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성이 없이는 성경은 무류할 수가 없다?’ 이 글에서 우리는 ‘무오’와 ‘무류’의 정확한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하겠다. 무오(無誤, inerrancy)와 무류(無謬, infallibility)는 서로 유사한 단어로 알고 적당하게 넘어가는 경우가 있지만, 성경의 무오성 개념에서는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 무오(無誤, inerrancy)는 개혁주의∙보수적 복음주의 신학에서 주장하는 용어로 단어까지도 완전히 영감 되었다는 것이고, 무류(無謬, infallibility)는 칼 바르트∙WEA(세계복음주의연맹, World Evangelical Alliance) 등이 주장하는 것으로 생각 정도에만 영감 되었다는 뜻이다. 무류는 완전히 틀림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심각한 실수는 없다는 정도의 의미라고 한다. 성경의 무오성이 아니라 무류성을 주장하는 수정주의적 복음주의자들과 신정통주의자들은 성경이 역사와 과학 등의 분야에서 오류가 때때로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처 박사는 성경의 무류성을 주장하는 것은 무오성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이 구분과 차이점을 알고 구분선 아래의 글을 읽으면 이해가 더 잘 될 것 같다.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시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는 최종적이며 최고이다. 만약 신약성경에 제시된 그의 견해나 교훈들 중 어느 것에서 그가 오류나 실수를 범했다면 그는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없으며, 모든 기독교 교리는 기만이며 장난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경관과 일치되지 않는 어떤 성경관도 그릇된 것으로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만약 신약성경이 무엇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마태복음에서 계시록까지 계속 우리 주와 구세주의 신성을 증거하는 것이다.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이 점에 대하여 완전히 동의한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의 신빙성에 대하여 믿었던 모든 것들은 모든 참된 신자들의 의식에 대해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과학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실 문제에 있어서 히브리 성경의 완전한 정확성을 믿었다면, 우리는 이 점에 관한 그의 견해를 모든 면에서 정당하며 신빙성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역사와 과학의 문제들이라고 하더라도ㅡ비록 이것들이 신학적인 성격은 아니지만ㅡ근본적인 교리상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실수를 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신학적 명제이다.
구약성경에 대한 그리스도의 언급을 자세히 조사해 보면, 히브리 성경에서 역사와 과학에 관련된 가장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진술들까지도 그는 완전히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다. 다음은 몇 가지 실례이다.
1. 임박한 그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하면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2:40에서 이렇게 단언하셨다.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이론을 옹호하기 위한 편견을 갖지 않는 한 이 말에서 예수께서는 요나의 표적을 다가오는 자신의 체험-즉 십자가에서 죽는 시간부터 부활절 아침 무덤에서 육체적으로 부활할 때까지 사이의 그의 체험-을 가리키는 모형(혹은 최소한 분명한 유추)으로 여기셨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결론을 도출해 내기는 불가능하다. 만약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고 또한 그것이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지냈던 것의 대형(antitypical) 이라면 이 점에 대한 현대의 회의론과는 상관없이 모형 그 자체도 역사적인 사실이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다. 요나서의 사실성은 마태복음 12:41에서 더욱 확인된다.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ㅡ즉 더 큰 이는 예수 자신이다. 예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이 실제로 요나의 엄중한 경고와 책망에 대하여 자기를 낮추는 겸허와 두려움으로 응답했다는 것을 함축해서 말하고 있다ㅡ이것은 요나 3장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예수께서는 저 미숙하고 배우지 못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당시의 유대인들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죄가 가볍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런 판단은 요나가 말한 바로 그대로 니느웨 사람들이 행했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복음주의자인 체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요나서를 단순한 픽션이나 우화의 한 편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런 사람들의 견해를 신봉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무오하심을 거부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이 된다.
