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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소리(로마서 10:14~18)
믿는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의 신앙생활 뿐 아니라 세상에서의 삶도 말씀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은 나침반과 같이 인생의 갈 길을 몰라서 헤매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시편 23편 1절에서 2절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들에게 좋은 길을 제시해주시고 인도해 주십니다.
외국에 있는 한인교회 신자들은 대부분이 다 이민자들이신데, 그들이 이민을 오셨을 때 반드시 이민 과정을 안내해주는 인도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그 안내자를 잘 만났으면 고생하지 않고 그 안내자의 가이드에 따라서 단계별로 이민 정착이 쉬웠을 것이고 반면에 인도를 잘하지 못한 분을 만났으면 아직도 어렵게 이민 정착중인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민 생활을 잘 정착하려면 앞에서 인도하는 분을 잘 만나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을 인도하는 모습을 보면 인도자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일이 있었냐면, 제가 처음에 밴쿠버에 갔을 때 길을 잘 모르니 성도님들께서 돌아가면서 저의 내외가 탄 차 앞에서 길을 인도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부드럽고 남을 잘 배려하는 분은 앞에서 저의 내외를 길 안내를 할 때도 잘 인도해 줍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제가 차를 놓쳤으면 앞에 가서 깜빡이를 키고 대기하고 있고, 차선이 달라졌으면 잘 이동하여서 인도하는 본인 차를 놓치지 않게끔 합니다. 반면에 그렇지 않은 분이 저희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앞에서 그분이 인도를 하다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었는데 지나치고, 유턴이 안 되는 곳에서 유턴을 해서 저도 어쩔 수 없이 따라서 유턴하다 보니 법을 어기게 된 적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분은 자기 차를 따라오라고 한 후, 제가 따라가려고 제 차를 빼서 보니 이미 그 차가 사라진 후였습니다. 이렇게 우리 인생길을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매우 중요한 데 하나님을 믿는 신자들은 우리를 바르게 인도하는 부동의 안내자를 갖고 있는 데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 때 여러분은 어두운 상황속에서도 바른 길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쉴만한 물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심을 받으실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을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나옵니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 중에 믿음이 없으신 분들을 종종 보곤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고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고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교회에 와서 좋은 믿음, 성숙한 믿음, 행복한 믿음을 얻으려고 한다면 말씀을 계속 잘 보고 듣고 실천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학교 때 처음 읽게 된 성경책을 통해서 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어느 날 도서관에 갔었는데 잠깐 자리를 비우고 다시 돌아오니깐 누가 성경책을 책상위에 하나 갖다 놓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펼쳐 본 성경구절이 예수님의 산상 수훈(山上垂訓, Sermon on the Mount)이 나오는 마태복음 5장 이였습니다. 처음으로 성경말씀을 읽는데 가슴이 와 닿고 찔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이제부터 교회에 가서 하나님을 믿어야겠다’ 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고 교회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또 제가 한국에서 저희 모교회인 수색감리교회를 다니고 있었을 때 일입니다. 예수전도단 책임자인 오대원 선교사님의 집이 연희동에 있었는데, 그 집이 저희 집과 가까워서 저는 신학교 졸업할 때까지 그 선교사님이 자기 집에서 인도하는 화요일 날 집회에 참석하여 매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 화요집회에 가서 은혜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주변의 친구들을 많이 그 집회로 인도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집회 참석을 통해 오대원 선교사님의 말씀을 들은 친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이 들려지니 신자들에게는 더욱 믿음이 생기고, 안 믿는 이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그 때에 느낀 것은 말씀이 들려지니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이처럼 믿음이 생기기에 그 말씀이 들려지지 않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마귀 세력입니다. 로마서 10장 14절을 보면,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나옵니다. 이 말씀을 문학적으로 보면, 신앙을 얻게 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도치법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앞에서부터 읽으면 ‘전파하는 자가 있어야 복음을 들을 수 있고, 복음을 들어야만 믿을 수 있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믿음이 생기는 이 과정에서 성도와 불신자들로 하여금 할 수만 있으면 믿음이 생기지 못하게 넘어트리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사도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은 초대교회 당시의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사도들이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니 많은 이들이 구원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로,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약 4천명 이상 되는 이들이 구원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도들이 말씀을 전파할 때 말씀의 역사가 있기 시작하니 믿는 자들이 갑자기 구름처럼 많아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4절을 보니,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나옵니다. 그 당시의 관습으로 여자 숫자가 인구에 안 들어간 것을 감안하면, 남녀 합쳐서 약 만 명이 넘어가는 숫자가 구원을 받은 역사가 있었던 것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의 역사가 뜨겁게 일어나니까 곧바로 마귀의 방해가 뒤따랐습니다.
