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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시와표현 하반기 신인상 당선작] 이수니, 고주희, 최경훈
파란 틈 (외 4편) / 이수니
시멘트 마당 틈
파란 풀 한포기 달린다.
틈은 환형동물처럼 꿈틀거리며
파란 여름에 동참한다.
모든 틈은 파란 색 내장을 갖고 있을 것 같다.
한 포기의 증거다.
금이 간 마당의 틈은
휘어진 실금을 이끌고 온 선지자이던가,
난민의 비좁은 텐트 속이다
빗물이 스며드는 국경의 철조망이다.
잠자리의 착각이 앉았다가 가고
풀은 파란 틈을 먹고 달리는
저 틈 은 파도의 끝,
죽은 아이를 밀쳐놓고 있는 해안이다.
마당하나 갖고 싶다는 표시다
파란 틈의 꼬리를 잡고
철조망이든 바다든 놓지 않는다
아무려면 어떤가,
실금의 궤적을 따라 파란 풀 한포기,
우왕좌왕 달리고 있지 않은가,
숨이 가쁜 기차처럼, 방향 없는 보트피플처럼
헐떡이는 레일 위를 노란 돛을 달고
시멘트 끝나는 곳, 흙 마당을 향해
달리는 파란 풀 한포기
종이 한 장
빳빳한 A4 종이 한 장의 무게는 5그램이라고 한다.
만약 그 종이를 구긴다면, 구겨진 마음이 지나간 자리만큼의 예리한 칼날 같은 무게가 늘어난다고 한다. 그 미세한 구김 속에는 누군가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무게가 도사리고 있다고 한다.
수많은 구김 속에는 불만족과 적의가 들어 있는 것이다. 다시 펴야 하는 관계가 바스락 거리는 무게로 들어 있는 것이다.
지극한 종이 한 장은 지혜서로 온 우주의 무게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구겨진 종이 뭉치는 찡그린 표정을 가진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인 것이다. 구길 수 있는 무게가 있다는 것, 네모 속에 갇힌 마음이 하얗게 질린다는 것, 앞과 뒷면이 함께 아픔을 느끼는 것이다.
칼끝보다 더 아픈, 구겨진 것들
파란 종이 한 장 같던 하늘이 금방 먹구름으로 구겨진다.
아무거나
우르르 술집으로 몰려온, 절대 아무거나로 불러지지 않는 한 무리의 사내들이 안주는 아무거나 주세요, 한다. 아무거나에 길들여진 입맛들은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 아무거나 는, 입맛을 지배하는 금세기의 미각 방정식으로도 풀 수 없는 지배계층이다.
암묵적으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무거나가 아니다. 아무거나로는 아무거나 가 될 수 없다.
23도의 불기를 털어 넣고 바짝 달구어진 크윽, 한 마디 내뱉는 그 뒤로 한 젓가락 들어가는 아무거나, 그 아무거나 가 입안으로 들어가면 쓴맛도 화끈거리는 빈속도 칼끝 같은 첫잔의 짜르르 한 느낌도 모두 뜨끈하고 다독거리는 입맛이 된다. 그 감칠 맛 나는 아무거나 가 다시 둥근 탁자에 저들을 둘러앉게 만드는 것이다.
아무거나 는 시대의 풍미를 아는 당당하게 차림표 서열에 줄을 선 것이다. 한 끼의 급박한 요기도 공경도 되는 섭섭하지 않는 대접인 것이다. 아무거나 는 아무나하고도 어울릴 줄 아는 미덕을 가진 것이다.
취해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지키는 아무거나 한 접시
스키드 마크
정지의 순간이 길다. 맑은 하늘에 회색구름의 스키드 마크 찍혀 있다. 다급한 순간이 결심으로 바뀌고 정지하기까지 어떤 자리는 무언의 증거로 선명하다. 그것은 주저한 자리가 아니다.
한때 그는 단거리 육상 선수였다
참가번호표를 달고 질주하던 트랙
공기를 뚫고 시간을 가로지르던 그의 몸에는
0.00일초의 미세한 순간까지
오차범위의 숨 줄기가 가득 차 있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뒤에도 남아있던 초침의 헉헉거림들
오늘은 보행기를 잡고 저가 흘러버린
오차의 시간들을 따라가고 있다.
