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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1장 28절-29절: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지난 설교 보충.
세례요한이 자기 마음대로 예수님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온 거냐?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내가 먼저 세상에 가서 길을 닦아놓겠으니 예수님은 천천히 오십시오’ 라고 한 게 아니라 주님이 세례요한을 당신보다 6개월 먼저 세상에 보낸 거다. 모든 게 그렇다. 병을 고친 거나, ‘네 병이 나았으니 집으로 가라’고 한 거라든지, ‘딴 데로 가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한 거라든지, ‘날 따라오라’고 한 거라든지 다 말씀에 의해서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교훈에 의해서다.
우리의 믿음은 말씀에 의해 되어져야 하는데,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하면 자기의 자유가 속박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만 그게 아니다. 인간의 일반적인 자유보다 훨씬 능력 있는 자유자로 만들어 주려는 거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 믿읍시다. 말씀대로 삽시다’ 라고 하면 자기의 자유가 속박되는 것으로 생각을 한다.
세상의 스타는 아무리 높이 올라가도 임시적인 스타다. 각 분야의 스타는 다 바람 불면 떨어지는 스타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마음 속에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불이 붙어서 올라오면 세상의 스타와는 비교가 안 되는 하늘의 스타가 된다. 믿는 사람이 이렇게 되는 것은 자기 마음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기 때문인데, 이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게 된다. 이 말을 하는 것은 자기 속에 자유가 있기 때문에 즉시 말씀을 따르든지, 미뤄놓든지, 나중에 따르든지 할 수 있는 거지만 거기에 따라 이룰구원 면에서의 신불신이 나누어지는 것임을 알라는 거다.
세상사람들은 큰 사람 작은 사람, 유명한 사람 유명하지 못한 사람을 사역이나 업적이나 공로 등을 가지고 말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일반사람들은 껍데기, 외모, 외형을 보지만 하나님은 진리 따르는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그래서 성도가 진리를 따르는 중심으로 어떤 일을 했을 때 그 결과가 크게 나타난 것과 작게 나타난 것은 차이가 없다. 왜 그러냐? 하나님께서 사건 환경을 크게 동원시키면 그 결과가 크게 되는 거고, 작게 동원시키면 작게 되는 거지만 이룰구원 면에서는 ‘그 사건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 했느냐?’에 따라 구원이 성장이 되고, 장차 그 나라의 상급이 주어진다.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라고 했으니 지금의 우리는 시대가 달라도 세례요한의 교훈을 따라야 주님을 온전히 맞을 수 있는 거다. 쉽게 말하면 세례요한의 교훈을 받으려면 광야로 나가야 하고, 그러려면 선지자를 바라보고 세상을 등져야 한다. 이렇게 광야로 나온 자에게 물세례 의식, 즉 세상 죄를 씻는 의식이 되어지는 거고, 그 다음에 회개의 세례가 되어지는 거다. 즉 세상을 향해 가던 발걸음을 천국 쪽으로 돌릴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이게 신앙의 원리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교인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껍데기만 만났다. ‘키는 얼마고, 옷은 어떻게 입었고’ 하는 것은 보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못 만났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 거냐? 우리는 이걸 교훈적으로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인간 편에서 보면 그들이 예수를 안 믿고, 핍박했고, 죽였지만 이들은 세례요한의 교훈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증거한 예수님을 만났지만 결과적으로 못 만난 거다.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을 이방인인 로마황제 앞으로 보낸 게 아니라 유대백성들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 보냈는데, 이들이 세례요한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인격적 변화, 즉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고로 예수님을 못 만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자기 앞의 옳은 진리이치를 죽이고 들어간다. 이러면 자기의 구원이 죽는다. 이건 예수를 못 만난 거다.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이 궁극적 구원을 위해서다. 이게 기독교다. 예수가 서양귀신이라고? 그러면 동양귀신은 누구냐? 이렇게 보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이름이면서 사람 자체다. 하나님을 닮은 자체다. 참 사람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나의 구원을 위해 나에게 오셨는데, 당신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인간들이 당신을 잘 맞이할 수 있게 하려고 하나님이신 선재적 그리스도께서 당신보다 6개월 앞서서 세례요한을 이 땅의 당신의 백성들에게 보내서 당신을 미리 소개하게 하신 거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목사라고 하면 세례요한의 사상을 가져야 한다. 아니면 하나님의 백성을 인도할 수 없고, 회개의 세례가 안 된다. 이게 원칙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면 세례요한처럼 하나님의 백성의 정신과 사상을 광야로 이끌어야 하고, 세상 죄를 씻고 세상을 향해 가던 발걸음을 천국으로 돌리게 해야 한다. ‘하나님의 종이 이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 ‘참 종이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낸 사자다, 아니다’ 하는 게 판단이 되는 거다.
