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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에 대한 축복
창세기 48:1~16
우리는 그 동안 요셉에 대해서 여러 시간 생각했습니다. 요셉은 특수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존재는 마치 오리들 사이에 있는 한 마리의 백조와도 같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다른 형제들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요셉은 소년시절부터 그의 깊은 생각과 거룩한 생활이 이미 장성한 사람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그는 일찍이 성숙한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렇다고 일찍이 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것때문에 사실 요셉은 특별한 시험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형들의 시기 때문에 큰 괴로움을 받다가 종래는 애굽에 가는 대상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었고, 거기서 무거운 시련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여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습니다” 한 말씀대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떻게 갚아 주셨나 하는 것을 보십시오. 요셉은 그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말씀하신 대로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의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것처럼 이것이 특별한 경우였다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 또한 그들과 달랐습니다.
이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나이가 많아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웠을 때 야곱은 다른 형제들이 공통적으로 받은 축복들 외에 그에게 있는 모든 축복을 전수해 주었습니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너희는 모여 들으라 야곱의 아들들아 너희 아비 이스라엘에게 들을지어다”라고 말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족들이 모여서 야곱이 선지자적인 혜안을 통해서 본 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전에 “믿음으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은밀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요셉의 고난이 얼마나 컸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위로 또한 컸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가운데 정말 견디기 힘든 어려움에 직면하신 분이 계십니까? 지금 당하는 슬픔과 어려움이 도리어 은혜로 바뀌어질 날이 반드시 오리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형제나 이웃이 내게 주는 그 고통이 비록 내게는 한없이 괴로워도 오히려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의 계시는 항상 육체의 가시를 동반하게 되어 있어서 우리를 아프게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에게는 육신의 가시가 있어서 그를 찌르고 아프게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육신의 가시를 제거해 주신 것이 아니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네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하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고통과 슬픔이 어떠하든지 요셉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게 해 주실 날을 주실 것입니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라는 이름의 뜻이 “하나님이 나로 나의 모든 고난과 나의 아비의 온 집일을 잊어버리게 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아들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로 나의 수고한 땅에서 창성케 하셨다.”는 뜻의 이름이었습니다. 주 안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신 여러분에게도 이와 같은 축복이 안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장차 받으실 축복으로 모든 사람보다 승하게 될 것을 믿읍시다.
그 축복이 이렇습니다. “네 아비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우리에게 내려오는 말 중에 “젊어서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산다.”고 했는데 젊어서 고생하고 멍에를 매는 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유익이 되는지 모릅니다. 젊어서 고생의 멍에를 매면 하나님께서 그 어깨 위에 정사를 매게 하실 때 거뜬히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보면 야곱이 병들었다는 말을 전해들은 요셉은 그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그 아버지 야곱에게 갔습니다. 아들과 손자들이 왔다는 말을 듣고 침상에 누워 있던 야곱이 힘을 내어 일어나 앉아 요셉에게 축복을 빌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함으로 요셉을 축복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들의 자녀들에게 임하는 것이 가장 귀한 축복인 것을 말해 줍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축복 받는 것을 보고 요셉은 이중적인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부모의 기쁨이 무엇입니까? 자녀들이 잘되고 축복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 사도 요한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산다는 말을 듣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젊은이가 많이 계십니다. 여러분의 부모의 소원이 무엇인지 아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적인 출세는 치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면 그밖에 모든 것은 자연히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기도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의 기도하시는 그대로 다 이루어져 믿음으로 살므로 의인의 후손이 받는 축복을 다 받아 누리시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역시 택하신 백성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주신 다음에는 이들의 자녀들을 같은 언약에 참여케 하는 것보다 더 큰 은총이 이 땅위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되신 분들은 최선을 다하여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와 같은 거룩한 기업을 이어 받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요셉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손을 이끌고 할아버지 야곱 앞으로 인도해간 것처럼 우리도 자녀들을 이끌고 복의 근원인 주님께로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자녀들이 참석하는 모임에는 우리의 관심이 소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위하여 축복을 얻을 기회를 잡기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 부모는 자녀들이 스스로 축복의 길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물질적인 부와 세상의 것으로 지위가 더해 가는 부모가 정신을 차려야 할 일은 우리가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 누리는 특권이 자녀에게 꼭 유익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富)하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세상에서 부모가 가난해서 자녀가 탈선하는 경우보다 부하기 때문에 탈선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는 경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애굽의 총리 대신 요셉의 두 아들은 여러 가지 유혹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옳은 길로 들어섰습니다. 아버지 요셉의 열성으로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죽은 선조들의 축복을 기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에 살았지만 그들에게선 애굽의 왕과 귀족들의 종교에 기울어진 흔적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요셉의 아들들은 오직 그 아버지의 신앙만을 따른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에게 이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손자들을 축복할 때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했습니다. 야곱은 “내 조부 아브라함과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이라고 증거했습니다. 이 말은 곧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생을 출발하는데 있어서 먼저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는 물려줄 것이 없다고 하지만 자녀들에게 하나님만을 물려주면 수백 수천억원의 재산을 물려주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야곱은 모든 죄에서, 만년의 모든 죄에서까지 구속을 받고 잠들었습니다. 그의 육신의 눈은 어두워졌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 육신의 눈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지각에 의해서 되는 것입니다. 야곱이 만년에 이르렀을 때 육신의 눈은 점점 어두워 갔으나 하나님의 비전은 더욱 선명해 갔습니다.
육체의 기능이 쇠하여 갈수록 은혜의 기능은 점점 더 성장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받기를 원했던 그런 축복 가운데서 자신의 생이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만 아니라 믿음으로 산 사람들의 마지막이 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세요. 그가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디모데 후서입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눈이 어두워서 직접 글을 쓰지 못하고 대필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모데 후서 4장에,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여러분, 이것은 이 세상을 떠날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육감으로 느끼면서 하늘을 바라보며 승리의 개가를 부른 것입니다.
