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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가시를 남겨두신 의미/삿 2:1-23
1.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2.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3.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4.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 5. 그러므로 그 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6. 전에 여호수아가 백성을 보내매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그 기업으로 가서 땅을 차지하였고
7.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8.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 십세에 죽으매
9. 무리가 그의 기업의 경내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산 북 딤낫 헤레스에 장사하였고
10.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11.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들을 섬기며
12. 애굽 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 곧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좇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13.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
1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 붙여 그들로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시는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15.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것과 같아서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
16.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17. 그들이 그 사사도 청종치 아니하고 돌이켜 다른 신들을 음란하듯 좇아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 열조의 행한 길을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치 아니하였더라
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그 사사의 사는 날 동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대적에게 압박과 괴롭게 함을 받아 슬피 부르짖으므로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셨음이어늘
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23.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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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3
1.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려 하시며
2.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 중에 아직 전쟁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 그것을 가르쳐 알게 하려하사 남겨두신 열국은
3. 블레셋 다섯 방백과 가나안 모든 사람과 시돈 사람과 바알 헤르몬산에서부터 하맛 어구까지 레바논산에 거하는 히위 사람이라
4.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여호와께서 모세로 그들의 열조에게 명하신 명령들을 청종하나 알고자 하셨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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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는 언제나 당신께서 세우신 이들을 통하여 하셨습니다. 아브라함 시대와 같이 족장들이나 혹은 다윗 시대와 같이 왕들을 통하여, 혹은 이사야와 같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로 말씀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시기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족장과 왕국시대의 중간기라고 할 수 있는 "사사시대"입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부터 시작되는 혼란기를 '사사'라고 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특별한 제도와 사명자들을 우리는 사사기에서 만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사사를 세우사 이스라엘을 건져내게 하셨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이후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갈렙, 즉 유다지파의 족장을 통하서 먼저 하나님의 일의 방향을 잡게 하셨습니다.
사사가 필요한 시대의 상황에 대하여 17절은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백성들이 사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지 않는 우상에게 나아가 절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던 열조의 신앙을 본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기에서는 계속되는 삶의 한 패턴을 발견하게 되는데,
첫번째 패턴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로 인한 불신앙의 삶,
두번째 패턴은 하나님의 막대기로 사용된 나라들로 인한 압제와 고통에 신음하는 백성들의 삶,
세번째 패턴은 이들의 회개의 눈물과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불쌍히 여겨 사사를 세우심,
마지막 패턴은 세우신 사사를 통해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은헤와 구원의 손길로 인한 평안의 회복입니다.
사사기는 사실상 오래 전의 이스라엘 민족의 삶의 이야기입니다.
'사사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저는 이 이야기들을 통해서 새롭게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곧 사사기의 반복되는 패턴이 바로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삶의 패턴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은혜를 주셨을 때 그 은혜를 바로 사용하지 못하고 탕진해 버리는 어리석은 탕자와도 같은 모습을 사사기는 발견하게 해줍니다. 은혜를 잃어버린 백성이 결국은 세상과 손잡거나 타협하면서 살다보니,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지 못하고 오히려 우상에게 엎드리는 기가막힌 결과를 얻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닫게 해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백성들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당신의 채찍으로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한 도구로 쓰신 줄 믿습니다.
고통을 당하고 빼앗김을 당하지만 처음에는 깨닫지 못합니다. 군대가 약해서인가? 훈련이 부족해서인가? 환경과 제도를 탓해 보지만 뽀죽한 방도가 나타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방황끝에 결국 그들이 얻는 결론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기 때문이다" 즉 불순종이 원인이라는 새로운 영적 각성을 하게 됩니다. 눈물로 회개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들의 문제를 내어놓고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잘못된 삶을 진노하고 채찍하셨지만 눈물로 회개하고 부르짖는 그들을 위하여 택하신 사사를 통하여 그들을 고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모습이 사사기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사기 1장과 2장은 우리의 삶의 형태를 들여다보게 해주는 서론과 같은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어느 부분에 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깊이 빠져 죄악과 짝하며 우상의 종노릇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불순종과 불신앙의 삶으로 인해 주변의 여러 상황들이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어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제야 무엇인가를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회개하고 부르짖는 가운데 있습니까?
아니면 사사를 통한 구원의 기쁨을 이웃들과 나누며 평안과 은혜를 회복하고 계신지요?
