 동료기자 박래부와 함께 연재한 ‘문학기행’에서 이미 그 유려한 필력을 보여준 바 있다. 그리고 ‘자전거 여행’등의 산문들을 통해 1990년대 한국 문단 최고의 스타일리스트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김훈을 김훈이게 한 가장 첫 번째 작품은 누가 뭐라 해도 ‘칼의 노래(2001)’일 것이다. “한국 문학에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라는 동인문학상 심사평까지 무수히 패러디된 이 작품이 잉태된 공간이 바로 현충사이다.
김훈은 이 책의 ‘책머리에’서 아산 현충사에 여러 번 와 “혼자서 하루 종일 장군의 칼을 들여다보다가 저물어서 돌아왔다”고도 했다. 그 인연으로 김훈은 현충사의 강연 요청에 흔쾌히 응해주었다. 김훈이 날이 저물도록 보고 간 그 칼은 보물 제326호로 현재 현충사 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에 ‘난중일기’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날 강연회가 열린 충무공 고택은 이순신 장군의 종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덕수 이씨 충무공파 종가이다. 이 집은 이순신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종종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원래는 충무공의 처갓집이었다. 이순신은 본래 서울분이다. 지금 서울 중구 인현동, 당시엔 건천동(乾川洞) 곧 마른냇골이라고 하는 곳에서 태어났다. 이순신 장군이 21세에 전 보성군수인 방진의 외동딸과 혼인한 후 이 집을 물려받은 것이다.
그런데 이 집만 물려받았을까? 그렇진 않았을 것이다. 별다른 기록은 없지만 노비, 토지 등 집안 재산 전부 다 물려받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그리 낯선 사례가 아니다.
율곡 이이가 태어난 것으로 유명한 강릉의 오죽헌도 율곡의 외증조로부터 삼대에 걸쳐 사위에게 물려주어 내려온 집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제사와 상속, 족보에 이름 올리기까지, 아들과 딸의 차이를 두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아들이 없다고 해서 양자를 들이지 않고 사위와 외손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그 사위와 외손이 외조부모의 제사를 모셨다는 사실. 우리가 흔히 오래된 전통문화라고 부르는 것이 어쩌면 그리 오래된 옛날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사례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순신 사후 그 후손들은 이곳을 세거지로 해서 뿌리를 내리게 된다. 충무공의 어머니인 초계 변씨가 생전에 자식들-충무공의 형제들-에게 재산을 증여하면서 남긴 문서인 분재기를 보면 집안의 재력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다 종4품 군수를 지낸 처가 재산까지 물려받고, 일등공신의 후손이었으니 경제적 기반이 넉넉했음은 짐작하고도 남을 터이다.
특히 이순신의 후손 중에서 삼도수군통제사가 12명이나 나와 덕수 이씨 충무공파는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무반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된다. 현충사와 이웃한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1980년대까지도 당시 종가의 종부에게 마님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고택은 1960년대까지 종손이 살고 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현충사는 그렇게 큰 곳이 아니었다. 충무공 고택 주변으로 마을이 있었고 주위는 온통 논밭이었다. 1960년대 현충사성역화사업을 거치면서 고택을 제외한 나머지 집들은 다 헐리고, 논밭은 갈아서 잔디밭으로 만들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현충사의 모습은 그 때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 당시 14대 종손은 현충사 바깥으로 이주하고 고택은 일반에게 공개하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결국 그때부터 이 유서 깊은 고택은 - 비록 성역화사업 때 너무 말끔하게 재건축되어 옛맛을 느끼긴 부족하지만 - 사실상 주인 없는 빈 집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이 고택에서는 한 해 두 번 중요한 제사를 모시고 있다. 바로 충무공과 부인이신 상주 방씨의 기제사를 400여 년 동안 모시고 있다. 충무공제사는 음력 11월 18일 밤 자정을 지나서 고택 마루에서 모셔진다. 마당 양 쪽에 관솔불을 밝히고, 제관들이 줄을 지어 집 뒤편에 있는 가묘(家廟)에서 충무공의 신위를 모시고 나와 제사를 올린다. 해마다 제사를 모시는 이 날은 유난히 춥다고 한다.
어쩌면 충무공이 노량 앞바다에서 마지막으로 싸운 그 날도 무척 추웠는지 모르겠다. 4대가 지나도 사당에서 신주를 빼지 않고 대대로 기제사로 모시는 불천위(不遷位) 제례는 다른 집안 후손도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충무공이 숨을 거둔 추운 겨울날을 떠올리고 싶다면 음력 11월 18일을 기억해둘 일이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현충사에 들러 함께 절 한번 올려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