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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3회 집회서 20장-30장
집회 20,1-8 침묵과 말
필요하고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의식적으로 해야 하는, 벗을 위한 충고라는 주제가 다시 등장한다(19,13-17참조).
“1 때에 맞지 않는 꾸지람이 있고 침묵을 지키면서도 현명한 이가 있다. 2 성을 내는 것보다 꾸짖는 것이 얼마나 더 나은가? 3 자기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는 이는 수치를 면하리라. 4 폭력으로 정의를 실천하려는 자는 욕정에 사로잡힌 내시가 처녀를 범하려는 것과 같다. 5 침묵을 지키면서 지혜로워 보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이 너무 많아 미움을 받는 자도 있다. 6 대답할 줄 몰라서 침묵을 지키는 자가 있는가 하면 말할 때를 알고 있어서 침묵을 지키는 이도 있다.”(20,1-6). 벤 시라는 침묵과 말에 대한 조화로움을 잘 가리켜 준다. “침묵해야 할 때”를 아는 것이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다.
집회 20,24-26 거짓말
“24 거짓말은 인간에게 오점을 남긴다. 무식한 자들이 그것을 끝없이 지껄인다.
25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보다는 도둑이 낫지만 둘 다 멸망을 상속받는다.
26 거짓말쟁이의 습성은 불명예로 이어지고 수치가 늘 그와 함께 있다.”(20,24-26) 거짓말은 백해무익하다. 선의의 거짓말도 있지만 이 역시 어떤 때는 큰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경우가 있다. 거짓말은 습관이 될 위험이 있다. 거짓말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을 우리는 주변에서 보게 된다. 습관적 거짓말은 삶의 질을 평가 절하시킨다.
집회 22,27-23,1 혀를 다스리기
잠언서에는 아구르의 기도(잠언 30,7-9)가 있다. 지금 읽게 될 벤 시라의 기도도 같은 종류에 속한다. 전형적인 지혜문학의 성격을 지녀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암시하지 않으며 보편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아구르의 기도와 같이, 많은 시편 저자처럼 어떤 불행을 당해서가 아니라 다만 높은 데에서 오는 도움만이 자신의 혀와 성적 본능을 다스릴 수 있게 해 주리라는 것을 깨달아 자신을 위해 하느님께 탄원하는 신앙인의 기도이다. 이들을 다스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고 품위 있게 사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현인들이 바랐던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벤 시라의 기도는 독특하고 주목할 만한 또 한 가지 특징을 보여 준다. 그것은 이 기도가 범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한, 그리고 자신의 혀나 격정을 지배하지 못하여 겪게 되는 위험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준비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 기도를 읽어 보자. 이것은 이중 기도이다. 기도의 첫 부분 본문은 다음과 같다.
“27 누가 제 입에 파수꾼을 두고 제 입술에 단단한 봉인을 쳐 입술로 말미암아 제가 실수하고 제 혀가 저를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까? 23,1 제 생명의 주인이신 아버지 주님 그들 때문에 제가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해 주소서”(22,27-23,1).
처음의 두 대구에서 질문이 던져진다. 대답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명백하다. 나는 아니다! 혼자서는 나의 말을 다스릴 수 없다. 하느님만이 나를 도우실 수 있다. 그래서 마지막 절에서 하느님께 호소하는 것이다. 23,1에서 우리는 주님을 향해 ‘아버지’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구약성경에서 ‘아버지’라는 칭호가 하느님께 적용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이 부성(父性)은 주님의 맏아들인 이스라엘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니며(탈출4,22; 예레 31,9; 로마 9,4), 창조주이며 구원자인 하느님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메시야 임금에게도 적용된다. 그러나 부성은 가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거나(시편103,13; 말라 1,6) 불행한 이들과 관련하여 극히 적게 나타나기도 한다(시편 68,6).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내 아버지”라 부른 것은 고대 팔레스티나 유다교 전통 안에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개인으로서 주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자신의 고유한 아버지로 본 것은 벤 시라가 처음일 수 있다. 이 아버지는 생명의 원천이시며(잠언 36,10 참조) 주인이시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다교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발전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러나 오직 예수님만이 아버지를 아람어로 당신의 “Abba”, 즉 아빠라고 부르심으로써(마르 14,36) 아들로서 아버지와 유일한 관계에 계신다.
집회 23,4-6 자신의 성을 지배하기
“4 제 생명의 하느님이신 아버지 주님 그들의 음모에 저를 넘기지 마소서. 저에게 오만한 눈길을 허락하지 마시고 5 제게서 욕망을 멀리하여 주소서. 6 식욕과 색욕이 저를 지배하지 말게 하시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욕정에 저를 넘기지 마소서”(23,2-6).
이성과 의지가 육체를 통제해야 하지만, 육의 유혹이 강해서 그 통제를 잃을 수도 있다. 현인은 이 점에서 자신의 약함을 인정한다. 제자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가 없다면, 지혜가 채찍처럼 요구하는 교훈을 누가 실천할 수 있는가? 그래서 하느님의 도움을 청해야 한다.
그분의 도움 없이는 생각과 마음을 – 여기에서 지향과 계획이 나온다 – 지혜가 가르치는 자제력에 종속시키기가 어렵다. 교육은 그런 빗나감이나 일시적인 잘못을 제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렇지 않으면 제어장치는 작동하지 않는다. 더 이상 망설임 없이, 수치심 없이 잘못을 범하게 된다. 이렇게 타락한 사람은 결국 드러나게 되고 자신의 영예를 잃어버리고 만다.
이어서 벤 시라는 고유한 의미의 가르침인 간음하는 남자(23,16-21)와 여자(23,22-26)에 대한 가르침에서 이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후대의 사람들은 주님을 경외함보다 좋은 일이 없으며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 감미로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23,27).
