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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혁명과 변혁운동
김금수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 김금수 선생은 4.19혁명 당시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으로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의 핵심역할을 담당했으며, 60년대 제1차 인민혁명당사건에 연루되고 70~80년대 한국노총 정책실장, 90년대 전노협-민주노총 지도위원, 그 후 노사정위원장. KBS이사장을 거쳐 현재 민주노동당 고문들 중 한 분임/편집자 주
1. 4.19의 성격
○ 4월 혁명, 4월 의거, 3,4월 민중항쟁, 민중봉기, 학생혁명, 민족혁명 등으로 표현되기도 함.
가) 반독재 민주혁명(근대화론의 보수학계 주장) (4.19 민주주의운동, 민중운동으로서의 4.19운동)
나) 민주주의와 진정한 민족해방의 실현을 위한 ‘미완의 민중혁명’, 민중 자신이 아닌 학생에 의한 대리혁명.
다) 4월 민중항쟁.
라) 민족해방 민주주의 혁명.
마) 3,4월 민중항쟁
― 1789년 프랑스 혁명
― 1688년 영국의 명예혁명
― 1788년 미국의 독립혁명
― 1830년 프랑스 7월혁명
― 1848년 프랑스, 독일혁명
― 1871년 파리코뮌
― 1905년 러시아혁명
― 1917년 2월, 10월혁명
※3,4월 민중항쟁, 민중혁명, 민주혁명.
2. 4.19의 배경
가) 경제적 배경: 1950년대의 매판적이고 전근대적인 관료독점자본의 급속한 형성과 종속적 경제구조의 심화.
○ 1950년대 미국의 무상원조가 21억6,455만 달러에 이름.
(가장 많은 해가 1957년으로 3억8,300만 달러, 1960년에는 2억4,500만 달러로 축소)
○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원조물자의 가격, 분배, 원조자금 사용에 대해 결정하고, 대충자금(미국의 원조물자를 판매한 자금으로 한국정부는 한국은행에 예치해 놓고 미국의 승인을 받아 사용: 주로 국방비나 재정투융자 기금으로 사용)의 사용 방도를 결정.
○ GNP 성장률은 1957년 8.1%에서 1960년 2.5%로 저하.
(1인당 GNP는 82달러 60센트)
○ 1958년 3백 가동률 저하: 제당 26.1%, 제분 23.3%, 방직 49.2%씩 공장가동률 저하. 경제불황.
○ 실업률은 1960년 8.2%, 잠재실업률 26.0%, 총실업률 34.2%.
나) 민중 저항의 증대
○ 1950년대 계급구성: 자본가 1%, 중산계층 70%(도시중간층 13.3%, 농업중간층 특히 빈농 40~50%), 노동자 25~30%.
○ 노동자 투쟁: 1956년 대한방직 파업, ‘전국노동조합협의회’ 활동.
○ 농민들의 소작쟁의와 토지획득을 위한 저항.
다) 학생운동: 신진회, 신조회, 협진회, 후진사회연구회, 암장
라) 진보당에 대한 탄압: 1956년 결성, 1958년 1월 구속.
3. 3,4월 항쟁의 경과
○ 1960.2.28(일요일): 강제 등교에 항의하여 대구 지역 고등학교 학생들이 거리 시위를 벌임.
○ 3.8: 대전 학생 시위
○ 3.12: 부산 해동고등학교 시위.
○ 3.15: 마산 부정선거 항의 시위.
○ 4.11: 김주열(마산고 1년)학생 시신 발견.
○ 4.18: 평화 시위 마치고 귀가하는 고대생 구타.
○ 4.19: 학생 시위에 대한 경찰의 발포(이승만 이기붕 부통령 당선 취소, 구속학생 석방 등 약속).
○ 4.25: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 앞세우고 교수들 데모.
○ 4.26: 민중 항쟁, 이승만 하야.
