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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번째 공유]
69.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와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에게는 모든 원리를 상실한 원리 없는 세계가 중요하다. 이런 이유에서 주사위 던지기는 ‘우연’을 긍정하고 모든 우연을 사유하는 역량이며, 이것은 무엇보다도 ‘원리가 아니라 모든 원리의 부재’이다.
70.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아무 것도 아닌 것’, 신의 부재 안에서, 인간 자체의 부재 안에서 원리 없이 사유하는 것은 놀이의 오래된 ‘지배자’(니체 “神은 죽었다.” - 181022, 김재홍)의 자리를 찬탈하고 산산조각 난 같은 세계 안으로 공존 불가능한 것들을 들어가게 하는 놀이하는-아이의 위험천만한 일이 된다.
71. 하지만 세계가 자신의 원리를 상실하기에 앞서 원리들의 마지막 피난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피난처로서의 ‘이성’이 무너져야만 했다. 그 이성은 ‘신경증’으로 죽었다. 그러나 또한 그에 앞서 정신병적인 중간 장면, 모든 신학적 ‘이성’의 위기와 몰락이 필요했었다. “바로 여기에 바로크가 자리한다.”
72. 신학적 이상이 도처에서 공격받고 세계가 끊임없이 신학적 이상에 반하는 증명, 폭력, 재앙을 축적하고 더군다나 흔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에……, 이 신학적 이상을 지킬 수 있는 수단이 있는가?
73. 바로크의 해결은 이런 것이다. 원리를 다양화할 것이고, 언제나 이것들 중 하나를 소매에서 꺼낼 것이고, 그리고 이로 인해 이것들의 용도를 바꿀 것. 이것은 ‘법률’을 보편적인 ‘판례’로 변형하는 것이다.
74. 이것은 개념과 독특성의 결혼이다. 이것은 라이프니츠식의 혁명이며, 라이프니츠는 가장 대표적인 마니에리슴의 영웅, 프로스페로에 가장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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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르(manière)
: ①일반적으로 ‘방식’, ②예술에서는 ‘양식’, ③철학에서는 ‘양태’를 뜻함.
마니에리슴(manièrisme, 매너리즘)
: 전기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 약 1520-1600년에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운동을 지시한다. 마니에리슴은 르네상스의 균형과 조화를 거부하고 감성적인 강렬함과 모호함을 선호한다. 마니에리슴은 또한 라이프니츠와 같이 본질주의에 대립하는 ‘양태주의’다.
75. 라이프니츠의 놀이가 ‘가장 좋음’의 원리, 가능 세계들 중 가장 좋은 세계를 선택하는 신의 지배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확실히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것은 귀결일 뿐이기 때문이다.
76. 라이프니츠 놀이의 참된 특징, 그리고 그 놀이를 주사위 던지기에 대립시키는 것은
①우선 원리들의 증식이다. 놀이는 원리의 과잉에 의한 것이지, 결여에 의한 것이 아니다.
②그러므로 이것은 숙고의 놀이, 체스 또는 체커 놀이이며, 여기에서는 우연이 아닌 재주가 오래된 현명함과 신중함을 대체한다.
③세 번째로 이것은 채우기의 놀이이며 원리들을 발명하는 놀이이다.
④끝으로 이것은 전투가 아니며, 말살의 전쟁보다는 유격전에 가깝고, 체스나 체커 놀이보다는 바둑에 더 가깝다. 상대방을 부재하게 만들기 위해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무력화시키고 공존 불가능하게 하고 발산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있는 곳을 포위한다.
77. 그렇다, 이것이 바로크다. 세계가 원리들을 상실하기 이전의 바로크. 無라기보다는 ‘어떤 것’을 보존하고 원리의 과잉, 원리의 무절제, 원리에 고유한 무절제를 통해 사람들이 세계의 비참함에 응답하는 빛나는 순간.
78.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은 얼마나 이상한가? (전범이자 본질로서의 이데아가 사라진, 혹은 神이 죽은 이 세계를 ‘무한한 좋음’으로 상정한 라이프니츠의 낙관론. - 181022, 김재홍)
79. 만일 이 세계가 실존한다면, 이 세계가 가장 좋기 때문에 잇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역으로 이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세계이기 때문에 가장 좋은 것이다.
80. 철학자(라이프니츠)는 경험론에 이르러 그렇게 될 ‘수사관’이 아직 아니며, 칸트에 이르러 그렇게 될 ’판사’는 더욱이 아니다(‘이성’의 법정). 철학자는 변호사, ‘신의 변호사’이다.
81. 신의 변호사는 세계 내부에 있는 소위 ‘자기-조형적’인 변양을 가지고 세계를 재구축하는 인격들을 소집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나드들, 또는 라이프니츠에게서 ‘자아’들, 자동인형들이다.
