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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영양 스크랩 영양남씨 처인당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150 14.01.17 14: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처인당(處仁堂)
소 재 지 :  경북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123-1
건 축 주 :  영양남씨 송정공파
소 유 자 :  영양남씨 송정공파

건축 이야기
인량산의 기슭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영양남씨 입향조인 남수(南須)의 생가지에 세워진 별채이다. 주위에는 밭과 마을의 가옥들로 둘려 있다.

건축 구성
처인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누각형 건물이다. 평면은 어칸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인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툇간을 두었으며 툇간의 전면에는 헌함(軒檻)을 두었다. 초익공 5량가구 팔작지붕 건물이다. 기둥은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상부에는 초익공 형식이며 가구는 간략한 5량가 구조이다.
문중 이야기
- 문중이야기
영양남씨의 시조는 중국 당나라 봉양부(鳳陽府) 여남인(汝南人) 김충(金忠)이다. 그는 당나라 현종 때 일본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풍랑을 만나 지금의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죽도에 기착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데, 신라 경덕왕(755년)이 남씨(南氏) 성을 하사하고 영의공(英毅公)에 봉하자 이름마저 민(敏)으로 바꾸었다. 시조의 묘소는 영양 일월산 부용봉 아래 현재의 영양군 영양읍 동부리에 모셔져 있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에 시조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의 후손인 홍보(洪輔), 군보(君甫), 광보(匡甫) 3형제가 나라에 큰 공을 세워, 홍보는 영양군(英陽君)에, 군보의 차자 익지공(益?公)은 의령군(宜寧君)에, 광보는 고성군(固城君)에 봉해짐으로써 3개의 본관(영양남씨, 의령남씨, 고성남씨)으로 분파된다. 다시 영양남씨는 대광공파(大匡公派)와 밀직공파(密直公派)로 나누어진다.
대광공파 중 1명인 울진 입향조는 2010년 현재로부터 약 600년 전 1400년경으로 추정된다. 고려말 홍보공(洪輔公)의 7세손인 내시원신호위보승중랑장(內侍院神虎衛保勝中郞將)이었던 남영번(南永蕃)으로 그의 묘소는 죽변면 화성1리에 있고, 매년 음력 10월 2일 제사를 올린다. 그는 네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호(顥)는 만호공파(萬戶公派), 이(?)는 현감공파(縣監公派), 영(領)은 반송공파(攀松公派), 막내 수(須)는 송정공파(松亭公派)를 이루었다. 반면 밀직공파는 부사공파, 중령공파, 수의공파, 회령공파, 만호공파, 목사공파, 진사공파, 별시위공파, 사직공파, 중랑장공파 10개 파로 분파되었다. 현재 남한 전역에 분포한 남씨 족인 수는 모두 약 8만 가구에 26만 명으로 그 중 의령남씨가 가장 번성하여 전체의 약 2/3를 차지하고 다음으로 영양, 고성 순인데, 우리나라 성씨별 인구순위는 30위이다.
영해 입향조인 울진 입향조 남영번의 막내 수는 세종 조에 감찰어사와 용담헌령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인량에 거주하고 있던 대흥백씨 백승의 딸과 혼인하여 인량에 정착하였다. 남수의 후손들은 인량, 원구, 괴시, 가산, 옥금, 묘곡, 거무역, 칠성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한다.

관련인물
- 남수(南須, 1395~1477)
본관은 영양, 호는 송정, 세종 대 직장, 주부, 사헌부 감찰, 용담현령을 역임하였으며, 울진으로부터 창수면 인량리에 옮겨 살았다. 중랑장 남영번(南永蕃)의 넷째 아들이자 만호(萬戶) 남호(南顥)의 아우이다. 1417년(태종 17)에 과거에 등재하여 1425년(세종 7)에 서사(筮仕)에 올랐고, 1439년(세종 21)에 통찬(通贊)에 올랐으며, 1440년(세종 22)에 승훈(承訓), 1444년(세종 26)에 감찰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용담군수(龍潭郡守)가 되었다. 용담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 단종의 손위(遜位)를 전해 듣고 1448년 봄에 고을에 돌아와 단종 사당에 문묘하였다. 그 후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산수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성균전적겸남학교수인 헌납(獻納) 김대(金臺)가 남수의 정절을 칭찬하여 “어물어물하지도 않고 굴하지도 않는 것은 순수한 덕성이요,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누워 쉰 것은 절의를 숭상함이요, 끝까지 옛 주상을 잊지 못하는 것은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라 하였다. 남수의 활동 사항은 『장릉사보(莊陵史補)』와 『매월당집』 등에 기록되어 있다.
- 남달만(南達萬, 생몰년미상)
본관은 영양, 호는 처인당, 재주와 지략이 있고, 증직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받았다.
- 남영번(南永蕃, 생몰년미상)
고려 후기 경상북도 울진 지역에 은둔한 문신이다. 본관은 영양(英陽). 시조는 신라 때 영의공(英毅公) 남민(南敏)이고, 분파조는 고려 때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남홍보(南洪輔)이다. 아버지는 종부시령판사(宗簿侍令判事) 남승고(南承顧)이다. 부인은 강릉최씨(江陵崔氏)로 최유의(崔有?)의 딸이다. 맏아들 남호(南顥)는 만호공파(萬戶公派)의 시조가 되었으며, 둘째 아들 남이(南?)는 현감공파(縣監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셋째 아들 남영(南領)은 반송공파(攀松公派)의 시조가 되었으며, 넷째 아들 남수(南須)는 송정공파(松亭公派)의 시조가 되었다. 신호위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으로 재임 중이던 1380~1390년경 고려 국정의 어지러움을 보고 울진에 은둔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송가문(誦歌門)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묘이다.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화성리 화방동에 있는 상현사(尙賢祠)에 남사고(南師古), 남계명(南季明)과 함께 배향되었다.
- 남기만(南基萬, 1730∼1796)
처인당 남달만의 종종형(宗從兄)이다. 국규(國珪)의 아들이며 경상도 영해(寧海) 인량(仁良)에서 태어났다. 1774년(영조 50)에 증광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선보(選補)되고 사변주서(事變注書)를 지냈다. 1777년(정조 1)에 홍인계(洪麟溪), 정후겸(鄭厚謙)의 국옥(鞫獄)에 참여하고 그 해 9월에 환향하였다. 1786년에 전적에 오르고, 1788년에 감찰로 전임되었다가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다. 1795년에 도신(道臣)과 수령(守令) 및 도유(道儒)들의 천거로 사간원 정언에 특제(特除)되었다.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성력도수(星曆度數), 참동계(參同契), 납갑법(納甲法) 등 역학에도 밝아 당시 영남에서 제일가는 선비로 이름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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