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1950년6.25~1953.7.27일 기준으로 666이라는 숫자를 뺀다.
1950-666=1284년
1284년에는 무슨일이 있었을까?
1284년 잉글랜드 웨일즈 완전 복속.
1284년 몽골 쿠빌라이 21년 일본침략차 구주서남부 가고시마북부 나가사키 서남부 타카섬으로
상륙하려다가 풍랑으로 괴멸하고 도원수 홀돈, 3만을 실은 병선만 살아돌아감..
몽골 쿠빌라이가 원나라를 세우고 안정화되는 시기.
1284-666=618년.
618년에는 무슨일이?
수(隋)양제(煬帝)14년, 공제(恭帝)2년이 되는 해.
당(唐)고조(高祖/이연) 원년이 되는해. (당태종 이세민이 당나라를 건국하고 이연을 내세우는 해)
신라(新羅) 진평왕(眞平王)40년이 되는 해.
고구려(高句麗) 영양왕(嬰陽王)29년이 되는 해에 죽고, 영류왕(榮留王)원년이 되는 해.
백제(百濟) 무왕(武王)19년이 되는 해.
신라
진평왕 618년 7년전에 빼앗긴 거창 가잠성을 되찾기 위해
북한산주의 군주인 변품(邊品)을 보내 탈환하였다.
그러나 전 가잠성 현령 찬덕의 아들 해론(奚論)이 싸우다 죽었다.
백제
무왕 600년 즉위 원년, 개별가야지방 괴산 늑노현, 증평 서곡성, 우르가야 지리산 운봉 아막산성,
남원 모산성, 대가야지방 거창 가잠성, 성주 독산성등 대가야지방 70여성을 함락시킨후
산청 생초,생비량면 일대까지 백제에 편입.
무왕은 삼국사기에 법왕의 아들.
삼국유사에는 익산 연못에 사는 용의 아들.
(산서성 대동시 용성 옛 용성국. 후일 서진(西秦)이 세워짐. 이곳에서 이주한 세력을 일컫는 말임.
석탈해도 용성국 출신임. 산서성 장치시 장사지방, 사탁지방으로 남하하여
후일 사마염이 서진(西晉)을 건국하고 감숙성 원천(완천)에서 전진의 부견이 죽은 후 세워지는
걸복국인의 서진(西秦)과는 다른 나라 ).
북사에는 위덕왕의 아들.
일본 신찬성씨록에는 진이왕의 아들.
후주서, 만성통보에는 부여관의 아들이라고 나온다.
고구려
영양왕(嬰陽王~618)은 수문제의 30만대군, 수양제의 113만대군을
을지문덕과함께 섬서성 유림시 임유관전투(臨渝關戰鬪)와 산서성 중서부 살수에서 수나라대군을
물리치는 위대한 왕이다.
임유관(臨渝關/림유관)은 하북성 북발해만의 만리장성 동쪽끝인 산해관(山海關)이 아니다.
임유관은 섬서성 유림관 지역을 지나간다.
유림관(楡林關)은 섬서성 유림시(楡林市)를 통과하는 곳이다.
임유관은 산서성 서부에서 섬서성 유림시를 지나 서부끝 지점에 있었고
섬서성 서안 장안성을 지키는 고구려장성(만리장성)을 말한다.
이 성을 고구려가 실크로드 요충지를 점령하고 쌓는 장성이다.
북방의 소족흉노[북흉노]와 오족선우 알씨가야인들을 막기 위해 쌓은 장성이었다.
고구려는 산서성 진성시 고평시 백제2군을 점령한후 이어받아 쌓는다.
산서성일대는 백제의 동성왕, 무령왕이 섬서동부지역까지 일부 쌓게 되는데,
대부분은 진한(辰韓)의 후신국인 진국(晉國 bc323)에서 쌓은것이다.