◇ 3,4월 민중항쟁에서 희생된 사람은 186명, 그 가운데 초등학교․중학생이 19명, 고등학생 36명, 대학생 22명, 회사원․학원 10명, 직업 미상 5명, 하층노동자(구두닦이, 넝마주이 등) 61명, 무직자 33명이었음.
4. 4.19 이후의 진보정당(혁신정당)운동
○ 1960년 6월 17일 사회대중당 창당 준비위 결성
○ 7.29선거 결과
― 사회대중당: 민의원 233개 선거구 121명 공천 후보, 참의원 7명 후보= 5명 당선(민의원: 서상일, 윤길중, 박권희, 박환생, 참의원: 이훈구).
― 한국사회당: 2명 당선(민의원 김성수, 참의원 최달희).
― 혁신연맹: 참의원 1명 당선(정상구).
○ 선거 이후 분열: 사회대중당, 사회당, 통일사회당, 혁신당 등. 노선: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 1961년 5월 7일 사회당, 혁신당, 사회대중당 통합 논의
― 기본노선: 민족자주노선
― 통일방안: 민족자주 원칙에 입각하여 남북협상과 국제협조로서 평화통일을 기한다.
― 당면과제: 민주주의 민족국가 건설.
5. 민족통일운동
Ⅰ.「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 1960년 9월 30일: ‘준비위원회’ 발족
― 3대 원칙: 자주, 평화, 민주,
― 실천방안: ① 즉각적인 남북협상
② 남북 민족대표자에 의한 ‘민족통일건국최고위원회’ 구성
③ 외세 배격
④ 통일 협의를 위한 남북 대표자 회의 제의
○ 1961년 2월 25일: 민자통 결성
― 참가조직: 사회당, 사회대중당, 혁신당, 민주민족청년동맹, 통일민주청년동맹, 광복동지회, 민족건양회, 천도교, 유도회, 4월혁명회, 피학살유족회, 출판노조, 교원노조, 교수협회,
◆ 결의문
― 외세의존을 배격한다.
― 선건설 후통일론은 통일 방해로 보고 이를 분쇄한다.
― 유엔과 미․소에 통일에의 협조를 요구한다.
― 통일후는 ‘망각법’을 제정하여 일체의 범죄자를 사면한다.
― 한사람의 희생도 없는 통일에 노력한다.
― 통일에 앞서 정부와 국회에 다음을 건의한다
가) 완충지대에 남북 서신 왕래를 위한 우편국 설치
나) 남북 경제교류
다) 완충 지대에 민족 친화기구를 설치하여 남북 동포를 만나게 한다.
라) 기자 및 민간 사절단을 이북에 파견한다.
마) 모든 국제 경기에 남북 혼성팀을 파견한다.
○ 1961년 2월 8일 ‘한미경제협정반대 공동투쟁위원회’ 결성, 3월 22일: ‘2대악법반대투쟁 성토대회’(반공법, 데모규제법) 주도.
○ 1961년 5월 13일, 서울운동장: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촉진궐기 대회’ 개최.
○ 5월 14일: 광주, 같은 날: 대전, 5월 16일 전주 예정, 5월 17일 대구 예정.
○ 민자통은 당시 변혁의 성격을 민주주의 민족혁명, 반제반봉건 민족해방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이 혁명은 민족통일로 완성된다고 파악했음. 성격은 ‘민족통일전선체’로 규정.
○ 민자통의 한계로서는 ① 식민지 지배통치의 청산에 복무하지 못한 점, ② 비합법 운동역량 준비가 부족한 점, ③ 혁신정당 사이의 분파투쟁으로 기층 대중조직과 학생조직을 포괄하지 못한 점 등이 지적되고 있음. 이런 평가가 정당한지는 의문.
Ⅱ.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
○ 1961년 2월 21일 통일사회당 중심으로 준비위 결성.
“합리적이고 실현 가능한 ‘영세중립’을 통일방안으로 내걸 것”을 주장하면서 “대안 없는 통일의욕만 고취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밝힘.