자꾸 보행의 밖으로 뻗어 나가려는 스키드 마크
달린 만큼 저항의 공기들이 짐승처럼
그의 걸음에 매달려 킁킁 거린다.
어떤 급정거에도 흔적은 남는다.
관절마다 총성이 울려도 허우적거리는
그 흔적으로 느리게 트랙을 실천중이다.
회색 구름 속엔 무수한 정지선 같은
빗금들이 그어지고 있다.
눈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슬픈 눈매를 가진
매를 잡아다 내 얼굴에 두고 키우셨다
매는 그때부터 내 눈 속에서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 했다
내 눈은 매의 슬픔을 깃들이지 못하고
툭하면 눈을 흘기거나
수시로 찔끔찔끔 울 곤 했다
눈가리개를 풀고 공중을 날 때 멀리 도망가는 들짐승들이 신기루처럼 텅 빈 눈 속으로 들어와 발버둥 칠 때 발톱을 세우고 내 눈을 쪼아대던 그것은 매가 아니라 급 하강해야 했던 나의 슬픔은 아니었을까,
나는 내 눈을 풀어
아득히 먼 곳의 사냥감을 잡아오게도 못하였고
날카로운 눈의 꽁지인 눈썰미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한 생을 다 탕진하고도 얻을 수 없는 눈매는
부릅떠야 될 일들 앞에서도
그저 질끈 감기만 했다
나는 매의 눈을 읽지도 배우지도 못하고
언제나 관망하기만 했던 것이다
매는 내 눈을 벗어나려고 몇 번이고
푸드득거린 적이 있었다
깃털을 갈 때마다 나는 딴청을 피웠지만
언젠가는 시치미를 떼고 날아 갈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제, 먼 곳이 하나 둘 사라져 가고
과녁들이 침침해 지는 것은
매가 날아갔기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매도 늙고 내 눈매도
흐린 날로 아득해지는 것이다
[수상 소감]
-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듯
이 수 니
콘크리트 벽 틈으로 달려 온 파란 풀 한 포기
오늘은 내 詩作의 틈에서 꽃을 피웠습니다.
악착같이 달려도 마당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날들
그러나 마당 안이면 또 어떻습니까.
좁은 마당이 북적거릴수록 더 즐거운 장면 아닐까요.
별의 발원지에서 보내 온 한바탕 웃음꽃에
광속으로 익어가는 씨앗들이 고개를 숙이고 기도를 올리는 시간입니다.
정지의 순간이 스키드마크로 선명합니다.
다급한 순간이 결심으로 바뀌는 무언의 증거입니다
그것은 주저한 자리가 아닙니다.
참가번호표를 달고 달리는 트랙,
오차범위의 미세한 숨 줄기가 초침을 따라 헉헉거리다가
결승점을 통과한 뒤에도 오래도록 남아 있는 숨 줄기,
그 숨 줄기 같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
파란 틈의 꼬리를 잡고 궤적을 따라
어쩌면 존재를 바꾸는 일, 별일 축에도 못 끼는
그런 연유를 찾아 나서겠습니다.
오래도록 품었던, 가장 가벼운 물 한 방울 끌어 올리는
마중물이고 싶습니다.
내가 마주한 존재들이 내게로 와 속삭입니다.
진실한 말에는 꾸밈이 없고, 꾸미는 말에는 진실이 없다, 라는 말
잊지 않고 쓰겠습니다.
특별히 저의 손을 잡아주신 〈시와표현〉 심사 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오래도록 손 놓지 않고 함께한 굴포문우님들,
중앙 대학원 문예창작반 문우님들과 함께 기쁨 나누고 싶습니다.
늘 묵묵히 응원해 준 나의 편인 가족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더 큰 응원 부탁합니다.
