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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왕이라고 불리우는 카네기는 사업이 너무나 어려워져서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가족들이 모두 미국으로 이민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여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친구이신 핸더슨 부인이 선뜻 이십 파운드를 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낯선 땅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을 믿고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빌려간 돈은 다음에 꼭 갚겠습니다."
카네기 가족은 거듭 약속을 했습니다.
미국에 도착한 카네기 가족은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꼭 하루에 오십센트씩은 핸더슨 부인의 돈을 갚기 위해서 저축을 했습니다.
마침내 어렵게 모아둔 돈이 이십 파운드와 맞먹는 돈이 되자, 카네기 가족은 서로 모여 축하하면서 기뻐했습니다. 카네기는 "빚은 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합니다. 평생 고마움을 간직하고 삽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카네기가 자신의 삶에서 결코 버릴 수 없었던 밀접한 한 단어를 찾으라고 한다면 바로 ‘은혜’라는 말일 것입니다. 카네기의 일대기를 들어다보면 과연 하나님께서 카네기를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셨고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속에서 위대한 강철왕으로 클 수 있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예언에 등장한는 넷째 아들 ‘유다’의 삶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은혜’라는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자신의 열 두 아들에게 한 사람씩 예언과 유언, 축복을 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책에서 49장 앞 부분에 제목을 붙이면서 ‘야곱의 유언과 축복’이라는 소제목을 달아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첫째 아들 르우벤으로부터 셋째 아들 레위까지는 보편적인 가치관속에서 축복의 멘트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유다에 와서는 엄청난 축복의 멘트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유다가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라는 질문을 할 때 우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가 받은 축복을 살펴보고 유다의 성품을 돌아보면서 우리 또한 유다가 받은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지 생각해보고 더 큰 축복을 사모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유다가 받은 축복의 의미 첫째는 인간적으로 내세울 수 없음에도 축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8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야곱에게서 유다가 받은 축복과 예언은 유다가 열두형제중에 찬송이 될것이라는 것입니다. 찬송이라는 단어가 사람에게 쓰여졌다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신앙관으로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찬송이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을 의미할 때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hL;hiT(tehila) 헬라어로 eujlogia(eulogia) uJmno"(humnos)입니다. 영어로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Praise 혹은 Hymn 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쁨이나 감사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고 헬라어에서 [율로기아]라고 쓰여지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좁은 의미로써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노래나 음악을 연주하는 일을 뜻하기도 합니다. [휨노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할 때 고백이나 행동으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찬양이라고 하기도 하고 악기연주나 노래혹은 춤을 추는 것을 찬양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것이 헬라어에서 뜻하는 찬양이요. 히브리어에서 찬양을 뜻하는 ‘테힐라’가 의미하는 ‘찬양’의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유다가 찬송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유다’가 어떻게 형제들중에 최고의 칭송을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유다는 이스라엘 법체계를 통해 볼 때 유산을 제일 많이 받을 수 있는 첫째 아들도 아닙니다. 유다는 다른 형제들보다 외모나 행동하는 모습이 인간적인 호감을 더 많이 가져다주는 스타일이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 더 사람들에게 호감을 가져다주고 사나이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인물은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였습니다. 사나이라고 한다면 조금 무대포같은 성격이 있고 불의를 참지 못하고 혈기가 왕성하여 대적들과 싸움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오히려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가 더 사나이다운 성격이라고 할 수 있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었던 옛날 이스라엘 문화권에서는 유다보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가 더 인간적으로 보일 것이 많은 인물일 것입니다.
이런 유다가 첫째 형, 둘째 형, 셋째 형을 제치고 넷째로서 다른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여기서 뜻하는 ‘찬송’의 의미부터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유다가 다른 형제들을 다스리고 다른 형제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실, 유다가 처음 태어났을 때 어머니인 레아는 이제 자신이 받았던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고 유다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시기를 소망하면서 찬양이라는 뜻의 ‘유다’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런 믿음이 유다를 하나님을 높이는 자가 되도로고 만들었고 결국 아버지로부터 형제들중에 찬송이 될 것이라고 축복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 예언의 성취는 유다의 자손으로부터 더 위대한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통해 이뤄지게 됩니다.
