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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3단계 완성 하나님 의지하기>의 줄거리:
‘삼종지도’(三從之道)에 따르면 여자의 일생은 세 단계 의지하기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엔 ‘신(新) 삼종지도’라는 말이 등장했습니다. 삼종지도 속 여성을 남성으로 바꾼 것입니다. 즉 "어려서는 어머니 말씀을 듣고 결혼해서는 아내에게 순종하고 늙어서는 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거지요. 이렇든 저렇든 변하지 않는 것은 '3단계 의지하기' 자체입니다. 삼종지도도 신 삼종지도도 아닌 3단계 의지하기를 하나님께로 돌려 신세계를 살아 보는 겁니다.
3단계 완성 하나님 의지하기
(시편 125:1~5)
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2.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3.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3단계 완성 하나님 의지하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3단계 완성 하나님 의지하기’
여러분은 혹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남자는 조신하게 살림이나 해라. 어디 아침부터 남자가 감히 인상을 쓰느냐. 여자가 하는 일에 남자가 토를 달지 마라. 남자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패가망신한다.”라는 말입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해온 말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개그우먼 김숙 씨가 jtbc의 한 프로에서 가상 부부관계를 연기하며 윤정수 씨에게 했던 말입니다. 또 다른 방송사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강주은 씨가 마초의 상징 같은 최민수 씨를 아이처럼 다루는 장면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2016년 대한민국에 신 삼종지도(新 三從之道)라는 말이 등장하게 되었답니다.
본래 삼종지도는 여자가 따라야할 세 가지 법도라는 뜻인데 이것을 남자에게 적용한 것입니다. ‘삼종지도’라는 말은 여자가 어려서는 아버지 말씀을 잘 듣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종할 것이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아들을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 삼종지도에서는 여자를 남자로 바꾸어서 ‘남자가 어려서는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장가가서는 아내에게 순종하고 아내가 죽은 뒤에는 딸들을 따라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삼종지도가 가지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3단계 의지하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여호와를 의지하다’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말을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나 또한 일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이나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의지하기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의지하기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독립적이고 자주적이라는 말이 극히 제한적으로만 타당합니다.
예를 들어 한 청년에게 매이다시피 했던 아가씨가 있습니다. 청년은 아가씨를 싫어했지만 막무가내로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 아가씨가 청년과의 관계에 결별을 선언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청년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가씨는 청년으로부터 독립을 했을 뿐이지 의지하기 자체를 멈춘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의지할 대상이 생겼기 때문에 결별을 한 것입니다. 혹은 의지할 대상이 없더라도 새로운 의지의 대상을 찾고자 하여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대상으로부터 독립한다고 해서 자주성은 회복되지 않습니다. 인간을 존재하게 하는 본질적인 방식은 의지하기가 사라지거나 멈추지 않습니다. 즉 의지하기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닌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의지하기를 우리는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이 맞는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의지하기는 존재의 기본방식을 하나님께로 돌리느냐 혹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처럼 다른 대상으로 향하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이 차이점을 분명히 하면서 하나님 의지하기의 3단계를 완성하고 반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새로운 신세계를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본 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귀환한 때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들의 삶의 조건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정신적 피로감에 지쳐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첫 번째 주어진 과제는 예루살렘 성벽을 수축하는 것이었는데 이 작업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있던 이방 민족들과의 날카로운 신경전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느헤미야가 이들의 방해를 무릅쓰고 예루살렘 성벽수축을 완성합니다만 그 과정이 쉽진 않았습니다.
삶의 터전조차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을 우선 재건하고자 하는데 그 과정이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 시는 여호와를 의지할 것을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면 백성들의 삶과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려는 과제도 평강가운데 진행 될 수 있음을 노래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얻게 될 평강의 모습이 묘사됩니다.
1~2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시온 산’은 성전이 위치하고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이 예루살렘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지만 또한 주변이 더 높은 산지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북쪽에도 남쪽에도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었기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산은 안전하고 변함없고 요동치 않음을 상징하는 대표적 본보기였습니다. 이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의 형상을 보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나타나는 평강에 대해 노래로 권면한 것입니다.
