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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망아지 <마르셀 예매> [1]
클라크뷔 마을에 어느 날 초록색 망아지가 태어났다. 망아지는 말라빠진 백마가 노쇠하면서 띠게 되는 척척한 푸른색이 아니라 진짜로 어여쁜 옥빛이었는데, 새끼가 태어나는 것을 지켜본 쥘 오두앙 씨는 자기 눈 아니라 마누라 눈까지도 의심했다.
자식 농사는 그나마 좀 다행스러운 편이었는데. 자식 셋을 건지기까지 무려 여섯을 만들어야 했다. 그래도 자식들은 가축들보다는 그나마 좀 덜 난감했다.
마을에는 일흔부터 아흔아홉 살 살까지는 관두고서라도 백 살 줄의 노인들이 스물여덟 명 있었는데, 이는 마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숫자였다.
고물딱지가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마을은 천국에서의 일요일인 모양 따분하기만 했다.
“사과처럼 새파래!”
“또 하나 넘어간다! 루슬리에 영감이야! 다음!” 반시간도 채 못 되는 사이 백 살 줄의 늙은이가 일곱, 아흔 살 줄의 늙은이가 셋 그리고 여든 살 줄의 늙은이 하나가 황천길에 올랐다.
망아지에 대한 소문은 행군을 계속해나갔다.
클라크뷔 마을은 엄청난 구경꾼들을 몰고 오는 망아지 덕에 잔뜩 거들먹거렸고, 마을의 두 다방은 때 아닌 호황을 누렸다.
오전 중에 생 마즐롱에 도착한 황제는 오후 세 시에 이르러 이미 열 네 개째의 환영 연설을 듣고 있었다. 환영파티가 끝나갈 무렵에는 눈이 다 가물가물해졌다.
황제를 실은 마차는 클라크뷔 마을로 접어들었다.
길가에 웅성웅성 모인 클라크뷔의 사람들은 일이 생기려고 하니까 끝이 없나보다며 반가운 마음으로 숙덕거렸다.
오두앙씨의 세 아들 중 맏이인 알퐁스는 고향의 이런 변화에도 아무런 이득을 보지 못했는데, 이는 군대가 그를 7년 동안이나 잡아두었기 때문이다.
그 아래인 오노레는 검은 눈동자에 날씬한 몸매를 한, 가난으로 거의 전설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어느 궁핍한 집안의 딸 아델라이드에게 반해 있었다. 오두앙 씨는 이 결혼을 원치 않았다. 오노레는 하겠다고 했다.
성인이 된 오노레는 아델라이드와 결혼하여 이웃 마을에다 살림을 차리고는, 날품팔이로 연명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사과를 받아내기 전에는 절대 집으로 돌아가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영감쟁이는 클라크뷔에서 반 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궁색하게 사는 아들의 꼴을 봐야 하는 수치를 씻기 위해 그 치사한 절차를 참고 거쳐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오노레는 농사일과 가축일 을 다시 손에 잡았다.
막내아들인 페르디낭에게 만큼은 부부 모두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어느 봄날 아침, 오두앙 씨의 집에 중대한 사건이(솔직히 말하면 처음에는 어느 누구도 그 중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벌어졌다. 부엌 쪽의 창가에 앉아 레이스 뜨개질을 하고 있던 오두앙 부인은 자기 집 뜰 안으로 웬 청년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다. 이 청년의 머리에는 빵모자가 씌어 있었고, 등에는 화구통이 매달려 있었다. 청년이 말했다. “지나던 길에 이 댁의 초록색 망아지를 구경할까 해서 왔습니다. 그림 한 장 그려보고 싶군요.”
망아지는 풀밭으로 끌려나왔고, 화가는 작업에 착수했다.
훗날 초록 망아지를 영원히 기념하게 될 망아지의 초상화는 이리하여 식당 안 벽난로 위쪽에 걸려 있던 황제와 캉로베르 장군의 초상화들 틈에 자리 잡게 되었다.
2년 후, 병이 든 망아지는 한 달을 골골거리다가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수의사로서의 지식이 충분하지 못했던 페르디낭은 망아지의 죽음 앞에 아무런 진단도 내릴 수 없었다.
막내아들이 수의사로서의 자격을 갖추어가는 사이 오두앙 씨는 꾸준히 재산을 늘려나갔다.
오두앙 씨의 진정한 즐거움은 부자라는 것과 이름만 대면 아는 누구누구 아무개로 통하는 거였다. 가장 유쾌한 오락거리는 자기 집 앞에 앉아 500미터 저쪽의 나무들 사이로 솟아 있는 말로네 가의 초가지붕을 감상하는 일이었다. 두 집안 사이에는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는 원한이 맺혀 있었는데, 이는 시기심이나 의견 차이 따위와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것이었다. 성난 말투나 고성이 오간 적도 없었다. 오두앙 가 쪽에서 클라크뷔 마을에 떠도는 말로네 가의 근친상간에 대한 소문을 이용해먹는 일 또한 결코 없었다.
1870년의 보불전쟁 기간 중, 오두앙 씨네는 힘겨운 나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우악스럽기로 소문난 프로이센군이 클라크뷔 마을로 쳐들어왔는데, 오두앙 씨는 면장이라는 이유로 많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 적들은 몇 번이나 그를 솥에 쪄먹자고 들었다. 한 번은 숫제 몸뚱이 속으로 꼬챙이를 찔러 넣기까지 했다.
늙은 오두앙 씨 부부는 민병대들 틈바구니에 끼어 숲 속 한구석에서 총질을 해대는 오노레 때문에 한시도 마음을 놓을 겨를이 없었다. 전투 초반에 최전방 부대로 불려 나간 알퐁스는 무릎에 부상을 입고 평생 다리를 절게 되었다. 클라크뷔로 돌아온 이후, 불구인 그의 몸은 처음 6개월간은 떳떳한 것이었으나, 사람들은 이내 깔보는 말투를 섞어 그를 절름발이라고 불렀다.
■ 망아지의 말
나를 그린 그 청년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 유명한 화가 뮤도와르 군이었다.
나는 그 불쌍한 청년이 몇 년 뒤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는데, 아마도 이는 그간의 상당했었을 작품 활동에 기력을 모두 소모해버린 탓이 아닌가 한다.
아아.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나는 평면의 액자 속에 갇힌 내 초라한 신세와, 언제고 꼭 실현시켜보리라는 희망조차 가져볼 수 없는 이 허망한 욕정의 실체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주인집 사람들을 관찰해가며, 이들이 보여주는 사생활의 풍경에 대해 사색해보기로 했다.
나는 4대에 걸친 오두앙 가의 사람들을 그 첫 대는 그들 인생의 황혼길을 통해, 그 마지막 대는 여명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70년 동안 부부관계에 임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는데, 저마다 나름대로의 기질에 따라 요령을 발휘하긴 했지만 대부분(정도와 차이는 있으나 거의 모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은 육욕을 탐하는 것과 그 마무리 방식에 있어서까지 마치 자신들을 지배하는 듯한 어떤 공통된 원칙에 충실하고 있었다.
[2]
생 마즐롱 시에다 페르디낭의 진료소를 차려주고 난 오두앙 씨는 아들에게 여자를 찾으라고 재촉했다.
페르디낭은 어느 외동딸을 둔 노부부의 눈에 띄게 되었다. 사업에서 물러난 부르샤르 씨 부부는 딸 엘렌을 시집보낼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엘렌은 예쁘장하고 건강하며 착실하고 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처녀였다.
신혼 초 부부는 프리데릭과 앙트완, 루시엔느 이렇게 세 아이를 낳았다.
말로레 영감을 만날 때면 오두앙 씨는 다분히 저의가 깔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네 조카가 취직에 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도 안타까웠네. 자네 누이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을 살아가느라 그 더러운 돈을 벌어가며 그렇게나 고생했는데…….” 오두앙 씨는 이 ‘더럽다’는 말이 때에 따라 갖게 되는 이중적인 뜻 같은 건 전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는 듯 태연한 얼굴을 해 보였다. 말로레 씨로서는 그의 입이라도 찢어놓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오두앙 씨는 슬그머니 페르디낭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 그 아이야 이제 번듯하게 자릴 잡았지. 정말이지 내 마음에 쏙 드는 자식 놈이라네.” 오두앙 씨는 나머지 두 아들에 대해서는 이렇다 말이 없었다.