2. 과학적으로 혹은 역사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고 사람들이 자주 생각하는 성경의 다른 기사들 중의 하나가 바로 창세기 6-8장에 기록된 노아의 방주와 대홍수 이야기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감람산 설교에서 분명히 이렇게 주장하셨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파루시아, parousia)도 이와 같으리라." 여기서 다시 예수께서는 미래의 역사적 사건이 구약성경에 기록된 한 사건의 대형(antitype)으로서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홍수를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의 실제 역사로 여기신 것이 분명하다.
3. 시내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의 기적으로 이백만이 넘는 이스라엘 사람을 먹였다는 출애굽기의 기사를 자칭 복음주의자들은 하나의 전설로 격하시키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요 6:49) 라는 말 속에서 그 이야기를 완전히 역사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나서 그 다음 절에서 그는 자신을 군중에게 그 대형으로,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보내신 참된 생명의 떡으로 소개하셨다.
4. 예수님 자신이나 영감 받은 제자들의 기록된 말 속에는 역사나 과학에 대한 어떤 부정확함이 구약성경 속에 있다는 아주 미세한 암시도 들어 있지 않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사두개인들의 과학적이며 합리주의적인 회의론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불은 붙었지만 사라지지 않고 기적적으로 타고 있던 떨기나무)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는 출애굽기 3:6의 말 그대로를 다음과 같이 인용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마 22:32). 이 구절을 히브리어로 말하게 되면 동사가 없게 되므로 그 시제는 자연히 현재시제가 되는데, 이 현재시제로부터 우리 주님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무덤 속에서 썩고 있는 생명 없는 시체들의 하나님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하신 것이 아니라, 영광 가운데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향유할 살아 있고 영구적인 인격체들의 하나님으로만이 자신을 묘사하고 계신다는 추론을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은 죽은 자의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
5.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에 관한 한, 그리스도는 아담과 하와에 대하여 말한 창세기 2:24의 설명의 정당성을 암시하셨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마 19:5). 바로 이 앞 절에서 그리스도는 창세기 1:27을 언급하셨는데, 그 구절인즉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인류 역사가 시작될 때에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는 것을 말하는 구절이다. 현대의 과학 이론과는 상관없이 주 예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글자 그대로의 역사적인 인물들로 믿으셨다. 이와 유사한 확증이 바울의(이 사람은 자기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자기의 교리를 받았다고 증언했다<갈 1:12>) 서신들, 특히 디모데전서 2:13-14에서 발견된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eplasthē, '주조되다', '모양을 취하게 되다') 이와가 그 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이 구절의 쟁점은 가정과 교회에서의 남성의 지도적 책임을 위한 역사적 배경이다. 그런데 여기서 창세기 3장의 역사성이 전제되어 있다. 이것과 관련해서 우리는 로마서 5:12-21에서는 인류를 죄에 빠지게 한 아담의 불순종과 대속의 죽음을 통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속을 가져다 준 그리스도의 순종이 대비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14절에서는 아담이 오실 자(그리스도)의 표상(typos, 모형)으로 진술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그리스도가 역사적 인물이며 아담의 대형(antitype) 이라면, 아담도 역시 동일하게 역사적 인물이었다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다. 어떤 사람도 성경의 교리적 무류성에 대한 충실한 신봉을 솔직히 주장하면서 동시에 인류의 유일한 시조로서의 아담이 신화적이거나 전설적인 인물이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하여 개방적 태도를 취할 수는 없다. 로마서 5장의 이 고도의 신학적 구절은(이 구절은 원죄론의 근거 구실을 한다) 창세기 2-3장이 글자 그대로의 사실적인 역사를 포함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글리슨 아처 저, 황영철 역, 『성경난제 백과사전』(서울: 생명의말씀사, 1996, 7쇄), pp.23-26.
첫댓글 이 포스팅은 조금 어렵지만 중요한 내용이 많습니다. 성경 무오성(inerrancy)와 무류성(infallibility)의 유사한 듯 하지만 차이 나는 뉘앙스를 본문 위 소개 글에서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건조하고 딱딱하지만 인트로의 안내를 받고 잘 이해하며 읽으면 유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
고경표 목사님의 아래 설명을 다시 읽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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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무오 (Inerrancy)와 성경무류(infallibility)는 같지 않다
https://blog.naver.com/lucalcollge/223678959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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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을 읽고 바르트, 신정통주의, 신복음주의의 한계를 알면 무오성과 무류성의 차이를 알고, 성경의 정확 무오성에 잘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오늘 포스팅 본문과 함께 또는 이전에 읽으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습니다.
