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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혜광학교
01
설렘이 가득했다. 엄청 추운 날씨였는데도, 인천 혜광학교까지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갈아타서 가는 그 시간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나면 뭐라고 먼저 인사를 해야할까?', '애들이 불편하지 않게 해줘야지!' 하며 온갖 다짐을 하고, 희란 쌤이 말씀해주신 주의사항들을 다시 꼭꼭 새기며 갔다. 뭔가 모든 것이 잘 될 것만 같았고, 모든 것을 잘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영이언니, 수빈언니가 독감이 걸려서 전날에 못 온다고 연락이 와서 정말 걱정이 되었지만, 그래도 많아봤자 4명일거라는 말에 안심하고 있었다.
교실에 들어가니, 노란색 패딩을 입은 조그마한 친구가 앉아있었다. 인사를 해야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노란패딩을 입은 그 친구는 우리에게 입술을 떼고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고 인사를 했다. 혜광학교에 오며 짜 놓은 그 완벽한 계획은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내 것이 아닌게 되었다. 속상했지만 용기가 없었다. 너무너무. 노란패딩을 입은 그 조그마한 친구의 이름은 예은이었다. 나는 멀리 떨어져서 친구들 주변에서 예은이를 보고있기만 했다. 예은이의 짝은 지민선배였다. 지민선배는 예은이의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 놀고 있던 모두가 예은이와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예은이가 나랑 짝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나랑 짝을 하고싶어 했을까, 그치만 서툰 나를 좋아해주는 예은이에게 고마웠다.
예은이가 오늘 온다는 친구들을 말해줬는데, 족히 10명은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7명이 왔는데, 하며 다시 조금 걱정이 되었다. 사실 다는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예은이가 말해준 그 많은 친구들이 모두 교실을 꽉 채웠다. 친구들이 많이 와줘서 기분이 좋았지만 잘 하지 못 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
친구들이 다 오고, 유찬이가 노래를 부르고 예은이와 서현이가 노래를 불렀다.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마스 노래 중 하나였다. 유찬이는 정말 피아니스트 같았다. 손끝으로 피아노 선율을 느끼고, 그 안을 채우는 것이 너무 멋있었다. 예은이의 목소리는 꾸밈이 없는 순수한 목소리였다. 그냥 예은이. 예은이의 목소리였다. 서현이의 목소리는 얇고 고왔다. 마치 새가 노래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는, 그런 목소리였다. 그런 셋의 노랫소리가 너무나도 예뻐서 내일도, 모레도, 계속 들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치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았다.
만나서 반가워요 대신에 새해 소망(?)을 했던 시간은 함께한 친구들의 소원들, 깊은 곳을 알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치만 마지막에 직접 정하는 소원에서 예은이는 소원이 없다고 말하였다. "딱히 없는데" 그 말을 반복하며 그냥 음료수를 마시려고만 했다. 그래서 예은이 소원일 것 같은 여러가지를 제시해줬는데, 예은이는 그 모든 것이 다 좋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말해준 "노래를 더 잘 부르게 해주세요"의 소원을 말하였다. 예은이의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마음이 울컥했다. 나도 소원이 없다. 맨날 "~하는 게 내 소원이야" 하지만, 나의 정말 간절한 소원을 나는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냥 남들 말에 휘둘릴 뿐이다. 누군가의 욕망을 갈구하고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예은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나도 잘 모르는 입장에서 함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많이 미안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 반응해주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사소한 것들에 웃음짓고, 그 미소로 서로를 안아주는 친구들의 순수함이 너무 좋았다. 집에 가는 발걸음도 즐거웠지만, 체력이 너무 안 좋았던 탓인지, 집에 가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02
오늘도 예은이는 제일 먼저 왔다. 그래도 오늘은 영이언니, 수빈언니가 와서 다행이었다.