생전의 오두앙 여사는 집안을 화목을 가져다주던 사람이었다. 여사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3년 뒤에 도시 까닭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는데, 그 원인은 의사들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홀아비가 되면서부터 오두앙 영감은 위의 두 아들을 좀 더 너그럽게 대했다. 그리고 오노레의 다섯 아이들 중 둘째인 줄리엣을 특히 귀여워했는데, 덕분에 며느리도 전보다는 좀 더 예뻐 보일 수 있었다. 죽기 몇 달 전, 영감은 세 아들을 불러다 놓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리고 가진 재산에서 일금 만 프랑을 떼어 줄리엣이 결혼식 당일에 쓸 수 있게 지참금조로 조치해두었다. 나머지는 삼등분되어 세 아들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페르디낭이 줄리엣 지참금으로 오노레보다 자기가 손해라고 주장하자 영감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그런 게야. 하지만 트집을 잡은 건 잘 했어. 언제나 주어진 몫보다 좀 더 가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법이거든. 불평해봐야 더 나올게 없다는 말은 아니야. 나중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오늘 당장 망아지 초상을 줄 터이니, 거실에 잘 걸어 두도록 하거라.”
페르디낭은 초상화를 경건하게 받아들고는 검은 색의 멋진 액자에 끼운 다음, 거실에서 제일 잘 보이는 피아노 윗자리에 걸어두었다.
어느 날 오후 아픈 일이라곤 생전 없던 오두앙 영감이 자리에 몸져눕는가 싶더니, 일주일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영감은 오두앙 여사 곁에 묻혔다.
얼마 가지 않아 사람들은 초록 망아지가 행운의 부적이라는 증거를 보게 되었다. 페르디낭은 큰 명예 학위와 동메달을 받고 생 마즐롱의 부시장으로 임명되는가 하면, 만 프랑의 채권 배당금을 타기도 했으며 그 얼마 뒤에는 시의회 의장이 되었다.
반면 페르디낭의 형들은 실로 대단했던 유산이 얼마 가지도 않아 싸그리 사라지는 꼴을 보아야 했다.
알퐁스는 오노래에 비하면 집안에 망조가 들어도 싸다고 할 만 했다. 고물이 된 다리가 밭일 하는데 불편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불이나 식료품 장사를 하든지, 하다못해 원금에 따른 이자만으로도 만족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고급 포도주에 흠뻑 취하고 일 년 열두 달 진수성찬을 챙겨 먹었으며, 하루 삼십 냥씩을 담배 연기로 그냥 날려 보냈다. 게다가 집 안에서의 이런 호의호식 만으로만 그친 게 아니라 며칠씩 시내에 머물며 어중이떠중이 불량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못된 곳이란 못된 곳을 죄다 훑고 다녔다. 재산의 절반이 날아갔을 때쯤 알퐁스는 다리가 멀쩡하게 붙은 처녀랑 결혼을 했는데, 생활의 원칙이고 뭐고 없던 그녀는 그나마 남은 집과 세간을 몽땅 말아먹고 말았다. 이에 불끈한 수의사 동생은 전혀 형을 도와주지 않았다.
재산이 거덜 나자 동생은 그래도 리용으로 떠나는 형 일가에게 여비를 대는 아량을 베풀었고, 알퐁스도 그곳에 정착하고 싶어 했다.
여름철에는 일요일을 보통 클라크뷔에서 보내는 것이 습관이었다. 페르디낭은 마차를 꾸려 온 가족들을 데리고 오노레형의 집으로 향했다. 사촌들과 사이가 좋은 페르디낭의 아이들에게 이 날은 휴식이라고 할 수 있었고, 엘렌도 자신의 형과 허물없이 지내는 남편의 모습에 흐뭇해했다.
오노레와 페르디낭은 서로를 완전히 미워하는 관계는 아니었다. 둘 사이에는 진짜 ‘정’과 같은 감정도 있었으며, 행이든 불행이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은 없었다.
[3]
불밭과 자신의 집 사이에 가로놓인 길에 이르자 오노레 오두앙은 베어놓은 밀 다발 위에 낫을 얹어두고 따가운 햇볕 아래 큰 키를 고쳐 세웠다.
길을 건너 집으로 갔다. 덧문이 닫힌 부엌에서 아내가 솔로 바닥을 싹싹 문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엌 안쪽으로부터 약간 숨이 찬 듯한 칼칼한 목소리가 가늘게 들려왔다. 아델라이트였다. “식탁에 다 차려놨어요. 빵 옆에 양파 깐 것 두 개가 있을 거예요. 포도주는 시원해지라고 물속에 담가 두었고요.” 오노레가 대답했다. “알았어, 그런데 부엌 바닥은 왜 비벼대는거야? 누가 보면 당장 무슨 큰일이라도 치르는 줄 알겠군.” “물론 더 큰 일도 있지요. 하지만 아주버님께서 내일 동서랑 아이들을 데리고 오시면…….” “부엌 바닥을 들여다보진 않을 거라구. 왜 이래?” “그래도 자기 집이 깨끗해 보이는 편이 더 좋을 테니까....” “알았어, 자기 집, 자기 집이라…….” “당신은 아직도 여기가 우리 집인 줄 알아요?”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차양에 기대앉은 오노레는 천천히 빵을 씹으며 늑장을 부리고 있었다. 그제는 눈도 어둑어둑한 부엌에 제법 익숙해져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아델라이드릐 형체도 알아볼 수 있었다. 아텔라이트는 등을 돌린채 무릎을 바닥에 대고 엉덩이를 치켜 올리고 있어 머리가 양어깨 사이로 사라지고 없었다. 무릎께에서 훌쳐올린 검은색의 폭넓은 치마는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어둠 속에서 상당한 부피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노레는 생전 처음 보는 듯한 그렇게나 풍성해 보이는 아텔라이드의 엉덩이에 놀라고 말았다. 여태까지 비쩍 마른 아내의 몸집을 내심 아쉽게 생각해오던 터였기 때문이다. 검정치마가 어둠이 몰린 부엌의 한구석에서 가만가만 흔들리고 있었다. 오노래는 어둠 속에 어렴풋이 묻혀 있는 치마의 윤곽을 구분해내느라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마치 아내를 바꿔치기라도 당한 것처럼 그 낯선 모습에 당황하고 있었다. 아텔라이드가 다시 솔을 집어 들고 두 팔을 쭉 뻗어 바닥을 문질러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그녀의 엉덩이도 앞으로 푹 꺼졌다가 이내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며 크고 재빠른 동작으로 발뒤꿈치 부근에서 부풀어 올랐다. 오노래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는 목을 쭉 뻗고는 어둠 속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검정 치마의 움직임을 쫓기 시작했다. 차양 뒤편으로부터 여름의 숨결이 전해져왔다. 귓가에서 붕붕거리는 말벌의 날갯짓이 숨 가쁜 노랫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서늘한 부엌은 어둠이 부린 요망한 마술에 걸려든 양 조그만 소리에도 온몸이 움찔해지는, 말하자면 병원의 대기실 같은 곳으로 둔갑해 있었다.
속곳 속에 달려 있어야 할 것이 다 달려 있으면 뭐 해요. 누구는 수의사 남편이 돈을 잘 벌어다줘서 아무것도 안 하고도 모자에 꽃 양말에 보석을 주렁주렁 꿰어 차고 사는데! “
“비단이요? 그럴 염려는 없죠, 가축일 하나도 제대로 못해 내는데다가 아버지가 물려준 집조차도 간수할 줄 모르는 남자에게서 비단이라니, 가당키나 한 생각인가요. 기껏해야 죽어서 구덩이 속에 처박히게 되는 날만 기다리다가…….”
오노레가 낫을 막 갈았을 때 덜커덩거리는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페르디낭의 마차가 불밭에서 200미터쯤 떨어진 길모퉁이를 돌아 나타났다.
페르디낭은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계획성 있는 사람답게 언제나 계획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다.
마차가 멈추자 오노레는 약간 근심 섞인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페르디낭이 평일에 클라크뷔에 들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별일 없니?” “아무일도” 마차에서 내리며 페르디낭이 대답했다. “근처에 왕진 나왔던 김에 잠시 인사나 할까 하고. 참, 그러고 보니 우리 내일은 못 와, 형, 다음 주에나 올 수 잇을 거야.” 페르디낭은 이렇게 말하며 온갖 격식을 생략하던 평소 둘 사이의 묵약을 잊은 듯한 손을 내밀었다. 오노래는 시큰둥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오노레는 이 이례적인 악수의 의미를 놓치지 않았다. 동생이 뭔가를 요구해올 것이다……. 페르디낭은 형의 또렷한 눈빛을 보고는 벌써 일이 글렀음을 알아차렸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약간 붉혀가며 어색함을 감추느라 괜히 더 수선스럽게 아이들 소식을 물었다.