집회 24,1-34 지혜의 찬미
집회서의 한가운데에 자리한 이 단락은 집회서에서 가장 유명한 단락이다. 24장은 지혜에 관한 교의와 함께, 창조와 구원 역사 안에서 지혜가 차지하는 역할을 종합하여 제시해 주는 집회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24장은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 신학 정립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요한 복음서 1장의 “말씀”에 대한 서술에 영감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집회서 저자는 시적인 표현으로써 지혜를 의인화한 하느님의 속성으로 인식하며, 이 속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율법 안에서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후기 유다교는 자연스럽게 율법의 선재 사상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24장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처음의 두 절(24,1-2)은 지혜를 소개하고, 지혜는 담론을 준비한다. 이어서 담론(24,3-22)이 나온다. 본문은 히브리어 알파벳 수와 같은 22행으로 되어 있는데(6,18-37; 17,24-18,14 참조) 이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담론이라는 표지다. 이어서 벤 시라가 다시 말을 받아 지혜가 말한 것을 해석하고(24,23-29), 자신도 수행 중인 현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설명한다(24,30-34).
스승의 저술을 손질하고 보충한 번역본에는(개관 참조) 몇 가지 첨가문이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8절에 들어 있는데, 아래에서 이 부분을 설명할 것이다. 마지막에는 이 담론의 그리스도교적 해석에 대해 언급할 것이다.
집회 24,1-2 지혜가 말할 장소
“1 지혜는 자신을 찬미하고 자신의 백성 한가운데에서 자랑하리라. 2 지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모임에서 입을 열고 자신의 군대 앞에서 자랑하리라”(1-2).
첫 두절이 제기하는 문제는, 지혜가 그의 담론을 말할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질문이다. 의견은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지혜가 천상의 무리 가운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은 2절만이 그런 의미로 이해된다고 본다. 또 다른 이들은 지혜가 지상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모임에서 말할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마지막 의견을 지지한다.
이를 지지하는 근거는 여러 가지다. 성경에서 지혜에게 한 담론을 귀속시키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잠언에서 지혜는 여러 길이 만나는 성읍의 성문에서 말을 했다(잠언 1,20-33; 8,1-36). 어떤 경우이든 지혜는 천상 조정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자 한다. 또 24,19의 명시적인 초대가 어떻게 천상 조정을 대상으로 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뿐 아니라 2절은 충분히 지극히 높으신 분의 엄위하심 앞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있는 회중을 가리킬 수 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라는 표현은 전능하신 주님을 가리키며 루카 1,35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분은 성전 안에, 당신 백성 가운데에 계신다.
집회 24,3-22 담론
첫 움직임은 공간에서 펼쳐지며, 지혜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입에서 나와 이스라엘에 자리를 잡도록 그 지혜를 만드신 분의 명령을 받을 때까지를 묘사한다(24,3-8). 지혜는 주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말씀과 비교된다(창세 1장). 아침에 땅을 덮어 풍요롭게 하는 이슬과도 비교된다(43,22 참조). 이사 55,10-11도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기름지게 하는 비와 비교한 바 있다. 그러나 이사야서에서 지혜는 하늘 높은 곳에 머물러 있었다. 구름 기둥이 지혜의 옥좌였다. 지혜는 우주 전체를, 하늘과 심연을 수직으로 돌아다니고 바다와 세상을 수평으로 돌아다녔다. 높은 곳에서 모든 민족을 다스렸고, 자리 잡을 곳을 찾았다. 그때에 주님께서 지혜에게 이스라엘을 자리로 정해 주셨다.
이와 같은 묘사는 유사한 다른 묘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욥 28장에서 지혜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반복되었다. 그 대답 중에, 심연과 바다는 아니라는 말이 있었다(욥 28,14). 잠언 8,27.30ㄱ에서는 주님께서 우주의 여러 부분을 정돈하시고 인간과 접촉하려 하셨을 때 지혜가 거기에 있었다고 설명했다(잠언 8,31). 집회 24,3-6에서는 지혜가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활동을 하고 또한 세상을 다스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24,4-8에서 사용된 표상들은 이집트 탈출을 암시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 담론 전체의 바탕에는 거룩한 역사가 깔려 있는 셈이 된다. 우리는 이집트에서 나와서 바다를 건널 때에 그름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기억한다(탈출 13,21-22; 14,19-24). 지혜 10,17-19의 저자에게, 거기에서 움직였던 것은 지혜였다. 시나이의 계시 이후에 구름은 십계명이 적힌 두 돌 판과 계약 궤가 있던 장막을 덮었다. 구름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했다(탈출 40,36-37; 민수 9,13-23; 10,33-34). 나중에 다윗은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 갔고, 거기에서 궤는 후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서 자신의 유산을(탈출 15,17 참조). 안식처를(1역대 6,16; 28,2; 시편 132,14) 찾았다. 성전을 봉헌하던 때에, 구름이 성전을 덮었다(1열왕 8,1-13). 이러한 과정 전체가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지만, 23절에서 벤 시라가 지헤의 담론을 해석할 때 모든 것이 더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다.
24,4-8에 대한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벤 시라가 하나의 본문 안에 창조와 거룩한 계시라는 두 차원을 융합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준다.
“한처음 세기가 시작하기 전에 그분께서 나를 창조하셨고 나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으리라”(9). 9절은 잠시 공간적 관점을 떠나 한처음부터 끝까지 시간 전체를 포괄한다. 이는 지혜가 그의 담론 첫 구절에서 말한 것을 시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지만, 여기에서 잠언 8,22의 영향이 나타난다. 이어서 지혜의 영원성을 말하는데, 다음 단락에서 그 단계들을 밝힐 것이다.
