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感泉吳先生碑文 至誠事親爲孝至誠事君爲忠至誠事天爲仁人矣. 盖誠者天之道而爲萬物之終始焉有誠至而不動者哉. 歷數今古能至誠事親而爲格天動物匹美 王孟之者吾於感泉吳先生見之矣. 先生諱浚同福人顯于王麗文獻公大陞 翰林自貴退隱石山麗亡不臣李氏 遯于興城寔先生祖曾二世而同知彭年考也. 生以世宗甲子自幼性孝專專一心惟在於親其事親也 一以小學爲準則而無少違. 忤其母病露禱指血以延危命 父患疽也吮之三晝夜而不離口竟奏効 及其親老而病就嘗糞割股極殫其誠其艱也. 毁慽幾傷生日一粥不進鹽菜遍身生白毛. 廬于墓下晨夕號哭 有虎常守每朔望爲之獻鹿而助奠需. 家有胎狗亦隨廬生雛于越峴而乳之與虎同處. 近無泂酌之水 每夙夜遠汲手足爲之皸瘃 天忽雷坼水湧廬下而味甚甘洌. 本倅聞之甃井而勒碑曰孝感泉仍稱感泉先生 後有人汚泉天雷暴死道臣繡衣莫不驚歎相繼以聞成廟嘉之特除通善郞軍資監直長命復戶 卒以五十一之甲寅旣歿之七月 特命其閭勅本縣春秋賜祭世世勿 감천 오선생 비문(全北 高敞郡 新林面) 지성으로 어버이를 섬김이 孝(효), 지성으로 임금을 섬김이 忠(충)이며, 지성으로 하늘을 섬기면 어진 사람이다. 대개 誠(성)은 하늘의 도요, 만물의 시작이며 끝이니, 지극한 정성이 있으면 감동 안 할 자가 있겠는가! 고금을 지내오면서 지성으로 부모를 섬겨 하늘과 사물까지 감동시켜, 王祥(왕상)과 孟宗(맹종)에 대등한 분은 우리 감천 오선생을 볼 수 있다. 선생의 휘는 浚(준)이요 동복인이신데, 고려왕조 문헌공 휘 大陞(대승)이 뛰어나셨다. 한림학사 自貴(자귀)와 퇴은 石山(석산)이 고려가 망함에 이씨조선에 신하가 되지 않고, 흥덕에 은둔하시니 선생의 조부와 증조부이시며 동지 彭年(팽년)은 부친이시다. 세종 甲子年(서기 1444)에 출생하셔 어려서부터 천성이 효성스럽고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부모를 섬김에, 소학의 가르침을 준칙으로 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었다. 모친의 병환에 갈피를 못 잡아 하늘에 빌고 斷指(단지)로 연명시키며, 부친의 등창을 사흘 밤낮에 입으로 빨아 완치시켜 드렸고, 부친의 노환에 대변의 맛을 보고 허벅지의 살을 베어 드리니 정성이 그렇게 힘들었다. 상사에는 매우 슬퍼하여 하루에 죽 한 그릇만 먹고, 절인 채소를 먹지 않으니 온몸에 흰 털이 났다. 묘 아래에 여막을 짓고 조석으로 호곡하니, 범이 와서 항상 보호하며 朔望(삭망)마다 사슴을 제수로 바쳤다. 집의 새끼 밴 개가 여막에까지 따라왔는데 고개를 넘어가 새끼를 낳고 젖은 범과 한곳에서 먹였다. 근처에 맑은 물이 없어 새벽마다 먼 곳에서 물을 길어 오느라 손발이 얼어터지자, 하늘에서 갑자기 뇌성을 치더니 맑은 샘이 여막 아래에서 솟아나는데 그 물 맛이 매우 달았다. 본현 현령이 듣고 달려와 인부를 시켜 샘 틀을 짜고 비석을 세워 孝感泉(효감천)이라 하니, 이로부터 감천선생이라 불리게 되었다. 