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엄일섭(嚴日燮)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5. 수련 강의와 승공 활동
1 1965년 11월 15일, 나는 전북지구 총무부장으로 부임하여 새벽 성지 기도회 참석, 밤마다 돌아가며 원리강의 연습을 하는 등 바쁜 생활을 보내게 됐다. 부모님을 모시는 대집회도 몇 차례 가졌으며 지구 수련회는 매월 실시했는데 그 강의를 주로 맡았었다.
2 생활은 역시 어려웠다. 수련생에게는 하루 두 끼 꽁보리밥만 먹게 했으나 강사에게만 점심에 죽이나 밥을 대접했다. 이런 생활 탓인지 영양이 부족해서 1년 넘어서부터는 수련 강의 시에 코피를 쏟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3 그때는 수련회가 12일간 계속됐는데 두 강사가 맡았다. 한 사람이 하루 새벽부터 밤까지 강의하여 5일 동안 맡게 됐다.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 걱정을 했다. 약도 쓸 수가 없는 실정이었다.
4 그리고 1966년 6월부터는 전주 경찰서장의 위촉장을 받고 완주군 일원을 순회하며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 몇 군데서는 소속이 분명치 못해 이름만 적어 주었더니 강사 소개 때 자수간첩으로 소개된 적도 있었고 신문에도 그렇게 보도된 적이 있었다.
5 가는 곳마다 전 기관장과 공무원 학생까지 동원하여 집회를 가졌는데 제일 참석자가 많았던 곳은 천여 명에 이르렀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2시간씩 강의를 했다. 대외 활동도 처음이라 수많은 청중 앞에 서보니 시간 측정도 반응 측정도 할 수 없었고 얼마나 초조하고 당황했는지 몰랐다.
6 그리고 전주 교대 원리연구회가 조직되어 매주 교내 집회를 갖고 강의를 했다. 4배가 운동이 시작되면서부터는 수천 매씩 들어오는 입회원서 정리와 보고서 작성에 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고 청년회 책자 회보 발행 한자 책 발행 등으로 밤늦게까지 일을 하는 때가 많았다. 두 해 겨울은 불기 없는 냉방에서 잠을 잘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격무라기보다도 허약한 탓으로 더 이상 지탱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7 나는 주위의 여러분들이 만류도 했고, 부인회 간부들은 나를 위해 금식까지 했다. 하지만 나는 1967년 5월 5일, 무주지역장으로 자진하여 부임하게 되었다. 몸도 수양하고 회복해서 재출발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8 무주에서는 유치원을 운영하였는데(교사는 김성기 430가정) 당시 군청 내에 오래된 옛 식구가 두 분 계셔서 적극 협조하여 주었기 때문에 매일 우유와 빵을 만들어 원생에게 먹이게 되었던 것이다.
9 당시 총무는 조덕영(430가정) 씨였고 청년회 중심 식구는 김용성, 황괄석, 박정현, 이태철, 유수봉, 김성기, 박순희, 김영자 씨(모두 430 가정)들이었으며 지교회는 가당교회장에 김종희 씨(430가정)가 어려운 가운데서도 교회를 건축하여 헌당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10 나는 당시 서울한의원 원장 부부와 그 형님과 인근 면의 젊은 한의사 한 분을 전도하게 되었다. 승공 활동도 각면 부락을 순회하며 강의했고 공기총 사격장도 운영하였던 것이다.
11 1968년 4월 21일, 나는 이리 지역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2개월간 있게 되어 큰 활동은 못하고 순회 대심방과 5월 청소년 선도의 달을 맞이하여 관계 기관의 협조 아래 전 중•고교를 순회하며 강연을 했었다. 원리를 중심한 강의를 실시한 결과 반응은 좋게 나왔다.
12 하늘은 이 어린 것 세워놓고 얼마나 안타까워하랴. 책임은 하늘이 져 주실 것이다. 나는 신념만 갖고 힘차게 외치면 된다. 이것만이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뿌리 없는 나무는 이내 시들고 만다. 내적인 교회 기반을 더 튼튼하게 다져야 한다.’라고 생각하고 특별정성 기간을 정하고 실시했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