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공부를 안 하고도 좋은 성적을 얻고 열심히 일을 안 하고도 돈을 잘 벌고자 하는 미신, 신비주의와 기복종교가 되면 아니 됩니다. 기도는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경외하며 신실한 삶을 살아 나아가는 신앙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 칼빈이 멋지게 정의한 기도의 의미를 구분선 아래에서 잘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확정된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라 정한 기한이 다가옴이니이다 주의 종들이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의 티끌도 은혜를 받나이다 이에 뭇 나라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이 땅의 모든 왕들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시고 그의 영광 중에 나타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하셨도다(시 102:12-17). |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데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한 가지는 역사 속에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이뤄지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 다른 차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의 삶에서 일어날 일에 영향을 끼치기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요청하는 기도를 통한 경험이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을 "영원히 (권좌에) 계시고 시온을 건설하실"(시 102:12, 16) 주 여호와라고 찬양한다. 세상에 속한 모든 권력은 그분의 이름이 "대대에 이를”(12절) 하나님의 최고 권세 앞에 모두 엎드린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려하신다. "여호와께서 빈궁한 자의 기도를 돌아보시며 그들의 기도를 멸시하지 아니 하셨도다" (17절).
이 말씀에 대해 칼빈은 "신실한 성도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에 전념하도록,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들의 요청에 응답하실 때 그분의 선한 기쁨을 이루고자 뜻하신 바를 허락할 것을 약속하신다."라고 설명한다.
신학적으로 볼 때 두 가지 차원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는 그분께 간구하는 이들의 기도를 통해 일어난다. 다시 말해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이 온 세상에서, 교회 안에서, 그분의 백성의 삶에서 이뤄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 간청하며 기도한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에 의미와 중요성을 더할 수 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섭리를 이루시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확정된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없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것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라. |
칼빈, 『칼빈과 함께하는 매일 기도』, p.40.
첫댓글 당연히 칼빈의 해석과 묵상이 훌륭하지만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다른 주석의 설명도 아래에 첨부합니다.
네. 잘 읽고 참고하겠습니다.
<호크마 주석>, 시편
=====102:12
여호와여(* , 웨아타 예화) - 직역하면 '그리고 당신은 여호와이십니다'이지만 '웨아타'(* )를 중심으로 앞부분에 서술된 내용과 그 뒷 부분에 서술된 내용이 상반되기 때문에 '그러나 당신은 여호와이십니다'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같이 '웨아타'는 강조사로서 선행구와 두드러진 대비를 암시하는 경우가 많다.
주는 영원히 계시고(* , 레올람 테쉐브) -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계시는'이 문자적인 뜻이다. 이 사실은 슬픔을 초월케 하고 큰 위로와 소망을 준다. 연약한 한 인생인 시편 기자는 소멸하여도 시온의 소망은 그의 영원한 왕에게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황이 너무 자주 혹은 급하게 변하여서 잠시 동안도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영원한 왕으로서 변치 않는 분이라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영원 불변하시는 하니님의 축복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점점 더욱 웃음거리가 되어가는 듯 보일수도 있다. 그러나 기자는 하나님이 그의 교회에 주신 약속들, 특히 그 위대한 언약적 약속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하리라'(출 25:8).
이 약속에 의존하여 그는 비록 현재의 상황이 불행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궁극적으로 천상적(天上的)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그의 약속과 언약 역시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뻗치고 계신 하늘 보좌를 눈을 들어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 이는, 당신의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7:6) 시온 성을 재건케 하신다는 뜻이다(16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시온 성벽 재건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가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대해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내신 언약에 신실하기 위하여 범죄한 그의 백성을 회복시켜 다시 평강과 안녕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 여기서 '정한 기한'은 1차적으로 사 40:2이하; 렘 25:11, 12; 29:10; 30:18; 슥 1:12-17 등에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과 같은 특정한 때로 이해할 수 있다 :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칠십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렘 25:11, 12).정한 기한이 지나 새로 도래할 시대의 특징은 죄사함과 회개, 언약 갱신 및 시온재건 등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었다(VanGemeren). 아울러 궁극적으로 보면 이는 영적 이스라엘의 안녕이 성취되는 때로도 볼 수 있다(Perowne).
