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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믿음
히 11:24-26
외국인 특별 묘역인 양화진에 가 보신적인 있으신가요?
한국에 와서 세상을 떠난 외국인들이 그곳에 묻혀 있습니다.
그 양화진에 첫 번째로 묻힌 사람은 죤 헤론입니다.
1883년 테네시종합대학 의대를 개교한 이래 최고의 성적으로 졸업한 그는 계속해서 뉴육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전문의가 되었습니다.
그의 모교인 테네시 의대는 그에게 교수자리를 제안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써줄 것을 요청했지만 정작 그의 관심은 자신의 편안함이나 명예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내시고, 재능과 지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그 분의 계획에 민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학적인 지식을 복음이 없고, 병원이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사용하기로 작정하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조선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최초의 조선 선교사인 알렌보다 9개월 늦은 1885년6월25일 조선에 도착한 그는 알렌과 함께 제중원을 설립하고 조선선교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조선을 사랑했으며, 조선의 사람을 사랑했고, 특별히 조선 사람의 영혼을 사랑했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자세로 그들의 육체를 돌보았습니다.
알렌의 뒤를 이어 고종황제의 御醫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일반 백성들을 돌보는 일 역시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조선은 여러 가지 질병이 만연하고 있었는데, 특별히 백성들을 괴롭히는 질병은 이질과 장티푸스, 콜레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여러가지 성병들도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1890년은 이질이 만연했는데, 선교사들은 모두 이질을 피해서 남한산성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헤론은 자신이 두고 온 환자들을 계속 돌보기 위해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고,
마침내 자신이 이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1890년 7월26일 아직은 젊은 나이인 약관 32세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육신은 강바람 부는 양화진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미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하나님의 심정으로 조선을 보았던 한 선교사의 삶을 통해 과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세계제국 이집트의 왕자였다가 후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자신의 인생을 헌신했던 모세의 삶을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모세는 소위 기적 같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모진 박해를 받던 시대에 히브리인의 아이로 태어났지만, 정말 기적 같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공주의 아들이 되고,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교육을 받으며 왕자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자로서의 삶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의 고난 받는 삶을 선택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는 구국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출애굽기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스라엘을 핍박하는 애굽인을 죽이고 그것이 발각되어 애굽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영웅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히11장 본문은 그의 삶을 요약해서 그의 선택이 믿음에 의한 선택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모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모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믿음은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서 모세는 세 가지를 버립니다. 포기합니다.
첫째는 공주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버립니다.
그리고 죄악의 낙을 포기합니다.
세 번째는 애굽의 모든 보화를 버립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앞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데 방해가 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이고 유익해 보이는 것들이래도 버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배설물이란 무엇입니까?
더 이상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버려야 할 것입니다.
가지고 있으면 방해만 되는 것이 배설물입니다.
좀 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들, 방해가 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의 다른 지식들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도 모세가 버리고 포기했던 것들은 대단히 유용해 보이고 유익해 보이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 요게벳의 교육을 받아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했을 것입니다.
그의 유모는 친어머니인 요게벳이었고, 그 어머니는 레위지파 였습니다.
지난주에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다루면서 우리는 그들이 얼마나 크고 철저한 믿음의 소유자였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준비하는 믿음이 소유자였다면 모세에게 젓을 먹이고 그를 양육하면서 그 어머니는 모세에게 민족적 정체성과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해서 모세는 자신의 왕궁생활이, 왕자라는 자신의 신분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단서를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스데반의 설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행 7장으로 갑니다.
거기 23절부터 25까지 말씀을 봅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 받는 자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 사람을 쳐 죽이니라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자! 이 말씀에 따르면 모세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분연이 일어선 것이 나이 40이 되던 해였습니다.
그러면 그 이전까지 모세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렇게 철부지로 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냥 어쩌다가 갑자기 자기 민족을 돌아볼 생각이 났다는 것이 아니라, 어려서부터 늘 민족적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는데, 40살이 되면서 민족을 도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려면 왕자의 신분을 가지는 것이 유익할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젊은 시절에 제가 유명한 사람이 되면, 고시에 합격을 하면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데 유리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과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모세의 이 시도는 이스라엘의 거절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계속해서 사도행전의 기록을 보겠습니다.
7장 26절 부터29절입니다.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자신의 힘과 지위를 이용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던 모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모세는 미디안 땅으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모세의 계획은 실패했습니다.