위대한 자손은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유다의 혈통에서 다윗왕이 나오고 다윗왕의 계보속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유산을 이어받을 적통 후손을 생각하면 항상 첫째 아들의 첫째 아들의 그 첫째 아들로 이어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난 주에 살펴보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계보는 조금 신기합니다. 아브라함의 둘째 아들인 이삭, 이삭의 둘째 아들인 야곱, 야곱의 넷째 아들인 유다... 뭔가 이상한 조합이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은 이 유다의 자손으로 다윗왕이 등장하고 예수님이 등장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이 땅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르우벤이나 시므온이나 레위 혹은 요셉같은 야곱의 아들들중 뭔가 괜찮은 구석이 있는 아들의 혈통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다의 혈통에서 나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참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로마서 2장 10절과 11절입니다.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하나님은 인간의 혈통으로 사람을 판단하며 인간의 외형이 모습으로 구원받을 사람과 구원받지 못할 사람을 정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외모나 재능, 인간적인 가치관에 따른 편견을 뛰어넘어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택하신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외모와 현실적인 형편을 보며 우리 자신에 대해 평가절하하거나 자학하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어나갈 때 그 사람의 외모나 소유하고 있는 물질등 외형적인 요건을 중요시 여기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절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우리의 외적 모습을 통해 속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외적 모습보다 내적인 모습을 더욱 깊이 보시고 순수한 믿음과 마음가짐을 더욱 깊이 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아무리 내세울만한 것이 없어도 사람들은 우리의 외적 조건을 보며 우리를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는 신실한 삶을 보여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무시하고 깔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으로 인정하시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가 은혜의 상징이 될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인간적인 큰 실수를 범했어도 하나님께서 죄를 사해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1절~12절 말씀입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유다가 왜 은혜의 사람일 수 있을까요? 유다는 하나님앞과 사람들앞에서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 모두 어찌보면 하나같이 죄악된 일을 한 가지씩 다 해본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여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한 사람도 있었고 배다른 형제의 어머니를 겁탈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나 인간적인 모습에서 떳떳한 모습을 가지고 인간다운 삶을 살았다고 말할만한 인물을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나마 요셉을 찾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요셉이 형제들중에 최고의 권한과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요셉보다 더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은 바로 유다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유다의 혈통을 통해 다윗왕이 등장하고 다윗왕의 혈통에서 메시야 예수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야말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는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되어서 축복을 받았을까요?
우리가 인간적인 측면에서 ‘자격이 있는 유자격자냐?’ ‘자격이 없는 무자격자냐?’라고 따져보았을 때 유다는 오히려 무자격자에 가깝습니다.
유다는 어찌보면 성적인 장애자에 가깝습니다. 성에 대한 충동에 대단히 약한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성적 유혹에 약하다보니 자신의 아내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자기 목장이 있는 곳에 일하러 올라갔다가 그 곳에서 어느 여인을 보고 성적 충동이 일어나 하룻밤을 함께 하게 됩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인은 바로 자신의 며느리인 다말이었습니다. 자신의 죽은 아들의 아내인 다말을 품에 안아 하룻밤을 지내고 그 여인으로부터 쌍둥이 아들을 또 얻게 되었습니다.
성적인 유혹을 이겨낸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고 어찌보면 정신적인 치료를 받아야할 대상인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범죄자를 처벌의 대상으로 보고 더욱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지만 어찌보면 성경적인 측면에서 성범죄자는 범죄자라기보다 성도착증 환자라는 측면이 강합니다.
이것은 사회에서도 아직 여전히 어느 것이 맞느냐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입니다. 어떤 사람은 범죄의 측면에서 성범죄를 다뤄야한다고 주장하고 어떤 사람은 질병의 측면에서 성도착을 다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의 성범죄자 치료 프로그램 전문가 윌리엄 마셜(77) 락우드 심리치료소 소장은 7월 24일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진행하였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마셜소장은 “(통영 어린이 살해사건으로) 성범죄자의 형량을 늘리자는 여론이 높아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은 전자발찌를 도입하는 등 강력한 정책을 펴왔지만 캐나다에서는 도입을 하려다 논란 끝에 포기하고 오히려 상담과 심리치료를 통해 재범률을 낮추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성범죄자들은 왜 재범을 저지르느냐는 질문에 “교도소에서 잘못된 부분만 지적받은 성범죄자는 강한 스트레스를 받고 출소 이후에도 새 인생을 살지 못하며 이들은 삶에서 만족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 성관계라고 보려는 심리기저가 있습니다. 따라서 치료 프로그램에서 삶의 희망에 대해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유다가 성범죄를 저지른 사람인지 성도착증에 빠진 환자이기에 또 성적 충동이라는 질병이 나타나서 그릇된 행동을 한 것인지를 우리의 생각속에서 결정하기는 힘이 들지만 아무튼 유다의 행동은 바르지 못했고 유다의 삶은 그리 깨끗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다말과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결국 다말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다말이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취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앞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처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최근 여러 교회에서 담임목사님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교회가 혼란에 빠진 교회들이 많습니다. 여성도와의 부적절한 관계, 교회재정에 대한 부적절한 사용, 말과 행동의 과격함으로 나타난 인격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 좋지 못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의깊게 봐야할 것은 목사님들이 그런 잘못된 행동을 한 것도 잘못이지만 잘못된 행동에 대한 깊은 사죄와 용서를 비는 행동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유다가 은혜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축복의 선물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가기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앞에서 완벽한 사람이라서 복받은 것이 아니라 항상 자신의 몸과 마음이 완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치료자앞에 나가 자신의 병을 치료받으려는 노력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나오면 우리의 모든 죄가 고쳐지고 용서함을 받게 됨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서 1장 18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완벽한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인간인이상 완벽한 인간의 모습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완벽하지 못하고 조금 불안하고 모자라더라도 하나님앞에 나가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시는 완벽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앞에 죄없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람인이상 죄없는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죄인된 모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날마다 죄를 지으며 살아가더라도 하나님앞에 나와 용서를 빌고 죄사함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는 지었으되 하나님과 사람앞에 죄를 떨어버릴 수 있는 사람, 병은 가졌어되 하나님과 사람에게 병을 들고나와 병을 치유받는 사람이 더 복된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항상 하나님을 찾고 영혼과 육체가 건강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혼과 육체가 상할 때에 나에게 힘든 것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으면 살 길이 있습니다. 내 영혼과 육체가 상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찾고 병원을 찾으면 우리가 살 길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죽는 영혼되지 마시고 빨리 깨달아 하나님의 은혜로 온전한 고치심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다가 은혜의 상징이 될 수 있는 세 번째 이유는 다른 어떤 이유보다 하나님이 유다를 특별히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10절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오늘 본문을 보니 유다는 모든 형제들중에서 통치자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어찌보면 이 본문은 참 의외의 본문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아들들 12형제중에 요셉에게 형제들이 다 절하고 굴복하며 통치자의 권력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을 하셨고 실제적으로 애굽으로 내려와 있는 지금 요셉이 통치자로서 형제들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규를 유다에게 주시고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규’가 뭘까요? 우리가 예전에 썼던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홀’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 ‘홀’이 무엇일까요?