=====102:14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며 그 티끌도 연휼(憐恤)히 여기나이다 - 과거 그 찬란한 자태를 뽐내던 멸망 전 시대뿐만 아니라 멸망을 받아 폐허가 되어 버린 지금도 시온은 남은 자들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멸망 후 경건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의 티끌들을 자신의 몸에 뿌림으로써 그 성(城)에 대한 애착을 나타냈다고 한다(Perowne). 결국 본문은 시온 성 재건을 열망하는 남은 자들의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한편, 이것은 오늘날의 영적 시온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아 할 것을 교훈한다. 즉, 거룩한 성도들은 극심한 환난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서 더욱 그 교회를 사랑해야 하며 좀더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돌들...티끌 - 어떤 학자는
이 둘을 새로운 도성 건축을 위한 재료들로 이해하지만 그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Luther). 그보다는 멸망당한 시온 tjd의 황폐한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봄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다(느 4:2; Alexander).
=====102:15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세계 열왕이 주의 영광을 경외하리니 - 개역 성경에는 동사가 둘로 되어 있으나('경외하다'), 원문에는 하나로 되어 있는데, 그것은 '야라'(* )로서 '두려워하다'를 뜻할 뿐 아니라 '존경, 경외하다'를 뜻하기도 하며, 그 대상은 부모(레 19:3), 백성의 지도자들(수 4:14) 그리고 종종 하나님(15:4; 22:25; 31:19)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목적의 성취일 뿐 아니라 기도의 응답이기도 한 그 백성의 구속 및 회복을 통하여 드러날 하나님 영광의 현시(顯示)로 인하여 이제 이방 세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공경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세계 모든 백성에게로 확대되어가는 분기점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Delitzsch, Kirkpatrick).
=====102:16
건설하시고...나타나셨음이라 - 이 두 동사는 각가 '바나'(* )와 '니르아'(* )로서 완료형으로
되어 있다. 17절에서도 계속되는 이러한 표현은 미래에 있을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표현법을 예언적 완료형(prophetic perfects)이라고 한다.
=====102:17
빈궁한자(* , 아르아르) - 이곳과 렘 17:6에만 나오는 본 용어는 '히드'(개역 성경의 렘 17:6은 '떨기나무'로 번역하고 있음)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히드'란 황야에 무성하는 관목이다(Barnes). 어원적으로 볼 때 '발가벗음'을 뜻하는 본 용어는 매우 결핍된 상태에 있는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 문맥에서 그 존재란 계속해서 고통을 토로해 왔던 기자 자신(1-11절)으로 볼 수 있으나,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하반절과의 평행을 고려할 경우 일련의 고통받는 무리, 곧 이스라엘 민족 전체로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본 구절이 강조하는 바는 고통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다(13절 참조).
@장코뱅 고난에 처한 자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노베 아멘!
<매튜 헨리 주석> 미래의 시온의 영광(시편 102:12-22)
여기서는 앞 에나온 탄식 에비해서 굉장히 크고 고귀한 위로가 모아지고 있다. 왜냐하면 비록 저들이 던져졌지만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똑바로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 자신에게도,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그것은 좋지 않은 상태이지만, 그는 자신을 소생시키기 위한 많은 숙고를 하고 있다.
Ⅰ. 우리는 죽어가고 있는 피조물이며 우리의 관심과 위로도 죽어가고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시고 영원히 존속하실 하나님이다(12절). "내 날이 그림자 같나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구제책도 없나이다. 밤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나이다.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나이다. 우리의 삶은 일시적이나 주는 영원하시나이다. 우리의 친구들은 죽지만 우리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도다. 우리를 위협하는 것이 저를 건드릴 수 없나이다. 우리의 이름은 재 가운데 쓰여지고 세상에서 잊혀질 것이나 주의 기념 명칭은 대대에 이를 것이나이다. 시간의 끝까지, 아니 영원까지 주는 알려질 것이며, 영광받으실 것이니이다."
선한 사람은 그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그는
그의 슬픔과 죽음을 영원한 마음(the Eternal mind)의 불변하는 축복으로 기쁘게 생각하면서 균형을 맞출 수 있다. 하나님은 "영원히 계시며" 그의 교회의 신실한 수호자와 보호자로서 영원히 계신다. 그의 영광과 영속하는 기념은 교회의 관심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우리는 그것이 소홀히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Ⅱ. 가난한 시온이 지금 곤고한 중에 있지만 구원과 소생을 위한 때가 올 것이다. 구원의 희망은 하나님의 선하심 위에 세워진 것이다. "주께서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라. 왜냐하면 시온은 그의 동정의 것이다. "저는 일어나서 긍휼을 베푸시며 그 스스로 그것을 홀연히 행하시고 교회의 적들에 의해 만들어진 모든 적대 행위를 미워하시며 행하실 것이다." "모든 주인들의 주님이 열심히 이것을 행할 것이다." 매우 고무되는 것은 교회를 구원하기 위해 예비된 시간이 있다는 것과 어떤 시간이 올 뿐만 아니라 지정된 시간에 올 것이라는 것이다 .무한한 지혜가 그 시간을 정했으며(따라서 그것은 가장 좋은 시간이다) 영원한 진리가 그것을 결정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어떤 특정한 시간이며 결코 잊혀지거나 폐지될 수 없다.