특별히 경인교대 문광영교수님, 중앙대 이승하교수님,
아낌없는 지도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수니]
59년생, 진주 출생 중앙대학교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과정 수료
아마조네스의 부활 (외 4편) / 고주희
왼쪽이 좀 더 가벼워
대리모 자궁에서 빠져나온 쌍둥이 남매 우렁차게 울어대는 밀림의 밤
달과 재규어의 속도로 수정란 분열하면
난자를 정자로 둔갑하듯 감쪽같이 풍경의 유선세포만 제거할 수도 있다
두 개의 염색체 핵을 제거한 난자, 복제인간은 급하지 않은데
푸성귀 없이 마른반찬만 일주일째 상에 올리며
일주일치 빨래를 돌리고 밀린 설거지를 하며
사냥감 없는 허탕의 날 배를 곯고 머리는 텅 비고
시만 없으면, 시가 없으면 간단할 텐데
이 모든 대안을 시행할 복제인간 간곡해질 때
나는 벼랑에 붙들려있었다
자가생식 하는 작은 빛들만 가끔 창가에 들이칠 뿐
이웃나라로 보내버린 쌍둥이 아들
물소리 들으며 떠가는 작은 주먹 노리는 호시탐탐
입맛 다시는
한쪽 고환 잃은 어둠의 제왕
왼쪽에서만 흐르는 젖줄은 아마존에서 잃은 내 피륙
어서어서 이웃부족의 남자들을 겁탈해
세계의 모든 활과 창을 공수해
이건 밀림이 아니라 시궁창 연옥 피갑 한 일상의 잔혹
출산한 밤은 죽음보다 더 많은 피를 흘려보내는 일
배냇저고리 하나 달랑 입힌 채
빼앗기듯 오리노코 강에 너를 보내며
젖이 흐르는 채로 밤새
수천 개의 화살을 날렸다 신선함을 노리는
간교한 포획자들
일일벌이로 간신히 굴러가는 비정한 밀림
낌새보다 빠른 독수리 떼 지어 날고, 물살은 기약 없는 미로가 되고
카누로 항행하는 한 운명을
벼랑에 서서 나
끝까지 견지한다
천천히 너를 잃어갈 것이다
나의 누드 속 와인
습관처럼 평정을 잃었다
넘칠 듯 출렁이더니 이내 수평이 된 고요
가볍게 잔을 타고 다시 관성처럼 혓바닥일 때
손가락 사이 위태로운 투명
붉게 발효된 시간은 쉽게 흡수되었다
지중해의 기후만을 남기고
당신은 흔적도 없이 떠나버렸다
거리, 눈물이 증발된 품종들 거짓말처럼 즐비했다
포도밭을 걸었다
생각보다 작고 메마른 포도알들
잎사귀로 가려도 맨 몸에 가까운 그런 포즈의 시간이 대부분이었을
비탈 언덕의 나무들 앙상하다 핏 내 나는 흙
그런 곳에 걸린 그림은 누드겠지
한 오라기 가식이 없는 노동
비교할 계급 없이 하루하루가 비슷한 속도로 익어가는
경유지에서의 우발적 연애는
불에 덴 손목처럼 조악하고 흉물스러웠지 좀체 사라지지 않는 붉은
비밀에 이르는 껍질들 저마다 은신처를 통과하며
밤의 카펫은 땀으로 젖어든다
마개만 열지 않는다면 영원일 수 있는
지하로 이어지는 황폐한 계단들 격렬한 키스
삼 년 혹은 십 년된 입술을 몰래 감춘 와인들
밤새도록 나를 넘겨 잔들은 찰랑이고
위선에 찬 혓바닥, 치즈처럼 먹기 좋게 굳어간다
다음 말을 삼키지 못한
이별의 관성으로
혼자일 때 가장 묵직한 이불을 덮어쓰듯
오크통을 엎지른 내 속의 검은 피
전신이 다 먹혀들어간다
프리다와 사슴*
내가 키우는 사슴이야 볼래? 발치엔 작은 나뭇가지가 드리워져 있지
이제 시작될 고통이야 작은 사슴은 작게 아플 거야 나무들이 에워쌌어
발작 전의 전조증상 마비된 입술 천살이 넘는 나무의 그늘로 덮쳐오는 적막
나는 너무 자주이고 나는 제일 나를 잘 그리고
마지막 전차가 지나면 어쩔 수 없는 사슴들 나동그라지고 병상은 앵무새와 원숭이들 차지지
침대 밖으로 뻗어나간 붉은 다알리아 꽃잎들 절창이다 자궁근 뚫고 나온 비명들 손모가지째
똑똑 떨어지는 2억 년 전 개화, 뱅듸에서 부는 바람은 모래 반 눈물 반
뿌리 없는 것들은 눈동자를 아프게 해 내전의 도미노 속 끝나지 않을 기아(飢餓)
청동거울 속 얼굴은 반대편으로만 향하지 이젤의 오른다리 절룩이며 계절을 끌고 와
하얀 캔버스에 밤을 걸지 영원히 반대편으로 자라날 자식들이란
한쪽 굽만 자꾸 높아지는 침대를 보았나요?