82. 모나드들을 춤추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이 춤은 바로크의 춤이며, 여기에서 춤추는 이들은 자동인형들이다. 이것은 두 모나드들 간의 나눌 수 없는 거리(공간)와 같이 완전히 ‘거리에 대한 파토스’이다.
83. 이 둘 사이의 만남은 축제 행렬, 즉 둘 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한에서 각자의 자발성의 전개가 된다. 작용과 반작용은 이 거리의 양쪽으로 분산되어 있는 자세들의 연쇄에 자리를 내준다(마니에리슴).
84. 낙관론의 원리 또는 ‘가장 좋은 것’의 원리는 신의 자유를 지켜낸다. 그 자유를 보증하는 것은 세계와 신의 놀이이다. 죄 짓지 않은 아담, 루크레티아를 능욕하지 않은 섹스투스가 다른 가능 세계들에는 있다.
85. 오로지 인간의 ‘자유만이’ 그 자체로 지켜지지 않는데, 그 자유가 이 실존 세계 안에서 작용하는 한에서 그러하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만일 아담이 이 세계에서 확실히 죄를 짓는다면 그가 다른 세계에서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86. 확실히 공존 불가능성은 라이프니츠가 미래의 우발적 사건이라는 고대의 문제를 스토아학파의 아포리아(Aporia, 난제)에 빠지지 않으면서 풀 수 있게 허용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자유를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개체적 개념이 언젠가 자신에게 일어날 것을 단 한 번에 확실하게 지는데’ 말이다.
87. 주어 안에 술어가 포함된 것으로 우리는 되돌아간다.
88. 만일 술어가 속성이라면 확실히 사람들은 주어의 자유를 구해날 수단을 발견하기 어렵다.
89. 그러나 술어는 사건이며, 주어 안에서 지각의 변화로서 나타난다. 어떤 동기(動機)를 지각 변화의 이유로서 지정할 수 있을 때 사건은 자발적이다.
90. 라이프니츠는 최초로 동기에 관한 현상학의 위대한 토대를 놓는다. 그는 두 가지 착각을 고발한다.
(1)하나는 동기를 대상화하는 데 있다. 마치 동기가 저울추인 것처럼, 그리고 숙고란 조건이 같을 때 저울의 어느 쪽이 기울어지는지 알아내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2)다른 하나는 동기를 배가(倍加)시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원하기를 원하기’라도 할 수 있는 양 대상화된 동기들 중에서 선택하기 위해서 주관적인 동기들을 무한하게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91. 그러나 사실 자신의 고유한 동기를 행하는 것은 바로 영혼이며, 그리고 이 동기는 언제나 주관적이다. 우리는 매순간 수천의 ‘작은 용수철들’의 작용 하에서 모든 방향으로 우리의 영혼을 접는 모든 작은 성향들에서 출발해야 한다.
92. 동요. 이것은 저울을 대신하는 시계추 모델, ‘불안’이다. 들어오는 이 작은 유혹(외력)들을 합산한 결과를 겪는 대신, 영혼이 이런 방향과 저런 측면으로 온 전체를 접도록 만드는 이런저런 진폭이 영혼에 주어질 때 행동은 자발적이다.
93. 나는 공부를 계속할 것인지 아니면 술집에 갈 것인지 사이에서 망설인다. 이것은 고립된 두 사물이 아니라 두 방향이며, 이 각각은 가능한 지각들 내지는 환각적이기까지 한 지각들 전체를 야기한다.
94. 자발적인 행위는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자유로운 행위란 지속의 어떤 순간에서 영혼 전체를 표현하는 행위이며, 자아를 표현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95. 앞서 변곡에서 포함으로 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변곡들이 자연스럽게 영혼들 안에 포함되어 있는지를 보았다. 성향은 바로 영혼 안의 주름이며 포함된 것으로서의 변곡이다. 여기서 영혼은 필연적으로 강제됨 없이 ‘성향’을 지닌다는 라이프니츠의 정식이 나온다. (‘성향’은 포함된 변곡이다. - 김재홍)
96. 동기는 내적 규정 자체가 아니라, ‘성향’이다. 그것은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현재의 표현이다. 라이프니츠에게 포함은 언제나 현재에 연동되어 있다고 말해야만 한다. 나는 글을 쓴다, 나는 여행한다…….
97. 만일 포함이 과거와 미래로 무한히 연장된다면, 이것은 포함이 매 차례 포함의 분배에 거주하는 생생한 현재에 우선 관련되기 때문이다.
98. 현재의 이런 특권은 모나드 안의 내속의 기능을 정확히 지시한다. 이것은 어떤 술어를 포함함에 있어 그 술어에 동사 값을, 즉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통일성을 부여하지 않고서는 포함하지 않는다. “내속은 자유의 조건이지, 그 방해물이 아니다.”