오노레는 다정하게 말을 쓰다듬으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클로틸드와 귀스타브, 밑의 두 놈들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벌써 돌아와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맨날 길거리를 쏘다닌다. 알렉시는 언덕에서 소풀을 먹이고 있는데, 이번 가을에는 다시 학교에 보낼 작정이다. 줄리엣이라면 시집가기 전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고, 그동안은 밭에서 머슴처럼 일하고 있다. 암, 그래야지, 제 오라비가 지금은 군대에 가고 없으니. “에른스트라면 여전히 에피날에 있지. 요번에 받은 편지를 보여주마. 에른스트 말이, 상관이 잘 봐 준다나……. 맙소사 그 녀석, 재입대할 생각은 아닌지 몰라! 알퐁스 형이 어찌나 노랠 불러놨는지……. 형한테서는 소식 있니?” 페르디낭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이 골칫덩어리 형을 들먹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노레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 전날 밤부터 생각해둔 긴한 이야기를 그르치게 될까봐 알퐁스에 관한 한은 반박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페르디낭이 클라크뷔 마을의 면장인 필리베 영감의 근황을 물었다. 오노레가 대답했다. “가볼 시간이 없었다. 대신 어젯밤에 줄리엣을 보냈더랬지. 기력이 쇠할 대로 쇄해서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야. 두 주일을 못 넘길 거라고 하는 걸 보면. 하긴, 노인네니까 더 할 말도 없지만.” 페르디낭이 한숨을 섞어 말했다. “그래도 안 된 일이군 , 필리베 영감은 면장 자리에 잘 어울리는 좋은 사람이었는데……. 참, 면장이라니까 하는 말인데, 마침…….” 오노래는 이 ‘마침’이란 말의 의미를 경계했다. 그래서 앞질러 말했다. “면장도 총무도 싫대잖아. 난 그냥 임원인 것만으로도 벅차.” 페르디낭은 그 마침이란 말이 혀끝에 딱 걸렸다. 그러자 야문 턱과 조잡한 얼굴에 별안간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꺼내려던 화제로의 전환점을 때마침 발견한 얼굴이었다.
오노레는 면 의회나 클라크뷔 마을에서 얼마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동생의 말에 으쓱해진 오노레는 좀 더 성의 있게 귀를 기울였다. 페르디낭이 다시 말했다. “들어봐, 지난번 저녁식사 때 의원님을 모시게 됐거든, 갈아탈 열차를 기다리시는 사이에 잠시 다녀가셨어. 발티에 씨는 예전부터도 우리를 많이 도와주셨던 분이야. 그리고 앞으로도 도움이 될 테고....” “난 그 발티에인지 뭔지에게 빛 진 것도, 바라는 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암튼 좋아.” “그건 또 모르지, 아무튼 식사를 하던 중에 마침 필리베 영감 이야기가 나왔는데 듣기로는 영감님을 대신할 만한 사람이 있대나 봐…….아, 물론 자신의 선택이 마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을 하고 계시지. 발티에 씨는 양심이 올바른 사람으로 신뢰 그 자체인 양반이라고 의회에서도 칭찬이 자자해. 내가 새삼스레 칭찬할 필요도 없지…….” “뭐, 그쪽 후보가 적당하기만 하다면야…….” 페르디낭은 이 대목에서 양해를 구한다는 듯 겸연쩍게 웃어 보였다. “형이야 물론 펄쩍 뛸 테지. 솔직히, 나도 이 이름에 익숙해지기까지 꽤나 애를 먹었어. 그 후보는 바로 제프 말로레야!” 오노래는 동생의 경솔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라는 듯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 적어도 너만큼은 원한이 없나 보구나.” “그야, 처음에는 물론…….” “그런데 네 애기 중에서도 가장 놀랄만한 것은 그 발티에란 자가 하필이면 보수파 중에서도 제일 골치 아픈 제프 같은 골수 교회쟁이를 내세웠다는 거야.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이지?” 페르디낭은 별안간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되어 조심조심 대답했다. “모르겠어, 설명하기 곤란해……. 요즘 정세가 좀 특별하다는 건 형도 잘 알거야. 불랑제 장군의 시안 하나가 여러 파벌들을 하나로 통합시켜놓았는데, 그건 표면적으로는 적대관계처럼 보이는 모든 파벌들을 하나로 엮는 고리가 될 수도 있어. 현재 우리가 처한 것과 같은 이런 혼란기에는 이러한 결속이 다행한 일이지. 사태에 대한 결론인 즉은…….” “이봐, 난 불랑제 장군의 시안도 모르고, 상황도,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클라크뷔는 아니까 하는 말인데, 제프를 면장 자리에 앉히자는 건 우리 공화파들 한테는 물먹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야. 거기에는 불랑제 장군이고 나발이고 없어.” “다 털어놓자면 발티에 씨가 말로네 집안과 관련이 있대. 아는 사람이 있다던가.…….?” “아는 사람? 그렇다면 잠깐! 혹시 제프의 딸……. 그렇지 2년 전에 파리로 상경한. 고 앙큼한 여우 마그레트 년이 아니냐? 젠장, 보아하니 얼굴은 반반한 게 피는 못 속이는가보구나!” 페르디낭은 대답을 회피하느라 고삐를 조이는 척, 말을 메어놓은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알아, 아버지랑 말로네 집안이랑은 줄곧 원수지간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게지…….” “그딴 건 난 몰라!” 오노레가 무시하듯 내뱉었다. “15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설마 그때의 그 민병대 일로 제프에게 원한이 있는 건 아닐 테지? 그건 아량도 상식도 없는 것이야, 형이 더 잘 알 텐데…….” 오노레는 잠자코 있었다. 그리고 동생에게서는 등을 돌린 채 말의 이빨에 관심이 있는 척 입술을 까뒤집었다. 하지만 분노로 동작이 어설펐던지 말은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심각한 장애에 부딪혔다고 생각한 페르디낭은 이겨보려는 욕심에 밀어붙이면 될 것으로 생각했다. “20년 전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이랑 감정 상했던 걸 하나하나 꼽자고 든다면 친구라곤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거야. 제프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든 오늘 부로 용서해줄 수도 있잖아!” “안 돼” 오노레가 말했다. “자, 자, 그러지 말고! 어쨌든 죽진 않았잖아?” 오노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말머릴 붙들 요량으로 콧등의 가죽 띠를 홱 낚아챘다. 말은 아프다고 히힝거렸다. 슬그머니 화가난 페르디낭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 민병대의 이야기 중에 뭐가 참말이고 뭐가 거짓말이야? 모든 게 막연하고 불확실하잖아. 마을에는 소문 한 번 없고!” 오노레는 획 돌아서더니 동생의 팔을 꽉 움켜잡았다. “그래, 한 번도 들어본 적 없겠지. 왜 그런지 가르쳐줄까?” “아, 아니, 뭐 구태여…….” “전부 다 말해주지. 알겠니? 그러고 나면 너도 아마 날 귀찮게 하는 짓을 그만둘 테지!” 오노레는 창백했고 페르디낭은 겁에 질려 있었다. 오노레는 버둥거리는 동생을 밀밭 끝으로 몰아붙인 다음, 밭두렁 위의 자기 옆자리에 강제로 앉혔다. 두 사람이 나란히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본 페르디낭의 말은 마차를 매단 채 그대로 마당 안으로 들어가 호두나무 그늘 속으로 숨어버렸다. “프러시아 군이 도착했을 때” 오노레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다시 페르디낭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버럭 내뱉었다. “이걸 속으로만 담아두고 있을 이유가 없어! 전부 다 말해주지!” 그러다가는 이내 잠잠해지더니. 다시 담담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속해 있던 부대는 딱히 하는 일도 없이 근방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지. 프러시아 군이 클라크뷔로 들어온 것을 알고는 모두들 숲 속으로 와서 진을 치고 있었더랬다. 멍청한 짓이었지만, 전날 밤 우리는 고주망태네 에서 코가 삐뚤어지도록 퍼마셔댄 참이었거든. 객기를 부리고 싶었던 데다가, 다들 초가언덕 위에 주둔 중인 정규군과 합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어. 내가 있던 자리는 벌판 저쪽의 소사나무 숲 뒤켠에 있는 불밭 끄트머리쯤이었어. 지금은 나무를 베어버렸지만, 바로 저기였어. 오노레는 4,5백 미터 떨어진 숲 속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오후 두 시경. 