70년이 끝난후에 바벨론의 딸로부터 구원됨으로 말미암아 시온이 기뻐할 시간이 오기로 되어 있었으며 결국 그것은 오고야 말았다. 시온, 즉 다윗의 도성에 세워진 성전이 파괴되었다. 시온의 기쁨은 16절에 설명된 바와 같이 성전의 재건설인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예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니엘은 "주를 위하여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된 성소에 비취시옵소서"(단 9:17)하고 기도한다. 시온에서의 건설은 저들이 갈망하는 것처럼 어떠한 사람에게도 큰 기쁨이 된다. 황폐된 상황에서 교회의 특권의 회복과 재건보다 더 바람직한 축복은 없을 것이다.
1. 여기에서 이러한 것은 시온의 친구들에게 큰 기쁨이 됨으로 기대되고 열망되었다. 주의 종들이 던져지고 흩어졌지만 성전의 돌들은 즐거워하며 그것의 티끌, 바로 그 쓰레기와 파괴를 연휼히 여긴다(14절).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그 돌들이 새 건물을 위해 취해졌을 때 그것으로 인해 격려된 자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티끌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진실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는 자들은 교회가 번영 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곤고한 중에 있을 때에도 교회를 사랑한다. 하나님이 시온의 파멸을
그의 백성의 마음속에 긍휼히 여기도록 했을 때 그가 그것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라는 것은 좋은 희망의 근거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그들의 기도와 노력에 의해서 그렇게 하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근거가 된다. 또한 열정적으로 시온에 대해서 관심하는 자들이 있고 여호와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를 기다리는 좋은 간구가 되는 것이다.
2. 그것은 시온의 이웃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에 기대되고 열망되었다(15절). 그것은 아마도 저들의 회개, 최소한 저들의 확신의 행복한 수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열방이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며" 그에 대한 그리고 그의 백성에 대한 숭고한 생각을 가지게 될 것이며 땅에 있는 왕들이 그의 영광을 경외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의 섭리로 교회에 이와 같은 영광을 부여했을 때 그들은 가지고 있던 생각보다 하나님의 교회에 대해서 더 좋은 생각들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참여하시는 것을 볼 때 교회에 대해서 어떠한 일을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저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너와 함께 가리다"(슥 8:23)고, 그것은 이와 같이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며 유다인이 되는 자가 많더라"(에 8:17)고 했다.
3. 그것은 시온의 하나님의 영광에 돌려지기 때문에 기대되고 열망되었다(16절). "대저 여호와께서 시온을 건설하신다." 그들은 그것이 이뤄질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수행하셨기 때문이며 그는 "그 영광 중에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저들이 최고목표는 그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갈망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것이 정한 때에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아버지, 당신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소서"하는 기도하는 자들은 하늘로부터 그리스도 자신에게 주어졌던 똑같은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영광을 받았고, 다시 영광을 받을 것이다." 지금이 비록 쇠잔해가는 시기일지라도 그러하다.
Ⅲ.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 기도는 등한시된 것 같고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보였으나, 저들은 과거를 회고하면서 크게 용기를 얻게 될 것이다(17절). "여호와께서는 빈궁한 자의 기도를 들으신다" 하나님은 세계의 왕들이
"경외할" 그런 "영광 중에 나타나실 것"이라고 했다(15절). 지위 높은 사람들은 영광 중에 행차할 때 자기들에게 탄원하는 가난한 자들을 경멸하기 쉽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신다.
1. 이제 간구하는 자의 비천함을 주목해 보자. 그들은 "빈궁한 자들"이다. 여기에서 사용된 말은 고상한 말이다. 그것은 광야에 있는 관목, 작은나무 또는 담장에 있는 우슬초와 같은 풀을 의미한다. 그들은 낮고 파괴된 상태에서 영적인 축복으로 부요하게 된 것처럼 여겨지지만 일상적인 선한 것들의 빈궁 - 가난함, 약함, 황폐함, 헐벗음 -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그 말은 다양하게 언급되었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로 가까이 인도하시기를 원하며 은총으로 돌보기를 원하는 낮고 파괴된 영혼을 의미한다. 이 사실이 저들을 굴복시킬 것이다. 빈궁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딤전 5:5).