산서서부에서 섬서성 유림시 임유관에서
감숙성 란주시 가욕관(嘉峪关), 돈황시 옥문관(玉門關위먼관)으로 이어지는
하서회랑의 만리장성은 고구려가 쌓은 장성이다.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위만이 감숙성 돈황시 하서회랑 끝지점인 안서현 위먼관(옥문관)일대로 달아난다.
위만은 무관출신으로 노관의 수하였으며 노관은 기준의 번조선으로 가면 죽을 것을 예상하고,
위만과 헤어져 북흉노지역으로 망명하고, 위만은 산서성 남부 기준조선으로 망명해들어간다.
원래의 기자조선은 안휘성 서화, 수현(수춘), 몽성일대에 있었다.
안휘성에서 기준의 선조인 기후여가 산서성남부 실크로드 종착지로 이주해간것이다.
그후 기준은 위만에게 멸망하여 반도평양으로 들어오고 기탁이 천안 직산 마한국을 건설한다.
기준, 위만조선에 남아있던 세력이 훗날 정주 한성백제, 양나라, 북제, 북주, 남제, 진나라인,
고구려의 구려인, 북연인이 된다.
그리고 그들이 중원을 상실하고 반도로 이주하게 되는 것이다.
산서, 섬서, 감숙일대가 모두 하서시랑 ,하서주랑, 하서회랑일대로
오르도스길을 보호하기 위하여 쌓은 장성이다.
중간에 서역 실크로드에서 오르도스길을 통해 들어오는 물자를 약탈하는 세력을 막기 위함이었다.
영양태왕이 수문제, 수양제의 대군을 물리치는 곳은 산서, 섬서성, 감숙성지방인 것은 분명하다.
단지 연개소문이후부터 이 일대의 귀족세력 180~200여명과 관련가족 2천여명이 학살하면서
중원 북조문명을 상실하고 요녕성, 반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논란이 있는 것뿐이다.
북위가 분열하여 서위의 우문태(우태)가 서안을 장악하면서 고구려는 서안지방을 상실한다.
수당이 건국할때 고구려땅 일부인 서안을 서위에 빼앗기고 서위>북주>수>당이
섬서성 서안, 산서성 남부일대를 장악하기 때문에, 수당영역이었던 곳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만리장성에 대한 진실은 중국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논란이 되는 곳은 한국인의 출입을 막고 있다.
만약 한국인이 북경이나 내몽골자치기에 살고 있다면
사막모래를 없애는 식목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여 사막화를 막아냈을것이었다.
중국은 북경 앞까지 사막이 덮쳤는데도 처리할 능력 자체가 없다.
오히려 한국의 현대, 대한항공 등, NGO단체가 가서 사막화를 막고있는 실정이다.
그런 중국인이 만리장성을 쌓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코미디를 하자는 이야기다.
즉, 천리장성에 그 해답이 있다.
천리장성을 쌓은 민족이 만리장성도 쌓은 민족이었던것이다.
산서성동부 태항산맥과 하북성부터 명장성을 쌓고 하북동부지역 천황도(秦皇島)시
산해관구(山海關區) 수중현(綬中縣) 발해만의 산해관까지 연결하고 나서 중국이 쌓았다고 주장하고있다.
요녕성과 경계선에 위치하며 하북성지방은 관동지방으로 불리웠다.
훗날에는 하북성과 요녕성을 경계로 관서(하북성), 관동지방(요녕성~길림성)으로
다시 나뉘어지게 된다.
요동성 방어의 승전장이었던 강이식장군의 묘는 요녕성 심양현(潘陽縣)
원수림(元帥林: 만주봉길현 원림역앞)에 있는데, 이것은 산서성 진성시 요동성을 상실하고
요녕성일대로 들어온 고구려인들중 진주강씨 후손들에 의해 심양시일대에서 강이식의 가묘를 세운것이다.
그후 진주강씨들은 훗날 강이식(姜以式)장군 시조묘를 경남 진주시 봉산사(鳳山祠)로 모셔와
진주강씨(晉州姜氏)의 성지(聖地)로 삼고 모시고 있다.
요녕성 진주시의 전신은 하북성남부 석가장 인근의 진주시(하곡양(下曲陽)에서 온것이다.
