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과 똥은 한 통 속에 있다
제자: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운문 선사: 마른 똥 막대기다.
―무문 혜개, 《무문관》
“보리과자를 굽듯이 빵을 굽는데 사람들이 보는 데서 인분으로 불을 피우고 거기에다 구어먹어라. … 좋다! 그렇다면 인분 대신, 쇠똥으로 피워 빵을 구워라”
―《구약성서》 공동번역, 〈에제키엘〉 4:12, 15
사람은 먹어야 산다. 먹어야 산다면 잘 먹어야 하고, 또한 잘 먹었으면 잘 싸야 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을 더 바랄까?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는 일은 생명의 시작부터 끝까지 잠시의 예외도 허용할 수 없이 똘똘 뭉쳐서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먹고 싸고 자는 것이 이렇게 한 묶음으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때로 그 중요함과 함께 그것들이 한 묶음이라는 점을 잊어버리는 것 같다. 잘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싸야 하기 때문에 이 둘은 떼어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한 통속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둘째의 뜻이 있다. 그것은 먹고 싸는 일이 ‘한 통 속’, 즉 한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결국 한 통 속에 밥과 똥은 같이 들어 있다.
그렇다면 밥과 똥이 과연 ‘한 통 속’에서 어떻게 함께 있을까? 사실 밥이 들어가는 구멍과 똥이 나오는 구멍은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연결된 만큼 열려 있다. 또한 그 자체로는 비어 있기까지 하다. 그래야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밀어낼 수 있으니까 이처럼 열려 있고 비어 있기까지 한 밥줄과 똥줄은 사실상 ‘하나’다. 밥을 먹으면 식도를 통해 위로 들어가고 소장과 대장의 각종 소화기관을 거쳐 항문으로 변이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밥이 똥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디까지가 밥이고 어디서부터 똥인가?”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밥과 똥의 경계가 생각만큼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는 엄연한 사실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그렇다. 밥과 똥이 한 줄로 이어져 있는 우리 몸인 ‘한 통 속’에서 밥과 똥은 확연하게 갈라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밥과 똥의 경계 불확정성이 우리네들 삶에 대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밥과 똥의 경계 불확정성은 우리네 삶이 그렇게 아름답지만도 않고 대책 없이 추하지만도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가르쳐준다. 삶의 묘미를 깨닫게 해주는 조물주의 섭리라고나 할까? 결국 산다는 것은 기존 관념에서 멀리 떼어놓을수록 좋은 것이라 잘못 여겨졌던 밥과 똥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정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밥과 똥의 경계를 가리기 어렵다는 것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둘이 서로 쌍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밥에서 똥으로 향해가지만, 정반대 방향으로, 즉 똥에서 밥으로의 거대하고도 도도한 흐름이 이보다 더 크고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싼 똥은 재래식이던 수세식이던 모양만 달리 할 뿐 결국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연 안에서 자연으로부터 생명을 제공받는다. 재래식은 좀 더 직접적으로 땅으로 스며들고 때로 밭에 거름으로 사용되니 눈으로도 즉각 확인할 수 있는 과정이다. 그 밭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는 우리의 똥이 스며들어 형성된 자양분을 섭취한, 즉 모양과 냄새를 달리한 또 다른 똥이다. 그러한 풀들을 뜯어먹은 초식동물을 고기로 먹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육식동물이라 해도 이런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지 않기에 전혀 다르지 않다.
혹 재래식에 의한 흐름은 그렇더라도 수세식은 다르다고 우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정화조를 거쳐 약간의 변형이 이루어지긴 하지만 결국 거대한 흐름을 따라 강으로 바다로 그리고 다시 하늘로, 그리고 또 다시 땅으로 그리고 동식물의 입을 거쳐 결국 사람의 입으로 밥이 되어 돌아온다. 물론 그 똥이 우리 자신의 것이기만 하라는 법은 없다. 남들이 싼 것, 짐승들이 싼 것이 거기 포함된다. 자연의 흐름은 알량한 차별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내가 싼 똥이라고 그게 온통 나의 것이기만 할까? 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될 까? 밥에서 똥으로 그리고 똥에서 밥으로 흐르는 저 거대하고도 유구한 자연의 순환을 응시한다면 내 똥도 내 것이 아닐 수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이미 남의 똥을 먹고 있으며 동시에 내 똥을 남에게 먹이고 있기도 하다.
밥과 똥의 경계 불확정성은 이처럼 서로 대조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진 자연의 도도한 흐름이자 우리의 통찰 원리가 된다. 그런데 이 원리는 아주 거시적인 구도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미시적으로 우리의 한 몸 안에서도 이 원리는 어김없이 적용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밥을 먹고 소화과정을 거쳐 배출할 때 한 통 속에 있는 모든 똥을 에누리 없이 모두 몰아내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거니와 그래서도 안 된다. 적정선에서 타협을 보아야 하는데 어쨌든 결국 중간에 일을 마쳐야 한다. 아무리 시원한 느낌으로 일을 치른다 해도 똥인지 밥인지 경계 불분명한 부분들은 우리 몸 안에서 여전히 양분 흡수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몸 안에 똥을 담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서 말도 하고 사랑도 하고 밥도 먹는다. 거룩하게 기도를 드릴 때나 성행위를 할 때도 여전히 우리 몸 안에는 얼마간의 똥이 들어 있다. 산다는 것은 밥과 똥의 타협과정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인즉, 뭐 그리 깨끗하고 고상한 척 위선 떨 일이 결코 아니다. 비단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 사람이라는 것도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다. 하니 무슨 고결하고 대단하다는 착각은 우선 버리는 것이 마음에 좀 더 편안함을 가져다주지 않을까 싶다.
―정재현, 『인생의 마지막 질문』, 청림출판,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