우리 모두는 이 네 가지 삶의 형태 중 하나일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마지막 부분, 곧 은혜와 평강 속에 허락하시는 복을 누리는 삶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사사를 세우실 때에는 그 사사와 함께 하셨고 대적들의 손에서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사와 함께 하시는 동안은 언제나 이스라엘은 승리의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사가 누구입니까? 족장과는 달리 사사는 어려운 시대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일을 위해서 특별히 부르신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사는 세습이 되지 않아서 그 당시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어떤 사사는 그 사건만 해결하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대 사사, 혹은 소 사사라고 사사들을 구별하기는 하지만 어떤 모양으로 쓰여졌든지 사사는 혼란한 시대에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인도했던 분명한 지팡이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사사가 사는 날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고 대적들을 물리치는 승리의 삶을 주신 줄 믿습니다. 승리의 조건이 바로 사사와 함께 하시는 여호와라고 하는 점에서 승리의 비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승리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는 다윗이나 모세나 바울이나 수많은 믿음의 삶을 살았던 이들이 바로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그 자신과 그와 함께 한 모든 공동체가 승리의 결과를 가졌다는 것을 기억하면 이 시대의 승리의 비결은 다름 아닌 임마누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심인 줄 믿습니다.
사사가 죽었습니다. 세습되어지지 않는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사가 죽고 나면 또 나라가 혼란스러워집니다. 은혜와 평강의 삶에서 이제는 불순종과 우상 숭배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경건의 삶을 사는 일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경건의 삶의 시간보다는 육신의 쾌락을 위한 시간으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 한번 살펴보세요.
저는 가끔씩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 젊은이들, 중고등부나 대학부, 또는 청년부가 헌신예배를 드린 후의 모습말입니다. 헌신예배를 위해 남선교회나 여선교회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많은 시간과 정성을 다해 준비합니다. 그런데 뭐가 헷갈리느냐 하면 그렇게 은혜로운 헌신예배를 드려놓고 나서 뒤풀이한다며 노래방이나 PC방엘 가는 모습을 보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PC방이나 노래방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젊은이들에게 있어서 건전하다는 곳이 그곳 말고는 거의 없다는 환경적 상황을 저도 잘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헌신예배를 드리고 나서 거기를 곧바로 간다는 것이지요.
성도여러분, 엘리야가 갈멜산상에서 450명의 바알 숭배자들을 불의 응답으로 제압시킨뒤, 왜 도망을 갑니까? 큰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나서 왜 침체에 빠지느냐 그 말이예요. 그리고 뭐라고 그래요. "이제 나만 남았사오니 죽여주시옵소서" 불러가 달라는 거예요.
뭔가 앞뒤가 안맞잖아요.
열왕기상 19장3절에 보면,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치는 엘리야를 볼 수 있습니다만 어디 엘리야가 자기 목숨위해 일하던 분입니까? 하지만 불로 응답받은 후, 삼년반의 가뭄을 끝내고 비를 오게 한 뒤로 아합과 이세벨보다 앞서서 달려가는 엘리야의 모습이나 이젠 죽여달라는 호소 모두가 그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이지요.
우리 자신도 이런 혼란스러운 삶의 모습들을 알게 모르게 가질 수가 있어요.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1절을 봅니다.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22절에 "이는 이스라엘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시험하려 함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 이삭을 너무 좋아하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을 시험해 보시기 원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는지 아닌지 알려 하노라" 이삭을 모리아산에 제물로 바치도록 요구했습니다.
원래 기독 신앙에 있어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법이 없어요. 그것은 이단입니다. 그 당시 주변에 에돔이나 암몬이나 모압 같은 그런 주변의 이방인들 제사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그러나 하나님 여호와 신앙에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했어요.
한마디로 얘기해서 무리한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밤새 고민하지요. 그리고 아내에게 이야기도 안하고 먼저 새벽에 길을 떠납니다. 아내에게 얘기해 봐야 도움이 되지 않지요. 100세에 얻은 아들인데 "여보, 이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다름이 아닌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나님 그러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의논했을 때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몇 가지 대답이 가능하지요.