붉은 언덕 위로 뾰족한 사각모가 나타나는 게 보이지 않겠어. 호르륵호르륵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지. 맙소사. 그 소리…….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것 같아! 그놈들이 마을 안의 어느 한 집을 노리면서 언덕을 내려가는 걸 보았을 때는 정말이지 숨이 턱 막혀오더군! 내 가까이에는 , 그러니까 한 15미터쯤 저쪽이랄까.”투셔“라는 열여덟 살짜리 젊은 친구가 있었어. 나쁜 녀석은 아니었지만, 아직 세상물정을 모르는 애송이였지. 숲 속이라서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난 녀석의 겁에 질린 목소리만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어.”프러시아 군이 이쪽 레카르 숲으로 들어오고 있어요.. 난 입 닥치고 있으라 하려다가, 어차피 숲 속에 죽치고 있는 우리 패거리들 중에서도 무턱대고 총을 놀려 애꿎은 마을 사람들만 희생시킬 멍청한 자식들이 틀림없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냥 대답했지.”그러고 보니 그렇군, 두고 봐, 저놈들이 연못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우릴 포위하려 들 걸“ 투셔 녀석은 처음에는 나의 왼편에 있었는데, 5분 후에 그 야만인들이 연못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우리를 포위했다는 소리가 오른편에서 들려오는 거야. 모든 게 나의 예상대로였지. 동료들은 멋모르고 잔뜩 사기가 오른 채 주섬주섬 짐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나로서는 그 다음 일이야 안 봐도 뻔하던터라 솔직히 등골이 오싹해지더군. 혼자서 프러시아 군을 정탐하다가 당하고 싶진 않았어. 그래서 그 자리를 물러나와 숲속으로 냅다 달렸지…….” “적이 무서워서 도망친 게로군?” 페르디낭이 비꼬았다. “시끄러, 왼편으로 약간 꺾어져서 달리다 보니, 아까의 그 투셔 녀석이 도랑으로 뛰어들어 어떤 집(누구의 집인지는 알만하지?)쪽으로 달려가는 게 모이지 않겠어? 녀석의 뒤를 따라 나도 도랑 쪽으로 뛰어들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녀석이 우리 집 쪽으로 미친놈처럼 달려가는 거야. ”투셔!“ 녀석의 뒤통수에다 대고 내가 냅다 소릴르 질렀지. 암, 녀석은 분명히 내 말을 들을 정신이 있었고말고! 그런데도 녀석은 맨 먼저 눈에 띄는 집으로 도망갈 궁리밖에는 안 하더라, 이 말이야. 바로 우리 집으로! 생각해봐! 면장 집에 민병대원이라니……. 발각되는 날엔 동네 사람들 모두가 총살 감이었지. 난 2백 미터나 앞서 가는 놈을 쫓아 달려가고 있었어. 더구나 꽁지에 불까지 붙은 녀석을 . 내가 큰 길로 뛰어오를 때쯤 녀석은 벌써 집안으로 들어가고 없었지. 제프 말로레와 맞닥뜨리게 된 건 바로 그때였어. 물론 나로서는 멈출 겨를이 없었고.” “그러니까 결국 그때 두 사람을 본 게 제프 뿐이었는지는 확실하지가…….” “그 자식이 제 입으로 그랬어. 언젠가 내가 그 자식의 주둥아리를 거름통 속에다가 쑤셔박아 주었던 날…….” 오노레는 그날의 자백을 떠올리고는 통쾌하게 웃었다. 그러자 다시 페르디낭이 아무도 죽은 사람이 없으니, 사건은 그다지 심각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아직 안 끝났어. 그래서 집으로 들어가 봤더니, 투셔는 어머니 목에 매달려 울고 있었고, 어머니는 달래는 중이셨지. 두 사람은 부엌에 있었어. 난 녀석의 뒷덜미를 낚아채서 문 쪽으로 내동댕이 쳐버렸지. 그러고는 곧바로 나왔어야 했는데……. 그런데 너도 알잖니....! 집에는 어머니 혼자뿐이셨고, 아델라이드는 아이들이랑 너희 집에, 그리고 아버지는 프러시아 군을 맞느라고 면사무소에 가고 안 계셨지. 난 어머니에게 입이라도 맞춰드리고, 또 ㅈ마시 이야기라도 나누지 않고서는 베길 수가 없었어. 투셔 녀석은 그 새를 못 참아서 또 벽시계 밑으로 숨어들었고. 강아지처럼 머리는 무릎에, 발꿈치는 궁둥이에 착 갖다 붙인 채 말이야. 슬슬 갈 때쯤 해서 난 일어나라고 녀석을 한방 걷어차 줬지.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프러시아 둔이 길모퉁이에 나타난 거야. 보아하니 바바리아놈들, 그러니까 프러시아 군들 중에서도 제일 악질이라는 그놈들인 것 같았어. 상사까지 합치면 열 다섯 명이었지. 상사라고 했지만 실은 장교였는지도 몰라. 그놈들한테는 소매에도 모자에도 계급이 표시되어 있지 않으니까. 사소한 거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게 바로 놈들이 야만인이라는 증거 아니겠어? 놈들은 한눈에 집을 내려다볼 수 있을 만한 위쪽에 있었어. 헛간으로 튈 방법이라곤 전혀 없었지. 뒤쪽 창문으로 도망치는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 혼자였다면 어떻게든 시도해볼 수도 있었을 거야. 투셔 녀석일랑은 아예 생각조차 말아야 했지. 내 옷자락에 매달려서턱을 덜덜 떨고 있엇거든. 어머니는 침착성을 잃지 않고 우리를 침실 안으로 밀어 넣은 다음, 침대 밑에 숨겨주셨지. 투셔는 살았구나 하고 납작하게 엎드려서는 죽은 듯 꼼짝도 아노고 있었고, 난 태연했어. 놈들이 침실 안을 왜 뒤져보겠니? 그냥 그러고 있다가 어둠이 깔릴 때쯤 해서 유유히 도망쳐 나오면 되는 거지. 어머니는 침실 문을 열어두신 채 부엌으로 가 계셨지. 어머니의 말소리가 들려왔어. ”오노레야, 프러시아 군 대장이 말로레 씨랑 이야기를 나누는 구나.”그때까지만 해도 정말이지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군인들이 간다.. 어머니가 말씀하셨지. 그러더니 뚝……. 아무 말소리도 안 들리는 거야! 어머니가 문을 닫으셨던 게지. 그런 다음에는 저벅저벅 부엌 바닥을 치는 군화 소리……. 아 아 젠장, 그때 만일 그놈을 족쳐 놓을 수만 있었더라면! 프러시아 상사가 말하더군. ‘ 집에 민병대원을 숨기고 있지?’ 그 망할 놈이 우리말을 하는 꼴하고는! 어머니는 아니라며, 민병대원이라곤 구경도 못했다고 우겼지만 상사 녀석은 틀림없다는 거야. 이윽고 소란이 가라앉는가 싶더니,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ㅏ 않았어. 그러자 녀석이 부하들에게 뭐라고 쌀라쌀라하더군. 필시 헛간이나 다락을 뒤져보라고 시켰던 거겠지“ 페르디낭은 더 듣고 있기가 무서워졌다. 때문에 서둘러 이야기를 끝맺으려고 말을 잘랐다. “어쨌든 결국에는 살아남았잖아, 중요한 건 그거 아냐?” “웃기는 소리. 죽었으면 죽었지 난 침대 밑에서 납작하게 엎드린 꼴로 발각되긴 싫었어. 그런데 내가 미처 침대 밑에서 빠져나오기도 전에 문이 덜컥 열리는 거야. 어머니의 치마 아랫단이 보이고……. 그리고 그 뒤에는 뭐가 보였겠니? 바로 상사 녀석의 군화였어. 처음에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랐지 그런데 갑자기 치마가 획 올라가는 거야!” “허엉…….” 페르디낭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머리 위로 두 사람이 털썩 쓰러져 눕는 소리가 들려왔어. 움직일 수가 없었지. 이때만큼은 내 목숨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어. 총 한 방으로 모든 걸 끝내자면 당장이라도 있었겠지만……. 그렇지만, 차마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을 두 사람 앞에 나설 엄두는 나지 않았어, 참나…….” 페르디낭은 모자 밑으로 베어 나오는 식은땀을 훔쳐냈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들어버렸군. 말을 하지 말지…….” 페르디낭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클라크뷔에 소문이 나지 않았던 것도 무리가 아니지. 아버지는 당신이 아시는 대로만 네게 말씀하셨던 게야 나머진 나밖에 몰라. 투셔가 그 이래 뒤에 죽어버려서 어찌나 마음이 놓이던지……. 전쟁이 끝났을 때 만일 내가 맘만 먹었더라면 제프 자식을 숲 속으로 끌고 가 대갈통에 총알을 한 방 쑤셔 박아줄 수도 있었을 거야. 쥐도 생도 모르게……. 하지만 어머니가 살아계시는 동안만큼은 ㄷ그 일에 대해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았어. 게다가 아무리 제프가 쓰레기 같은 자식이라곤 해도 사람을 죽이는 건 내 생리에 맞지 않아.” “제프가 깨끗한 놈이 아니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 페르디낭이 중얼거렸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발티에 씨와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의원나리는 제프의 출마에 몹시 집착하는 것 같았다. 마그레트 말로레에게 정신없이 빠져 있는 그를 조종하자면 그의 변덕을 들어주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페르디낭은 발티에 씨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이득이 많았다. 게다가 자신의 야심은 몽땅 제쳐둔다손 치더라도 맏아들인 프레데릭의 장래를 생각해볼 때 아들의 화려한 출발을 위해서는 그의 지지가 꼭 필요한 터였다.