우리의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먼저 세례요한을 만나야 하듯이 우리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이 있네. 없네’ 하는 걸 따지는 게 아니라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제로 하고 그 분이 하신 일을 알아가는 거고, 그래야 신약성경을 보면서 예수를 만나게 되어 있다. 신앙의 원리가 이런 거다.
본 설교.
28절: ‘이 일은 요한의 세례 주던 곳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베다니에서 된 일이 많다.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하는 걸 볼 때 세례요한 이후에 어떤 역사가 일어날 것을 암시하는 거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니 ‘거기에 갔다가는 얼마 안 있으면 필연적으로 안 좋을 텐데’ 하는 게 있는데, 예를 들면 술집이 많은 곳으로 이사를 가면 그 집 아이들이 당장 어린 나이 때부터 술 먹고 나쁜 짓은 안 할지라도 계속 거기에 산다면 아이의 교육이 희망적이겠느냐, 사람이 망하겠느냐?
아이들의 교육을 보면, 첫째는 정서적인 교육이다. 그런데 테레비에서 가수들이 춤추는 게 나오면 부모가 어린아이에게 따라서 춤을 추라고 하고, 춤을 추는 걸 보면서 좋다고 깔깔거린다면 이 아이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느냐? 왜 목사님은 안 좋게만 보느냐고? 그래? 그러면 네 생각대로 해 봐라.
세례요한이 죽고 난 뒤에 베다니에서 된 일을 보면 베다니에서 깨끗함을 받은 문둥이 시몬의 집이 있었고, 형제처럼 지내던 나사로의 집이 그곳에 있었고, 예수님께서 승천한 곳이고, 또 예루살렘이 가까운 곳이다. 이런 일들은 본 절의 세례요한을 기점으로 보면 요한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이다. 반면에 세례요한 이후에 베다니 동네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이뤄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과거를 살펴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했던 일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세례요한 당시에 그곳의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말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적과 기적과 표적을 직접 볼 수도 있었을 것이고, 온전자가 되는 체험도 있을 텐데 그러지 않고 세상 길 넓은 길로 갔으니 멸망을 받고 말았던 거다.
지금의 우리 역시 과거에 되어진 일을 보면서 깨닫는 게 있다면 창세 이후 타락된 인간세계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지공법에 만족을 이뤄드린 그리스도의 구원의 걸음걸이를 어떻게 헛되게 만들 수 있겠느냐? 어떻게 함부로 세상 목적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겠느냐?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나를 위해 하신 일, 그 분의 교훈, 그 분의 걸음걸이를 배우고 깨달아서 그 분의 성품으로 자체화 시켜야 한다. 그 분의 걸음걸이를 헛되게 하면 안 된다.
29절: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요한이 이미 예수님을 만나본 게 아닐 텐데 어떻게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오시매 예수님이신 줄 알았을까?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당신보다 먼저 이 땅에 보냈기 때문에 세례요한을 아시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만난 일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을 봐도 모를 텐데 어떻게 금방 알아봤을까? 그리고 많은 무리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갔는데 이들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자마자 아는 것은 영의 눈으로 신앙사상으로 보고 아는 거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있는 건데, 이룰구원의 진리이치를 잘 아는 성도는 이룰구원의 진리이치를 잘 가르치는 목사를 보면 ‘아, 주님이 보내신 종이로구나. 성령님에 감화된 사자로구나’ 하고 알아보게 된다. 이게 아니라 안수하고, 예언 방언하고, 명함이 무거운 사람을 주님이 보낸 참 사자로 본다면 이건 외모 모양을 기준으로 보는 거라서 잘못 보는 거다. 주님은 외모나 모양으로 취하지 않으신다.
신앙 질적으로 보면 회개의 세례를 받은 자는 그 신앙이 즉시 주님을 알아본다. 우리 역시도 ‘회개의 세례가 뭐다. 물세례가 뭐다. 회개의 신앙사상이 뭐다’ 하는 게 인격적으로 박혀 있으면 나중에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금방 알아보고 주님을 맞아들이게 된다.