10-17절이 첫 단위를 이룬다. “나는 거룩한 천막 안에서 그분을 섬겼으며 이렇게 시온에 자리 잡았다”(10). 지혜가 담론의 도입 부분에서 이미 암시했던 전례적 역할을 수행한 곳이 처음에는 장막이었고 후에는 시온의 성전이었다. 지혜는 처음에서는 사막에서(탈출 25-28), 이어서 예루살렘에서 사제의 임무를 수행한다. 집회서 저자는 사제직과 경신례에 큰 관심을 보인다. 특히 경신례는 율법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자는 이를 하느님 지혜의 작품으로 제시한다. 지헤의 공간인 성소에 거처를 정한 다음에는 예루살렘 도성에서 안식을 누렸고 하느님의 백성 전체 안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이 마지막 말은 식물 세계에서 나온 표상으로서, 다음 단락에서 논리적으로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13-14절 전체는 지혜의 성장과 – 지혜가 자랐다고 세 번 반복한다 – 지혜가 덮었던 이스라엘 땅의 영역을 밝힌다. “나는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헤르몬 산에 서 있는 삼나무처럼 자랐다”(13). 이를 위하여 지혜는 이스라엘 땅의 경계를 지적한다. 북쪽으로는 레바논과 헤르몬 산, 동쪽으로는 엔 게디와 예리코, 서쪽으로는 지중해 해변의 기름진 평원, 이들은 모두 잘 알려진 장소이다. 거기에는 물이 풍부하여 식물이 잘 자라나기 때문이다. 각 지역의 특정적인 나무와 식물이 이스라엘에서 지혜가 자라나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로 사용된다.
15절은 다시 지혜를 거룩한 도유에 사용되는 기름의 향기(탈출 30,23-25참조)와 향의 좋은 냄새(탈출 30,34-36 참조)에 비유한다. “나는 향기로운 계피와 낙타가시나무처럼 값진 몰약처럼 풍자 향과 오닉스 향과 유향처럼 천막 안에서 피어오르는 향연처럼 사방에 향내를 풍겼다”(15). 이렇게 지혜가 자리 잡은 장소인 시온의 성전으로(24,10 참조) 되돌아오는 것은 지혜가 자신의 현존으로써 축성하고 주님을 향하여 오르게 하는 것, 즉 지혜를 받아들인 이들의 기도와(시편 141,2 참조) 찬미를(39,14 참조) 자신의 향기로 가득 채웠음을 말하기 위해서다.
16-17절은 자라나는 식물의 비유을 다시 취하나. 가지에 순이 트고 꽃이 피는 때가 오고, 여름에는 열매를 맺는다. 테레빈 나무(이사 6,13 참조)와 포도밭(이사 5,1-7; 27,2-6; 시편80,9-12)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상징한다.
한마디로, 지혜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덮고 그 열매로 풍요롭게 만든 것이다.
지혜의 초대에 응답하는 것은 여름의 익은 과일과 같은 지혜의 결실로 가득 채워지러 가는 것이다. 그 결실은 무엇인가? 17절은 그것이 “내가 친절을 포도 순처럼 틔우니 나의 꽃은 영광스럽고 풍성한 열매가 된다”라고 밝혔다.
지혜의 결실에 대한 벤 시라의 이 설명에, 유명한 첨가문인 18절은 새로운 빛을 비추어 준다. “나는 아름다운 사랑과 경외심의 어머니요 지식과 거룩한 희망의 어머니다. 나는 내 모든 자녀들에게, 그분께 말씀을 받은 이들에게 영원한 것들을 준다”(18). 이 첫 두 행은 기원전 마지막 시대에 유다교에서 지혜의 참된 열매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보여 준다. 지혜는 지혜가 낳는 선익들의 어머니로 여겨졌다. 그 선익들 가운데 첫째는, 신앙인이 주님에 대해 지니는 진정한 사랑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주님을 경외함이고, 그 경외심의 본질은 사랑어린 존경, 공경, 주님을 향한 진실한 투신의 자세이다(2,15-17 참조). 벤 시라에 따르면 이러한 자세는 분명 지혜를 받기 위한 조건이지만(1,11-20에 대한 주해 참조). 첨가문의 저자에게 그것은 이미 지혜의 매개로 하느님의 선물에 자신을 열어 놓는 사람 안에서 지혜가 이루는 업적이다. 첨가문이 덧붙여 말하는 것은 하느님의 길에 대한 지극히 깊은 지식과 우리 삶에서 그분의 끊임없는 현존을 알아보는 능력이고, 또한 주님께서 지혜를 양식으로 삼는 이들에게 갚아 주시리라는 희망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이 첨가문의 저자는, 의인들이 사후에 누릴 행복을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라틴어본에서 이 장에 첨가된 다음 구절도 이를 생각하게 한다. 지혜는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을 비출 것이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이들이란 세상을 떠난 의인들을 말한다(그리스어 집회 24,32과 24,33 사이에 삽입된 첨가문).