이 시간 제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 중에 연로하신 어른들께서 야곱처럼 바울처럼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고, 육신의 눈은 점점 흐려지나 신령한 눈은 점점 밝아지고, 육신의 귀는 멀어지나 신령한 귀는 점점 밝아져서 하늘에 소망을 더욱 튼튼히 붙잡고 하나님의 음성을 똑똑히 듣고 하늘에 마련된 면류관을 바라보시며 인생의 경주를 끝까지 잘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한 것 네 가지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1. 야곱은 선조들의 자비를 말했습니다.
15절에 “그가 요셉을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존재자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야기하고,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친구였으며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즐겼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조상을 가진 자녀들은 실로 복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인식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상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이란 말씀은 그들의 평범한 생활 가운데서 그들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만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매사를 하나님 앞에서 행했습니다.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 드릴 때만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생활 사사건건에서 하나님과 함께 일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떠난 적이 없었습니다. 상수리 나무 아래 있든지, 우물 곁에 있든지, 나그네를 영접하든지, 들에서 양을 칠 때든지 항상 하나님 안에 살았고 그 안에 움직였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바로 그래야 될 것입니다. 사무실에서, 가게에서, 학교에서, 병원에서, 공장에서, 부대에서, 농토에서, 광내에서, 부엌에서‧‧‧‧‧‧ 어디서든지 하나님과 함께 하고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생활, 이것이 곧 신앙 생활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순례의 길에는 많은 위험과 고난이 처처에 쌓여 있었지만 주께서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므로 대적의 땅에 살면서도 완전한 안전이 보장되었고, 평안하게 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행했고 하나님은 자기의 친구요, 방패가 되시며 큰 상급이심을 알았으므로 흔들림이 없는 평정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충만한 하나님을 믿고 살았으므로 이 세상의 물질적인 면에서는 전혀 염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래도 평화로운 생활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었지만 하늘로 더불어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다는 기사를 볼 수 있고 또 이삭에 관해서도 “하나님이 정녕 그와 함께 하심을 우리가 보았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의 부요, 능력이며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처럼 조상의 축복이 되신 하나님께서 그의 후손에게도 하나님의 복의 근원이 되기를 축원한 것입니다.
2. 그의 후손에게 개별적으로 축복했습니다.
15절 하반절을 보세요.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씀은 “내 평생에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이라고 번역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하나님을 자기의 목자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자기 자신이 목자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목자라는 말의 의미를 그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많은 비유적인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시 23편을 기억합니다. 여기 나오는 시제(時制)를 바꾸어 생각해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를 과거로 바꾸어 보세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셨으므로 내가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셨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셨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녔을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신 사실을 증거하십시오. 그러면 많은 다른 양떼들을 그의 목장으로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양은 완전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에 하나님은 분명히 야곱을 일생동안 기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실 때 하나님은 우리의 일생을 책임지고, 이끌어 주시고, 지켜주시고, 먹여주십니다.
야곱의 일생이 시작될 때 그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무명의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집을 떠날 때 보따리 하나를 들고 있었을 것이고, 밤에 누워 잘 때 돌을 베개하고,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침대 삼아 이슬을 맞으면서 노숙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는 자기의 길을 스스로가 개척해야만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생동안 하나님이 언제나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처음이나 나중이나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한없는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네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
여러분, 과거에 빈손으로 시작해서 오늘의 번영을 가져오셨습니까? 내 재능, 내 수완, 내 실력, 내 노력으로 오늘의 성공을 누린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교만입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서 나를 기르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목자는 양떼를 앞서 가시며 인도하십니다. 사실 갈 길을 알지 못하고 헤매이는 우리의 앞길을 주님이 먼저 가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목자되셔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만 가면 거기에 잘못될 염려가 없는 것입니다. 야곱이 가정에서 부모의 슬하에 있을 때도, 유랑의 길을 떠났을 때도, 가나안에서든지, 고센땅에서든지 하나님은 항상 그에게 목자가 되셨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여정 길을 바로 가기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목자로 삼으세요. 우리의 갈 길을 다 가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승리적으로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3. 환난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16절 상반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일생을 통해 볼 때 항상 그가 빠져 나오기 어려운 궁지에 몰리게 되면 구속의 사자가 언제나 간섭하였습니다. 야곱은 일찍이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서 그 형 에서에게도 몹쓸 짓을 했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보존하려고 멀리 도망을 쳤는데 이때 그와 하나님 사이에는 큰 틈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사자가 내려와서 사다리로 그와 하나님 사이에 다리를 놓아 야곱이 하나님께로 일어나 갈 수 있게 했습니다.
그 후에 머나먼 밧단 아람에 가서 살 때 사기꾼 라반과 서로 속임수의 대결에 불을 튀길 적에 다시 깊이 침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도 천사가 와서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 네가 출생한 곳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노에 가득 찬 라반을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노여워하는 에서가 야곱에게 다가올 때도 천사가 그들 사이에 나타나 화목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과 씨름하여 과거의 그를 새 사람으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환난 가운데서 구속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병들어 누워 있을 때 주님이 찾아 주시고 능력의 오른손으로 어루만지시며 모든 병에서 건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매일 매사에 하나님과 더불어 사십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말씀대로 순종하십시다. 하나님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목자로 삼으십시다. 과거에 함께 하시고, 길러 주신 하나님께서 앞날도 보장해 주실 것을 믿습시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어려움에 봉착하신 분 계십니까?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가 팔을 벌리고 주님을 부른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저녁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