오노레가 싸늘하게 말을 잘랐다. “그만 하면 할 말을 다 한 것 같은데. 제프는 절대로 클라크뷔의 면장이 될 수 없을게다. 내가 버티고 있는 한은!”
자신의 무력함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난 페르디낭은 오노레를 굴복시킬 만한 중대한 반론을 찾기 시작했다. 페르디낭의 눈동자가 집 쪽을 향했다. 집은 자신의 소유이니 내일이라도 당장 오노레를 쫓아내자면 쫓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 망아지의 말
[4]
아델라이드는 여태껏 그렇게 화를 내는 시동생을 본 일이 없었다. 페르디낭은 집으로 들어오지도 않고 인사만 하고는, 곧바로 말을 몰아 떠나버렸던 것이다.
이 말과 동시에 줄리엣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더니 오노레 옆에 앉았다. “뛰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자정에 들어왔겠구나.” 아델라이드가 나무랐다.
애인이 셋이면 나중에 시집갈 걱정은 없겠구나. 그래, 그 불한당들은 어떤 놈들이냐? “ 오노레가 물었다. 줄리엣은 세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레옹듀로, 밥티스트 류뇽, 그리고 노엘 말로레. 이 마지막 이름에 오노레가 눈살을 찌푸리며 츳츳츳, 하고 혀를 찼다.
페르디낭이 다녀간 이후 오노레는 말로레의 출마에 따르게 될 온갖 문제점들을 생각해보았다.
[5]
사랑하는 형
~~~토요일에는 피차 감정이 좀 상한 채로 헤어졌던 것 같아. 난 형이 좀더 미리 말해주었더라면 좋았었을 뻔 한 그 이야기에 대해 오래도록 생각해봤어.
~~~난 가족보다도, 심지어는 나의 정치적 신념보다도 우선은 조국이라고 말하고 싶어.
~~이제 남은 건 어머니가 당하셨던 그 불행했던 사건과, 그 표면적인 원인이 Z의 고자질이었다는 거겠지. 내가 왜 표면적이라고 하는지는 당시에 어머니가 그런 봉변을 당하셨을 때의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길모퉁이를 돌아 나오던 바바리아 상사가 외지고 인 적없는 집에 여자 혼자 있는 것을 보자 따분한 직무 수행의 와중에 약간의 오락거리가 생겼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보는 편이 옳지 않을까?
~~~그리고 쉰을 넘긴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한창 나이 때에 있는 여자들과는 달리 그게 그렇게 심한 모욕은 아니었을 거야. ~~~~<형의 다정한 동생 페르디낭>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은 다음, 중절모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날 아침 우체부 테오다의 가방에는 15통의 편지와 3부의 인쇄물이 있었다.
테오다는 길을 꺾기도 전에 오른편으로 붙었다. 무슨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모퉁이를 돌자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토닥거리는 아이들이다. 테오다는 아이들을 전부 알아볼 수 있었다. 클라크뷔 마을 사람들을 모두 알아보는 것이 바로 그의 일이었으니까. 오두앙 가의 막둥이인 귀스타브와 클로틸드가 있었고, 메슬롱 가의 아이들이 셋, 탱탱 말로레, 나르시스 루뇽, 알린 듀르 그리고 그밖에 다른 아이들도 있었다.
싸움은 꽃나무 사이로 날아가 버린 새 한 마리가 화근이었다. 탱탱은 물론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새를 볼 겨를이 없었지만, 녀석은 그게 종달새였다고 아주 얄밉게 말한 모양이다.
귀스타브는 그것이 꾀꼬리라고 주장했고, 메슬롱 씨네 아이들도 모두 그의 편을 들었다. 탱탱 말로레는 하하하 웃으며, 눈에 콩깍지가 씌지 않고서야 종달새를 꾀꼬리로 볼 리가 없다고 반박했다. 쥬드는 탱탱이 우쭐대게끔 놔둘 수가 없었으므로 태연하게 말했다. “꾀꼬리를 종달새로 보다니, 과연 교회쟁이다운 생각이야.” 사태는 즉각 돌변했다. 류농, 듀르, 말로레, 버프, 루슬리에가의 아이들이 꾀꼬리에 반대하여 똘똘 뭉쳤다. 메슬롱 가의 아이들 셋과 오노레의 두 꼬맹이들도 지지 않고 버텼다.
“편지는 탱탱 말로레가 가지고 갔어요! 제가 뒤통수를 한 방 날렸을 때, 땅 바닥에 엎드려 있던 그 자식이 뭔가를 호주머니 속으로 주워 넣는 것을 봤거든요!”
줄리엣, 네 아버지에게 배달할 편지를 잃어버렸는데, 애들 말로는 탱탱 말로레가 가져갔을 거래. “ “탱탱의 아버지에게 가서 달라고 하시면 됐잖아요.”
테오다는 우선은 다행이라며 좋아했다. 제프가 문 앞에 서 있고. 그 옆에는 탱탱이 있었던 것이다. 테오다가 말했다. “자네 아나? 조금 전에 쌈질하던 개구쟁이 패들과 마주쳤지.” 제프가 엄한 얼굴로 아들을 돌아보았다.
“오노레가 뭐라고 하겠나? 중요한 편지인지도 모르는데. “ 제프의 종요한 눈에 순간 파란 불꽃이 일었다.
제프 말로레는 아들을 마구간으로 밀어 넣고는 끝이 네 갈레로 갈라진 채찍을 집어 아들의 종아리를 후려갈긴 다음, 온 집안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곤 하던 예의 그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오노레 오두앙의 편지를 어떻게 했는지 말해라. 안 그러면 여기 이 채찍 손잡이로 갈비뼈를 몽땅 분질러놓을 테다.”
■ 망아지의 말
페르디낭은 형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추태’에 시시때때로 얼굴을 붉혀야 했다. 아이들의 이야기와 아버지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들 모두의 태도에는 자유 방만함과 또 그야말로 ‘악마의 냄새’라고 할 수 있을 만한 온갖 죄악의 그림자가 짖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쩌면 아델라이드 하나를 제외하고는, 페르디낭의 눈에는 온 집안의 식구가 차마 말하기도 민망한 아찔한 죄악의 구렁텅이 주변에서 아슬아슬하게 노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오노레 형, 아무리 그래도 그럴 수가! “ 오노레는 처음에는 영문을 몰라 동생을 바라보기만 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고는 딸을 제쳐둔 채로 패르디낭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를 갈았다. “더러운 놈, 누가 똥파리 아니랄까봐 가는 데마다 성가시게 굴어! 꺼져!”
자신은 올바르고 도덕적이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잘 아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화낼 일에 화를 낸 것뿐인데, 오노레는 한 손을 죄로 물들인 채 단 한마디 말로 자신이 혹시 마귀한테 쓰인 것은 아닌가.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엘렌은 어쩌면 별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나쁘게 몰아붙이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좋은 말로 남편을 달래려고 했다. 패르디낭으로서는 그 이상 비위가 상하는 말도 없었다. “얼씨구, 편을 들어? 그럼 절 조몰락거리는데도 헤헤거리던 줄리엣 년도 편들어 보시지?” “그런 게 아니라, 넓게 이해하자면…….” “내 말이 바로 그 말이야. 참. 이해하는 방법도 가지가지로구먼!” 페르디낭은 씁쓸하게 내뱉었다.
