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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8
그래도 희망해야 합니다 / 김충식 목사
일반적으로 엘리야하면 강하고 능력 있는 선지자 또는 불의 선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도 시련을 만날 때에 실의와 좌절감에 빠지는 연약한 선지자였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엘리야 선지자를 보면서 우리도 지치고 힘들 때에 낙심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올 때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아니하였지만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을 때의 상실감으로 인한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때는 그것이 명예나 자리일 수 있고, 자녀나 남편일수도 있고, 부모일수도 있습니다.
어느 때는 물질일수도 있고 사업일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에 대한 기대감이 충족되지 아니하거나 그것을 잃었을 때에, 다른 사람들이 판단할 때에는 별것이 아닌 것 같아도 자신에게는 심각한 문제이고 낙심할 수 있는 문제들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행복전도사라고 일컬었던 최윤희씨 부부가 자살을 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녀는 방송인으로서 실의에 잠긴 사람들에게 희망과, 생의 의욕을 주었고 불행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애를 쓰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녀도 질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할 때에 그것을 극복할 수 없었고 결국은 죽음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과거에도 모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유명 인사들이 인간이 안고 있는 좌절과 절망으로 생을 포기하는 경우를 많이 목격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래도 희망해야 한다’는 말씀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엘리야선지자는 선지자중의 선지자로 일컫는 사람이었지만 그도 시련을 당할 때 크게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로 하여금 모든 실패를 이기게 하시고 굳게 설 수 있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엘리야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들도 더욱 희망하는 존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항상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시련을 당할 때에 그대로 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아합왕 때에 도입한 바알과 아세라 신앙으로 인해 온 민족이 종교적 및 도덕적인 타락을 합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어 아합 왕을 책망하였습니다. 아합왕 시대에 이스라엘이 번영하고 잘 살게 되었는데 그들은 그 이유가 농경신인 바알과 아세라의 축복으로 되어진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신은 바알과 아세라가 아니라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수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아니하고 이슬도 없겠다는 말씀을 선포합니다.
엘리야의 모습을 보면 돈키호테처럼 무모하고 당돌하기까지 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선포는 반국가적이고 불순한 발언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쫓기는 신세가 되었고 비가 오지 아니하고 가물었기에 자신도 거처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보내셨고 그곳에서 까마귀를 통해서 떡과 고기를 물어다가 연명하게 하셨습니다. 계속된 가뭄으로 그릿 시내에도 물이 말라서 그곳에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이방 나라인 시돈으로 보냈습니다.
시돈은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의 고향나라입니다. 바알의 종주국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곳에서 사르밧 과부의 섬김을 받으면서 가뭄의 시기를 무사히 넘기는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이 시사해 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주리고 배고픈 시련을 당할 때에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탐욕스럽고 게걸스러우며 시신을 먹는 부정한 새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의 생계를 유지시키기 위해서 그 추하고 더러운 새까지 동원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을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자연계를 주관하시는 분으로 자연세계의 그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의 사람을 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기름통에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를 공궤하므로 가뭄을 잘 넘겼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일부는 맞습니다만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기적을 일으키게 하신 것은 먼저 엘리야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나라 여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3년 동안 섬기게 하시며 엘리야를 돌보신 것입니다. 말이 몇 년이지 부부가 아닌 남을 오랫동안 섬긴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남은 단 며칠만 함께 있어도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가까운 사이라 할지라도 서로 불평하고 미워하는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3년씩이나 엘리야를 섬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고 그만큼 엘리야를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처음에는 까마귀를 통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사람을 통해서 엘리야를 돌보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인 우리도 시련을 당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수 있고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은 까마귀를 보내시던지 아니면 이방 여인을 보내셔서라도 우리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돌보실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의 생명을 끝까지 지키십니다.
3년 반의 가뭄이 끝날 때에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아합에게 가서 이제 비를 내리겠다고 하여라” 하십니다.
엘리야는 망설임과 두려움 끝에 아합왕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아합 왕에게 바알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가 믿는 신과 자신이 믿고 있는 신 중에 누가 참신이냐 하는 내기를 하자고 건의합니다. 아합왕이 동의하여 갈멜산 꼭대기에서 나무로 제단을 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 놓은 후에 주변에 도랑을 파고, 물을 제물과 나무에 붓고 도랑에 가득 채웁니다. 엘리야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을 서로 불러서 제물을 태우는 신이 참신이신 것을 증명하자고 했습니다. 주변에는 많은 백성들이 엘리야와 이방 제사장들이 하는 시합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이 먼저 그들의 신을 부릅니다.
그들이 광란의 춤과 요란한 의식을 행하면서 바알신을 부르지만 응답이 없습니다. 급기야 그들의 몸을 칼로 찢어 피를 흘리면서 부르짖는대도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여호와 하나님을 찾고 부를 때에 불이 내려서 제물만이 아니라 물에 젖은 나무와 흙을 태우고 도랑의 부은 물까지 핥았습니다. 결국은 엘리야가 승리하게 되었고, 바알 선지자와 아세라 선지자들은 모두 그곳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지 모릅니다.