19-22절은 지혜가 자신의 역사에 대한 찬미를 끝맺으며 듣는 이들에게 식탁에 앉아 자신의 열매들을 먹으라고 초대한다. “19 나에게 오너라, 나를 원하는 이들아. 와서 내 열매를 배불리 먹어라. 20 나를 기억함은 꿀보다 달고 나를 차지함은 꿀송이보다 달다. 21 나를 먹는 이들은 더욱 배고프고 나를 마시는 이들은 더욱 목마르리라. 22 나에게 순종하는 이는 수치를 당하지 않고 나와 함께 일하는 이들은 죄를 짓지 않으리라”(19-22). 지혜를 한 번 맛본 이들은 그것을 더욱 갖고자 하는 욕망을 느낀다. 그 어떤 것도 지혜보다 더 욕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한편 요한 복음서는 목마름을 풀어 줄 생명의 물과(요한 4,13-14) 할 수 없는 음식과 대립시킨다. 집회서와 요한 복음서의 비유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 같으나 그 생각은 동일하다. 두 비유 모든 지혜든 예수님이든 그 탁월성을 예찬하기 때문이다. 20절은 지혜가 초대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지혜의 열매를, 즉 지혜가 유산으로 남기는 것을(4,13 참조) 먹는 사람은 지혜가 꿀보다 더 달다고 기억한다. 즉, 지혜도 너의 갈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을 알아라. 사실 꿀을 먹어 본 사람은 더 먹으려 한다. 21절에 따르면 지혜는 결코 지혜에 지치지 않는다고 선언한다. 지혜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이나 음료와 같다. 여기에서 지혜가 더 이상 자신의 결실에 대해 말하지 않고 지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것이다. 지혜는 자신을 먹고 싶어 하고 마시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준다. 그런 다음 22절에서는 표상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삶으로 들어가, 잠언 8,32-36과 잠언 9,6에서와 같이 자신의 초대에 대한 설명을 끝맺는다. 지혜를 먹는다는 것은 지혜에 귀 기울이고 그 영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지혜의 부름에 응답하는 사람은 수치와 벗어남, 실수와 온갖 잘못을 피할 수 있다.
집회 24,23-29 벤 시라가 담론을 해석하다
“23 이 모든 것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계약의 글이고 야곱의 회중의 상속 재산으로 모세가 우리에게 제정해 준 율법이다. 24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강해지고 그분께서 너희를 강하게 하시도록 그분께 매달려라. 전능하신 주님 홀로 하느님이시고 그분 말고 아무도 구원자가 될 수 없다”(23-24).
집회서의 저자는 지혜의 말을 소개한 두 지혜를, 흘러넘치는 이름난 강들과 광대한 바다에 비교하여 그 풍요로움을 묘사하면서 모세의 율법과 동일시한다. 이렇게 율법을 중요시하는 현상은 구약성경 말기 유다교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그리스 말 성경에서 자주 발견된다.
어떤 경우이든 벤 시라에게 지혜의 담론 내지 적어도 그 일부가 계약의 책과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바룩 4,1에서도 지혜에 이르는 길은 이스라엘 땅에 나타났다. “슬기는 하느님의 명령과 길이 남을 율법을 기록한 책이다.” 한편 벤 시라는 신명 33,4에서 인용하여 여기에 첨가한다. 지혜는 “야곱의 회중의 상속 재산으로 모세가 우리에게 제정해 준 율법이다”(24,23ㄴㄷ).
이어지는 세 절 24,25-27은 하나의 작은 단위를 이룬다. 율법은 지혜를 흘러넘치게 한다. 각 절의 첫 행은 동의어로 이를 반복하여 말한다. 이 풍부함은 둘째 행들에서 추수철과 비교된다(첫 수확기, 추수기, 포도 수확기). 이 표상들 역시 식물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며, 지혜가 그의 담론 마지막에서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할 때 사용했던 표상을 계속 이어간다(24,19.21). 또한 그 풍부함과 충만함은 낙원의 네 강(피손, 기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에 비길 수 있는데(창세 2,10-14). 여기에서는 그 네 강에 요르단 강과 나일 강이 추가된다. 벤 시라는 이 강들을 언급함으로써 율법이 지상에 본래 낙원의 모습을 다시 꽃피우게 되리라고 암시하는 듯하다. 어떻든, 충만함이라는 개념은 분명 들어 있다.
이러한 개념은 다음의 두 절에서도 다시 제시된다(24,28-29). 첫 절에서는 아마도 아직까지 지혜를 찾고 있는 아담(지혜 10,1-2 참조)과 벤 시라 자신을 대조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4,28ㄴ에서 “마지막 사람도 지혜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리라”라는 말에서 저자가 묵시적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벤 시라는 그의 수고를 끝낸 것이 아니다. 아직도 지혜의 발자취를 끝까지 따르지 않은 것이다. 누가 지혜의 비밀을 다 알아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지혜의 생각과 계획은 바다와 심연보다도 더 광대하다(24,29).
벤 시라가 지혜와 율법을 동일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 법전에서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신명 4,6)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유배 이후 시기의 이 본문에, 페르시아 임금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기원전 398년에 에즈라 사제에게 맡긴 칙령도 덧붙일 수 있다. “그대 손에 있는 하느님의 법”(에즈 7,14)은 공식적으로 국가 권위에 의하여 인정을 받으며, “그대 손에 있는 하느님의 지혜”(에즈 7,25)라고도 정의된다. 신명기 법전이든 오경 전체이든 구약성경의 법률은 모두 진정한 지혜인 것이다.
그러나 벤 시라는 창세 1장을 암시하면서 지혜의 담론을 시작하고, 또한 신명 33,4를 인용하면서 그의 해석을 시작한다. 이 구절을 현인이 오경의 마지막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따라서 “계약의 글”을 언급하는 “이 모든 것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계약의 글”이라는 24,23ㄱ의 어려운 구절은 충분히 오경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지혜의 담론은 오경을 넘어선다. 오경은 모압 땅에서 모세가 죽는 것으로 끝난다(신명 34장). 그런데 24,10부터 지혜는 모세가 죽은 뒤에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에서 자신이 자라난 것을 묘사한다. 24,4-10에서 계약 궤에 대한 암시를 찾아볼 수 있다 하더라고, 지혜의 옥좌는 궤를 덮고 있는 구름 위에 있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지혜가 자리한 곳은 십계명 돌 판이라기보다 하느님 신비의 차원이다. 24,28-29에서 벤 시라는 이러한 우월성을 역설한다. “첫 사람도 지혜를 완전히 알 수 없었고 마지막 사람도 지혜를 완전히 깨닫지 못하리라. 지혜의 생각이 바다보다 풍부하고 지혜의 의견이 큰 심연보다 깊기 때문이다”(28-29).