제일 먼저는 "아마 당신이 잘못 들었을 거야" 아니면 "이 영감이 노망이 들었나" 몇 가지 가능한 생각들이 우리의 머리를 스칩니다. 그리고 결론은 뭐예요. 부부간의 논쟁과 그리고 분쟁이겠지요. 합의가 될래야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낮시간 동안 장작과 나귀와 거기에 가야 할 일꾼들을 다 준비시켜 놓고 밤새 고민하다가 결국은 아들을 데리고 갑니다. 이른 아침 새벽에 떠났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려고 하는 그 시간에 하나님의 급한 음성이 들립니다. "알았다. 내가 이제야 나를 더 사랑하는 줄 알았다"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음인 줄 믿습니다. 베드로에게 다가와서 말씀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들은 하시지요. 문제는 순서입니다. 사랑하되 남편 아내도 사랑하고, 자식도 사랑하고, 물질도 사랑하고, 직장도 사랑하고 다 사랑하고 사랑할 것이 없어서 나중에 "뭐 없나? 하나님 사랑 좀 있네" 그래서 생각나면 할 일 없으면 찾아오는 사람들 "오늘은 교회나 가볼까?" 그런 수준의 사람들을 우리 주님은 원하시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이지요. 장례를 마치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점심을 우리가 했습니다. 어느 식당에 갈까 생각을 하다가 그래도 버스가 주차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저 부평에서 부천 경계로 막 들어오다 보면 우측에 '전장군 가든'이라고 하는 설렁탕 전문집이 있어요. 저도 그 집을 그날 처음 갔습니다. 이름이 굉장히 거창하잖아요.
주인에게 물어보았어요. "장군 출신입니까?" 그랬더니 아니래요. "뭔가 이상하다. 장군이라고 그랬는데..." 더 물어보니까 처음에는 말씀을 안하시려고 하다가 결국은 말씀하시는데 사실은 부친께서 중장으로 예편하셨습니다. 장군 중의 장군이지요. 중장이면... 그래서 '전장군' 그 성이 전씨더라구요. 지금 사장님은 집사님이고 장로 피택을 받으셨다고 그럽니다. 우리로 말하면 장로 추천을 받으신 거예요. 그밖에 큰 솥에 뼈를 삼고 그 국물로 이 설렁탕을 내는데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그 분이 하시는 말씀 중에 "목사님, 어제께 대통령 영부인과 장관들이 우리 집에 다녀갔어요" 제가 하도 맛있다고 그러니까 그 얘기를 꺼내셨어요. "그렇습니까? 대통령 영부인이 다녀가셨어요? 장관들이 다녀갔습니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요즈음의 마케팅 전략의 무엇입니까? 사진을 찍어서 대문짝만 하게 벽에 걸어놓고 밖의 현수막에 "영부인이 다녀가신 가든, 장관들이 다녀가신 가든" 신문에 조그마한 기사만 나도 온통 벽을 도배하는 요즘 시대에 얼마나 비즈니스의 좋은 조건이 되는 거예요.
"그거 왜 안하셨습니까?" 그렇게 물었더니 그 집사님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제가 집사 아닙니까? 제가 사업을 해도 하나님의 자녀의 그러한 마음으로 사업을 하는 것이지 그런 것을 가지고 사업에 도움 받기는 싫습니다" 제가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얼마나 마음에 감동이 왔는지 몰라요. "야, 멋있는 집사님이다. 이런 사업을 하는 집사님을 하나님이 복을 안주신다면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시랴?" 먼저 제가 그 집을 축복했어요. "하나님께서 집사님 같은 분을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승리의 비결이 뭔가요? 정말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승리하고 싶어하지만 승리의 비결이 뭔가요? 하나님께서 사사와 함께 하실 때에는 그 민족을 구원하게 하시고 이기게 하신 비결을 아는 사람만 아는 거예요. 이 비밀을 평안의 여러분들이 모두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장 1절로 가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을 시험하기를 원하셨어요. 가나안 전쟁을 알지 못한 이스라엘 말은 이스라엘 민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살다가 불순종의 세대는 다 가고 순종의 세대를 남겨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어요. 요단강을 건넌 후에 모두가 다시금 할례를 받고, 그들의 모든 옷을 빨아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까지 그들은 여호수아와 모세의 지도력을 통해서 승리의 체험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승리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 기뻐하는 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러나 그들의 자녀들은 가나안 땅에 갈 때까지 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삶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할 때 만왕의 왕,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과 함께 한 삶의 승리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 우리말로 하면 신세대가 되는 거예요. 그들을 시험해 보기 원하셨다는 거예요. 한번 테스트 해보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신세대를 테스트한다고 하는 것은 누구 책임인가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을 알려면 누구를 통해서 교육받아야 되는 것입니까? 부모들 아닙니까? 그 세대를 시험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부모들이 자녀 교육을 얼마나 제대로 했는지를 시험해 본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이상한 현상을 아십니까?
