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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대로
이사야 35:8~10
거기에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 바 되리니 깨끗하지 못한 자는 지나가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이사야 35장 전체 말씀은 주의 백성들의 회복의 예언의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는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주의 백성 중에 진실한 주의 백성 곧 남은 자들이 다시 시온 성, 주의 고토로 돌아와 안전하고 행복한 시온 성에서 살게 될 것에 대한 예고의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시온으로 돌아오는 주의 백성을 위한 ‘대로’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온으로 돌아오는 주의 백성들을 위한 대로가 예비될 것이라는 말씀은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 가운데 여러번 등장합니다.
이사야 11:16 말씀에,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고 하였고, 이사야 40:3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고 이르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귀환하는 주의 백성들을 위한 길을 수축하고 그 백성의 길에서 모든 걸림돌들을 없애주시겠다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이사야 57:14)
그래서 이 귀환자들의 돌아오는 길은 실제적인 길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이해함이 좋을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은 이 대로로만 통하여 주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대로는 진리의 길을 상징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6:16 말씀에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 옛적 길, 선한 길은 믿음의 조상들이 걸어온 길입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온 신앙의 바른 길입니다. 새로운 사상과 철학과 편리주의에 물든 세속적인 길이 아니라, 진실하고 순수하고 우직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따라가는 믿음의 길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신약 시대에 들어가면 이 길, 대로의 이미지는 구원의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구원의 주요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온으로 향한 대로의 본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자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예수님께서 전하신 진리의 복음을 종종 한자로 길을 의미하는 ‘도’로 표현하곤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9:2 말씀에 보면,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초대 교회 성도들은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 18:25,26 말씀에 보면 청년 사역자 아볼로의 사역을 소개하기를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서도 복음을 ‘주의 도’, ‘하나님의 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길을 가는 자들인 것입니다. 주님의 길을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세상 가운데에서 살다가 주님이 예비하신 대로를 따라 주님 게신 시온 성으로 돌아가는 자들입니다. 아멘. 우리가 가는 순례길 저 끝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토록 그 이름을 부르며 찬미하던 우리 주님을 거기서 뵐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길은 누가 갈 수 있나요? 그리고 이 길은 어떤 길일까요? 다음 몇 가지 내용을 선지자 이사야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이 길은 눈에 드러난 큰 길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말씀을 드린 대로 ‘대로’라는 단어 ‘메쉴라’는 잘 다듬어진 돌로 만든 솔로몬 왕궁과 솔로몬 성전의 층계입니다. 이것은 잘 다듬어진 길이요 큰 길이요 확연히 드러난 길입니다. 그러므로 길이 있다는 것을 깜깜하게 전혀 몰라서 못 가지는 않습니다. 이 길을 찾고자 하는 자는 다 알아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진리의 도는 온 세상 가운데 다 전파된 바 되었기 때문에, 알지 못해서 그 길을 가지 못했다는 변명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로마서 10:18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들이 듣지 아니하여서 이 길을 찾아나서지 않은 것이 아니요 듣고도 원치 아니함으로 이 길을 찾아나서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차 주 앞에 변명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게도 우리들은 이 도에 대하여 듣는 은혜를 입었고 이 길만이 참된 길이라는 것을 알고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옛적 길로 내 인생이 걸어갈 길로 갈아탔으니, 주님의 전적인 은혜로다 할렐루야.
둘째로, 이 길은 거룩한 길입니다.
이 길은 구별된 길입니다. 이 길은 사방팔방으로 뚫린 길이요 사통오달하여 이리 저리 왔다 갔다 하는 길이 아닙니다. 오직 쭉 시온 성을 향하여 난 곧은 길입니다. 도중에 곁길도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도 없습니다. 딱 한 길로만 쭉 난 고속도로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One way ticket"입니다. 이 길은 편도만 있는 큰 고속도로입니다. 그런데 이 길은 거룩한 길이라서 그 끝은 우리 주님이 계신 성전 산, 시온 산으로만 이어지는 길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님과 우리 성령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그와 함께 영원한 축제를 벌이기 위하여 가는 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일 세상적인 장사차 이 길을 들어선 사람은 사절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음이 없는 자는 이 길에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그 길이 거룩한 길이기에 오직 거룩한 주의 성도들만이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딴 목적, 딴 생각 가지고는 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 길은 거룩한 자들만이 그 길 끝까지 갈 수 있고, 가면 갈수록 더 설레고 기쁘고 행복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마음도 그러합니까? 할렐루야.
셋째로, 이 길은 하나님께서 순례자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길입니다.
