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사물성이란
J. P. Sartre는 산문과 시의 언어를 다음과 같이 구분하고
있다. 산문의 언어는 현실의 실존적 상황을 지시하는 기호
( 나시의 언어는 사물( 이다. 시어는 사물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자체라는 것이다. P. Valery도 그의 스승 말렐르브의 말을 빌어 산문과 시의 차이를 재미있게
비유한 바 있다. 즉 산문을 '보행(*1)'이라고 한다면 시는
무용( 에비유할 수 있다고 했다. 보행에서의 동작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지만, 무용에서의 동작은 그자체가 목적이라는 뜻이다.
산문에 사용되는 언어는 전달하고자 하는 그 '무엇'을 표현하기 위해 언어가 도구로 쓰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다른 언어로 바꾸어 표현해도 상관없다. 어떤 사람의 직업이 우편배달부라는 내용의 산문을 '그는 집배원이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고, 그 사람은 우체부다'라고 해도 무방하다. 즉 산문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는 마치 그릇과 같은 것이어서 내용물을 변질시키지 않는 한 어떤 형태의 그릇에 담아도 크게 문제될 것이없다.
그런데 시를 구성하고 있는 언어는 그렇지 않다고 본 것이
다. 시의 언어는 산문과는 달라서 무엇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바로 그것 자체'를 표현의 목적으로 삼는다. 따라서 시는 그것 아니고서는 '그 자체'를 달리 표현할 수 없다. 만일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어떤 시어를 비슷한 의미의 다른 언어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그것은 이미 앞의 작품과는 다른 새로운 구조로 변질되고 만다,
예를 들어 어떤 시구에 '푸른 눈썹의 계집아이'라는 것이 있는데 '계집아이' 대신 '소녀'로 바꾸어 놓았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한다면 의미에는 큰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앞의 시적 구조는 파괴되고 다른 새로운 시적 구조가 만들어지고 만다. '계집아이'와 '소녀'가 지닌 사전적 의미의 차이는 별로 크지 않다 치더라도 두 시어가 지니고 있는 내포적 의미는 많은 차이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두 단어의 판이한 음성구조는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두 단어가 지닌 색다른 어감과 이미지들은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여타의 시어들과 어울려 전혀 다른 구조를 만들게 된다.
산문과 시에서의 언어를 미술의 매체인 선이나 색채를 통해 설명한다면 다음과 같은 비유가 가능할지 모른다. 구상화에서의 선이나 색채는 어떤 대상을 표출해 내는 매체로 사용되지만 비구상화에서의 선이나 색채는
그 자체가 스스로 표현의 대상이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시어가 사물이란 의미는한 작품 속에 구사된 시어는 과거의 어떠한 곳에서도 또 앞으로 어떠한 곳에서도 다시는 그렇게 반복해서 쓰일 수 없는 일회성, 유일성, 절대성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어의 사물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 소위 '무의미의시라고 할 수 있다.
>>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
>> 풀 발바닥을 보여다오.
>> 그대가 바람이라면
>>보여다오.
>> 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
>> 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이 작품에서 우리는 아무런 일상적 정황을 읽을 수 없다. 이 작품은 아무런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다. 언어가 일상적 의미 전달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언술된 세계는 지상적 상황이 아니다. 말하자면 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던 대상의 모방이기를 거부한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순수 유일한 세계의 창조다. 그래서 김춘수는 '무의미의 시'라는 명칭보다는 '순수시' 혹은 '절대시'라는 이름으로 호칭되기를 선호한다. 비구상화가들의 작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이는 지상적 질서의 파괴다. 어떠한 합리적 논리도, 윤리적 가치관도 여기에는 끼어들지 못한다.
친숙하지 않는 생경한 언어들이 서로 어깨를 짜고 만들어 낸 낯선 정황이 환상처럼 펼쳐져 있다.
이러한 시를 구성하고 있는 시어들은 바로 절대적인 질료다
그 자리에 꼭 그렇게들 서로 얽혀 존재하면서 이 세상에 유일한 언어 구조를 만들고 있다. 어느 한 시어를 빼거나 바꾸면 이 구조는 무너지고 만다
내가 이 자리에서 무의미의 시를 거론한 것은 시의 사물성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적절한 예라는 생각에서이지 결코 무의미의 시가 이상적인 시 형태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구상화와 함께 비구상화의 존재 가치가 있는 것처럼 무의미의 시도 여러 종류의 시의 양식과 함께 그 존재 의의를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시가 나아가야 할 정도는 '의미'를 떠나서는 곤란하다는 것이 내 평소의 지론이다. 내 생각이 보수적인지는 몰라도 나는 모든 예술 작품의 존재 의의
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데 있다고 본다. 시가 그런 기능을 갖기 위해서는 의미를 떠나서는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어떤 양식의 시를 막론하고 이상적인 시적 구조는 바로 그것 아닌 다른 시어로 바꾸어 표현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만바꾸어 표현한 것이 보다 좋아 보인다면 그 작품은 완전한 절대적 구조를 아직 지니지 못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란 다른 어떠한 언어들로도 대치될 수 없는 그러한 절대 유일한 시어들의 집합이어야 한다. 여기에 사물로서의 시의 위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