이제 엘리야는 이 일로 인하여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백성이 될 줄 알았습니다. 자신의 생애도 지금부터는 크게 대우받고 인정받는 삶이 될 것이라는 추측도 해봅니다. 아마도 아합왕이 그를 이스라엘의 고문으로 추대할 것이라는 기대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 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의 죽음에 격분하여 내일 이맘때까지 엘리야의 생명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이때에 엘리야는 크게 낙심하게 되었고 두려움에 떨면서 죽음의 공포심을 느끼며 삶의 의욕을 상실합니다.
엘리야는 브엘세바로 내려와서 사환을 그곳에 남겨 두고 혼자서 광야로 들어갑니다. 엘리야는 좌절과 허탈감으로 어쩔줄 몰라하면서 인생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전사라 할 수 있는 엘리야가 이렇게까지 나약한 존재로 떨어진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불과 하루 전까지 대단한 위엄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심약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인간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기를 탄원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합니다.
넉넉하다고 하는 것은 다 끝났습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 끝났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좌절하고 희망을 잃었으면, 이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엘리야는 자신이 종교개혁을 하고 왔기에 이제는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세상은 하나도 안 달라지고 오히려 자신만이 위기를 당하는 것이 납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의 의욕을 상실한 엘리야에게 이번에는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가 첫 시련을 당했을 때에는 까마귀를 보내시어 돌보시고 그 다음에는 사람을 보내어 섬기게 하시더니 이제는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가 먼길을 오느라 지치고 기진맥진하여 잠이 들었을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갖다 놓고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엘리야는 그것을 먹고 원기를 회복하여 40일 동안 호렙산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서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들도 어느 때는 이처럼 허탈감에 빠지고 더 이상 일어설 수 없을 것 같기에 차라리 죽었으면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에 천사를 보내셔서 지치고 힘들어 생의 의욕을 잃은 엘리야의 생명을 지키시고 인도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하실 것입니다.
힐튼 호텔(Hilton Hotel)을 아실 것입니다.
호텔 왕 힐튼의 성공비결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에 어머니로부터 늘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힐튼아, 앞으로 네게 무슨 일이 닥쳐오더라도 실망하지 말아라 오직 여호와께 아뢰어라 그 분이 너에게 힘과 용기를 줄 것이다.’ 어린 힐튼은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어머니의 말씀이 마음 한 구석에 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가 사업을 할 때에 역경을 당하여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어머니의 말씀이 힐튼으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해주었고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얻어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마지막이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라도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낙심천만하여 의욕을 잃은 엘리야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셔서 삶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엘리야가 살아야 할 이유를 주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호렙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어찌하여 네가 여기 있느냐” 하십니다.
이때에 엘리야는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왕상19:10) 대답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바알과 아세라 신앙에 물들었는데 갈멜산에서의 승리로 인하여 이제는 백성들이 변화되어야하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엘리야의 생명이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하나만 남았다고 하나님께 투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왕상 19:11)하십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로 나아갈때에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현현이 바람이나 지진이나 불 가운데에 나타나신 것이 아닌 불 후에 세미한 소리로 다가오셨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지금까지 기적과 능력이 있는 곳에 사람들의 변화가 있을 줄 알았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울 때에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여서 하나님의백성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3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때 기도함으로 비가 쏟아지면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적과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심령의 변화는 불이나 강한 바람 지진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세미한 소리로 이루어지는데 그 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에 찾아오셔서 강퍅한 마음을 움직여 주실 때에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고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고, 예후에게 기름부어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엘리야의 후사가 되게 하라”(왕상 19:15,16)는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이어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이 너 혼자인줄 아는데 바알이나 아세라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이 이 땅에 7,000명이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혼자라는 자만심과 교만을 버리고 겸허히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낙심하고 좌절하여 이제는 더 이상 무슨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엘리야에게 다시 해야 할 일과 살아야 할 이유를 가르쳐주시고 하나님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시므로 그로 하여금 굳게 설 수 있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영적 암흑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유지시키시고 새로운 의욕으로 사명을 감당토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마지막이라 생각할 때에 오히려 더 큰 일을 맡기시고 희망을 주십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에녹과 더불어 죽지 않고 승천한 두 인물 중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콜롬버스(Columbus)가 미 대륙을 발견하였습니다. 신대륙을 향해 항해를 하는데 많은 난관과 곤란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키려 합니다. 어느 때는 선원들이 콜롬버스를 죽인다는 위협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그 일을 밀고 나갔습니다. 후에 그가 쓴 항해일기를 보니 매일같이 첫머리에 “We sail west” (우리는 서쪽으로 간다)는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아무리 낙심하고 좌절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잃지 않은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않는 것”(고후4:8)은 생명 되시는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희망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한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야곱도 얍복 강가에서 형 에서로 인하여 절대 절명의 위기 앞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입니다.
요셉도 형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던지 애굽에 팔려서 절망하며 살수밖에 없던 사람입니다.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큰 집단을 인도할 때에 여러 번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던 사람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 차라리 제 생명을 거두어 가십시오’ 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들과 함께 하시어 결국은 시련과 난관을 극복케 하시고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해야 합니다. 아무리 큰 시련과 난관이 있더라도 그래도 희망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