이 의지하기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3단계가 필요합니다. 이 3단계를 거쳐야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의지하기는 제대로 완성될 수 있는데, 이제부터 이 3단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단계는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워야 함을 믿는 것입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 마음의 공백 상태가 유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에 본능적으로 이 공백을 채울 대상을 찾습니다. 마음을 채워서 만족함과 기쁨을 주리라 믿어지는 대상을 확정하고 추구합니다. 흔히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의 가치들이 그러한 대상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재물로서 예수님께서도 직접 언급하신 바가 있습니다. 또한 건강 성공 형통 출세 등과 같은 것들이 있을 것이고 취미생활이나 명품도 그렇습니다. 목사님들 같은 경우에는 큰돈을 들여서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이 마음을 채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상들을 젖혀두고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마음을 채워야 함을 믿는 것이 바로 첫 단계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곧 만족과 기쁨의 유일한 근거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대신에 재물을 믿고, 어떤 사람은 부흥을 믿고, 또 어떤 사람은 부모나 배우자를 믿고, 애인을 믿고 권력이나 명예를 믿습니다. 선민들도 이 첫째 단계를 잘못 이해하거나 건너뛰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경우는 이 첫째 단계에 대해 아예 배우질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셨던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대한 이야기를 통해 짚어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삶이었습니다. 달리 보충설명도 없이 이들이 죽어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에 떨어졌습니다. 이 비유가 바로 첫 번째 단계인 의지하기에 초점을 맞춘 말씀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은 곧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의지처가 되신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나사로의 거지 모습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식사를 할 때에 물로 손을 씻지만 당시의 부자들은 빵조각을 뜯어서 손을 닦고 버렸습니다. 나사로는 그 떨어진 빵 조각이라도 먹으려고 하였지만 개가 먼저 와서 먹어버립니다. 나사로의 능력은 개만도 못한 셈입니다. 곧 세상에서는 나사로의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가치가 전무함을 상징합니다. 이러한 나사로는 그 이름이 뜻하는 대로 오직 하나님만을 도움으로 여기고, 하나님만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의지처로 여겼기에 천국을 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의지하기에서 표현되는 믿음입니다. 무엇을 의지하느냐는 것은 곧 무엇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단계가 결정되면 두 번째 단계로 의지하기인 추구함이 나타납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줄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정하면 실제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됩니다.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 번째 과정에서 의지하기로 믿은 대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의지가 나타납니다. 전문가를 찾아갈 수도 있고 친구나 가족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스승을 찾거나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추구할 방법을 찾기도 합니다. 소위 종교라는 것들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 두 번째 단계입니다. 이 단계를 잘못 배운 선민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도 다른 종교의 신들에게 우상숭배 하듯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단계에서 마음의 공백에 기쁨과 만족을 줄 대상으로 돈을 정하게 되었다면, 두 번째 단계로 돈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 추구의 방법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삶의 환경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첫 번째 의지의 단계로 환경이 좋아져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찾으며 이 상황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잘 하고 싶습니다. 사업이 잘 되는 것을 기쁨과 만족으로 여깁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첫 번째 단계인 의지하기가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 사업을 잘 하기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습니다. 목사님들이 설교에서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사업도 잘 되게 해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말을 믿고 따르며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여호와 하나님은 내게 기쁨과 만족이 될 수 없다는 고백이고, 기쁨과 만족의 차원에서는 하나님을 자격미달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시기에 내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자 첫 번째 의지의 대상인 재물과 형통을 얻는 도구로서 도움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 의지하기가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단계에서 올바르게 하나님을 의지하였다면 두 번째 단계에서 일어나게 될 의지하기는 어때야 하는 것일까요?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근거로서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을 내 마음에 올바르게 모셔 들여서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 의지하기의 두 번째 단계로 구약에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말하고 신약에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전 생활화와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만 첫 번째 의지하기의 단계에서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실제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포로로 잡혔다 돌아온 선민들은 먹고 살 길이 막막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적으로 예루살렘의 성전과 성벽재건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의 유일한 근거로 믿는 첫 번째 의지하기의 단계를 거쳤기 때문에, 두 번째 단계를 위해 어떻게 하든지 성전과 성벽을 완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실제로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오셔서 채워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렇게 채워져야만 세 번째 단계로서 삶에 하나님이 나타나시게 될 것입니다.