“민자통이 내세운 자주, 민주, 평화란 정치적 일반원칙이 될 수는 있어도 통일의 기본방침이 될 수 없음은 물론, 때에 따라서는 다의적으로 혹은 편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성명.
Ⅲ. 「조국통일민족전선」
○ 1961년 1월 8일 결성. 위원장 정순학.
○ 하부 조직은 없고, 성명서 몇건 발표.
● 당시 장면 정부의 통일 방안은 “유엔 감시 하 남북 총선거를 통한 평화적 자유민주통일방안”이었음.
Ⅲ. 「민족통일 전국학생연맹 준비위」
― 1960년 11월 18일, 서울대 민족통일연맹, 11월 10일 ‘경북대학교 민족통일촉진 학생연구회’, 12월 ‘경희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결성 등 1961년 5월까지 18개 대학에서 민통련이 결성되고, 경북고등학교에서도 민통련이 결성됨. 민통련에 가입한 학생의 총수는 약 2,000명으로 추산(당시 대학생의 총수는 9만 7,000명이었음).
― 1961년 5월 3일 서울대 민통련이 ‘남북 학생회담’ 제의.
― 1961년 5월 13일 북한에서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위원장 홍명희, 부위원장 백남운, 상무위원 이극로, 위원 박시형, 이만규)’가 결성되었고 이를 환영함.
― 1961년 5월 5일 17개 대학 민통련 대표들이 회합하여 결성준비대회. 선언문에서 “세계사적 ‘현단계의 기본적 특징’은 식민지․반식민지에 있어서의 민족해방투쟁의 승리라고 규정, 현재의 사회구조를 ‘식민지적․반식민지적 반봉건 사회’로 파악했음. 즉, 반제, 반봉건,반매판 민족혁명론의 관점을 분명히 함.
6.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 노동조합운동의 개편
― 1960년 5월 9일 대한노총 지도부 총사퇴, 10여명으로 수습위원 위촉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국노협)」가 170개 노조, 조합원 16만 명 포괄.
― 1960년 11월 25일 대한노총과 전국노협이 ‘전국노동조합 통합대회’ 개최,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창립. 산별연맹 지도부는 유임된 경우가 많음(철도, 전업, 광산, 전매, 체신 등).
○ 조직확대
― 1959년 노조수 558개, 조합원 28만438명
― 1960년 노조수 914개, 조합원 32만1,097명
― ‘한국교원노조 총연합회’, 전국금융노조연맹, 언론노조 결성, ‘전국실업자구호대책투쟁위원회’(1960년 7월 27일 300명 참가) 등.
○ 노동쟁의
― 1959년 95건, 참가자수 49,813명
― 1960년 227건, 참가자수 64,335명
― 1960년 4월~1961년 5월 282건
☆ 주요 요구: 임금인상, 해고반대, 노조 민주화 등
― 주요 사례: 극동해운에 대한 해원노조의 76일간 파업, 대구 제일모직 노조결성 보장, 철도노조 임금인상 투쟁 등.
○ 노동운동의 한계
― 민주적 개편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함
― 정치투쟁 취약
― 연대성의 결여
― 타 민중운동이나 민주민족운동과의 결합되지 못함
― 실업문제에 대한 대응 미약
○ 농민운동은 활발하지 못함
― 토지 소유자로서의 보수성
― 농민조직 부재
― 폭력적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두려움
― ‘전국피학살유족회’ 형식을 취하기도 함
7. 학생운동․청년운동
○ 학생운동은 통일운동이 주류를 이루었고, 그 밖에 국민계몽운동, 신생활운동, 학원자주화운동이 있었음
○ 청년운동은 ‘민주민족청년동맹’과 ‘통일민주청년동맹’이 있었는데, 민자통의 근간 조직이었고 노선은 민주민족혁명 방향이었음. 청년조직의 간부들이 5.16 이후 ‘인민혁명당’ 사건에 연루됨.
