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나무
김상분
첫사랑, 발그레한 순이의 얼굴일까. 한두 개 박힌 붉은 점들도 선연하다. 추억은 세월이 갈수록 살굿빛으로 물들어가나 보다. 초등학교 시절 짝꿍의 얼굴을 몰래 훔쳐보던 그때 그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괜히 얼굴이 달아오른다. 먼 옛날의 순이를 바라보던 눈빛으로 다시 길 건너 살구나무를 응시한다.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린 열매들이 꽃처럼 화안하다.
매화 피고 벚꽃이 흐드러져도 살구꽃만 하랴, 삼동을 이겨낸 매향의 절개에 고개를 숙이고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는 벚나무 아래서는 잠시 희색이 만면하나 그래도 어린 시절의 살구나무꽃에 비할까. 앵두꽃은 그냥 조무래기들의 해맑은 얼굴이어서, 무릉도원의 복숭아꽃이야 넘볼 수 없는 경지여서 차라리 외면했다. 늘그막에 마지막둥지로 삼은 아파트 앞 대로변으로 나란히 심어진 가로수가 유실수여서 참으로 행복했다. 봄이면 두고 온 고향마을을 찾아가듯이 그리움으로 서성인다. 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매도 잠시나마 한결 고와지고 입가에 번지는 웃음들이 곧 다정한 이야기라도 건널 것 같다. 열흘 붉은 꽃 없다더니 진자리마다 빛나는 보석이 달렸다. 녹두알만하던 것이 어느새 그리 굵어졌을까 노심초사 긴 봄날이 지나가고 초여름 따가운 햇살에 꽃보다 고운 살구가 단내를 풍기며 익어간다. 드디어 나뭇가지마다 노란 꼬마전구들이 빛나기 시작한다.
길을 건너면 바로 마트가 있어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찬거리며 야채 과일 등을 조금씩 물고 온다. 늙은 몸에 무슨 먹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할까마는 그냥 심심해서라도 한 바퀴 돌아보는 나의 일과를 영감님은 그렇게 표현한다. 노후의 하릴없음을 탓하다가도 그 건널목을 오며가며 살구나무와 정들인 세월이 어느새 십여 년이니 세월이 참 빠르다. 나무가 울창하게 자라서 지난해엔 가지치기를 대대적으로 했다. 우연히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가지가 잘려 나갈 때마다 후드둑 떨어지는 살구 열매들을 보며 너무도 아까웠다. 견물생심이라던가. 물어보지도 않고 농익은 살구 한 알을 집어 한 입 베어 무니 새콤달콤한 맛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작업을 하던 녹지과 직원이 그런 나를 보더니 외마디를 지르며 달려와서 독한 농약 살포를 많이 해서 먹으면 안 된다는 주의사항을 늘어놓았다. 요즈음 농약 안 치고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 무엇이냐는 솔직한 반론 사이에 길 가던 사람들까지 모여들어 내 편을 들어주었다. 수북하게 떨어져서 쌓여가는 살구 앞에서 결국 아주머니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 장바구니에서 여분의 비닐봉지까지 꺼내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도 흐뭇한 나눔을 하며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서 살구를 양푼에 쏟아 붓고 식초를 넣고 깨끗하게 씻어서 또 몇 번을 헹구었다. 잔류농약 이야기까지 몇 번을 강조하며 설명하던 녹지과 직원의 당부를 염두에 두며 그래도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다. 과일나무를 가로수로 심기 전의 조경설계부터 잘못되었으니, 수종을 바꾸기엔 너무 멀리 왔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늦게라도 국민건강을 생각하는 행정당국의 지침도 틀렸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
어느새 온 집안에 새콤달콤한 향기가 가득해진다. 살구는 다른 과일보다 유난히 펙틴이라는 섬유 성분이 많아서 잼을 만들기에 안성맞춤이다. 젤라틴이나 굳이 다른 첨가물 없이 설탕만 넣고 끓여도 잘 엉긴다. 유난히 새콤한 구연산 함유량이 많아 살균해독 작용은 물론 방부제역할까지 탁월하다. 여러 가지 과일 잼이 다 독특한 맛과 향이 있어서 종류별로 만들어 두고 먹지만 그날 살구 잼을 만들던 날은 참으로 행복했다. 온 아파트 복도까지 과일 향기가 가득할 무렵 살구잼 졸이기를 끝냈다. 뜨거운 잼이 식기 전에 병병이 담아 작은 견출지에 제조 날짜와 제조인 내 이름을 적은 라벨을 붙일 때 그 뿌듯한 성취감은 오직 만들어 본 사람만 아는 기쁨이다. 그뿐이랴. 한종일 냄새를 풍긴 이웃이며 친지에게 돌리는 즐거움을 더 말해 무엇하리….
그 즐거운 일을 올해는 하지 못했다. 멀거니 건널목을 오가며 눈독만 들이다가 장마가 졌다. 폭우에 떨어지고 발길에 치이고 뭉개지는 금과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지난해 우연히 풍성한 살구수확을 맛본동네 아줌마들 몇이 궁금해 했다. 결국 구청 녹지과에 질의할 분은 원예학 전공자라는 부추김으로 어리석게도 다시 앞에 서게 되었다. 여러 단계를 거쳐 지난해의 이야기와 함께 올해도 그런 기쁨을 기다리는 주민들의 청원을 정중히 전달했다. 그러나 예상했던 대로 가로수로 적합하지 않은 유실수를 택한 것은 잘못되었다는 사실의 인정과 함께 맹독성 농약 살포와 잔류농약으로 인한 건강 이상을 책임질 수 없다는 거부의 회신이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서양에서 오래 길들여진 아침 식사에 빵과 요구르트와 함께 지난해 만든 살구잼을 먹어도 이상이 없고 당시에 선물을 돌린 지인들에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더 무슨 욕심을내랴. 유실수도 관상수 이상의 의미를 두지 말라니 꽃이든 열매든 그림처럼 바라보면 되는 것을.
꽃이 피고 벌 나비 날아들어 열매 맺힘은 자연의 이치이니 그 수확의 기쁨을 나눔은 소중한 일이다. 어쩌면 그것은 하늘이 우리 인류에게 주시는 먹거리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귀한 아기를 잉태하여 입덧하는 며느리에게 딸에게 농약 걱정 없이 새콤한 살구 몇 개 따다 줄 수 있으면 좋겠다. 푸른 별 아름다운 지구에 살면서 공해 없는 기후와 토양, 자연환경을 지켜오지 못한 우리 모두의 잘못이 크다. 식물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진정 아름답고 건강한 지구환경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좀 더 멀리 보고 더욱 튼튼한 밑그림을 그려야겠다. 지난해 엄청난 가지치기로 놀랐는지 해거리 하는 나무가 올해는 유난히도 잎이 무성하다.
첫사랑 순이의 얼굴처럼 해맑은 살구가 아마도 명년에는 무척 많이 열릴 것이다. 우리 영감님은 꽃피는 봄날에 벌써 그 아래를 서성이며 짝꿍이었던 소녀를 그리고 있지 않을까?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할 것이다.
『月刊文學』655호, 2023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