부모들은 교회를 나오는데 아이들은 교회를 안나와요. 1,000명 모이는 교회에 아이들은 200-300명도 안모여요. 이 기이한 현상을 여러분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십니까? 아마도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의 자녀들도 교회를 안 다니는 자녀들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도 심각하지도 않지요. 아무렇지 않지요. 그냥 멀쩡하게 키가 크고 학교만 다니니까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시지요. 위기를 못느낀다는 거예요.
여러분,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시나요? 중학교 정도부터는 동네 가까이 학교가 있지 않으면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가야되지요. 아니면 여러분들이 차로 픽업을 해줘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은 시간이 있잖아요. 아이를 깨워야지요. 여러분 자녀 중에서 제시간에 딱 딱 일어나서 가방 싸들고 그리고 학교 가는 아이들 몇이나 됩니까? 아마 거의 없을 거예요. 그러면 우리 부모들이 해야 할 일이 많지요.
먼저 1시간 전에 일어나서 밥을 해놓고 찬밥보다는 이왕이면 학교 가는 아이들 더운 밥 먹이려고 우리 한국 사람들 부모들의 생각 중에 더운 밥을 먹인다는 것은 남편에게나 자녀에게나 아내로서 할 수 있는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최상의 헌신이라고 생각되는 관용구예요. 더운 밥을 먹인다는 것...
먼저 일어나서 밥을 짓고, 반찬을 해놓고, 국을 끓이고 그 국 식지 말라고 불을 약하게 해놓고서 그리고 아이를 깨웁니다. "얘, 일어나라" "예. 알았어요"하고 한바퀴 빙 돌지요. 그리고 시계를 봅니다. "그래. 피곤하니까, 어젯밤 11시에 들어왔는데 공부하느라고 어려운데 10분만 더 재우자. 그리고 빨리 일어나면 될거야" 그리고 10분 더 재웁니다. 그 다음에는 더 이상 여유가 없어요.
깨우는 것을 좋아하는 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 짜증 소리 다 들어가면서 결국은 깨워서, 저와 집사람도요 아이들 깨울 때 온갖 아양을 다 떨어요. 막 두들겨서 안마도 해주구요. 이게 어떻게 된 세상입니까? 자식이 부모 안마를 해줘야지 왜 부모가 자식 안마를 해주고 주물러 주고 난리입니까? 그래가지고 겨우 기분 좋게 해서 아침 샤워시키고 그리고 먹여서 그리고 차 태워서 보내요. 365일 중에 자기가 벌떡 일어나 가는 날은 1/10도 안돼요. 그래도 부모들은 그거 수고하잖아요.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대학 갔다고 좋아할 거 없어요. 그 공로의 2/3는 부모님들의 몫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그런 거 아니예요.
그런데 주일날 교회학교 어린이들, 주일날 중고등부, 청년, 대학부들 "왜 안왔나요?" "아유, 피곤해가지요. 그래서 못 나왔나봐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학교를 애가 피곤하다고 안깨워 보냅니까? 교회에 피곤하다고 안깨워 보내요? 이게 제 정신이 있는 얘기입니까? 제가 좀 심하게 얘기하고 싶어요.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학교를 깨워 보내는 분이 왜 교회는 안깨워 보내나요? 부모에게 문제가 있는 거예요.
신세대에게 하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 시험한다는 이야기는 부모를 시험한다는 말과 다름이 아닙니다. 학교를 보내는 열정을 가진 부모님이라면 영적인 생명을 얻는 구원의 지혜를 얻게 하는 그곳을 왜 그런 열정을 안가지시나요? 한국 교회에 지금 우리 부모 세대가 가져야 할 큰 숙제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어요. "댁의 아드님, 왜 청년부 안나오지요?" "토요일날 늦게 와서요. 피곤해서 제가 못깨우겠어요" 이제 앞으로 제 앞에서는 그런 이야기하지 마세요. "그 중등부 아이, 그 애 왜 안나오지요?" "아유, 토요일 날이면 1-2시까지 텔레비전 보고 게임 하고요, 피곤해서 못나오나봐요" 그런 이야기는 이제 저한테 하면 안돼요. 어쩌면 꿀밤을 맞을 수도 있어요. 이게 말이 되는 얘기예요? 하나님의 자녀를 만드는 일이 세상의 학교 가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이예요? 그게 우리 집사, 권사, 장로, 목사 이 성도들의 사고 수준이 그 정도라면 불행한 일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유람선이나 타고 다니는 그런 구경꾼이나 만들고 싶지 않아요. 제가 이 교회에 담임목사로 있는 한 여러분들을 군함에 탄 하나님의 십자가의 군사들로 만들고 싶어요. 어차피 여러분들이 평안의교회 등록해서 저와 함께 신앙생활 한다면 유람선이나 타고 다니는 구경꾼이 될 수 없어요. 구경꾼이 되려고 이곳에 오셨다면 자리를 바꾸셔야 됩니다. 강하고 담대한 사람...