핑거니팅, 손가락으로 목도리를 떴다. 시각장애가 있는 이 친구들에게는 귀로만 설명을 듣고 하기에는 조금 힘겨워보였다. 그치만 서로 손을 맞대고 하면서 더 친밀감이 높아진 것 같았다. 예은이는 핑거니팅이 서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다 하고싶어했다. 그런 모습이 되게 기특했다. 나라면 그냥 "나 조금만 하고 언니가 해주면 안돼?!"하고 했을텐데. 예은이도 조금은 힘들었는지, 한 코를 할 때마다 계속 "언니, 이거 언제끝나?" 하며 재촉했다. 그 때마다 조금만 더 하면 돼! 하며 도와줬지만 결국은 다 끝내지 못해 그 이후 시간에 계속 손에 털을 감고 있었다. 아, 예은이가 핑크색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색을 아는지 신기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이야기가 상처가 될까 두려워 말하지 않고 핑크색 실을 감았다.
'완벽한 아이 팔아요'라는 책을 읽어주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되게 좋았는데, 친구들은 별로 재미없어 보였다. 아마 그림까지 직접 같이 봐야 더 스스로에게 감동을 줄 수 있었던 책 같다. 그치만 그런 엉성한 준비에도 호응을 해준 친구들이 좋았고, 지아가 재미없다고 한 것 까지도 솔직한 그 마음에 기분이 너무너무 좋았다. 예은이는 점자를 되게 잘 읽었다. 그치만 몇몇 책들에 있는 점자가 느껴지지 않아 힘들어했다. 예은이가 나에게 책을 읽어준다고 열심히 읽었지만, 그 책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래서 중간에 예은이가 조금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세아는 인기가 참 많았다. 많은 친구들이 세아를 좋아했다. 예은이도였다. 그래서 핑거니팅을 한다고 예은이를 잘 못 봐줬는데, 그 때마다 세아를 끌어안았다. 그치만 내 눈에는 그 모습이 좋아하기보다는 괴롭히는 걸로 보였다. 그래도 예쁜 말만 해줘야겠다는, 그런 생각에 타이르지는 않고 말투를 조심하며 이야기 했던 것 같다. 그치만 예은이는 고집이 있는 아이였다. 그래서 그런 모습들을 신경쓰는게 힘들었다.
친구들이 모두 가고, 밥을 먹으러 가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는데 희란쌤이 예은이의 관한 이야기를 했다. 예은이가 산부인과를 가겠다고 한 이야기도, 그리고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에서도.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부정적 관심을 즐긴다. 문제를 만들어 모두의 관심을 받고 싶어하거나, 자신을 망치고 자기를 신경 써주기를 바란다. 짜증나는 것이 아니었다. 안쓰럽고, 속상했다. 이해가 되고 나서도 잘 모르겠었다. 예은이의 이런 행동을 받아줘야 할지, 타일러야 할지. 마지막 날 밖에 남지 않아 후회가 없고 싶었는데, 내가 서툰 행동으로 상처를 줄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에 이런 것에 대해 찾아보고 집에 와 심리학 책도 읽었는데 그런 잘못 된 행동은 타일러주되, 잘한 행동에 대해서는 더 큰 칭찬을 해줘야 한다고 하였다.
03
진짜 정신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오늘 나와 승민이가 담당하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밥을 놓고 가서 편의점에서 햇반을 샀다. 어떻게 하면 햇반이 안 식을지 궁리하며 패딩 안에 햇반을 담은 봉투를 감춰놓고 갔다. 조금 늦게 도착한 탓에 예은이가 많이 기다렸던 것 같다. 예은이가 영이언니랑 수빈언니랑 그림을 그리면서 놀고 있었는데 영이언니한테 다음 캠프 때는 영이언니랑 짝 하고 싶다하는 소리를 들었다. 늦게 온 것이 조금 미안했지만, 그래도 이틀이나 함께 했는데 조금은 속상하고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상헌이가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짐을 옮겨야 해서 상헌이 짝인 지훈이와 잠시 같이 있게 되었다. 지훈이는 전 날들에 계속 볼에 손을 대며 "나 귀엽지!" 하며 돌아다녔다. 이 날도 그런 모습을 보고, "지훈이는 그런 거 안해도 귀여운데?" 하고 말해줬다. 그 말 탓인지, 아니면 다른 집중할 것이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부쩍 그런 행동을 보이는 횟수가 적어졌다. 잘 못 느끼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피드백을 하면서 상헌이가 얘기해서 기억이 났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치만 지훈이와 예은이랑 같이 있는 것이 많이 힘들었다. 마치 인형 하나를 붙잡고 양쪽에서 내가 갖겠다고 잡아당기는 기분이었다. 