수차례에 걸쳐 페르디낭은 그가 보통 ‘무신경’이라 부르곤 하던 오노레의 갖가지 ‘작태’들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노레의 거듭되는 반박에 열렬했던 도덕심이 오히려 자신의 발등을 찍고 말자 그의 윤리관도 마침내는 혼란에 빠지게 되어, 어는 날인가는 그 형의 죄라는 것도 혹시 자신이 만들어낸 상상 속의 산물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페르디낭은 몇 번씩이나 여행을 핑계로 먼 고장을 다녀오기도 했다. 내놓은 난봉꾼들이 자신들의 문란함을 숨기기 위해 밤기차에 올라 어는 몹쓸 고장을 향해 달리듯, 페르디낭 역시 자신만의 고해실을 찾아 백여 킬로미터를 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여행도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으며, 페르디낭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던 신부는 그의 고민을 근거 없다고 탓하기만 할 뿐이었다.
형체도 그림자도 없는 자신의 죄는 자신의 음란한 망상이 빚어낸 허깨비였을 뿐이다. 아침 미사를 마친 후에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느라고 시내를 서성이게 될 때면, 페르디낭은 싸구려 호텔을 나서는 남녀나 악덕 포주, 오입쟁이 혹은 창녀라고 생각되는 모든 인파들을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곤 했다. 저들의 죄는 신부의 회개의 그물대가 뚝 꺾여 버릴 만큼 무거울 것이다.
겨울이면 페르디낭의 가족들은 클라크뷔로 가는 일이 드물었고, 일요일은 보통 집 안에서 보내곤 했다. 나는 일요일 오후의 따분한 집안을 지켜볼 수 있었다. 엘렌과 루시엔느는 바느질을 하고 있고, 앙트완과 프레데릭은 바로 옆에서 감시하는 페르디낭 때문에 자습을 하면서도(혹시 하는척하면서도)공부방에 감도는 공포 분위기에 연방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페르디낭은 매상 장부와 진료일지를 무릎에 펼쳐놓은 채 이따금씩 사내아들 쪽으로 불안하고도 살벌한 눈초리를 보냈다. 틀림없이 자신의 신성한 노동에 몰입해 있는 동안 엘렌과 아이들이 부끄러운 부분에 손을 대거나 야한 그림 따위를 돌려보고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가는 열쇠 구멍이나 피아노 위의 양초에서 연상되는 이미지에 거북해져서는 다시 고개를 숙이는 것이었다. 모르긴 해도 이 다섯 사람 가운데 가장 불행했던 사람은 아마도 페르디낭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떠한 고통도 그가 내 쪽을 쳐다보았을 때 느끼던 나의 고통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나는 뮤드와르 군의 붓이 나의 초록빛 가죽 아래 틔어낸 이 부동과 혼란의 삶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40년이 지난 오늘, 이 모든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6]
루시앤느의 고민은 이윽고 현실적인 문제로 바뀌었고, 소녀는 자신의 반성노트를 미처 다 채워놓지 못했다는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월요일 저녁까지 반성노트에 적어 넣을 만한, 최소한 너덧 개의 죄를 찾아내야 했다. 아니면 누가 감히 한 주일에 네 개 이하의 죄를 지었다고 큰소리칠 수 있단 말인가? 에르멜린 자매들 중 1학년 신앙 반을 담당하고 있는 베르드랑드 양은 학생들이 죄 같지도 않은 어설픈 죄를 적어 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급한 김에 루시앤느는 이 양말 사건으로 양다리를 걸치기로 했다. 우선은 평일에 고급 양말을 신은 죄부터 고백할 것이다. 그런 다음으로 신으라고 한 엄마의 말씀을 거역할까 하고 망설인 죄다.
어느날 오후 갈레 중위는 혼자서 집을 보고 있는 엘렌을 발견하게 되었다. 엘렌은 피아노를 치고 중위는 악보를 넘기고…….
이날 이후 둘의 백설 같은 사랑은 둘만의 비밀로 붙여져 오고 있었다.
기차는 기마대 중위와 자스민의 눈을 나란히 한 채 발뷔송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페르디낭에게 갚아야 할 돈이 있는 매날은 광장에 마차를 매어놓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매날은 정중했으나, 죽어도 돈을 안 갚기로 단단히 작심한 덩치 큰 사내였다.
[7]
페르디낭의 가족들이 클라크뷔를 방문할 때면 오노레의 가족들은 꼭두새벽부터 부산을 떨었다.
8시 반에는 알렉시가 호두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붉은 언덕’에 마차가 나타나는지 살폈다.
그러다가 마차가 마당을 돌아 들어오면, 온 식구가 집밖으로 뛰쳐나가 씨익 웃으며 일제히 “왔구나!”를 합창하는 것이었다.
“자, 그럼 소들을 보러 갈까?” 외양간으로 들어가자, 그제서야 비로소 만남의 흥분 가운데 잊고 있었던 둘 사이의 껄끄러운 감정이 되살아났다. 페르디낭은 소의 맥을 짚어보며 심각하게 말했다. “여기 이놈은 마른풀을 너무 먹나 보군.” “그럴지도, 어쨌든 하루에 12리터씩은 꼭꼭 나오니까” 오노레는 보통 이렇게 암소 뒤편에 멀찌감치 서서 페르디낭의 의견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서 있었다. 페르디낭은 그러거나 말거나 검진을 계속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이 무료진료가 이래봬도 100수우짜리이고, 이것 하나로도 자기 식구들이 먹는 밥값은 충분하며, 그래서 생 마즐롱에서 가져온 고기와 소시지는 덤으로 주는 선물이라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둘이 외양간으로 들어섰을 때, 페르디낭이 겁먹은 눈초리로 형을 바라보았다. “내 편지 못 받았어?” “아니? 들으면 웃을 게다. 데오다가 잃어버렸대. 학교에서 돌아오던 개구쟁이들이랑 한바탕하다가 편지를 가방에서 흘렸대나…….”
페르디낭은 양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괴로운 신음 소리를 냈다. 오노레의 머릿속으로 언뜻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데오다의 의심이 처음에 탱탱 말로레에게로 향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정치 얘길 했어, 하지만 그거야 별 거 아냐. 문제는 ……. 어머니 얘기야…….” “그래도 너 설마…….” “웬걸, 바로 그 얘기야. 사건의 출발ㅈ머에서부터……. 그 왜 바바리아 상사가 나타났을 때의……. 그러니까 죄다 써놨어…….” 오노레는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저 모자라는 수의사 등신 새끼만한 멍텅구리는 본 일이 없다고 악을 써댔다. 자알 한다. 그래, 제 어미가 프러시아 군한테 날치기 당했다는 소리를 온 동네방네에다 대고 나발을 불려고 그 잘난 공부를 했구나. 나만큼만 참을 줄 알았더라면, 저나 제 자식 놈들의 인생을 망쳐버릴 그따위 편지를 쓰자고 덤벼들지는 않았을 텐데.
오노레는 분노로 부들부들 떨어가며 두 암소 사이에 놓인 여물통에 몸을 기댔다. 이윽고 흥분이 가라앉았다. 편지가 제프의 손에 있다는 것도, 그가 그것을 이용해먹으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생각 끝에 최악을 가정한 오노레는 체프가 시침을 뚝 떼고 있을 리 없다는 매우 냉정한 결론을 내렸다. 틀림없이 온 마을에는 자신의 어머니가 바바리아 군인과 짝짝 꿍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고, 또 상황이야 어떻든 사람들은 사건 잧에만 연연해할 것이다.
오노레는 평소에도 페르디낭을 거침없이 면박하곤 했으나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그의 무료 진료를 이렇게 대놓고 혹평했던 적은 없었다. 페르디낭은 순간 자신들의 관계가 뭔가 달라졌다고 느꼈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아래의 소작농쯤으로 여기고 있던 형이 어느덧 집안의 우두머리이자 오두앙 가의 주인이 되어 있었고, 페르디낭 자신은 이런 현재의 상황에서 그에게 즐겁게 복종하고 있었다.
■ 망아지의 말
클라크뷔에는 마을 신부가 인가하지 않는 몇몇 방식을 포함하여 14가지의 사랑을 나누는 방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14가지 방식 중 그 절반만큼이라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았을 것이다. 살림 비결과 요리 비법 등은 아낙네들의 수다와 친구 사이의 속내 이야기와 혼인 이야기 등에 딸려 이집 저집으로 건너다니고 있었다.