뒤에 샘을 더럽힌 여인이 있어 하늘에서 벼락으로 폭사케 하니, 감사와 어사가 놀라지 않을 수 없어 조정에 알리자, 성종께서 들으시고 가상히 여겨 통선랑군자감 직장을 제수하여 부역을 면 替. 士林議建祠也虫篆彰孝于竹葉仍命名 及至英廟年間 先生之孝聞于通國縉紳名碩 如忠獻公宋寅明文簡公李天輔文靖公南有容等莫不撰述其孝而美之. 歷四百有年于今日而誦慕如昨孝感泉指定文化財 至誠之不可掩有如此. 夫世之論奇應異感者莫不以氷鯉雪筍爲宗然 先生之雷泉忠字實無遜於鯉筍董生鷄狗之瑞較此虎狗同處逕庭又遠矣 則先生可謂古今一轍而于前尤有光焉. 嗚呼! 顧今西潮橫濫不復知有父母之恩而梟也獍也. 比肩接踵思欲起先生於九原而不得 則宜鄕省儒之爭先出力竪追慕大碑於彰孝祠之傍 昭刻先生之大孝以爲警世之鐸也. 後孫炳溢然琇以諸章甫之意來請余文余惟斯役 實有關於世道而且托名爲榮樂爲之敍如右系以歌曰.
鷲嶺之山律律 感泉之水洋洋 山不夷水不竭 先生之風與之俱長
檀紀 四三一三(西紀 一九八十) 庚申 春三月 上澣 居昌 愼思範 謹撰 宜寧 南大熙 謹書 同福君 二七世孫 秦均 對譯 제하는 復戶(복호)를 명하셨다. 51살로 甲寅年(1494)에 돌아가시자 7월에 특명으로 旌門(정문)을 내리고 본 현에서 봄가을에 세세로 제향을 모시게 하였다. 사림들이 사우를 짓기로 결의하자, 벌레가 댓잎에다 彰孝(창효)라고 새겨 彰孝祠(창효사)라 명명하였다. 영조 연간에 선생의 효성이 온 나라에 알려져 공경대신인 충헌공 송인명, 문간공 이천보, 문정공 남유용 등이 그 효성을 칭송하는 글을 지었다. 4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칭송ㆍ사모하기를 어제와 같이 하여, 孝感泉을 문화재로 지정하니 지성은 이와 같이 감출 수 없다. 무릇 세상에 기이한 호응과 색다른 감응을 왕상의 겨울 잉어와 맹종의 겨울 죽순을 말하지만, 선생의 번개 샘ㆍ벌레 글자는 氷鯉雪筍(빙리설순)에 손색이 없고, 董生(동생)의 닭과 개의 상서로움도 선생의 범과 개가 한 뜰에 거처함에는 비교가 되지 못하여, 곧 선생의 효는 가히 고금에 으뜸 행적이니 앞으로 빛이 될 것이로다.슬프다! 돌아보면 지금 서양 풍조가 제멋대로 넘쳐 부모의 은혜를 알지 못하니 올빼미와 애비를 잡아먹는 범 같은 무리로다. 선생의 발자취를 따르려 하나 다시는 九原(구원)에서 모셔올 수 없으니, 마땅히 향리 사람들이 앞 다투어 추모대비를 창효사 옆에 세워 크게 선생의 大孝(대효)를 7새겨 세상을 경계하는 방울이 되도록 함이다. 후손 炳溢(병일)과 然琇(연수)가 사림의 뜻으로 나에게 비문 짓기를 청하니 내 생각에 이 일이 세상의 도리에 맞고, 또한 탁명 받음이 영광스러워 즐겁게 오른쪽과 같이 쓰고 노래를 지어 붙이노라.
취령산은 높이 솟아 있고 감천 물은 굽이쳐 흐르네. 산은 평탄해지지 않고 물도 마르지 않으니 선생의 유풍은 길고도 길어라.
단기 4313년 (서기 1980) 경신 봄 3월 상순 거창인 신사범 삼가 짓고 의령인 남대희 삼가 쓰다 동복군 27세손 진균(在祐: 전북 익산) 대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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