예수님께서 초림으로 이 땅에 오심은 세상을 심판하러 오심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오심이었다. 오셔서 교훈을 하시고 이적기사를 일으키고 한 것은 나를 구원하시려는 거다. 이 구원 속에는 깨달음도 들어 있고, 인격화 되는 것도 들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성장성도 들어 있다. 초림으로 오셔서 가르쳐서 이걸 알게 하셨고, 다시 오실 때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는 건데, 그 이유는 초림으로 오셔서 구원도리와 이치를 다 가르쳐 주셨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재림으로 오실 때까지 그만한 시간이 주어졌고, 구원에 필요한 사건 환경을 다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주님 재림 전에 주님 맞을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예수님처럼 온전자로 되는 게 준비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누구를 말하는 거냐? 예수님이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이라고 했는데, 여기에서의 죄가 세상 일반인들이 말하는 도덕적인 죄냐? 일반적 도덕적인 죄는 각 나라나 인종이나 사회마다 각각 다르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죄는 일반 도덕적인 죄를 말함이 아니라 먹으라는 생명과는 먹지 않고 먹으면 정령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먹고 영이 죽고 타락된 정신에서 나온 모든 언행심사를 말한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아무리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고 해도 선악과를 먹지 않은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다 하나님 앞에 죄요 악이다. 우리는 생명과를 먹고 나온 도덕성이다. 그러면 선악과를 먹고 나온 도덕성인지, 생명과를 먹고 나온 도덕성인지 어떻게 아느냐? 그 사람의 이해타산 가치판단 평가성이 영원에 내려져서 나온 언행심사는 생명과를 먹고 나온 도덕성이고, 그렇지 않고 세상과 육과 임시성에 가치판단 평가를 놓고 나오는 언행심사는 선악과를 먹고 나온 도덕성이다.
선악과를 먹고 나온 것은 항상 전제적인 조건이 붙어 있기 때문에 인간냄새가 난다. 즉 인간 자기가 기준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이유가 붙는다. 또한 선악과를 먹고 나온 것은 세상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자기 속에서 세상에 대한 걱정 근심이 나온다. 그러나 생명과를 먹은 데서 나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근심 걱정 대신 하나님께 기도가 올라간다. 그리고 자기 마음이 편하다. 그리고 하나님과 밀착되지 못한 면을 놓고 기도를 한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절대적인 죄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할 게 있고, 그냥 지나쳐도 될 게 있다. 어린아이가 죄를 짓는 것은 크는 과정에서 못 깨달아서 짓는 거지 죄인 줄 아는 상태에서 일부러 짓는 게 아니니까 그냥 지나가도 되고, 아직 어려서 오줌이나 똥을 싸는 것도 어릴 때는 원래 그런 거니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지만 아무리 어리더라도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고집이 있는데, 이건 부모들이 신경을 쓰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면서 잡아줘야 한다. 이런 아이는 어떻게 보면 부모들에게 기도의 제목을 준 것이니 부모 자신의 성격과 성질도 돌아보면서 부모와 아이가 고쳐나가야 한다.
세상사람들이 제일, 첫째, 먼저, 가장, 우선에 두고 소원 목적하는 것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전부가 선악과를 먹는 거다. 현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선악과를 먹는 거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인간 자기의 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모른 채 사는 자도 선악과를 먹는 거고,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며 사는 자도 선악과를 먹는 거다. 이런 사람은 다 세상을 기준으로 하고 산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세상사람들의 죄를 지는 분이시다. 즉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신 분이다. 사람마다 자기 죄도 해결을 못하는데 예수님 외에 어느 누가 남의 죄를 짊어질 수 있느냐? 부모형제도 불가능하고, 자식도 불가능하고, 친구도 불가능하다. 아무도 없다. 땅에서 태어난 모든 인간은 남의 죄를 짊어질 자격자가 아무도 없다. 다 자기 죄 때문에 죽는 존재다.
인간의 죄를 해결하려면 자신이 죄가 없어야 하는데, 이러려면 원죄가 없어야 하고, 또한 전 삶을 100% 하나님의 지공법에 맞게 살아서 하나님 앞에 티끌만한 죄도 없어야 하는데 세상에 이런 삶을 산 자는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은 죄 아래 태어났고, 죄로 인해 죽었고, 또한 죽었다가 살아난 자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늘로부터 오셨고, 그 정신으로 사셨고, 부활 승천한 자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인간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분이 아니면 불가능한데, 구약의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한 속에는 ‘인자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에 오를 자가 없다’ 라고 하셨으니 그 안에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공경하는 믿음성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성으로 인해 올라간 거다. 우리 역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성으로 인해 하늘나라로 올라가게 된다.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죄 사함의 구속으로 죄 문제가 해결이 되어서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고, 이 기본구원을 기초로 해서 그 다음에 이룰구원 면에서의 죄 사함이 되어져야 한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의사와 뜻에 맞지 않는 세상소원 목적이나 취미성 등은 다 선악과 따먹은 데서 나온 것으로 하나님 앞에 죄이니 이것을 말씀을 통해 깨닫고 고치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져 나가는 게 이룰구원 면에서의 죄 사함이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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