99. 라이프니츠가 완전한 또는 실현된 앙텔레쉬를 원용할 때 과거로 간주되도록 포함이 요구하는 현실태, 그리고 어떤 본질을 지시하는 현실태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울타리의 조건, 폐쇄의 조건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100. 완전한, 실현된 현실태란 자신을 포함하는 영혼으로부터,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의 고유한 통일성을 받아들이는 현실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베르그송(Henri Bergson, 1859-1941)은 라이프니츠와 매우 가깝다.
101. 미래를 품고 있는 과거로 가득 찬 현재. 내적인 결정론이 아니라 자유 자체를 구성하는 내부성.
102. 생생한 현재는 본질적으로 외연과 내포체(강도)에 있어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은 매순간 모나드의 특별 지구 또는 구역, 모나드가 명석하게 표현하는 지대와 구별되지 않는다.
103.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어떤 순간에 영혼의 진폭을 구성한다. 다소간 연장되어, 다소간 강렬한 채로, 생생한 현재는 같은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지 않고, 같은 운동에 통일성을 부여하지 않는다.
104. 행위는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행위는 현재의 영혼 전체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105. 라이프니츠가 말하듯 저주받은 자는 영원히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저주받아 마땅하며’, 각 순간마다 저주받는 것이다. 또한 저주받은 자들은 축복받은 자들만큼이나 현재에 있어 자유롭다.106. 저주받은 이들을 저주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현재의 협소함, 진폭의 부족이다. 이들은 복수의 인간들 또는 원한의 인간들이다. 저주에 대한 이런 시각은 바로크의 깊은 심층에 속한다.
107. 현재에 있는 죽음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운동으로 인식한 것이 바로 바로크이며, 여기에서 이 운동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 김재홍은 살아 있으면서 죽어가고 있다. - 181022, 김재홍)
108. 아담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었고, 저주받은 자들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만일 그 영혼이 다른 진폭, 다른 주름, 다른 경사를 지닌다면 충분했거나 충분할 것이다.
109. 우리의 세계와 공존 불가능한 다른 세계에서가 아니하면, 그 영혼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그 영혼이 그렇게 하면 다른 영혼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110. 신이 한 영혼의 진폭의 정도들을 앞서 정렬한다는 것은, 그 정도의 각각이 어떤 순간에 영혼 전체가 된다는 것을 배제하지 않는다. 자동인형은 자유로운데, 미리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생산하는 사건의 동기를 매 차례 구성하기 때문이다.
111. 사람들은 라이프니츠의 주제들과 베르그송의 테제 사이의 유사성에 사로잡힌다.
(1)동기에 관한 착각을 같이 비판하는 것,
(2)영혼의 변곡들을 같이 개념화하는 것,
(3)내속과 포함을 자유로운 행위의 조건으로서 같이 요구한 것,
(4)자유로운 행위를 자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같이 기술하는 것.
112.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신은 각자에게서 ‘도처에서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과 더 나아가 앞서 일어났던 것 또는 앞으로 일어날 것’까지도 읽고, 과거에서 미래를 읽는데(讀者로서의 신), 신은 ‘시간과 더불어서만 감각될 수 있도록 전개되는 모든 겹주름들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113. 여기에서 현재는 자신의 특권을 잃고, 결정론은 예정설로서 재도입되는 듯하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신적인 독서란 신이 모나드 안으로 들어가는 진정한 이행이다. 물론 각 모나드는 신의 이행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각 모나드는 시선점을 가지고 있지만, 이 시선점은 신의 독서 또는 시선의 ‘결과’이며, 신은 모나드를 관통하며 모나드와 함께 일치한다.
114. 모나드는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자신의 행동이 자신을 지나가는 것과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온 세계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 181022 김재홍)
115. 포함의 체계 내에서 위협받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도덕이다. 왜냐하면 만일 자유로운 행위가 영혼이 이 행위를 하는 순간 이 영혼의 전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면, 세계의 각 부분 즉 모나드를 자극해야만 하는 가장 좋은 것으로서 경향이란, 그 경향이 세계 또는 모나드들의 전체에 대한 신의 선택을 가극하는 한에 있어, 무엇이 되겠는가?
1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라이프니츠보다 더 도덕에, 그것도 매우 구체적인 도덕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성적인 영혼의 진폭은 바로 그 영혼이 명석하게 표현하는 지역, 영혼의 생생한 현재이다. 그런데 이 진폭은 차라리 통계학적이며, 큰 폭의 변동들에 종속된다. 하나의 같은 영혼이 같은 진폭을 갖지 않는다.