산서성 진성시 남부 요동성>하북성 석가장 진주시>요녕성 심양시>경남 진주시로 들어온다.
이들 진주시민과 진주강씨의 마지막 종착지는 경남 진주시였다.
진(秦)시황은 bc213년부터 2~3년간 산서서부에서 섬서성 유림시 유림관지역을
잠깐 쌓다가 bc210년에 죽는다.
그것도 동이족인 진국인을 끌어다 쌓으려다 동이족들이 자기왕이 아니니까
반도로 도망쳐오는 사람들이 진국인(晉國人)과 진인(辰人)이었다.
원래 진시황의 진나라 이름도 진국을 점령하고 진한>진국(辰韓>晉國)의 이름을 빌려
비슷하게 진(秦)나라라고 짓은 것이다. (쉽게 지배하고 포용하기 위해서..)
618-666=bc48년.
기원전 48년에는 무슨일이?
기원전 48년 동부여 건국자 헤부루(해부루/고우루)왕 사망.(bc86~48)
기원전 47년 동부여 제2대왕 금와왕 등극.
기원전 48년 8월9일 알렉산드리아제국 그리스 테살리아지방의 파르살루스 평원에서
로마의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간의 대전투가 벌어진다.
ad48년은 광무제 유수가 중원을 통일하고 동한(후한)을 건국하는 해이다.
기원전48+666=714년
기원전48-666=618년
기원전714년~3년 견융의 변경침공,사벌단군의 번조선행차(1개월간 잔류),
처음으로 번조선에 행차한 기록이 보인다.
번조선은 기자>기후(기후여/서우여)>기준.기탁으로 이어지며 위만에게 번조선을 빼앗기자,
bc194년 기준은 감숙성 평양시 평양마한국> 한반도 평양 마한국 이주,
기탁은 천안 직산 마한국인 중마한을 건국한다.
기원전 707년 임치(臨淄)에서 제(齊)나라 군사와 전투를 벌여 승리한다.
임치(臨淄)는 섬서성 유림시(楡林市) 임유관(臨渝關)이 들어서기전의 주변일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임유관은 산해관이 아니라 유림시일대에 있었던 오르도스를 지키는
조선장성이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원래 백제가 산서성에서부터 섬서성지방으로 쌓아가던 것을 고구려가 무녕왕과 2차전에서 승리하고
이어받아 감숙성 란주시 가욕관, 돈황시 옥문관까지 완성한 장성이었던것이다.
진조선때부터 쌓아가기 시작하여 진한의 후신국인 진국을 백제가 이어 받았다가,
고구려가 점령하고 쌓아가는 장성이 만리장성이다.
기원전714+666=1380년
기원전618+666=1284년
기원전1380년 고홀단군 영고탑 개축으로 별궁지음(1345년에 완성)
영고탑이 섬서성 서안 서안평 주변에 있었다.
북흉노가 조선의 상전이라고 주장하여 북흉노를 물리침(기원전1377)
이당시 북흉노는 감숙성 중서부, 내몽골서부 사라선맹자치기를 말한다.
이당시에도 섬서성 서안, 하남성 낙양, 산서성 영제시, 운성시장안일대는 단군조선영역이었다.
고구려에 의해서 서안 위남시주변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장안은 한때 동위(고태>구태)와 그의 아들 고양에 의해서 하남성 낙양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기원전 1284년 색불루가 단군삼한을 삼조선체제로 전환시키는 해.
진한은 진조선, 마한은 막조선, 번한은 번조선으로 고치고 각 조선왕을 임명하는 해.
색불루는 부여출신이자 기자(箕子)의 후예인 수유족(須臾族) 서우여(徐于餘/서여胥餘/기후여箕侯餘)를
번조선의 왕으로 임명한다.
(기자씨가 서씨, 변씨, 청주한씨, 덕양기씨, 북원선우씨(원주) 등으로 퍼져나가는 시초를 연다.)
백악산 아사달시대를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