화구들 있는 대로 펼쳐놓고 수염을 그리고 가위를 그리고 입술을 오려요
벨벳처럼 보드라운 풀들이 두 발을 파랗게 감싸고
뿌리도 없는 것들 초현실적으로 아파오는 사이
더 붉어지는 꽃들
눈물 쏟아지는 날 망명을 꿈 꿔요
심장은 이제 아무나 다녀가도 좋을 만큼 단단하고
가시목걸이에 걸린 벌새만이 나를 견뎌요 셀 수 없을 만큼의 날갯짓을 셀 수 없이……
하반신은 눈물을 마비시키죠
베개 밑에 놓여있는 얌전한 총
장전된 꿈이 자화상을 비껴갈 때
총을 공유하는 조건으로 코끼리와 비둘기 다시 손잡을 수 있을까요?
온 몸에 못이 날아와 박혀도 끝나지 않을 혁명
몇 번 찔렸을 뿐인데 폐렴이 겹쳐요 질질 끌려가는 침대들
구원해줘요, 낳아줘요, 놓아줘요
진통제를 토해 놓는 밤
고통은 질투에 관대해 목에 총구를 겨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지 애인들은
강철 코르셋으로 간신히 버티던 계절들
갔던 봄 갔던 여름 갔던 가을인데
아랫도리를 뚫고 골반을 지나 허벅지를 관통한 아들과 딸들은 왜 돌아오지를 않니?
9개의 화살이 명중한 나의 사슴
프리다, 너를 만난 건 사. 고. 였. 어.
* 프리다 칼로의 그림
목련
그거 아세요? 사람 알아보는데 냄새만 한 게 없다는 거.
타고난 후각으로 저는 단박에 알아챈답니다. 오, 보기와는 달리 애연가시군요,
홀아비 냄새도 조금 나는 것 같네요.
화면 속 조향사의 짧은 전언
할아버지 기일 날
함께 모신 작은할머니는 제사상에 나란히 오르지도 못하고
뭔 사단지가 나려면 하르방 뒤통수에서부터 냄새가 나더라는
정실할머니 등 돌려 앉은 방향은 아들이 없어 온통 북향인데
방풍림 없이도 슬픔을 잘도 막아내던
투명인간 같던 분, 새 한 마리조차 들지 않던 곁에
물관부 깊숙이 삼투된 하얀 목덜미
어둠을 사르며 한 잎씩 밝아지는데
누군들 알았을까
유난히 크게 차오른 달의 이면이
마당에 떨어지는 빛의 체표면 따위를 산술하는 일
몸 깊이 밴 머스크향처럼
아직 쓸모 있는 배후
어딘가 연결된 파향 있어
기억의 가장자리 곧잘 더러워지는 것인지
만료된 여권들, 번번히
체류 불승인 처리되던 연애
박하 꽃 같은 딸아이 손등 교차시키면
랜덤으로 떠다니는 기억 두엇쯤
동트지 않은 새벽,
놋그릇 촛대들 부엌으로 돌아가도
제전(祭奠)에 피운 향으로 맴도는 할아버지
하얀 도포자락으로
반쯤 피다만,
갈라테아
새하얗게 단단했어요
우린 말이 없지만
밤이 나를 다듬어갔죠
끌칼은 달빛 속에 부서지는 별가루처럼
황홀한 눈길이 되어갔어요
불완전한 얼굴들이 좌절하게 했나요?
