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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Elijah는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왕상14:1a)라고 소개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여호와”라는 뜻입니다. 바알 숭배가 만연한 당시의 상황에 대한 강한 거부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곧 성민 이스라엘이 섬겨야할 참 신은 여호와이지 바알이 아니라는 강력한 항변抗卞입니다.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시대의 등불과 파수꾼으로 부름 받은 하나님의 교회마저도 물질이라는 거대한 우상에게 완벽하게 사로잡힌 시대를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 역시 선지자와 같은 분명한 자기 성찰과 함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합니다.
또 “바로 그 여호와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 자신의 믿음의 현주소와 정체성에 대한 확고한 고백입니다. 열방 가운데서 거룩하게 구별된 성민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바알과 아세라 숭배에 완전히 매몰埋沒되어 있다는 고발입니다. 선지자가 유일한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었던 여호와로부터 성민 이스라엘을 위한 대사大使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선포입니다. 특히, 그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라고 외쳤습니다. 직역하면 “살아 있는 참 신은 여호와”입니다. 온갖 종류의 우상을 섬기고 있던 시대를 향한 담대한 도전입니다.
바알과 아세라 및 우상 숭배 세력이 지배하는 상황 속에서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이 다시 입을 열기 전까지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당연히 골짜기와 골목의 숫자보다 많을 정도의 우상들과 함께 대표 신격神格인 바알 숭배가 만연했던 성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당시 바알은 땅에 비를 내리는 등 생산력을 주관하는 신으로 알려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고는 바알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는 폭로입니다. 생명 없는 거짓 신에 불과하다는 폭로입니다.
실제로. “오늘...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쏟아 부어 그를 섬겨라. 그리하면 그가 너희 땅에 가을비와 봄비를 철에 맞게 내려주셔서 밀과 술과 기름을 거두게 해 주시고 들에는 너희 가축이 뜯어 먹을 풀이 자라나게 해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는 배불리 먹으며 잘 살게 될 것이다.”(신11:13-15), “구름으로 하늘을 덮어서 땅에 비를 내리시고, 이 산에도 풀 저 산에도 풀, 사람이 먹을 곡식이 나게 하신다.”(시147:8)라는 증거에 따르면, 때를 따라서 적절하게 내리는 단비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결과입니다.
반면, “마음이 변하여 다른 신들에게 끌려 그 앞에 엎드려 섬기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차려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셔서 하늘을 닫으시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어 밭에서 소출을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여호와께 받은 그 기름진 땅에서 이내 사라지고 말 것이다.”(신11:16-17), “여호와께서 비 대신에 티끌과 모래를 네 땅에 내리시리니 그것들이 하늘에서 네 위에 내려 마침내 너를 멸하리라.”(신28:24)라는 증거에 따르면, 농사를 짓지 못할 정도로 땅이 메마르게 되는 가뭄은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을 거두어들이신 결과입니다.
수년 동안 비가 없으리라는 가뭄 예언 역시 하나님께서 은혜와 축복을 거둬들이신 결과입니다. 우상 숭배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선지자 입장에서 볼 때, 왕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에서 선포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절대 다수의 백성들이 왕과 함께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어려운 상황에 전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담대히 선포했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는 또 여호와의 명령대로 사마리아를 떠났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르쳐주신 요단 동편 시내들 가운데 하나로 피신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벌이게 될 능력 대결에 앞서 왕의 즉각적인 위협으로부터 잠시 동안만 피해 있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기까지 잠시 떠나 있어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우상숭배에 대한 징계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가뭄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당장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끊어버리고 말겠다는 왕의 추상같은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누구도 모르는 장소로 은밀하게 잠적해 들어갔습니다. 비웃음을 사고 조롱과 멸시를 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선지자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수치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숭배에 취해 있었던 동족들의 타락한 취향이나 기질에 영합迎合하지도 않았습니다. 영웅이 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하나님께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라는 증거대로, 오히려 자신을 철저하게 내려놓았습니다. 완전히 지워버렸습니다. 여호와로부터 임한 명령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부정하게 여기는 까마귀가 등장했습니다.