117. 도덕은 각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저런 조건에서 가능한 최대치를 표현하는 자유로운 행위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매번 자신의 명석한 표현의 지역을 확장하려는 노력, 자신의 진폭을 증가시키려는 노력, 이것이 사람들이 진보라 말하는 것이며, 라이프니츠의 도덕 전체는 어떤 ‘진보의 도덕’이다.
118. 영혼의 진보 또는 확장의 이러한 가능성은 세계 내의 진보들의 총량과 충돌하는 듯하다. 이 양은 공존 가능한 모나드들에 상응하는 지역들 전체의 수렴에 의해 정의되기 때문이다.
119. 만일 시간이 없다면, 즉 실존하는 모든 모나드들이 동시에 이성적인 수준까지 상승하도록 호출 받는다면 그 말은 참일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이렇지 않다. 이성적이 되도록 운명 지어진 영혼들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시간을 기다리며 처음엔 아담의 씨(정자) 안에 잠들어 있는 감각적인 영혼일 뿐이다.
120. 이러한 ‘봉인된 증서’ 혹은 출생증명서는 어두운 모나드 안에서 불붙는 빛이다. 그리고 역으로 우리가 죽을 때 우리를 무한히 되접을 때에는 신체의 부활이 두 번째이자 긍정적인 상승을 우리에게 알릴 때까지 우리는 다시 동물적이거나 감각적인 영혼이 된다. (들뢰즈는, 죽음 후에도 우리의 영혼은 어딘가에 되접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181022, 김재홍)
121. 저주받은 영혼은 그 죽음 직전의 마지막 사유가 신에 대한 증오인 영혼들인데, 왜냐하면 이들의 영혼이 모든 것을 혐오하고, 이 증오 내지 분노밖에는 명석하게 둘러싸지 않을 때 그것이 증오의 가능한 최대치 또는 이성의 가장 작은 진폭이기 때문이다.
122. 부활은 이들이 자신들의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내는 이 사유에 이들을 여전히 관계시킨다. 진보의 문제에서 고려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시간의 질서이다. 영혼들을 올라가게, 다시 내려가게, 다시 올라가게 만드는 극작법 전체.
123. 모든 경우에 있어서, 세계는 이 세계를 표현하는 모나드들 안에서 주름 잡혀 있는 것으로밖에는 실존하지 않으며, 모든 모나드들의 공통 지평으로서 또는 모나드들이 포함하는 계열들의 외부적 법칙으로서 잠재적으로밖에 자신을 펼치지 않는다는 점은 사실이다.
124. 그러나 보다 엄밀한 의미, 고유한 내적 의미에서 하나의 모나드가 자신의 삶을 ‘살도록’ 호출 받았을 때, 그리고 이성의 수준으로 올라서도록 호출 받았을 때 더더욱, 이 모나드는 명석하게 밝혀진 것으로 포함된 자신의 지대에 상응하는 세계의 그러한 구역을 자신 안에 펼친다.
125. 모나드-영혼이 자신의 이성적인 삶 동안에 자신이 펼치는 구역을 증폭시키고 심화시킬 수 있고, 이 구역을 진화의, 발전의, 구분의, 반성의 보다 높은 정도로 올려놓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안으로-말림’을 이용해서이다.
126. 의식의 무한한 진보, 이러한 영혼의 진보는 필연적으로 다른 영혼들의 희생을 대가로 이루진다고 종종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이는 참이 아니며, 그 다른 영혼들도 저주받은 자가 아니하면 마찬가지로 그렇게 될 수 있다.
127. 그것은 오직 저주받은 자들의 희생만을 대가로 하며, 아마도 그들에게 아장 나쁜 처벌은 그들이 다른 이들의 진보를 위해 기여한다는 것일 텐데, 이런 의미에서 더더욱 저주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뜻에 반하여서, 결코 가능 세계 중 가장 좋은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
128. 라이프니츠의 낙관론은 가장 좋은 세계의 초석으로서 무한히 많은 저주받은 자들 위에 근거한다. 그들은 무한한 양의 가능한 진보를 자유롭게 풀어 놓는데, 이것은 그들의 분노를 다양화하고 진보하는 세계를 가능케 한다.
129. 아래층을 진동하게 만드는 베엘제불의 증오의 외침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세계들 중 가장 좋은 세계에 대해 사유할 수 없다. 바로크의 집은 자기가 가진 두 개의 층을, 틴토레토(Tintoretto, 1519-1594)의 ‘최후의 심판’ 형식으로, 저주받은 자들의 층과 행복한 자들의 층으로 구성한다.
130. 여기에서도 여전히 진보의 총량은 신에 의해서 앞서 규정되거나 사후에 규정되지 않으며, 양심을 모두 더하고 저주받은 자들을 모두 빼는 과정을 통과하는 무한급수의 계산 안에서 영원히 규정된다.
출처: 2024년 10월 26일 3:29PM [가독] 일상 속 글쓰기 단체 카톡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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