지난 주일 저녁에 우리가 8절 후반절의 말씀에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될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로 다니지 못할 것이며”
라는 말씀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칼빈 선생님의 의견을 가지고 원문 그대로 풀면,
“그가 그들을 위하여 그 길을 걸어주시니 어리석은 자들도 길 잃지 아니할 것입니다”
라고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 대로에 귀환자들만 남겨두어 그들 스스로 시온 성까지 돌아오는 힘든 싸움을 싸우도록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이사야 11:16 말씀에서도,
“그의 남아 있는 백성 곧 앗수르에서 남은 자들을 위하여 큰 길이 있게 하시되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게 하시리라”
고 하였던 것처럼, 귀환자들이 시온의 대로를 따라 돌아올 때에도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가주셨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불기둥과 구름기둥 가운데 함께하셨고, 주의 사자 곧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도 그들의 길에 앞서 가시며 그들을 인도해주셨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시온의 대로에서도 친히 함께해주시고 그들을 위하여 그 길을 함께 걸어주신다는 말씀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성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길을 걸어주시니, 그 대로를 걷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연약한 성도일지라도 도중에 길을 잃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시온의 대로를 걷기 시작한 후에 도중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낙오할까 염려하는 주의 백성들에게는 크나큰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8:20 말씀에서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고 말씀하셨으니, 주님께서 우리의 순례길 내내 동행해주시고 길 잃지 아니하게 끝까지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지금도 우리들 곁에 함께 이 시온의 대로를 함께 동행해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마음에 담대함을 갖기 바랍니다.
넷째로, 그 길에는 사자와 사나운 짐승이 올라오지 못합니다.
9절에 보면 이르기를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라고 하고 있습니다. 사자와 사나운 짐승은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선지자가 예언할 당시에는 매우 실제적인 공포였습니다. 선지자가 예언할 당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 제국에 의하여 망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많이 죽이고 일부는 멀리 끌고가서 산지 사방에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 왕국의 땅에다가 이민족을 데려다가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민족들이 우상을 섬기고 각종 더러운 귀신을 섬기는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께서 사자들을 보내었습니다. 그 결과 으르렁거리는 사자들에 의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바로 그 일은 이 예언이 선포되는 시기에 일어난 실제 사건였습니다. 사자와 사나운 짐승들은 여행객들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백년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시온의 대로에 올라 하나님의 성산으로 귀환하는 주의 남은 자들에게는 바로 이러한 들짐승의 공격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2:15 말씀에 보면,
“그 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사자와 들짐승과도 언약을 맺어 돌아가는 남은 자들은 절대로 해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 약속을 받아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첫 사람 아담에게 모든 짐승들이 다 순종하였던 것처럼, 때가 되면 모든 사자들과 사나운 들짐승들도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때가 올 것입니다.
사자와 사나운 짐승은 악한 영들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마귀는 종종 우는 사자로 비유되기도 하고, 뱀과 전갈과 들개 역시 더러운 악령들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귀와 여러 악령들이 더 이상 시온의 대로를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남은 자들에게 해치거나 괴롭히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 주님께서 금지해주시는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훗날 우리가 하늘의 시온 성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더러운 악령들과 마귀는 일체 없을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다 무저갱에 잡혀 있다가 훗날 불못에 떨어져 영원한 둘째 사망을 당하는 저주를 피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시온의 대로에는 구속함을 받은 자만이 들어갈 거십니다.
9절 하반절에
“오직 구속함을 받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속함을 받은 자란 무슨 뜻일까요? 이는 친척과 골육의 도움으로 빚더미로부터 구출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원문에 보면, ‘구속하다’는 히브리어 단어는 ‘까알’이요 구속하는 분 곧 구속자는 ‘꼬엘’인데, 이는 구약 시대 율법에 형제나 친척 중에 가난해져서 집이나 논밭이나 그 몸을 노예로 팔게 될 때에 그를 불쌍히 여겨 부유한 형제 친척이 그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다시 자유인이 되게 하고 그 논밭을 되사서 그 사람의 기업으로 계속 누리게 하는 행위가 ‘구속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구속하는 권한을 가진 자는 그 채무자의 일가 친척이어야 합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와 룻이 가난해져서 논밭을 팔아야 할 때에 보아스가 그 모든 빚을 갚고 룻을 아내로 맞아 그 집에 기업을 이어가도록 돕는 일을 했지 않습니까? 그 결과 상속자가 없었던 보아스 역시 룻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얻어 상속자를 얻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죄와 허물로 완전히 환경적 파산을 당했습니다. 또한 의와 선을 행하기보다는 불의와 악을 많이 행하여 도덕적 파산도 당했습니다. 결국 영적으로 마귀의 종이 되어 우리 영혼까지 다 도적질당하고 죽임당하고 멸망당할 상태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렇게 이제 완전히 모든 것을 잃고 알거지가 되어 끌려갈 운명인데 우리 친척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속자가 되사 그의 생명과 영광과 능력을 다 내어줌으로써 우리를 채권자의 손에서 건져내셨고 다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구속자의 희생 덕분에 죄사함을 받았고 의롭다 함을 받았고 영벌에서 자유함을 받고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가난뱅이인 우리가 우리의 형제요 구속자 되신 주님 덕분에 이렇게 아무런 채무의식 없이 당당하게 시온의 대로를 걷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구속함을 받지 않은 자는 이 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자기의 믿음의 구주로, 자기의 맏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이 구속의 은혜를 누리지 못합니다. 구속함을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섯째로, 속량함을 받은 자만이 시온의 대로로 돌아옵니다.