곧이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복음 전파가 뜨겁게 전파되는 것을 두려운 나머지 사도들을 잡아 가두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18절을 보면,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라고 나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사도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는데 한 가지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이고 나머지 하나는 ‘가르치지 말라’였습니다. 즉,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지도 말고 증거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이러한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목숨을 걸고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그랬더니 날마다 구원받는 숫자가 증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46절에서 47절을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시절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뜨거운 복음전파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컨대 복음전파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신자들이 드리는 예배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말씀의 의미가 성도들에게 들려지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의미가 신자들에게 들려져야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믿는 참된 신앙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가 젊었을 적에 가끔 청년 부흥회 강사로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어느 교회에서 수련회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때 앞에서 찬양인도도 하고 궂은일을 도맡아서 하던 어느 청년이 제가 말씀을 시작하면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말씀의 결론을 맺을 때 그 때 쑥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즉, 말씀 들을 때만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청년을 불러서 ‘왜 말씀이 선포될 때 넌 여기에 없니?’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청년이 ‘목사님, 솔직히 노래는 부르고 싶은데 말씀은 듣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을 주는 것도 사탄이 주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머릿속에 여러 가지 잡생각이 든다면 거기에 방해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도하셔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장례식에 가서 장례 의식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즉, 장례식에 참석한 이들 앞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돌아보고 영생을 바라보는 메시지를 통해 좋은 전도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의 핸드폰 벨소리로 인해 엄숙한 장례식에서 청중들의 웃음보가 터졌습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정반대가 되는 ‘노세 노세 젋어서 노세’라는 노래가 나왔던 것입니다.이처럼 예배 가운데 예기치 못한 사탄의 방해를 이겨내도록 우리는 더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중세기 천년 동안 예배를 라틴어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평신도들은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세기 천 년간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니 신자들에게 말씀이 들려지지 않아서 믿음이 안 생기니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급기야 결국에는 구원의 열쇠가 된다는 면죄부도 파는 패역한 일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중세기 기독교의 타락과 부패가 이렇게 극에 달하니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중의 가장 큰 혁신적인 일은 각 나라가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게 하여 평신도들도 말씀을 보고 이해하며 들을 수 있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보지 못하게 되면 교회는 타락하게 되는 것을 교회사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말씀의 의미와 깨달음이 온전하게 믿는 신자들에게 강물처럼 흘러들어가야 함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도 이 세상에서 혼잡하고 다양한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길거리에 한 번 나가 보십시오. 오만가지 소리가 다 들립니다. 그런데 신자들은 그 세상의 혼잡한 소리들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옥석처럼 가려서 세밀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신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전화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은 상대방에게 전화하고 일방적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끊기도 합니다. 기도를 이렇게 일방적으로 하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화를 통해 상대방과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신자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즉, 자기 이야기만 하고 끊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대답과 응답을 민감하게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듣는 것은 마치 산 속에서 메아리를 치는 것과 같습니다. 산속에 올라가서 메아리를 치면 산에서 반사되어 산의 소리가 나한테 들립니다. 믿는 신자들은 자신의 소리만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산의 소리를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등산하는 분한테 물어보니 정말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산이 들려지는 음성을 들을 수 있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들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들려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성도들이 교회 신앙생활가운데 자신의 소리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고 착각하지 말고, 진정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참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전에 한국에 있을 때 TV프로그램 중 ‘동물의 세계’라는 유익한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기억나는 장면을 말씀하고자 합니다. 물개들이 바다에 가서 고기를 잡아와서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수천 수만마리의 물개가 바닷가에 있는 가운데 자기들의 새끼들을 알아보고 잡아온 먹이를 주는 장면이 인상이 깊었습니다. 엄마 물개가 소리를 크게 지르면 아기 물개도 그 엄마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같이 소리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찾아 엄마가 아기물개를 만나 물고기를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소리를 들려주십니다. 성도들은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기에 때때로 신자들의 영혼이 메말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을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많은 은혜와 축복을 내려 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됩니다.
에스겔서 37장 8절부터 9절을 보면,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하셨다 하라’고 나옵니다. 사람을 육체적으로 보면, 뼈가 있고 살이 있는 겉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내면에는 ‘영(spirit)'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영을 보내주셔서 신자들에게 임해야만 영혼이 숨 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소리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말씀 없는 신자라고 한다면 영적으로 곤고한 뼈다귀만 남는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예배에 관해 쓰여진 ‘Dry Bones(뼈만 남은 신자들)’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내용의 핵심내용은 ‘신자들이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못 받고 말씀이 들려지지 않고 감격 속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면 뼈다귀만 남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믿는 신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리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늘 생기가 넘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시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은혜 받지 못하는 성도는 나무가 겨울에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는 모습과 너무나 똑같습니다. 말씀이 샘물처럼 우리들의 영혼에 스며들어야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생명력이 있고 사시사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장 13절을 보면,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나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이 바로 백성의 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듣기 싫어서 심지어 구덩이를 파서 예레미야를 거기에 묻어버리는 사건이 나옵니다. 얼마나 말씀 듣기가 싫으면 이렇게 까지 했겠습니까? 말씀듣는 것에 늘 마음이 열려있고 또 그 듣는 말씀에 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자라나는 세대들은 컴퓨터나 대중매체에 신경이 온통 가 있어서 자라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소리를 듣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들은 말씀의 소리 보다는 컴퓨터 게임이나 TV소리를 주로 듣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도 이런 현상이 더 심각합니다. 신자들은 세상의 혼잡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어렵고 힘든 이 세상에서 그 말씀을 의지해서 소망이 있고 올바른 길로 좇아가며 방황하지 않고,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걸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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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 말씀에 귀 기울이며, 말씀을 통해 은혜 받기를 사모해야겠습니다! 아멘! ^^
아멘
말씀의 소리만 듣는 말씀의 사람 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