8. 교훈
○ 1960년으로부터 꼬박 반세기 세월이 지났음. 세상은 엄청나게 변했음. 1960년의 경우와는 달리 현재 한국 사회는 국가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거침없이 편입되어 있음. 경제성장과 민주화는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었음. ‘7.4 공동선언’과 ‘6.15 남북공동선언’, 그리고 ‘10.4 남북정상선언’이 나왔음.
그러나 남북 분단은 그대로 존재하고 있고, 민주변혁은 이룩되지 못하고 있음. 민주 변혁과 민족의 자주화 및 통일의 실현은 오늘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한 기본 과제가 되고 있음.
○ 1960년 4월 혁명 이후, 1964년 6.3항쟁, 1974년 민주변혁운동(민청학련, 인민혁명당 재건위 등), 1980년 광주 민중항쟁, 1987년 6월 민주항쟁, 7~9월 노동자 대투쟁, 2008년 촛불 항쟁을 거쳐 우리 사회의 변혁을 위한 역량 축적은 진행되고 있음.
○ 이명박 정권이 대두한 이후 민주주의는 퇴행하고 있고, 남북관계는 경색되어 극심한 대결상태를 보이고 있으며, 민중생존권은 보장되지 않은 채, 그야말로 도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
○ 민주변혁과 자주적 민족통일, 그리고 민중생존권의 보장을 목표로 하는 사회변혁이 요구되고 있음. 그래서 사회변혁을 자기임무로 하는 민족통일전선의 구축과 그 전략의 설정이 중요하게 제기됨.
○ 민족통일전선 또는 민중전선은 진보정당이 주축이 되고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대중운동이 주력군이 되어 광범한 동맹 세력을 포괄해야 함. 그런 점에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그리고 한국진보연대가 지고 있는 역사적 책무는 막중하다 할 것임.
4.19혁명 50주년 <특강-탐방>
1. 취지
- 4.19혁명 50주년을 맞아 당시 노동운동과 혁신정당운동, 자주통일운동으로부터 교훈을 얻고 오늘의 민주노조운동 혁신, 진보정치대통합,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길을 찾는다. 아울러 4.19혁명 유적지 탐방을 통해 그날의 함성을 되새기며 민생외면, 민주후퇴, 평화위협의 이명박 정권 심판의지를 다진다.
2. 일시
- 2010년 4월 17일(토)~18일(일)
3. 참가자
- 노동조합운동, 진보정치운동, 촛불운동 등 진보운동에 참여하는 활동가들
4. 주최 및 후원
- 주최 : 민주노동당 중앙연수원/소통과혁신연구소
(연락 : 정성희 010-6748-7126, jinbodang21@hanmail.net)
- 후원 : 민주노총 교육원
5. 프로그램
4/17(토) 19시~22시 민주노총 9층 교육원
<4.19 당시 진보운동의 교훈과 오늘의 과제>
(강사: 김금수 민주노동당 고문/한국노동사회연구소 명예이사장)
- 이승만 독재와 4.19, 이명박독재와 제2의 촛불항쟁?
- 4.19 직후 노동운동, 실업자운동과 오늘의 민주노조운동 혁신과제는?
- 4.19 직후 혁신정당운동의 분열과 단결, 그리고 오늘의 진보정치대통합은?
- 4.19 직후 통일운동과 6.15시대 통일운동은?
22시~23시 뒤풀이
23시~ 찜질방
4/18(일) 08시~09시 아침식사
09시~11시 옛 서대문형무소 탐방
11시~13시 이동, 점심
13시~17시 4.19혁명 유적지 탐방(4.19민주올레 참가)
출발지 - 4호선 혜화역 2번출구 마로니에공원
주요코스 - 마로니에공원(교수단 데모 출발지, 옛 서울대 의대자리), 이화장(이승만 대통령 하야터), 동대문운동장(4.19합동장례식 터), 서울시의회(옛 국회의사당, 4.18고대생 데모 종착지), 효자동 로터리(4.19 경찰발포현장, 4.19향나무), 대한문, 4.19혁명기념관(옛 이기붕 집터) 등
첫댓글 참가 신청합니다.
참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