개인적인 취향 혹은 여인네들의 부끄러움, 남자들의 권위의식으로 인해 이러저러한 한두 개의 방식만이 선호되었으며, 나머지, ‘신식’ 취미니, 또는 몇 백 년 전부터 내려오던 가풍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망각의 구렁텅이 속으로 갖다버렸기 때문이다.
마치 찐 달걀만 먹어야 하는 환자가 건강하던 시절에 먹었던 순대와 소시지를 그리워하듯 후회막급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그럭저럭 적응해 나갔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민망하네만 오노레, 자네 아들은 말 도 못할 악동이라네. “ 오노레는 고개를 으쓱 하고는 경관의 말을 마저 들었다.
“잘 했네. 자네에게 참 수고를 끼치는구먼. 하지만 안심하게 돌아오면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 구멍을 내줄 테니.”
오노레는 어두운 풀밭 한 귀퉁이에서 혼자 울고 있거나, 또 어쩌면 강가를 헤매고 있을지도 모를 아들의 모습을 상상했다.
마침내 축축한 풀밭에서 마치 외양간에서처럼 줄지어 앉아 있는 소들이 눈에 띄었다. 알렉시는 그중의 한 놈에게 등을 기댄 채 몸을 녹이고 있다가, 아버지의 형체가 다가오는 것을 보자 안도함과 동시에 겁을 집어먹게 되었다. 오노레는 아들을 품에 안고는, 뜀박질과 불안감으로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는 가슴 쪽으로 꽉 끌어당겼다. “날 무서워해서는 안 된단다, 아가야.” 오노레가 말했다. 그리고 부끄러움 때문에 여전히 쭈뼛쭈뼛해 있는 알렉시에게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짓은 다시는 하지 마라. 그럼 돼.” 둘은 소들의 걸음에 맞춰 손을 잡고 나란히 집으로 향했다. 소들은 그날 밤 벌어진 일에 약간은 어리둥절한 모습들이었으나, 주인아저씨가 곁에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주위는 캄캄한 어둠 속이었고. 안개에 젖은 풀잎들은 어찌나 보드랍던지 둘은 서로의 모습을 보기는커녕, 발자국 소리조차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이었고, 손에 손을 잡은 채 서로가 서로를 걱정한 사실에 기뻐하고 있었다. 알렉시는 아버지의 큼지막하고 따뜻한 손이 흔히들 끔찍한 일을 떠올리곤 할 때처럼 간간이 자신의 손을 힘주어 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믿으셔도 좋아요.” “알고 있단다.” 아버지가 말했다. 오노레는 이제 막 아들을 찾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래서 다른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알렉시는 약속을 지켰다.
신부는 별의별 죄악을 다 들었던지라 어지간해서는 놀라는 법이 없었다.
[8]
테오다는 평소와 같은 파란 눈을 한 채 씩씩한 우체부의 걸음걸이로 걷고 있었다.
두 발을 곱게 앞으로 모으고 상여를 탄체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는 잊어버렸다. 아내는 죽었다. 아내는 죽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벌어지는 일이었고, 세상살이에 그보다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벽에 머리를 찧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어쨌거나 자신은 우체부복을 입은 우체부로서 이 세상에 남았다. 그리고 차분한 우체부답게, 차분히, 무사태평한 걸음걸이로 주어진 일을 하며 죽음이 자기 집 문턱을 넘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이렇게 느긋하게 차례를 기다리며 팔팔하게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도로를 벗어나자 테오다는 제프 말로레씨네로 가는 사과나무길 로 접어들었다.
자기 집 남자들과 함께 있지 않을 때 아나이스는 우체부에게 웃어주었고, 케오다는 그녀의 금발과 건장한 체구, 사십대의 원숙한 아름다움이 보기 좋았다. 테오다는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테오다는 흐뭇하게 웃으며 제프의 집을 나왔다.
발걸음을 돌려 다시 큰 길로 나와서는 일요일의 습관대로 집에 돌아가기 전에 오노레 오두앙의 집을 잠시 들른 것이다. 외양간에서말다툼 이후, 가족들도 얼마간 낌새를 맡게 되었던 만큼 어쩌면 점심 식사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한 가운데 진행되었으리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이 이렇게나 떠들썩하고 이렇게나 히히 깔깔대던 적은 또 없었다. 오노레 삼촌은 혼자서 아이들을 몽땅 합친 것만큼이나 요란을 떨어대고 있었다. 그는 포도주를 한 번에 들이켜 가며 크게 떠벌였고, 으하하하 웃어젖히며 모두를 웃기고 있었다. 식탁은 오노레 삼촌의 독무대였고, 페르디낭 삼촌은 빈자리가 하나 남아돌 때 초대되는 먼 친척 같은 모습이었다.
[9]
■ 망아지의 말
[10]
[11]
“휴가 나왔네. “ 세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둘은 오노레가 보조를 맞춰 주지 않았기 때문에 거의 무안할 지경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에른스트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머블 장군의 부인이 어제 아침에 돌아가셨대요.
“자, 여기서 헤어지세. 난 배달해야 할 편지가 한두 통이 아니네. “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게 되자 에른스트는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제프의 딸이 큰 거리에서 50미터쯤 떨어진 오솔길을 지나고 있었다. 마그레트는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툭 튀어나온 옆 가슴 선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있었다. 오노레가 물었다. “산보하니?” 마그레트가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 가는 길이에요. 아저씨도 에른스트랑?”
“이것 줄게. “ 클로틸드가 편지 한 통을 내밀며 말했다. 줄리엣은 편지의 글씨가 자기 삼촌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그것이 도난당한 편지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겉봉이 열린 채였다. 줄리엣은 편지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줄리엣은 편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둔 채 잠시 망설였다. 그런 다음, 얼굴을 약간 붉히며 클로틸드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시계 밑에 도로 넣어둬. 그리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부엌을 나올 때 클로틸드가 제 언니의 팔꿈치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런 거지? 할머니가 프러시아 군이랑?”
■ 망아지의 말
페르디낭은 자기 아이들이 클라크뷔의 제 사촌들은 물론, 오노레 삼촌과 어울리는 것까지도 꺼리고 있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직접 그 남부럽고도 한심한 광경을 목격한 바 있지 않았던가. 시골 아이들의 대담무쌍한 애정표현과 장난질에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가족들을 데리고 형의 집으로 가는 일요일이면 페르디낭은 자기 식구들의 귀를 틀어막고, 오노레의 입을 대바늘로 꿰매놓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는 앙트완의 귀에 저질스런 농담을 주워 넣는 알렉시를, 프레데릭의 동정을 강탈하는 줄리엣을 혹은 루시엔느에게 예의 그 지저분한 쇼를 보여주는 밑의 두 꼬맹이들을 상상했다. 지아비를 기다리는 아낙처럼 나른한 이 시골에는 반듯하게 자라온 아이들을 위협하는 무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었다. 벌판 한쪽에는 먼 지평선을 따라 커다란 숲이 자리 잡고 있었다. 끝없이 울창한 숲은 음산한 습기를 품고 있었고, 그 속에서 자란 끈적끈적한 욕정에의 몽상은 산들바람을 타고 벌판에까지 수군수군 전해져오고 있었다. 이 무슨 추잡한…….
바로 이런 곳에 일주일 내내 조용한 공부방에서 나쁜 생각이란 나쁜 생각은 모조리 정화시켜, 정직하고 단정해진 자신의 아이들을 일요일마다 데려오는 것이다. 그가 얘들에게 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이다. 자신이 그들을 이 불결한 놀이터에 하루 종일 내팽개쳐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 페르디낭의 불안은 괜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의 아이들은 클라크뷔에서 못된 짓거리를 배우고 있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그의 기준에는 좀 대담해 보일 수도 있는 몇 가지 말버릇만을 익혔을 뿐이다. 클라크뷔의 다른 모든 집들처럼 오노레의 집에서도 일요일이란 휴식 일이자 일상으로부터의 작은 일탈이었다. 밭과 초원도 이 날 하루만큼은 나날의 평 이한 일상을 깨고 일주일간의 노동과 소 부리는 소리와 힘쓰는 소리, 쟁기와 달구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밭에서 쟁기를 끌다가도 고개 들어 먼 곳을 바라보면 흩어져 일하는 이웃들이 보였고 오노레는 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면 땅과 자신을 이어주는 노동에 안정감이 느껴지곤 했다. 반면, 일요일에는 모든 일이 다르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바깥이 아닌 집 안에서 들판을 내다보았으며, 거기에는 텅 빈 밭과 초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주의 날”이란 땅주인들의 날이었고, 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기가 죽어 있었다. 이 날은 또한 한 주일의 지출을 계산해보고 약간은 질려 지내는 날이었다. 그런가하면, 애인에게도 친구에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절약과 은둔의 날이기도 했다. 여기에다가 사랑을 나누기에도, 말하기에도 신경이 쓰이는 ‘주일용 복장’까지 있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떵 빈 벌판을 바라보며 깊은 시름에 잠겨 있었다.