지훈이는 궁금증이 많았다.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는 시간동안도 질문을 5~6개 물어본 것 같았다. 그 질문들이 귀찮지는 않았다. 그저 어린 친구의 순수한 궁금증이 너무 귀여웠다. 하지만 나는 예은이의 짝이었다. 지훈이가 하는 질문의 간격은 너무 짧았고, 그 틈에 예은이는 들어올 수가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계속 내 손을 끌어당겼고, 지훈이와 직접적으로 싸울 뻔 하기도 했고. 심지어 "언니, 나 쟤 싫어. 나랑만 얘기해."라는 말까지 나왔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게 너무 답답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요리시간은 그리 별 탈 없이 넘어간 것 같다. 친구들은 뭔가를 자기 손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되게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애쓰는 모습이 너무 예뻤고, 같이 온 친구들, 선배들도 친구들의 물음을 귀찮아하지 않고 함께 해주는 모습이 예뻤다. 그래서 그걸 담으려고 자꾸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보다 그 속에 스며들어 있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날, 예은이와 지아가 나를 그려줬다. 아니, 우리 모두를 그려줬다. 예은이는 우리를 느끼고 그 느낌을 그렸다. 막 그리는 것처럼 보였는데 희란쌤 말대로 다 비교해서 보니, 무엇인가의 느낌이 있었다. 꾸며진 말이 아니라, 진짜로. 내 그림을 봤을 때는 잘 몰랐는데, 거대하게 컸던 정현이의 그림과 내가 느끼는 다른 사람들의 느낌을 그냥 곡선으로, 선으로 나타낸 느낌이었다. 지아는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세아의 동생이다. 이 곳에 오던 이유도 그냥 놀고싶어서라고 생각했었고 크게 불편한 이유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희란쌤과 선배들의 말을 듣고 지아를 좀 더 보게 되었던 것 같다. 지아는 첫째 날에 나의 특징을 기록할 때 '예쁜 언니'라고 기록해놨다. 기분은 좋았지만 사실 지민선배를 하트로 해놓은 게 조금 부러웠다. 욕심이 많기는 많았다. 그치만 내가 그렇게 예쁜 사람이 아니라서 보다는, 지아가 거리를 두고 보는 나라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더 가까워지고 싶은 욕심이 있었던 것 같다. 그치만 그런 욕심에 비해, 내가 지아를 바라봤던 애정에 비해 함께 하지 못 한 것에 대해 아쉽다가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예은이라는 걸 깨닫고서는 또 실수할 뻔 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무튼 지아는 꽃을 들고 있는 나를 그려줬다. 지아가 그림을 계속 그렸으면 좋겠다. 조금 미화해서 그리지만 특징은 제대로 잡아놓는다. 지아가 그런 지아가 갖고 있는 모습들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예은이가 캠프 중간중간에 저번 캠프에 왔던 종은선배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고 영이언니가 예은이가 저번에는 원에 다시 가기 싫어했는데 오늘은 빨리 가고 싶어만 했던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잘해주지 못해서인가 하고 미안했다. 예은이한테 잘 해주지 못한 행동들을 자꾸만 곱씹게 되었다.
지아는 울상이었다. 왜 지아가 울상인지 몰랐었는데, 나중에서야 알고 지아를 꼭 끌어안았다. 잠바를 안 입고 밖에 나갔었는데, 하루종일이라도 지아를 꼭 끌어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지막 수만세일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이자 마지막 나의 혜광학교. 그래서 애들이 다음에도 올게요! 했을 때도 자꾸만 더 아쉬움이 남았다. 꼭 오고 싶었지만, 캠프 준비를 하지 않고 멋대로 참가하는 건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 먼 탓에 수만세만 참여할 수도 없었다. 너무너무 속상했다. 그치만 희란쌤이 다시 와도 좋다고 해서, 이번에 같이 혜광학교를 참여한 친구들이 오히려 고맙다고 꼭 와달라고 해줘서 나야말로 너무너무 고마웠다.
이게 끝이 아니라는 사실이 행복했다. 이번에 이 기억을 안고, 다음 캠프 때 또 다시 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안녕 혜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