10절 전반절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속량함’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파다’라는 단어인데, 그 뜻은 값을 지불하여 노예 된 상태에 있는 자를 다시 산다는 뜻입니다. 아까 구속하다는 것은 일가 친척의 관계가 강조된 것이라면 이것은 팔려서 자유를 잃어버린 자를 위하여 그 돈을 지불함으로써 그 사람을 다시 자유롭게 한다는 것,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더 강조된 것이 속량함의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도 하나님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팔로 권능을 많이 행하심으로써 그 대가를 지불하고 그 백성을 값주고 사셨습니다. 신약 성도들 역시 죄와 허물로 인하여 마귀의 포로가 되어 노예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주님께서 친히 우리의 죄값으로 자기의 생명의 피를 흘려 내어주심으로써 우리를 포로 된 데서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다. 참으로 그렇게 우리 주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주지 않았더라면 결코 우리는 저주와 사망과 영벌을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영혼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 비쌉니다. 시편 49편 6절 이하에서 이르기를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시 49:6~8)
고 말씀한 바 있습니다. 한 사람을 속량하는 값은 너무 비싸서 아무리 큰 부자라도 절대할 수 없다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아니요 주님의 수많은 택한 백성들의 영혼을 속량하사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벌에서 값을 다 지불하여 다시 영원히 살리신 것은 얼마나 비싼 값이 지불되었겠습니까?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18,19 말씀에서 분명히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돈 많은 이병철 씨도 그 많은 돈으로 자기 죄와 저주와 사망을 값을 지불해서 다시 사지 못하고 죽어 흙에 묻혔습니다. 그 영혼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로도 그 몸과 그 영혼을 다시 값을 주고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제단에 많이 바친 제물로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가장 값비싼 영원한 보상비가 있으니,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흘리신 그 보배로운 피가 능히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와 사망과 영벌에서 완전히 구출해내기에 충분한 값비싼 대가인 줄 믿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되고 오직 예수님의 생명의 피 값으로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이 속량함을 받은 자만이 시온의 대로에 들어서서 순례길을 나설 줄 믿습니다.
일곱째로, 시온의 대로를 걷는 자들은 노래하며 큰 기쁨과 즐거움을 얻습니다.
10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들의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붜 우리 영혼과 몸의 비싼 값을 대신 지불받은 자들, 예수님의 피값을 주고 포로에서 벗어난 자들은 이제 시온으로 돌아가는 길에 얼마나 큰 자유함과 기쁨이 충만하겠습니까? 실제로 나라가 망했다가 칠십년이 차서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시온으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너무 기뻐서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그 해방의 기쁨에 겨워 지은 시편 126편을 잠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도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같이 돌려보내주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1~5)
그렇습니다. 진정 구속주의 특별한 사랑을 입고 거덜난 삶, 남의 노예가 된 삶에서 다시 회복되어 어엿한 기업을 상속한 자가 된 자는 그 구속해주신 친척 형제에게 얼마나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까요? 속량함을 받은 자, 노예되어 영원히 고통을 겪을 자를 위하여 그를 대신하여 엄청난 그 노예의 비용을 갚아준 경우 얼마나 기뻐하며 그 사람에게 감사하며 지낼까요? 이처럼 우리 남은 자들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속해주시고 속량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그 시온의 대로를 따라 돌아올 때 그들은 기뻐함과 노래함과 즐거움이 특징이 아니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옥갈 자기를 예수님께서 택정하시고찾아와주시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인도해주시고 귀한 사명 주신 일을 생각할 때 얼마나 감사하며 자기의 사명에 충성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는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감옥에서 쓴 빌립보서에 여러 차례 당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감격과 기쁨과 희락은 불편한 감옥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온의 대로를 걷는 자의 특징은 바로 이러한 기쁨과 희락입니다. 그것이 천국 백성의 진정한 표지입니다.
이 땅에서 시온의 대로를 걸을 때에 어려운 일도 적잖이 만납니다. 하지만 로마서 5:3 말씀처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을 앎이로다”
고 하신 대로, 환난 중에도 기뻐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장차 그 시온에 이르게 될 때에는 우리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게 될 것입니다. 거 천국에는 슬픔이 없습니다. 탄식이 없습니다. 눈물이 없습니다. 그 대신 영원한 희락과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 가지고 이 시온의 대로를 걷는 우리들 모두 고난과 시험 중에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구원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항상 대속주, 구속주 되신 주님을 인하여 감사하며 성령 안에서 기뻐하며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