‘규’도 뭔지 모르겠고, ‘홀’도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성경을 찾아보니 ‘왕의 지팡이’‘임금의 지휘봉’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규’혹은 ‘홀’의 히브리어는 fb,v,(shebet,쉐베트) 혹은 fybir]v'(sharbit,샤르비트)입니다. 헬라어로는 rJabdo"(rhabdos,라브도스)입니다. 이것은 권위의 상징으로 왕이 손에 쥐던 단장, 혹은 패입니다. 성경에서는 주로 이 단어가 번역되어진 곳을 보면 막대기, 지팡이를 표시할 때 이 단어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왕이 자신의 권력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있을 때 그 지팡이를 ‘홀’혹은 ‘규’라고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유다의 손에서 규가 떠나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의 왕위가 유다의 가문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엄청난 예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지금 야곱과 12형제들.. 그리고 이 가족구성원으로 대표되는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입니까? 아직 완전한 나라의 모습을 갖추고 있지 않은 가족공동체의 사회일 뿐입니다. 더군다나 이들은 땅도 없고 먹을 것이 없어 애굽으로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내려와 있는 상태입니다. 일정한 주거지도 없고 권력도 없고 재산도 없는 그냥 평범한 한 가족구성원일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과 그 아들 유다에게 이스라엘민족의 왕이 유다에게서 나오고 유다의 가문이 대대로 이스라엘의 왕권을 가지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는 왕족이라는 것과, 그의 자손, 곧 메시야로 말미암아 인류에게 평화가 미치리라는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가 잘 나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로 작정하시고 하나님의 긍휼이 반영된 결과였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가장 합당한 인물로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유다를 적임자로 삼으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1절,12절입니다. 함께 읽으시겠습니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한 인물을 택하시고 그 인물을 향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결국 이 모든 계획과 일의 진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결국 하나님께서 높아지시는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만드신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쁘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만드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어찌보면 이 세상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땅에서 누리는 기쁨을 주시고 평화를 주시고 행복을 허락하시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영광은 하나님앞에 돌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행복할 수 있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유다를 보십시오. 우리가 흔히 이스라엘사람들을 ‘유대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유대인’이란 말의 뜻이 무엇일까요? 바로 유대지파나 유다 왕국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 의미가 이제는 모든 이스라엘사람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모든 히브리민족은 ‘유대인’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유다지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열두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열두지파중 하나인 유다지파가 모든 이스라엘지파를 지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감을 통해 하나님의 선택하심속에서 떠나지 않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중에 하나님이 안 선택하셨으면 내가 교회와 신앙에 아무리 들어가려고 해도 들어갈 수 없는 것 아니냐? 하나님은 너무 불공평하게 자기맘대로 사람들을 구분해놓으신 것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느 사람을 선택했는지 어느 사람이 예정되었는 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복음을 들었고 교회에 있다면 우리는 분명 선택받은 사람이요, 예정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선택과 예정에 대해 비판을 하거나 부정을 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우리의 앞길을 예정하심에 감사하며 기쁨의 인생을 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 말씀의 유다처럼 우리는 잘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예전에 참 나쁜 짓을 많이 하며 세상속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살았던 사람이다라며 우리를 자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전에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별 보잘것없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유다를 특별하게 생각하시고 은혜의 축복을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 밝은 빛이 비치고 세상 어느 사람들보다 더 큰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특별히 이 자리에 앉아있는 믿음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의 사랑으로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가까이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가족과 친척들, 친구와 동료들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우리와의 관계속에서 서로 은혜를 주고 받도록 만들어주셨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이번 고주리마을 최초의 기독교 행사이며 최초의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 저 사람을 보내어주시고 여러 가지 관계를 통해 준비해야할 물품들과 재정을 채워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무시하거나 무감각하게 살아가지말고 항상 은혜를 체험하며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잘나서 받는 은혜가 아닌 나는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지만 그럼에도 나를 택하여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받은 은혜를 이웃들에게 또한 나눠주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