총신 교회사 교수를 역임한 박용규 교수는 온건한 입장에서 성경의 무오성과 시카고 선언의 내용을 아래 동영상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fOTWpjBBaA
동영상으로 보니 이해가 잘 되네요.
WEA는 WCC보다는 온건하지만 자유주의, 에큐메니칼에 가까운 신복음주의이므로 성경의 무오성, 무류성 논쟁에서 무류성의 입장에 섭니다. 보수주의와 개혁주의가 군집한 단체는 국제기독교연합회(ICCC)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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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음주의는 빌리 그레이엄과 존 스토트에 의해 발전된 기독교 사상으로 성경 중심적 신앙을 견지하되 지성과 신학의 균형도 충분히 고려하는 것을 지향하는 개념이다. 또 세상에 대해 공격보다는 비교적 화해와 부드러운 설득을 추구한다.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신복음주의는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보수주의라고 비판받고 근본주의자들로부터는 자유주의에 가깝다고 비판받는 경우도 있다. 세계복음주의연맹이 지지하는 로잔 언약의 선언문은 기독교의 사회적 책임과 평화주의, 빈곤 퇴치, 선교를 모두 균형있게 강조하고 있다."
<-- 출처: "세계복음주의연맹", 한국어 나무위키.
많은 경우에 흑과 백 사이에 어중간히 위치하는회색지대가 문제인 것 같습니다.
아처 박사가 위에서 나열했듯이 무류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수용하여 창 1~11장을 신화로 본다거나 노아홍수, 요나가 물고기에 먹힌 사건, 이스라엘이 40년간 광야생활 한 것 등등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있으므로 성경의 무오성을 훼손하고, 진리에서 서서히 미끌어져 나가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판단인 것 같습니다. 이점을 아처 박사가 잘 지적하고 있네요.
집이 무너질 때 한꺼번에 확 무너지지 않고 작은 나사가 하나 빠지기 시작하여 점점 기둥이 빠지고 벽이 무너지고 지붕이 내려 앉는 것과 같은 현상이 무오성에 회의를 가지고 의심하기 시작하는 곳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네요.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무류성을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를 서서히 무너뜨리는 고도의 전략 같습니다.
네, 공감합니다.
무오성은 인정치 않고 무류성만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아래 말씀이 적용되면 어떨까 싶습니다.
계3:15, 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 충분히 적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Okay!
@장코뱅 공감합니다.
위의 글에 대해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개역한글성경을 읽었었고 1, 2년 전 부터는 새번역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위의 글에서 언급하는 성경은 어떤 성경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처 박사는 고대 근동어를 비롯해서 성서 원어 등 15개 언어를 섭렵한 학자로서 다양한 사본들과 다양한 영어 성경 등을 두루 읽었겠지요. 성서비평하던 다른 신학자들도 마찬가지겠구요. 이 책 번역 시 한글 성경은 개역한글입니다. 이 글을 성서번역본들의 문제로까지 확대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한국어로 번역(1996년)되면서는 개역한글을 썼고요. 아처 본인이 본 영어 성경은 아마도 KJV 아닐까 싶습니다.
멀리 계시지만 기쁜 성탄을 기원합니다(Merry Christmas!)
@코람데오
성경의 무오성을 말할 때는 성서 원어에 한정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믿을 때 위와 같은 말씀을 많이 들었는데,
그때마다 저는 제가 매일 보는 개역한글성경이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에는 신학적인 번역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글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보지만,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번역을 잘못한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장코뱅
장코뱅님
말씀 감사하고 성탄절에 대한 말씀도 감사합니다.
기쁜 성탄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Merr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