착실한 신도들은 교회 옆에 위치한 묘지를 한 바퀴 돌아보면서 언제나 자신들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고인들에 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다가 미사드릴 시간이 되면, 일주일간의 죄업에 십자가를 꽂기 위해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연단에 선 신부는 세태의 불안정함과 또 자신의 새끼 양들이 악마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장난을 치다가 겪게 될 수도 있는 위험을 알리는 데 열을 올렸다. ‘섣부른 호기심과 육욕은 노동과 부의 적이다’ 신부는 클라크뷔에서 일어난 일을 이름까지 들먹여가며 설명했다. 결혼식을 마친 주르니에 부부는 신으로부터 받아낸 ‘허락’을 맘껏 활용해보겠다는 피로연에서 땅땅 큰 소리를 치더니, 어찌나 가난해졌는지 이제는 미사에 얼굴조차 내밀지 못하고 있다.
여분으로 취한 즐거움은 지상에서든 하늘에서든(특히 지상에서) 톡톡히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알찬 노동으로 하루를 보내고 거기에다 야무진 기도를 보탠 후 즉각 골아 떨어 질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재산을 늘릴 방도요, 천국으로 가는 가능성까지 높일 수 있는 길이다.
신부의 말에 신도들은 자신들의 땅과 또 그 땅이 밤 생활 때문에 허물어져가는 꼴을 상상하면서 잠자리의 재미와 농사의 길흉과 신의 노여움 사이의 무시무시한 대차대조표를 작성해보곤 했다. 두려움과 아쉬움이 이들의 신앙심에 씁쓸한 회한을 더해주었다.
교회를 나와 너나없이 뿔뿔이 흩어져 걸어가던 사람들은 주일날의 버거운 복장위로 한 주일의 피로가 내리누르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텅 빈 논밭의 풍경 앞에서 몸과 마음까지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오노레는 신도 악마도 믿지 않는다고 자랑하며 클라크뷔의 신부를 고약한 사람이라 욕하기도 했지만, 그러면서도 잠자리에서는 그에게 죄의식을 느꼈고, 속으로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는 것을 은근히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신부가 자기 몰래 하나님과 상의해서 이날 하루만큼은 자신의 아랫도리를 맡아둔 듯 한 느낌이었다. 일요일 아침, 모두가 교회로 떠나고 집에 홀로 남게 되면 오노레는 이따금씩 감자나 과일로 좀 민망한 형상들을 조각하는 것으로 육욕을 달래곤 했다.
그의 불안감은 지면에 쉽사리 옮길 수 있을 만큼 흔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논리적인 검토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막연한 감정이었다. 오노레는 이것을 종교적 죄의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심심풀이 장난으로 여기고 있었다.
페르디낭의 의심은 줄리엣과 프레데릭 사이에 오가는 알 듯 모를 듯 한 미소를 발견하면서부터 더욱 굳어지고 있었다.
줄리엣은 예쁘장한 얼굴의 사촌에게 입 맞추는 것이 기분 좋았다. 하지만 그 이상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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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델라이드는 확인도 할 겸 시계추와 받침대 사이로 걸레를 밀어 넣었다. 걸레를 끌어당겼을 때, 편지 한 통이 딸려 나왔다. 아델라이드는 처음에는 줄리엣이나 알렉시가 숨겨놓은 연애편지나,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즐거운 기대감에 가슴을 두근거려가며 나지막이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 망아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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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아지의 말
나는 진심으로 말한다. 여기 이 한 마리의 초록 망아지가 참다운 사랑이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정직하고도 튼튼한 교훈을 한 권의 책 속에 담아 소설로 써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고…….
[Review]
“고물딱지가 되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마을은 천국에서의 일요일인 모양 따분하기만 했다.” -본문-
“사과처럼 새파래!”-본문-
작가의 글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반전이 있다. 독자를 잔뜩 긴장하게 해놓고 슬며시 발을 뺀다. 웃음을 참으며 책을 읽다가 결국에는 빵 터지게도 한다. 특히 인물을 묘사하는 탁월함은 어느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심리학적 통찰력이 있다. 마음대로 사물을 설정하는 자유분방함, 도대체 망아지가 태어났는데 온 몸이 초록색이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이야긴가?
그렇지만 타고난 말쟁이 예메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꺼내놓고 교묘하게 독자의 의심을 피해가며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찰스 디킨스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인간 내면에 숨어 있는 감성을 모두 끄집어내어 발가벗기는 재주 때문에 독자는 그의 그런 표현에 감히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만든다. 조용하고 병약했다는 예메로부터 어떻게 이런 표현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그러고 나서 그의 초상을 보니 옆모습에 희극배우와 같은 익살스런 표정이 드러나 있다.
그의 소설은 평면거울과 같다. 의도적으로 어떤 목적에 도달하려고 복잡하게 꾸미기 보다는 눈앞에 일어나는 상황을 보이는 그대로 전개시킨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쉽고 자유롭다. 그래서 소설 속에는 수많은 반전이 있으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하려는 독자에게는 때로는 싱겁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러한 단순함과 풍자적 해학이 일반 서민들에게는 인기가 있지 않았나싶다.
<초록 망아지>는 그가 발표한 백여 편에 가까운 소설 중 몇 안 되는 장편 중 하나다. 어느 날 갑자기 오두앙씨 가정에 초록색 망아지가 태어나고 그 소문이 온 나라에 퍼져 황제까지 호기심에 그 집을 찾아왔다. 이유야 어쨌든 오두앙씨는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고 면장의 자리에 오른다. 착실하게 돈도 모았다. 누구나 꿈꾸는 인생 반전의 드라마 같은 행운이 찾아온 것이다.
초록 망아지는 3년을 살았고, 사람들도 또 오두앙씨에게 '이제는 그만'하는 시기에 죽고, 어느 유명화가가 그려준 초록 망아지의 초상만 남았다. 그에게는 아들 셋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행운은 아들들에게 좀 더 나은 인생의 길을 개척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큰 아들은 군에서 입은 부상으로 절름발이가 되었고, 둘째는 아버지가 반대하는 가난한집 여자를 아내로 맞아 실망을 안겨주었다. 오직 순종적인 막내아들 하나만 착실히 공부하여 아버지가 원하는 수의사의 꿈을 이루었다. 아버지의 유산은 삼형제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 되었지만 위로 두 형은 유산을 지키지 못하였고, 막내만 제대로 아버지의 뜻을 이루었으며, 초록색 망아지 초상화도 그에게 주어졌다. 운명이지만 비정상적인 승계로 인한 형제간의 갈등을 소설 속에서 표현했다.
아버지는 보불전쟁 시기에 면장이라는 직분으로 큰 고초를 당했으며, 그의 아내는 프러시아 군 장교에게 능욕 당했다. 어머니가 숨겨준 침실 침대 아래서 이 모습을 지켜본 둘째 아들 오노레는 이 사실을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한 채 어머니의 명예를 지켰으나 그 상처는 자식들에게 대물림 되었고,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프러시아 장교에게 고자질한 제프 말로는 훗날 오노레가 그 아내를 똑같은 방법으로 능욕하는 유치한 복수를 함으로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이 조금은 외설스런 장면묘사로 또 다른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예메는 그런 성적 묘사와 인간의 이중성을 표현함에 있어서 벽에 걸린 초록색 망아지 초상화의 눈을 통해보게 함으로서 현실표현에서 오는 감정을 희석 시킨다. 가끔은 정치적인 배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시키지만 이 소설 속에서 등장인물들이 가진 정치적 소견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다. 예메는 이 소설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일어난 사랑의 이야기라고 했지만 오늘의 독자가 보기에는 메시지보다는 보불 전쟁 시대적 배경과 조금은 특이한 가정의 3대에 걸친 일상사를 그린 작품, 가십과도 같은 느낌이 든다.
나는 진심으로 말한다. 여기 이 한 마리의 초록 망아지가 참다운 사랑이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정직하고도 튼튼한 교훈을 한 권의 책 속에 담아 소설로 써낼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고…….―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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