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광해군이 제주에 귀양와서 4년을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위리안치의 유배형속에 67세로 숨졌다.
광해군이 죽기 1년전 제주목사로 이시방이 부임하였다.그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내쫒은 이귀의 둘째 아들이었다.그는 푸짐한 음식을 장만하여 광해군을 찾아 왔다.
광해군은 이시방에게 말했다.‥폐주에게 목숨을 붙어 있게 해주신 것만도 임금의 하해같은 은혜임을 알고 있소.그러나 고해 같은 삶을 빨리 마감하는게 내 소원이요.아마도 나는 해를 못 넘길것 같소.
하지만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말씀 하시지요.
나는 세상사에 아무 미련도 없지만 단 한가지 소원이 있다면 김만일이 일궜다는 산마장과 그의 묘소를 은밀히 다녀 오고 싶소.
알겠습니다.남 몰래 나귀 한마리를 올레 앞에 매어 둘테이니 알아서 하십시오.지키는 포졸도 폐한지 오래 되었으니 말입니다.
광해군이 4년간 제주 유배생활 하면서 처음으로 집밖으로 나온 인연이다.그는 제위에 있을때 제주도 김만일의 도움을 받아 기마부대를 만들어 북로남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조선의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것이다.제주에서 조련한 말을 아낌없이 헌상한 김만일에게는 헌마공신의 직위와 종2품의 벼슬을 내렸다.
김만일은 제주 의귀리에 살면서 한라산 일대 산마장을 만들어 1만마리 이상의 말을 길러 선조.광해군대에 조정으로 군마를 보냈던 사람이다.
광해군은 허름한 나그네 차림을 하고 나귀를 타고 산마장을 지나 김만일의 묘소를 찾았다.
광해군은 김만일의 묘소에 하염없이 앉아 있더니 혼자말을 하며 일어났다.‥
나는 사람의 왕노릇을 하다 낙마하여 지옥으로 떨어 졌으나 그대는 말의 왕노릇을 하다 용마를 타고 하늘에 올랐구려.‥광해군은 김만일 묘소를 찾아보고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죽으면서 어머니 무덤곁에 묻어 달라고 한 유언에 따라 남양주시 진건읍 봉인사 입구에 군묘의 형식으로 간단하게 봉안되어 있다.
봉인사에는 광해군의 불심을 전해 주는 이야기와 사리탑이 전해진다.
임진왜란으로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고 광해군이 분조를 이끌면서 의병을 모집하고 전장을 누볐다.한번은 광해군이 왜군들에게 포위되어 위험에 빠졌을때 승장 부휴대사의 도움으로 빠져 나올수 있었다.
광해군은 즉위 4년에 부휴대사를 내전으로 불러 불교의 법을 묻고 금란가사와 선물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부휴대사가 머무는 봉인사에 직접 행차하여 재를 베풀기도 하였다. 광해군은 즉위후에 생모에 대한 추존작업을 한다.공빈김씨를 추존하여 공성왕후로 하고 묘호를 봉자전.능호를 성릉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 보내온 부처님 사리를 봉인사에 봉안하여 어머니의 극락왕생과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었다.광해군의 발원으로 만들어진 사리탑은 일제때 일본 고베로 반출되었다가 오사까 시립미술관 뜰에 전시되었다.
봉인사는 전란으로 불타 없어 졌다가 한길로스님이 옛터를 찾아 복구하였다.그리고 봉인사 사리탑이 일본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소유자인 이와다 센소에게 편지를 보내고 직접 만나 사리탑을 원고향으로 되돌려 줄것을 호소하였다.이와다 센소는 죽으면서 사리탑을 한국으로 돌려 주도록 유언하였다.
우리 정부에서는 황수영박사를 단장으로 광해군 사리탑의 환수를 추진하였다.
1987년 2월에 한국에 돌아 왔고 문화재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928호로 지정되었다.보통 사리함은 동함.은함.금함의 3중함에 모시는데 광해군 사리함은 7중 보함으로 이루어져 그 기법과 정성이 주목 받고 있다.
은제 사리함의 바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기록되어 있었다.세자 무술생(1598년) 수복무강 성자창성 만력 48년 경신 5월(광해군 12년 1620년) 세자의 만수무강을 세존의 사리를 모시는 공덕으로 빌고 있다.그러나 역사는 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폐주가 된 광해군과 비 유씨 폐세자 이질과 빈 박씨등을 강화에 안치하되 각각 동문 서문에 유배시켰다.
본시 한 뿌리인데 어찌 이다지 박대하는고 이치로는 마땅히 불쌍히 여겨야 할것을 어떻게 이 조롱속에서 벗어나 녹수청산에 마음대로 오갈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