다른 한편으로, 지혜의 담론이 특히 24,3-17에서 역사를 기술한다면, 이 역사는 오경의역사에 상응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설 뿐 아니라 그 역사 자체에 대해서 지혜의 관점을 제시할 따름이다. 실상, 지혜가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대해서도, 범해진 죄들에 대해서도, 백성이 겪어야 했던 벌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아마도 벤 시라는 지혜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흠 없이 충실했음을 강조하려 한 것 같다. 9절은 이를 알려 주는 것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충실함은 예루살렘 성전에 자리를 잡고 있다. 24,10은 그 성전이 차지하는 중심적 위치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혜의 담론의 끝 부분은 지혜의 잔치에 초대하는 내용이다(24,19-22). 지혜는 자신의 열매들을 내주고, 나아가 자기 자신까지 내준다. 24,18의 첨가문에서 우리는 지혜가 맺는 열매들이 종교적 태도에서 가장 근본적인 가치임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지혜는 자신의 말에 따르기를 권고한다(24,22). 여기에서는 지혜의 계명들을 생각하게 되는데, 계명들이 처음으로 암시되며 담론의 끝 부분에 이르러서도 어떤 구체적인 계명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신명 33,4을 인용하면서 벤 시라는 이러한 해석을 확인해 준다. 지혜의 계명은 모세 율법의 계명인 것이다.
그러나 지혜는 지혜 자신의 계명이나 율법의 계명으로 축소되지 않는다. 지혜의 역사는 계명을 무한히 초월한다(다시, 24,28-29 참조). 그러므로 벤 시라에게서 지혜와 율법의 동일시를 말하기보다, 율법이 지혜의 계획의 최고 표현이라고 말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지혜 자신이 바로 성전에서부터 백성에게 확산되어 가는 그 현존이다. 지혜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에게, 지혜 앞에서 살고 행동한다는 것은 율법의 계명을 준수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지헤롭고 슬기로우며 잘 교육 받은 이가 될 것이다(24,25-27).
이러한 말을 통하여, 헬레니즘이 이스라엘을 조금씩 침범하고 있고 젊은이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 줄 위험이 있는 시대에 벤 시라는 성경 계시의 타당성을 힘 있게 단언하려 한다. 조상들에게서 받은 유산을 수치스러워할 것이 없다(24,22ㄱ). 그 유산은 그리스에서 도래하고 있는 이교 문화보다 훨씬 우월하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온 지혜를 원천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집회 24,30-34 벤 시라의 역할
“30 나로 말하면 강에서 끌어낸 운하와 같고 정원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같다. 31 나는 ‘내 동산에 물을 대고 꽃밭에 물을 주리라.’ 하였다. 보라, 내 운하가 강이 되고 내 강이 바다가 되었다. 32 나는 교훈을 새벽빛처럼 다시 밝히고 그 빛을 멀리까지 보낸다. 33 나는 가르침을 예언처럼 다시 쏟아 붓고 세세 대대로 그 가르침을 남겨 주리라. 34 보라, 나는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찾는 모든 이를 위해 애썼다는 것을 알아라”(30-34).
먼저 지혜의 말을 듣게 하고 지혜와 율법의 관계를 보여 준 다음, 벤 시라라는 자신과 지혜의 관계를 지적하면서 그의 시를 끝맺는다. 이를 위하여 그는 몇 가지 은유를 사용한(24,30-31) 뒤 자신의 역할과 계획을 명시적으로 이야기한다(24,32-33).
은유들은 이 장에서 이미 사용되었던 식물과 강의 표상을 이어간다. 벤 시라는 강에서 물을 끌어내어 정원(이것이 그리스어 번역자가 사용한 paradeisos의 첫 번째 의미이다)에 물을 대는 운하와 같다. 수문을 열기로 결정한다면 그것은 그의 정원과 동산에 물을 대기 위해서이다. 분명하게 말한다면, 강은 지혜를 가리킨다. 지혜의 스승은 그가 지혜로부터 받는 것만을 전해 줄 수 있다. 정원과 동산은 그의 학교에 찾아오는 제자들이다. 현인은 그들에게 지혜를 전달한다. 그의 활동은 율법의 활동과 비슷하다. 율법은 지혜가 제시하는 것을 가장 잘 표현하여,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풍부한 지혜를 전해 준다. 현인은, 그가 전달하는 것이 중개자로서 그의 역할을 훨씬 넘어서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가 말하듯이 그는 운하이고 그 운하는 강이 되고 다시 강은 바다처럼 엄청나게 커진다. 그런데 지혜를 거센 강물에 비길 수 있다면, 그 지혜의 생각과 계획은 바다보다 더 넓다(24,29). 한마디로, 스승의 가르침은 그가 받은 것 이상을 전해 준다. 그를 통하여 지혜의 무한함이 전해지고 그것으로 제자들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마지막 절들은(24,32-34) 벤 시라의 가장 큰 계획을 표현한다. “32 나는 교훈을 새벽빛처럼 다시 밝히고 그 빛을 멀리까지 보낸다. 33 나는 가르침을 예언처럼 다시 쏟아 붓고 세세 대대로 그 가르침을 남겨 주리라. 34 보라, 나는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혜를 찾는 모든 이를 위해 애썼다는 것을 알아라”(32-34). 이 책의 모음이 증언해 주는 그의 가르침은 그의 학교의 좁은 범위를 넘어 멀리까지 비추는 빛이다. 실상 책은 필사될 수 있어 저자가 직접 만나는 이들보다 더 많은 대중에게 도달할 수 있다. 벤 시라의 손자가 스승의 저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힘든 일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책 한 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머리글, 27-29절 참조). 또 책은 세세 대대로 전해진다. 벤 시라는 기록된 그의 작품이 여러 세기 동안 전수되리라고 여길 수 있었다. 실제로 우리는 오늘 그 책을 읽고 있고, 우리 이후에도 다른 이들이 그것을 읽을 것이다. 벤 시라에게는 또 하나의 통찰이 있었을 수 있다. 그는 그의 가르침을 예언처럼 부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에게서 영감을 받았음을 의식하고, 어느 날 그의 작품이 그 시대의 유다교에서 예언자들로 인정받던 예언자들의 저서들과 동등하게 여겨지리라는 희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고, 사실상 오늘날 집회서는 가톨릭교회의 성경에 속해 있다.
