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나는 오래전부터 써온 나의 세례명이다.
지금 기록을 찾아보니 이 이름이 왔었던 이유가 있었던 듯...
요안나 ― 헌신적으로 예수를 섬긴 여제자
1. 인적 사항
① 요안나는 ‘여호와께서 은혜를 주신다’라는 뜻.
② 헤롯 안디바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눅 8:3).
③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전도자로서 삶(눅 8:2).
2. 시대적 배경
예수 당시 헤롯안디바(B.C.4-A.D.39년)가 통치하던 갈릴리 지역의 주민이었음.
3. 성품
① 병고침을 받고 소유를 주께 드리며 평생을 전도자로 산 것으로 보아 감사할 줄 아는 헌신적인 여성(눅 8:3).
② 예수님 사후, 제자들조차도 도망간 상황에서 향유를 준비하여 무덤으로 찾아간 것으로 보아 용기 있고 실천적인 신앙을 소유한 자(눅 24:3).
③ 예수의 죽음에도 변절치 않고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며 무덤을 찾고, 또 예수의 부활을 맞아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증거할 정도로 지조 있고, 변치 않는 믿음을 소유한 자
4. 주요 생애
출 생 | ― | ― |
구사와 결혼 | ― | 눅 8:3 |
예수께 치유 받음 | A.D. 28년 | 눅 8:2 |
모든 소유로 주를 섬김 | A.D. 28-30년 | 눅 8:3 |
예수의 죽음 목격 | A.D. 30년 | 눅 23:44-49 |
향품과 향유를 갖고 예수의 무덤을 찾음 | 〃 | 눅 24:1 |
예수의 빈 무덤 목격 | 〃 | 눅 24:3 |
사람들에게 예수 부활의 증거 | 〃 | 눅 24:9 |
죽음 | ― | ― |
5. 구속사적 지위
① 예수께 병고침을 받은 후 헌신적으로 예수를 섬긴 여제자.
② 예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들 중의 하나.
6. 평가 및 교훈
① 주님께 치유함을 받고 자기의 소유를 주께 드려 감사한 요안나의 갸륵한 마음씨는 구속의 은총을 입고도 이에 감사하기는커녕 불평과 원망이 습관화된 현대의 신앙인들 에게 감사하는 삶의 좋은 본보기가 된다(눅 8:3). 이에 우리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을 받는 자들로서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을 갖추어야 하겠다(살전 5:18).
② 요안나는 예수의 죽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 모든 제자들이 도피한 가운데서도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주님의 무덤까지 찾아갔다(눅 24:3). 이는 오늘날 환경과 여건에 따라 쉽게 신앙과 불 신앙의 탈을 번갈아 바꿔 쓰는 현대의 신자들에게 신앙의 정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이에 우리 성도들은 “몸을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마 10:28)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자. 그리하여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신앙의 절개를 지킬 줄 아는 담대한 신앙인 이 되자.
③ 끝까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요안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최초로 목격한 증인 중 하나가 되는 영광을 얻었다(눅24:1-12). 이와 마찬가지로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는 자들 역시 마지막 날에 구원의 반열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영광을 얻을 것이다.
7. 핵심 성구
“요안나와…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눅8:3)
여교황 요안나(라틴어: Ioanna Papissa)는 8세기의 중세 유럽에서 교황 레오 4세와 교황 베네딕토 3세 사이에 재위했다고 여겨지는 전설상의 여자 교황이다. 여교황 요한나 전설은 13세기에 쓰인 장 드 메이의 연대기에서 처음 나타난 뒤로 유럽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 이 전설은 1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민중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현대의 역사학자와 종교학자들에게는 허구의 것으로 여겨진다.
여교황 요안나의 전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장 드 메이의 연대기에서였으나, 오파바의 마르틴이 저술한 《Chronicon Pontificum et Imperatorum》가 더욱 대중적이고 영향력 있다. 대부분의 기술에서 요한나는 총명하며 학구열이 강한 여성이며, 공부를 위해서 남장을 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녀는 그녀의 재능 덕택에 성직자의 계급을 차근차근 올라갔으며, 마침내는 교황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어느 날, 말을 탄 채로 아기를 출산하게 되며 이로 인해 그녀의 성별이 밝혀지게 된다. 대부분의 기술에서 그녀는 그 뒤에 곧 죽었으며, 성난 군중들이 그녀를 죽였다거나 자연적인 원인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전설
여교황 요안나는 요한 안글리쿠스(John Anglicus)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교황명은 앙글리아 요안나 폰티펙스 막시무스이다.
자세한 전설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요안나는 독일 마인츠 근처의 잉겔하임에서822년에 태어났으며, 색슨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영국에서 건너온 참사회원 게르베르트의 딸이었다. 여자의 신분임에도 총명하고 학구열에 불탔던 그녀는 공부를 하기 위해 '요한 안글리쿠스'라는 이름으로 남장하여 유럽 각지의 수도원을 유랑하면서 필사승으로 활동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비잔틴 제국의 테오도라 황후를 만났고, 아테네에서는 당대의 명의 이삭 이스라엘리에게서 의학을 배웠으며, 독일에서는 '대머리 왕' 카를 2세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깊은 교양과 능란한 외교적 수완 덕분으로 848년에 성서 교수 자격으로 로마 교황청에 들어가게 된 그녀는 계속 진짜 성을 숨기면서 권력의 계단을 차근차근 오르게 된다. 결국 교황 레오 4세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 필요 불가결한 존재가 되어 교황의 국제 관계 보좌관이 된다. 레오 4세가 855년에 선종하고, 세월이 흘러 마침내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별 탈 없이 교황직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그녀는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다. 교황의 법의로 배가 부풀어오르는 것을 감출 수 있었으나, 마침내 성모승천일날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가는 길에 그녀는 고통을 호소하며 탈것에서 떨어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기를 출산하였다. 장 드 메이에 의하면, 군중의 경악은 곧바로 집단 히스테리로 변했고, 여교황 요한나는 아기와 함께 돌에 맞아 죽었다. 그 뒤에 성직자들은 역대 교황 목록에서 요한나를 완전히 제거하였고 교황 베네딕토 3세의 즉위일을 조작하였다고 한다.
역사적 분석과 비판
1647년 칼뱅파 역사가 데이비드 브론델(David Blondel)은 여교황 요안나의 전설이 사실(史實)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여교황 요한나의 이야기는 20대 초에 죽은 교황 요한 11세에 대한 풍자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고 시사하였다. 브론델이 여교황이 있었다는 주장과 시사된 시기에 대해 상세한 분석을 행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그러한 사건은 일어날리 없다고 결론지었다.
현대의 역사가들도 같은 의견을 보인다. 그녀에 대한 자료들은 그녀가 살았다고 여겨지는 시대로부터 400년 정도 뒤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교황이 갑자기 군중 앞에서 출산하고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을 동시대 사람 어느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