출애굽기의 기록이나 사도행전의 기록을 그대로 보면 그가 왕자의 지위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본문인 히브리서는 이것을 모세가 믿음으로 이것을 버린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모세가 어쩔 수 없이 왕자의 지위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그것을 포기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내 실패를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바꾸시고 그것을 내 믿음이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사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그리스도를 알아서 그를 믿은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선택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여십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를 받아들이는 것을 내 믿음이라고 하면서 그것을 근거로 해서 나를 구원해 주십니다.
이제 다시 문제의 핵심으로 돌아갑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모세로 하여금 자신의 지위와 신분을 버리게 하신 후에 다시 모세를 들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이루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모세가 버릴 것을 버리게 하신 후에 모세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성숙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을 포기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버리고 포기함으로서 비로소 하나님의 손에 완전히 사로잡혀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 하나님께 나가는 것은 방해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욕심이 하나님께 사로잡히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것이 영적 성숙을 방해합니다.
그러면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간관계에 대한 집착이 하나님과 관계를 방해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보다 더 집중하는 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아니, 하나님과 나 사이에 존재는 모든 것들이 우상이라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그의 종으로 쓰임을 받기를 원할 때는 그 모든 우상을 버려야 합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무엇이었습니까?
둘째, 믿음이란 더 좋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 기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히11:25-26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여기 하나님의 백성의 위대한 선택의 비밀이 있습니다.
우선 모세는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은 고난을 선택했습니다.
그 이유를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크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받는 고난이 곧 그리스도를 위해 받은 능욕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애굽의 모든 보화는 무엇과 같으냐 하면 잠시 누리는 죄악의 낙과 같다는 뜻이 됩니다.
모세는 죄악과 보화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그리스도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서를 통해서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가난해지는 것과 종교를 이용해 부자가 되는 것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잘 섬기려면 가난해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온갖 선한 것들을 주십시다.
그러나 혹시라도 내가 이 세상 재미에 빠져서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선순위를 올바로 정하도록 도전하신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먼저 선택할까요?
여자 친구 혹은 남자친구와 하나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연봉과 하나님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믿음이란 신념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험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믿음이란 올바른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렇게 보면 모세의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제대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의 기준이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신분과 재산보다 하나님의 편에 서기로 했던 사람입니다.
어제 장례식을 하면서 고인의 믿지 않는 어머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이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믿었는데, 왜 이렇게 사고가 나고,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하느냐고...
그런 그에게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모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믿음이란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라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은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보화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에 동의한다면 세상에서 돈을 손해보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손해 보지 않겠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모세에게 믿음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셋째, 믿음이란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세의 믿음을 설명하면서 그가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한 능욕을 선택하고 잠시 동안 누리는 죄악의 행복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선택한 이유를, 그가 상주시는 이를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핵심은 무엇이었냐 하면 무한한 희생이 아니라 상급에 대한 기대 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보물이 감추어진 밭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밭은 자기 소유가 아니었습니다.
해서 이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았습니다.
살던 집을 팔고 물을 대기에 좋아서 남들이 모두 탐내는 밭도 팔았습니다.
많은 소출을 내던 무화과와 포도원도 팔았습니다.
다 팔아서 별로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 그 밭을 샀습니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모두 이 사람을 비웃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그것은 그 밭에 무엇이 감추어져있는지를 그가 보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살았을 때, 믿음으로 올바로 선택 했을 때 자신에게 주어질 상급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마치 귀한 진주를 구하는 장사꾼이 크고 좋은 진주를 발견했을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보석들을 다 팔아서 그 진주를 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소소한 것들을 다 팔더라도 이 진주만 손에 넣으면 그 동안의 손해는 충분히 보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손해라도 감수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올바른 것을 선택하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것들을 버림으로서 주어질 상급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우리는 소소한 것들에 매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할 것이며, 영적 성숙이라는 목표에 집중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실 상급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지금 얼마의 돈을 손해 보는 것 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것입니다.
정확한 예화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어떤 사람이 정확한 로또 번호를 알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로또 복권 사는 돈을 아까워하겠습니까?
모세가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 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고난당하는 것을 선택하고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이해 능욕을 당하는 것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실 대가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을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때문에 세상에서 당하는 손해는 손해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돈을 손해보고, 건강을 손해보고, 권력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에 더 신경을 쓴다면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몇 재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19:29입니다.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몇 배의 상급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베드로가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주님을 따라왔는데, 우리에게 어떤 보상이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18:29-30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의 상급을 천국에서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상급은 이 세상에서도 받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 포기했던 것들은 몇 배의 상급으로 되돌아온다는 주님의 가르치심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한한 희생의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포기했던 것들의 몇 배를 상급으로 주신다는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주님을 위해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믿음이란 주님과의 관계에서 방해가 되는 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내 영성을 위해 올바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주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고 그것을 신뢰하며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 가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