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340) 땅딸보와 꺽다리(상)
학가산 언저리 새빨간 단풍 속에 황 의원의 초당이 자리 잡았고 그 뒤로 남녀 입원실이 두개 딸려 있다.
여자 입원실에는 환자들이 몇 있는데, 남자 입원실엔 배불뚝이 노인 혼자, 아니 노인을 시중드는 사동이
함께 있었다.
어느 날, 초라한 노인 한사람이 콜록콜록 기침을 하며 입원해 배불뚝이 노인과 같은 방을 쓰게 됐다.
새로 입실한 노인네가 양손을 모으고
“초면에 인사 올립니다. 변가라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라며 정중하게 인사했건만, 배불뚝이
노인은 유월 생감 씹은 듯 미간을 찌푸린 채 힐끗 쳐다보고선 고개를 돌렸다.
초라한 행색의 신참 노인이 출입구 쪽 구석에 자리 잡고, 고참 노인은 한가운데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고수했다. 황 의원실에 고참 노인의 사동이 들어와
“의원 나리, 조 대인께서 코를 막고 계십니다. 새로 들어온 영감탱이 몸에서 냄새가 너무 나요” 한다.
황 의원의 제자들이 부엌에서 물을 데워 신참 노인을 목욕시켰다. 소갈을 앓는 천석꾼 부자 조 대인은
초라한 신참 노인을 길가의 개똥 취급했다. 이렇게 두 노인네 환자는 서로 말도 하지 않은 채 불편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조 대인의 사동이 빨랫거리에다 빈 반찬 통을 들고 조 대인 집으로 간 어느 날 밤, 조 대인이
통시(뒷간)에 가려고 문을 열고 나갔다. 합숙을 하는 방이면 문을 열고 닫을 때 상대방이 행여 깰세라
살짝 여닫아야 하거늘, 놀부 심보 조 대인은 요란하게 헛기침하며 문을 쾅 하고 열고 나갔다.
밤은 깊어 사경인데 구석에 쪼그리고 자던 변 노인이 문소리에 잠을 깼다. 다시 잠이 들어봤자 그가
들어올 때 또 깰 것이 분명해 이제나저제나 멀뚱거리며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나가 통시 문을 열었더니 조 대인이 통시 구석 잿더미에 얼굴을 처박고 쓰러져 있었다.
조 대인을 뒤집어 눕히니 숨소리가 없었다. 동산 같은 배 위에 타고 앉아 두주먹으로 가슴팍을 쾅쾅 내리치며
“사람 살려∼” 고함을 쳤다.
제자들이 달려오고 황 의원도 나왔다. 입속의 재를 내뱉으며 조 대인이 숨을 토했다. 우황청심환을 먹이고
사지를 주무르고 뜨거운 물수건으로 돼지 같은 온몸을 닦아내고나니 새벽닭이 울었다.
조 대인은 계속 의원실 진찰대에서 침을 맞고 있다가 이튿날 저녁나절에야 입원실로 돌아왔다.
그러고선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목숨 살려줘서 고맙소이다.”
모깃소리다.
“통시에 갈 때 문을 쾅 하고 연 탓입니다.”
변 노인이 은근히 한방 먹이자 조 대인이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본가에 다녀온 사동이 뭔가 한보따리 메고 왔다. 상강이 지나 쌀쌀해진 날씨에 솜을 넣은 비단옷과
찬합에 온갖 반찬을 싸 왔다. 조 대인의 사동이 부엌으로 가 찬모에게
“오늘부터 우리 방 저녁상 겸상으로 주세요”라고 귀띔했다.
커다란 겸상이 들어오자 신참 노인이 놀랐다. 사동이 찬합을 올렸다.
장조림·송이산적·도가니…. 신참 노인의 젓가락이 가지 않자 조 대인이 신참 노인의 밥 위에 반찬을 놓아줬다.
저녁상을 물리고 그제야 통성명을 했다. 예천 사는 짚신 장수 변 노인은 한평생 골방에서 짚신을 삼아
장날이면 장에 나가 그걸 팔아 일곱 식구 입에 풀칠하고 사는데, 때때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극심한 복통에
시달리다 용하다는 황 의원을 찾아 삼십리나 떨어진 이곳까지 왔다는 것이다. 배불뚝이 땅딸보 노인과
삐쩍 마른 꺽다리 노인은 부쩍 친해져 밤늦도록 얘기꽃을 피웠다. 나이가 같은 갑장이란 사실에 두 노인은
함께 놀랐다. 조 대인은 자신이 한참 손아래인 줄 알았고, 변 노인은 자신이 한참 손위인 줄 알았다.
갑장 친구로 말을 놓기로 했다.
초하루는 보름과 함께 면회일이다. 한부대가 찾아왔다.
“할아부지∼” 손주들은 달려와 변 노인 품에 안기고
“아버님∼” “영감∼” 모두가 변 노인 가족이다.
아들딸·사위·마누라·손자·손녀 모두 열명도 넘었다. 예천서 삼십리 길을 걸어 변 노인 식구들이 면회를 왔는데,
오리도 되지 않는 안동에서 조 대인을 찾아온 가족은 한사람도 없었다.
변 노인네 식구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온 듯 양지바른 풀밭에서 싸 온 음식을 펼쳐놓고 왁자지껄
웃음꽃을 피우는데, 조 대인은 변 노인이 찾을세라 산골짝 외딴곳에 홀로 앉아 마른 풀 줄기만 씹고 있었다.
그날 밤, 조 대인은 가족사를 털어놓으며 눈물은 감췄지만 기어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조 대인네 집안은 손이 귀했다. 늦게 본 외동딸, 조하늘은 천하에 둘도 없는 귀한 딸로 조 대인이 안고 살았다.
품속의 딸이 열일곱이 되자 단옷날 씨름판에서 황소를 탄 건달과 눈이 맞아 조 대인의 오장육부를 뒤집었다.
하인들을 시켜 건달을 잡아 와 다리를 부러뜨려놓고 딸은 삼단 같은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런데 곳간에 묶어놓은 건달을 딸이 풀어준 뒤 같이 야반도주를 해버렸다.
오년이 지났건만 딸의 소식은 듣지 못했고, 그 사이 마누라는 화병으로 이승을 하직했다.
조 대인은 기생집을 전전하며 술독에 빠져 살다보니 소갈이 들었다.<다음 호에서 계속>
첫댓글 건강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으로 즐겁고
보람 가득한 하루되시고 환절기 감기
걸리지않게 조심하시길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