간단히 말해, 예루살렘의 현인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일하지 않고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든지 지혜를 찾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일했다. 33,18에서도 반복되는 24,34에서 그는 짧은 말로 현인은 본질적으로 지혜와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중개자이며, 또 그 자신이 수고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지혜가 자신을 가득 채우도록 내맡겼을 때에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집회 27,4-7.17 말, 비밀에 생활의 금언
“4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난다. 5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된다. 6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속 생각을 드러낸다. 7 말을 듣기 전에는 사람을 칭찬하지 마라. 사람은 말로 평가되기 때문이다”(4-7). 말에 대한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그 중요성이 크다.
“네 친구를 아끼고 그에게 신의를 지켜라. 그러나 네가 그의 비밀을 폭로했다면 그에게 더 이상 가까이 가지 마라”(17). 상대방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은 내게 신뢰에 대한 소중한 약속과 같다. 상처는 아물고 욕설은 화해로 풀지만 비밀을 폭로하면 희망이 없다.
집회 28,2.12.13-14 복수심, 말다툼, 사악한 혀에 대한 다스림
“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2).
“불씨를 입으로 불면 더욱 세차게 타오르고 불씨에 침을 뱉으면 꺼지리라. 바람과 침 둘 다 네 입에서 나온다”(12).
“13 중상하는 자와 한 입으로 두말하는 자를 저주하여라. 그들은 평화로이 사는 많은 사람들을 멸망시켰다. 14 이간질하는 혀는 많은 이들을 혼란시키고 그들을 이 민족 저 민족으로 흩어 놓았으며 튼튼한 성읍을 파괴시키고 고관들의 집안을 파멸시켰다”(13-14). 이간질 하는 혀는 쌍방 간의 또는 두 친구 사이의 반목을 조장하는 제삼자를 말한다. 이간질하는 혀는 세 사람을 희생시킨다. 비방당하는 사람과 비방하는 사람과 비방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특히 이간질 하는 혀는 뱀의 혀로 비유된다.
집회 29,1-20 이웃을 경제적으로 도움
어려운 사람을 경제적으로 돕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 그에게 꾸어 줄 수도 있고, 자선을 베풀어 돈을 줄 수도 있고, 아니면 채권자에게 보증인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성경의 백성은 이웃을 돕는 이 세 가지 형태를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인들 사이에서, 현금을 빌려 줄 때에는 이자를 받을 수 없었다. 더구나 고리대금은 비난받을 일이었다(에제 18,8.13.17; 잠언 28,8). 자비심에서 빌려 주는 사람은 칭송을 받았다(시편 112,5). 반면 빚을 갚지 않는 사람은 가끔 단죄를 받았다(시편 37,21ㄱ).
히브리어로 ‘정의’라 불리는 자선은 그 자체로 갚음을 포함하지 않는다. 받을 생각을 하지 않고 주는 것으로, 성경은 자주 자선을 실천하는 사람을 칭송한다(예로 토빗 4,7-11; 12,8-9). 예수께서는 은밀히 자선을 행하기를 요구하실 것이다(마태 6,1-4).
보증은 더 복잡한 문제이다. 어떤 사람이 돈을 빌리면, 채권자는 채무자에게 보증인을 요구할 수 있다. 빚을 요청한 사람이 갚지 않으면 빌려 준 사람은 빚진 사람이 갚지 않을 경우 그 액수를 갚을 책임을 진 보증인에게 그것을 요구한다. 성경의 현인들은 이러한 방법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보증인에게 너무 큰 위험을 내포하기 깨문이었다.
집회 29,1-7 꾸어 주기, 그리고 갚기
어려운 이웃에게 꾸어 주어야 하는 의무를 기억하면서도, 벤 시라는 꾼 돈을 갚아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길게 이야기한다. 이렇게 분명하게 그 점을 이야기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처음의 세 절(29,1-3)은 계명에 속한다. 꾸어 주는 사람은 선함과 자비를 보이는 것이고, 모세 율법이 명하는 바를 충실하게 실천하는 것이다(29,1-2ㄱ). “자비를 베푸는 이는 이웃에게 돈을 꾸어 주고 도움의 손길을 펼치는 이는 계명을 지킨다. 이웃이 궁핍할 때 돈을 꾸어 주고 이웃에게 꾼 돈은 제때에 갚아라”(1-2). 그러나 돈을 꾼 사람은 정해진 때에 그것을 갚아야 한다! 자신이 했던 말에, 즉 꾸어 준 사람에게 한 약속에 충실해야 한다. 그에게 정직해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빚진 사람은 언젠가 다시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다시 그에게 돈을 빌려 줄 사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29,2ㄴ-3). 빚진 사람의 이러한 의무에 대해 모세 율법은 말하지 않았다.
벤 시라는 지나칠 정도로 계산적이고 별로 양심적이지 않은 채무자의 행동과 그 결과를 여러 표상으로 강조하고 설명하는데, 여기에는 역설도 있지만 현실성도 분명히 들어 있다.