까마귀는 주로 시체와 부패한 것들을 즐겨먹는 대단히 게걸스러운 날짐승입니다. 그런 까마귀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여 숨어 있었던 선지자가 먹을 수 있는 떡과 고기를 날라다주었습니다.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선지자의 믿음을 한층 더 강하고 성숙하도록 만들어주는 거룩한 도구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가뭄은 도무지 그칠 줄 모르고 이어졌습니다. 선지자가 숨어 지내고 있었던 시내도 완전히 말랐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선지자에게 사르밧צרפת(차르파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사르밧은 이세벨의 부친 시돈 왕 엣 바알이 다스리던 지중해 연안 도시였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께서는 선지자에게 살기등등했던 이세벨의 고향을 피난처와 은신처 삼아 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던 것입니다. 온갖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던 바로의 궁전에서 탁월한 지도자 수업을 받았던 모세를 연상할 수 있습니다. 기막힌 역설입니다. 동시에 두렵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만에 하나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여호와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고 있었던 이방인을 의지하여 숨어 지내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도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아야할 입장에 있었던 무기력한 과부를 의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단순히 음식을 제공해 주는 차원을 넘어서서 정성을 다해서 보살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민選民이라는 자부심으로 무장하고 있던 성민 이스라엘에게는 그야말로 큰 수치였습니다. 선지자라고 다를 수 없었습니다. 순종하기가 결코 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미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았던, 자신을 완전히 지웠던 선지자는 여호와의 명령에 토씨하나 달지 않았습니다. 잠시 동안 만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기도해 본 다음 결정하겠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이 떨어진 즉시 순종했습니다. 선지자가 도착했을 때, 과부는 거리에 흩어져 있던 나뭇가지들을 줍고 있었습니다. 극도로 가난했다는 증거입니다. 선지자는 과부에게 마실 물을 구했습니다. 가뭄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 지역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이 귀한 상황에서 낮선 나그네의 요구는 여간如干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상당히 당돌한 요구였습니다. 나그네에게 먹을 물 대접하는 것을 신성한 의무들 가운데 하나로 여기던 중근동의 관습에 비춰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놀랍게도 과부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즉시 물을 뜨러 출발했습니다. 선지자는 그런 과부를 불러 세웠습니다. 이번에는 한술 더 떠서 떡 한 조각도 가져오라고 마치 명령을 하듯이 말했습니다. 당시 떡 한 조각은 과부가 가진 전부였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요구였습니다. 과부는 당황했습니다.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있는 그대로 내뱉듯 설명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떡 한 조각을 아들과 나눠먹은 다음 죽으려던 참이었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서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 같았습니다. 동시에 선지자는 과부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ארי(야레)”를 직역하면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대상은 오직 여호와 (한 분뿐)이시다.”입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현실과 미래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한 분만 두려워하라 곧 경외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정서적인 문제는 탁월한 이성과 정연한 논리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없습니다. 차원이 보다 높은 정서에 집중할 때 비로소 말끔하게 해소解消될 수 있습니다. 불확실한 현실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곧 경외할 때, 자신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사도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리라.”(빌4:5-6)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여호와에 대한 두려움 곧 여호와 경외는 지혜의 토대입니다. 고해와 같이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갖춰야할 가장 이상적인 정서입니다. 믿음을 값없이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지극히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더할 나위 없는 평안이 마음과 생각을 파수꾼처럼 지켜주는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지자의 말은 지극히 불확실한 현실과 미래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뜻이었습니다. 동시에 바알을 숭배하는 본 고장 곧 한 복판에서 바알 숭배를 버리고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뜻이었습니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말했습니다. 과부와 아들을 위해서는 그 후에 만들라고 말했습니다. 과부에게 최후의 양식이라는 생각 곧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촉구했습니다. 여호와를 위해서 의지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라고 촉구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을 하나님께서 바치라고 촉구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a)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우선순위의 첫 번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영광 하나만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참된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을 누릴 수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정서적인 상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b)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삶에 필요한 모든 것 곧 먹고 입고 마실 것이 덤으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 역시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왕상17:14)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과부는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선지자의 말대로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혹독했던 가뭄이 그칠 때까지 무려 2년 동안이나 밀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도록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밖에 없었던 소중한 아들이, 어느 날 갑자기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겨우 먹을 것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습니다. 참으로 가련可憐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과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당시 선지자는 과부의 집 다락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다락עליה(알리야)”은 “하늘, 누각, 사닥다리, 계단” 등의 뜻입니다. 지붕 위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낮고 비좁은 공간이 아니라 앞이 시원하게 탁 트여 있었습니다. 통풍이 잘되고 쾌적했습니다. 팔레스타인 같은 뜨거운 지방에서는 집에서 가장 좋은 장소였습니다. 과부가 선지자를 정성을 다해서 대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였습니다.