2. 저들의 비천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살펴 보자. 그는 저들의 기도를 들으실 것이며 그 기도를 바라보며 저들의 탄식을 음미하시며(대하 6:40) 그는 저들의 간구를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표현된 것 이상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그는 그것을 값지게 여기며 그것을 기뻐하며 평화의 응답을 준다. 그것은 주어지는 가장 큰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저들의 기도를 경멸하면서, 하나님이 그것을 경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들의 곤고가 지속되고 저들의 간구가 응답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경멸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우리의 비천함과 야비함, 우리의 어두움과 죽음,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의 많은 결점을 생각할 때는, 우리의 기도가 하늘에서 멸시받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그 반대되는 것을 보장받고 있다. 왜냐하면 성부께서 옹호해 주고 있으며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은총 아래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록 곤고한 중에 있으나 그에게 기도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의 이러한 사례는 끊임없이 기도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위로를 가진다면 우리가 저들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또한 적합하다. 그가 저들에게 저들의 선조에게 행한 것으로 말미암아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많은 자들이 교회의 역사를 읽음으로써 개종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새롭게 창조될 사람들 즉 그의 "창조의 처음 열매'가 되는 자들은 그들이 더욱 곤궁하게 될 때 저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인하여 여호와께 찬양할 것이다.
Ⅳ. 저주 아래 갇힌 자는 부당하게 도살할 양같이 보이지만 저들의 해방을 위한 배려가 취해진다(19, 20절). 하나님은 그가 그의 보좌 높은 곳 성소로부터 하감하시며 감찰하신다. 그것은 관망의 장소이며, 지상의 어떠한 것도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그의 눈에 숨겨질 수 없다. 그는 세상의 왕국들의 모습과 그들의 영광 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갇힌 자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은총의 행위를 하기 위해서 감찰하신다. 저들의 소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죽기로 정한 자들을 해방하기 위해서" 저들을 도운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바벨론으로부터의 유대인들의 해방이라고 이해한다. 하나님은 저들이 애굽에 있을 때 저들을 구출하려 하감하신 것같이(출 3:7-9) 거기에서도 그들의 탄식을 들었다. 하나님은 은총의 언어인 그의 곤고한 백성의 기도를 감찰하실 뿐만 아니라 본성의 언어인 저들의 탄식도 감찰하신다. 저들이 죽기로 정해지고 속박되고 쇠사슬로 묶여져 있을 때일지라도 갇힌 자의 탄식을 듣는
하나님의 연민과 갇힌 자의 속박을 풀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라!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행 7:6). 하나님의 겸비와 연민의 이러한 예는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1. 그것은 "시온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도록" 도와 줄 것이며, 그 자신이 선포한 그의 이름에 응답일 되 것이며, "은혜롭고 자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불리울 것이다. 시온에서 그의 이름의 이러한 선포는 예루살렘에서 그를 찬양할 소재가 될 것이다(21절). 만일 하나님의 섭리로써 그의 이름을 선포하면, 우리는 그로 인해 그의 찬양을 선포해야 하며, 그의 이름의 메아리를 울려 퍼지게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되고 갇힌 자기 백성을 해방시킬 것이며, 저들은 하나님이 이름을 두기로 택한 "시온에서 그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며" 그들의 귀환지인 "예루살렘에서 그의 찬양을 선포할 것이다." 저들이 포로된 땅에서는 시온이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137:3, 4). 그래서 하나님은 저들이 노래할 수 있도록 다시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였다. 결국 하나님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를 주시며("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케 하소서." 시 142:7),
죽음으로부터 생명을 주신다. "내 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119:175).
2. 그것들은 하나님의 예배에 다른 사람들을 이끌도록 도울 것이다(22절)(저들이 바벨론으로부터 귀환된 후에).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였을 때" 열방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저들과 함께 연합하여 "여호와를 섬길 것이다." 이것은 포로에서 구출된 이스라엘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열방 중에 흩어진 많은 자들이 기쁨으로 떡을 나누는 잔치를 유지한 데서 성취하였다(에 6:21). 그러나 그것은 좀더 멀리 후세에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신앙에의 개종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스도는 갇힌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속박된 자들에게 석방을 선포했다. 그로 인해 저들은 복음의 교회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할 것이며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연합하여 선포할 것이다.
@장코뱅 빈궁한 상태는 성도의 겸손을 의미하고 여호와를 예배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기쁨과 감사의 드림으로 보입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주신다고 하셨죠. 우리가 마음의 소원을 갖고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칼빈도 그런 차원에서 위의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언뜻 보면 신인협력설 같이 보이지만 칼빈이 그런 엉터리 주장을 했을 리는 만무하지요. 성도의 기도조차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순종하고 경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