많은 이가 빚을 청한다. 돈을 꾸면 그것을 횡재로,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돕는 이들을 어려움에 빠뜨린다.(29,4). “꾼 것을 횡재로 여기고 도움을 준 이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자들이 많다. 돈을 꿀 때까지는 이웃의 손에 입 맞추고 그의 재산을 두고 공손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나 갚을 때가 되면 시간을 미루고 빈말로만 갚겠다 하며 시간만 탓할 뿐이다”(4-5). 너무나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갚아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돈을 꾸는 것에서 이익을 본다. 벤 시라는 그에게 이미 말했다. “네 지갑 속에 아무것도 없으면서 꾼 돈으로 잔치를 벌이다 거지가 되지 마라”(18,33). “남의 돈으로 제집을 짓는 자는 제 무덤에 쌓을 돌을 모으는 자와 같다”(21,8).
29,5에서 벤 시라는 부정직한 채무자의 태만한 행동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빚을 얻기 위해서는 감언이설을 한다. 더없이 겸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다른 사람의 재산에 대해 좋게 말한다. 그러나 갚아야 할 때에는 갚지 못하면서 온갖 변명을 하고, 다시 얻으며 되갚지 않는다.
꾸어 준 사람은 계속해서 돈을 갚으라고 주장해야 하겠지만, 얼마나 큰 값을 치러야 하는지! 29,6에서 벤 시라의 현실 감각은 신랄해진다. 꾸어 준 사람에게, 그 돈의 반을 받는 것도 이미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그 이상은 바랄 수도 없게 된 것이다! 돈을 받지 못하면, 꾸어 준 사람은 빼앗기고 만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는 채무자의 원수가 될 것이다. 이자 없이 빌려 주었던 것과 똑같이, 이유 없이 원수가 되는 것이다. 갚지 못하는 채무자는 태도를 바꾸어 저주하고 욕하기 때문이다. 도움을 청하던 날처럼 그를 구해준 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모욕만을 돌려준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악의가 없으면서도 돈을 빌려 주려 하지 않는다. 거저 빼앗기게 되지 않도록 조심하게 된다(29,7). 돈을 빌리는 것이 도둑질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현인의 묘사는 강한 인상을 주고, 우리를 웃음 짓게 만든다. 그러나 잘못이 없으면서도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 시대에도 그렇다는 것을 우리는 어쩌면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렇게 본다면 벤 시라가 너무 가혹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지 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의 사명은 좋은 집안의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언젠가 곤궁하게 될 이들이 있을 것이다. 스승에게, 빚을 갚아 의무를 충실히 지키는 것은 정직한 삶에 요구되는 사항이다. 그러나 그의 시대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 그의 경험에 따르면 부정직한 채무자들이 많았고(29,4). 그래서 빌려 주려는 사람이 맣지 않았다(29,7). 돈을 빌려 주도록 명하는 모세의 계명이 주저 없이 실행될 수 있기 위해서는 채무자들이 정확하게 돈을 갚아야 했다. 그러나 상황이 그렇지 않다면 누가 돈을 빌려 주려 하겠는가? 이것은 비교적 균일했던 사회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을 위한 가르침이었다. 오늘의 상황은 그때와 다르다.
집회 29,8-13 자선, 위험 없는 정의
빚을 얻으려 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지만, 가난한 사람의 처지는 그보다 더 나쁘다. 그의 처지는 영구적이고 근본적이다. 그래서 벤 시라의 제자들처럼 가진 것이 있는 사람에게 현인은 관대함을 보이라고 절박하게 촉구한다. 이러한 관대함은 히브리어로 ‘정의’라고 일컬어진다.
이 단락의 처음 세 절(29,8-10)은 절실한 요청이다. “8 그렇지만 비천한 이에게는 참아 주고 자선을 베풀 때 그를 기다리게 하지 마라. 9 계명을 생각해서 빈곤한 이를 도와주고 그가 궁핍할 때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마라. 10 형제나 친구를 위해 돈을 내주어 그 돈이 돌 밑에서 녹슬지 않게 하여라.”(8-10). 각 절마다 첫 행은 긍정적이다. 관대한 마음을 보이고, 도움을 베풀고, 너의 돈을 내주어라. 수혜자는 가난한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형제이고 친구이기도 하다. 절실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각 절의 둘째 행에서 벤 시라는 부정적 형태로 그의 생각을 보충한다. 그를 기다리게 하지 말고, 빈손으로 보내지 말고, 너의 돈이 돌 밑에서 녹이 슬도록 하지마라. 이 계명들의 동기는 이 부분의 둘째 절(29,9)에서 주어진다. 그것은 주님의 명령이며(신명 15,1 참조). 가난한 사람의 “궁핍함 정도에 따라” 그 명을 행해야 한다.
가진 돈을 빌려 줄 수도 있지만, 빌리는 사람은 갚지 않을 수도 있다. 주머니(마태 25,18 참조)나 금고에 쌓아 둘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아무도 그 혜택을 입지 못한다. 그러나 단순하게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나누어 줄 수도 있다. 그것을 돌려받으리라는 희망은 없지만, 자선은 전혀 다른 종류의 이득을 준다.
벤 시라가 다음 세 절(29,11-13)에서 설명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명에 따라 자신의 돈을 주는 것은 그 돈을 금보다 더 유익하게 만든다. 그 돈을 내주는 은인에게도 그렇다. 29,12의 첫 행에서 벤 시라는, 가난한 이들에게 줄 것을 따로 떼어 두라고까지 권고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스스로 그것을 자신을 위해서 써버리지 않기로 약속하게 되고, 그것은 내 재산 가운데 가난한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벤 시라가 도달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29,13). “자선은 튼튼한 방패와 단단한 창 이상으로 너를 위해 원수와 맞서 싸워 주리라”(13). 가진 돈 덕분으로, 여우가 있는 이들은 자신을 방어하고 개인적인 공격에도 맞설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된다. 돈으로써 그들은 방패와 창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을 구하는데 그들이 채워 주었던 가난한 사람이 그것보다 더 강력한 보호 수단이 될 것이다.