며칠전 목사님들과 어떤 선교 모임이 있어서 이야기를 하는 중에 아들이 군에 가게 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나 이번에 우리 아들 해병대에 보냈어"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아니, 어떻게 해병대를 보냈습니까? 힘든데..." "아이, 그래도 남자는 해병대를 가야지요. 그런데 목사님, 이 해병대 가기도 쉽지 않습디다" "왜요?" 지원을 했는데 7:1이래요. 1,000명을 뽑으면 7,000명이 온 거예요. 저는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란 것이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이 괜찮은 젊은이들이 많구나" 희망을 가졌어요. 군에 안가려고 손가락을 자르고, 무릎을 수술하고, 돈을 주고서 거짓 진단을 받아내는 엉터리들도 간혹 있지만 대다수의 젊은이들은 괜찮은 젊은이들이구나. 그냥 징병 받아서 육군을 가는 것도 쉽지 않은데 어렵고 어렵다는 해병대 지원율이 7:1이나 되었답니다.
여러분, 왜 해병대가 중요합니까? 해병대 나온 목사님이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무나 갈 수 없으니까 해병대지요" 이때가 그때라 한마디 하시더라구요. 제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맞아요. 아무나 갈 수 있다면 누가 해병대입니까?" 여러분, 공인 회계사, 변호사, 판사, 검사 왜 그분들을 우리가 높이 생각합니까? 그들이 치루는 시험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예요. 하루 이틀 준비해서 되는 시험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한다고 하는데 그 시험, 시시한 시험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그 시험에 모두 패스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신세대의 문제는 하나님을 모른 것과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시는 걸 모르는 데 있는 거예요. 그것을 알게 하라는 거예요. 신명기를 펴보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반복하시는 말씀이 "너의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너희 자녀들에게 알게 하라. 가르치라.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장 6절 말씀은 돌 예배를 드리는 가정에 성경 앞에 늘 제가 직접 써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좀 자녀를 가르치라는 거예요. 밥만 먹이지 말고 제대로 가르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학교는 못갈지언정 교회는 보내라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3장 4절에 보면 "남겨두신 이 열국으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주님께서 시험하신 이유를 다시한번 밝히시는데 모세에게 주셨던 그 말씀을 순종하나 안하나 확인하기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쁘게 순종하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열국, 여러분에게 남겨진 열국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남겨진 열국은 시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에게 주변의 산지에 여러 해변에 남아있는 열국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열국들이 이스라엘 백성들 지파 지파에게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시험은 무엇인가요?
자녀 문제가 여러분에게 가시가 되는 경우가 있지요. 부부간의 문제가 여러분에게 시험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사업 문제가, 여러분의 건강의 문제가 여러분에게 남겨진 열국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그 남겨진 열국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이 허락하신 말씀을 얼마나 청종하는지를 알기 원하신다는 거예요.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청종하나 안하나 확인하기 원하신다는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해답이 거기에 있지요. 순종이 해답인 줄 믿습니다. 순종이 지름길인 줄 믿습니다. 괜히 잘난 척하고 여러분 길로 돌아다니지 마세요.
순종이 지름길이예요. 사업의 지름길이 순종입니다. 믿습니까? 인정하십니까? 괜히 이상하게 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지름길이예요. 남겨둔 열국과 타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당장 타협하면 일이 쉬워지고 당장 타협하면 길이 넓어지는 것 같지만 그것은 올무요 가시입니다. 타협하지 않고 나아갈 때 우리는 거기에서 승리의 길을, 거기에서 지름길을,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평안의 성도들이 가시를 남겨두신 하나님의 의미,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시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때때로 주어지는 가시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청종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들을 바로 감당하는 채찍이 되셔서 언제나 주님과 동행하는 그래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때에는 승리의 삶을 살았든 대적의 손에서 구원함을 받았든 그러한 결론을 늘 여러분의 삶의 결론으로 삼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도전이 문화적이나 사회적인 모습으로, 혹은 신앙적인 모습으로 다가올지라도 주님,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자신을 위한다는 어리석음에서, 사업에 도움이 된다는 유혹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 벗어나는 어리석음을 범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 한서노회(http://cafe.daum.net/harns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