이들이 포로로 잡혀간 이유는 선조들이 첫 번째 단계의 의지할 대상을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풍요와 다산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풍요와 다산으로 대체하자 자연히 성전 생활화를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실제로는 그 이름이 풍요와 다산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전락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가나안 지역에서 최대의 세력을 이루던 바알과 아세라 숭배를 통해 풍요와 다산을 얻고자 했습니다. 당시로서는 바알과 아세라가 재테크의 한 방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지하기가 잘못 됨으로 인해서 나타나게 된 두 번째 의지하기였던 것입니다.
애초에 여호와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의지하였다면 성전을 생활화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유전죄의 체질을 가진 우리의 본능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이라면 상번제의 번제단에서 어린양이 죽을 때에 나의 마음도 같이 죽는다고 여기며 성전을 생활화했어야만 했습니다. 이는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이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단계의 의지하기에서 풍요와 다산이 들어오자, 두 번째 단계에서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찾게 되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조차 방편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풍요와 다산은커녕 나라까지 잃었고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오고서야 이들은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현실은 먹고 살기도 어렵지만 광야에서도 선민들을 먹이시던 하나님을 생각하며,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평강을 얻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본 시는 4~5절에서 나타날 세 번째 단계를 염두에 두고 마무리 지어집니다.
정리해봅니다. 예루살렘 성전 생활화와 예수님의 십자가 생활화가 두 번째 단계였습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세상의 가치들에 대해 죽지 않으면, 첫 번째 의지하기였던 하나님을 유일한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믿음이 표현될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바르게 믿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가치들에 대해 죽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믿는 것이 돈이나 건강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설령 그 대상이 애국심이나 자녀의 형통일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의지하기의 단계는 성령님을 의지하기입니다.
첫 번째가 여호와 하나님 의지하기였고, 두 번째가 성전 의미의 완성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단계였다면, 세 번째는 성령님을 의지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없으며 알 수도 없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 마음이 하나님으로 차게 되면 몸이 살아가는 지상에서의 삶이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지상의 삶도 의지하기로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안으시고 이루어지는 삶입니다. 성령님의 활동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전적으로 의존되는 상태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성령님의 활동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령의 열매로 우리의 삶을 채워 가십니다.
이를 하나님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나를 향해 가지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하나도 빠짐없이 성령님께서 다 받아서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셔서 움직여가시는 것이지만 곧 하나님 아버지가 들어오신 것이나 예수님이 들어와 계셔서 내 삶을 살아주시는 것이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모릅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을 보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앞서 요한복음 3장 8절에서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완전히 성령께 의존되는 것입니다. 성령에 의존되는 것은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의 의지하기가 제대로 이루어질 때에 성령님께 의지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들의 삶은 거지 나사로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려 했던 이유는 첫 번째 단계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삶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지, 문제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님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믿었기 때문에 귀환한 백성들은 성전을 재건하려 했던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죄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에 자꾸만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 흔들립니다. 이러한 마음을 십자가에서 계속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 체질이 얼마나 강한지 내가 죽으면 하나님께서 세상의 가치를 좀 주시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를 합니다만 이러한 마음까지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믿음은 곧 의지(依支)하기를 해나가는 의지(意志)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과 만족이 되심을 믿고 세상을 의지하고자 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해나갈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라고 하는 말은 내가 예수님을 불러서 내 마음에서 살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그리스도가 나를 살아가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고, 16장 33절에서는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어떤 가치가 없더라도 평강과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께서 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심이고, 성령의 열매로서 우리의 삶을 채워나가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단계로 하나님을 의지하기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는 세상 사람들도 똑같이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단계에서 우리의 대상은 세상의 가치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단계에서는 십자가의 예수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단계입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나를 장갑삼아 끼시고 열매를 맺어 가시는 단계입니다. 하늘을 얻고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주님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모든 특권에 더해 이 땅의 삶이 성령의 열매로 가득히 채워지는 신세계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삼종지도는 첫째 여호와 하나님 의지하기이고,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지하는 것이고, 셋째 성령님을 의지하기입니다. 이 삼종지도로 약속되어진 신세계를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만이 유일한 나의 기쁨과 만족되심을 믿고 그 열매를 위하여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리하여 성령에 의존되어 살아가는 신세계의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