자선에 대해 말할 때 벤 시라는 어떤 유보도 두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에는 위험이 없다. 오히려, 돈을 빌려 주는 사람에게는 바랄 수 없는 유익이 나타나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자선’이라고 부르는 것을 히브리어로는 ‘정의’라고 말한다는 점을 기억해 두자.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라틴어레서 자선은 엘레모시나(elemodina)인데, 이는 은혜를 베푸는 행동을 지칭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을 자선이라고 하고, 대개는 돈을 주는 것을 말한다. 벤 시라도 돈을 주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만, 그것을 ‘정의’라고 부른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집회 29,14-20 보증 서기? 그러나
담보 또는 보증에 대해 말하면 다시 빚 문제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거기에 덧붙여 보증을 생각해 보자. 보증인이 있을 때 채권자는 더 확실하게 돈을 되찾으리라고 생각한다. 벤 시라는 빚과 보증의 관계를 분명히 보고 있었고,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14 착한 사람은 이웃에게 보증을 서 주지만 수치심을 잃은 자는 그를 배반하리라. 15 보증인의 호의를 잊지 마라. 그는 너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았다”(14-15). 29,14-20에서는 같은 상황을 다른 방식으로 고찰한다. 무엇보다 먼저(29,14-17) 보증인의 호의로 빚을 얻는 사람을 생각한다. 현인에 따르면 보증을 서는 사람은 큰 위험을 무릅쓰고 다른 사람을 돕는 착한 사람이고, 돈을 꾸는 사람을 어려운 상황에서 구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보증인의 도움으로 빚은 얻은 사람이 부끄러움도 잊고 제때에 빚을 갚지 않게 되면, 보증인은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것에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감사할 줄 모르는 채무자는 부정직한 사람이다. 그래서 스승은 “보증인의 호의를 잊지 마라”고 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정해진 때에 너 자신이 꾼 돈을 갚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게 하는 것은 은인을 망하게 하는 짓이다. 부유하지만 속임수에 넘어간 보증인들은 모든 것을 잃고, 때로는 유배를 가게 되는 일까지 벌어진다(29,18). “보증은 성공한 사람들을 수없이 망쳐 놓고 바다의 파도처럼 그들을 뒤흔들었다. 그것은 세도가들을 유배 가게 만들어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방황하게 하였다”(18).
반면, 스스로 보증을 설 기회를 찾지만 – 이 어려운 절을 잘 이해한다면 – 그들 스스로가 채무자로서 이미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에게 돈을 거두는 양심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이자나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 주는 것에 가까운 행동이다. 지나치게 이익에 욕심을 내는 이런 나쁜 보증인은 법정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한마디로, 빚을 얻으려는 사람은 보증인에게 정직해야 한다. 보증인은 신중해야 하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로 정직해야 한다.
그 이전의 사람들에 비해 벤 시라는 당시에 일반적으로 통용되던 경제적 관습에 개방된 모습을 보이지만, 순진한 것이 아니라 이 관습에 따르는 위험을 온전히 의식하고 있다. 빚과 보증의 문제에서 말이다. 자선에 대해서만은 유보를 두어야 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돈을 빌리거나 보증인을 찾는 사람은 정직해야 하고 자신이 한 말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할 일이다. 그러나 자선을 받는 가난한 사람에게는 권고한 것이 없다. 결국, 우리의 현인은 빌려 주거나 보증을 서는 것보다 그냥 주는 것이 낫다고 본다.
벤 시라는 매우 개인주의적인 중산층의 대변인으로서 말한다. 이 차원에서 그의 메시지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벤 시라는 아무런 잘못 없이 가난 때문에 빚을 갚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현상의 사회적 차원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중반에 느헤미야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을 무자비하게 괴롭히던 빚을 완전히 탕감해 주도록 부유한 사람들을 설득했다(느헤 5,1-13).
그러나 벤 시라가 가난한 사람 개인에 대해 말할 때에는 순전히 거저 주는 것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사실이고, 그것은 히브리어로 ‘자비’가 아니라 ‘정의’의 행위이다. 느헤미야 시대의 사람들도 이를 알았을 것이다.
집회 30,14-17 건강에 대한 금언
“14 가난하지만 건강하고 튼튼한 몸을 가진 이가 부유하지만 제 몸에 상처가 많은 자보다 낫다. 15 건강한 삶은 어떤 금보다 좋고 굳건한 영은 헤아릴 수 없는 재물보다 좋다. 16 몸의 건강보다 좋은 재산은 없고 마음의 기쁨보다 큰 즐거움은 없다. 17 비참한 삶보다 죽음이 낫고 지병보다 영원한 휴식이 낫다.”(14-17). 건강한 삶을 몸의 건강에서 시작된다. 몸 관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설명해준다. ‘굳건한 영’은 육체적 몸이 아니라 정신적 몸인 프네우마 즉 영(靈)이다.
집회 30,21-25 기쁨에 대한 금언
집회서 저자의 종교관 안에서 기쁨이 차지하는 위치를 유념해야 한다. 그는 이 단락에서 이롭지 못한 걱정들을 버리고(마태 6,34 참조),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끼치는 원한을 내버리라고 권고한다. “21 슬픔에 너 자신을 넘겨주지 말고 일부러 너 자신을 괴롭히지 마라. 22 마음의 기쁨은 곧 사람의 생명이며 즐거움은 곧 인간의 장수이다. 23 긴장을 풀고 마음을 달래라. 그리고 근심을 네게서 멀리 던져 버려라. 정녕 근심은 많은 사람을 망쳐 놓고 그 안에는 아무 득도 없다. 24 질투와 분노는 수명을 줄이고 걱정은 노년을 앞당긴다. 25 마음이 밝은 이는 진수성찬을 반기며 제 음식에 관심을 기울인다”(21-25). 마음의 기쁨을 누리는 오늘이 되어야 한다. 즐거움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