그럼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너무나 큰 불행을 당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내가 당신을 선대善待한 결과가 겨우 이것이란 말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섭섭하게 한 일이라도 있었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대답이나 위로도 하지 않았습니다. 과부의 품에서 죽은 아들을 취했습니다. 자신이 거하고 있던 다락으로 올라갔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다קָרָא(카라)”를 직역하면 “여호와를 부르다.”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 죽은 아이를 살려내라고 외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과부에게 보내주신 여호와께 집중했습니다. 여호와 한 분만 구했습니다.
여호와의 뜻을 구했습니다. 자신이 과부에게 외쳤던 대로, 여호와 한 분만 온전히 경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이의 호흡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과부의 의심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당신의 위대한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왕상17:24)라는 증거대로, 과부가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선지자와 과부가 결코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경외하고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인가?”입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명령 앞에서 순종할지 말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충분히 기도해본 다음에 결정하겠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이 떨어진 즉시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내려놓았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지웠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을 토씨하나 빼지 않고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그 비결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다.”(엡2:8)라는 증거대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 곧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한편, 선지자의 예언대로 극심한 가뭄이 시작되자 온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상황은 대단히 참혹하고 암담했습니다. 뚜렷한 생계 대책을 마련하기 어려운 과부들의 생활은 더욱 극심했습니다. 대부분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가뭄에 고생하며 굶주려 있던 이스라엘의 많은 과부들이 아니라 큰 도시 시돈의 작은 마을 살고 있었던 이방인 과부에게 선지자를 보내주셨습니다. 은혜를 값없이 베풀어주셨습니다. 구원해주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순종은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허락해주시는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본 다음 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충분히 기도해본 다음 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이 허락하면 그때 가서 순종하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영광이 먼저입니다. 그들에게서 온전한 순종을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시는 믿음으로 무장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온전히 순종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보다 자신이 먼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위대한 신앙의 선진들은 여호와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하나 같이 믿음으로 반응했습니다.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면서도 방주를 지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본토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집트의 바로 앞에 섰습니다.
사도는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핍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들의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전파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높은 보좌를 버리셨습니다. 낮고 천한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세상에 나타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주어지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사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모진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저와 여러분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능동적能動的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수동적受動的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능동적인 순종과 수동적인 순종은 완벽한 하나입니다. 분리되지 않습니다. 능동적인 순종이 없으면 수동적인 순종은 그 자체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수동적인 순종이 없으면 능동적인 순종은 미완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온전히 순종해야 하지만 할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없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순종하셨습니다.
지상에서 생활하는 모든 날 동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은 물론 99.9%가 아니라 100%의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쏟아 부은 완벽한 순종을 습관적으로 추구하셨습니다. 당신을 완벽하게 부인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두 시간, 네 시간, 열두 시간, 심지어 하루 종일 잠시도 쉬지 않고 드리는 기도보다는 당신이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즉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온전히 순종하기를 바라십니다. 그A. W. Tozer는 대표적인 복음주의 목회자 가운데 한 명입니다. 인기에 영합迎合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부패를 비판했습니다. “불신앙은 ‘그때 거기(곧 화려했던 과거)’만 말하고, 신앙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도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바쳐진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종이 되기를 기뻐했습니다. 종이 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종인 자신의 생각은 철저히 내려놓았습니다.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억지로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자발적으로 순종했습니다. 좋을 때만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목이 잘려 죽어야하는 최악의 상황에도 순종했습니다. 순종하기 위해 자신을 철저히 지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만 나타내기 위해서 몸부림쳤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 유명 가수曺芳憲는 “사랑은 아무나 하나?, 어느 누가 쉽다고 했나?”라고 노래했습니다.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것은 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은혜 안에서 값없이 허락해주시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는 바알 숭배에 깊이 빠져 있었던 과부의 경우를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주시는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토씨 하나 달지 않고 즉시, 끝까지,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복된 삶,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된 삶,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만 부어지는 참된 평안이 파수꾼처럼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복된 삶,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 친히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까지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