나는 당신의 몇 번째 인가요
맥박이 뛸 리 없는데 나를 포갠 당신의 심장소리가
맹렬한 사자처럼 뜨거워요
내게 다가오지 말아요 당신의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요
쓰다듬지 말아요 굳은 내 발
당신에게로 달려갈 수 없어요
복수였나요?
뱀의 혓바닥에 농락당한
신전에 모인 불행한 연인들
피 한 톨 돌지 않는 대리석 입술에
주문을 걸어요 제단 위의 촛불이 길게 세 번 타오르고
심지처럼 단단한 기도만이 아프로디테를 움직여요
두 번 네 번 귓불에 닿는 숨소리
사랑한다 속삭이고 사람이다 속삭이고
불안에 얼어붙은 도시 곳곳
동공 풀린 조각상들 늘어나요 심장 둘 곳 없는
피그말리온의 불안
도시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신화를 잃고 어딘가로 빠르게
사라져요
나는 어디로 사라져야 하나요?
*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아(galatea)
[수상소감]
- 두려운 첫걸음, 허락된 모험
고 주 희
막상 소식을 듣고 나니 난감합니다.
부족하고 부족해서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몸을 숨기고 싶은 심정입니다.
수도 없이 까맣게 그을린 낮과 밤, 이유 없이 뜨고 지던 별자리.
휠덜린과 칼라블레이, 레오까락스, 빔밴더스 그리고 수많은 시인들
……
취향이라는 이름으로 지독한 음악과 영화와 텍스트를 감내했던 시간들, 지금도
현재형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절박함이었습니다.
때문에 표현되지 못한 부분에 희망을 버리지 못하면서도 표현된 부분에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누가 될까 차마 뱉어내지 못한 마음 속 스승님들. 한시도 시를 잊은 적 없지만 시 앞에서 작아지던 나날 속, 많이 방황했음을 고백합니다.
삶이라는 무게로 엄살 부리지 않고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쓰겠습니다.
12년 만에 우연히 만난 문우이자, 언니! 성향숙 시인. 그대가 아니었더라면 다시 시를 마주할 용기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대가 있어 섬에서 홀로 쓰는 일이 꼭 외롭지만은 않았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사랑한다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는 故신기섭과 시혼동인, 스무드재즈 여러분들께도 이 자리를 빌어 안부를 묻고 싶습니다. 부족하고 서툴지만 저의 가능성을 보아주신 ‘시와 표현’과 이성혁, 김종태, 권현형 심사위원님께도 다시 한 번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더욱 정진하여 부끄럽지 않은 시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끝으로 가시 돋친 나의 말들을 삼키고 이해해주는 가족들과 시인의 유전자를 남겨주신 아버지께 더 없는 사랑을 전합니다.
[고주희]
1976년 제주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소용돌이 속으로 (외 4편) / 최경훈
화장실 불을 켜면 바퀴벌레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중 새끼손톱보다 작은 것들은 내가 양치를 하는 동안에도 도망가지 못하고 타일 사이에 드문드문 맺혔다 아직 죽을 자리와 살 자리도 구분 못하는 어린 것들을 두고 달아난 어미는, 더듬이를 흔들며 새끼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어느 집의 장손일지 모르는 그것들은 먹을 것을 찾아 정장자락을 펄럭인다
실수로 꺼내 입은 아버지의 정장이 맞춘 듯 딱 맞았다
대학 졸업날 십이만 원을 주고 산 내 정장은 옷걸이에서 어깨가 하얗게 세었는데, 양복을 입으면 답답하다던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이 옷을 사줬는지 죽을 자리와 살 자리를 모르는 새끼들은 어미 대신 먹을 것을 찾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더듬이로 앞을 짚었다 그렇게 앞으로, 앞으로, 계속 앞으로, 더듬이 끝이 내 발에 닿았다 라면에 바퀴벌레가 떨어져도 아무렇지 않게 될 때쯤 어미가 떠난 것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바퀴벌레를 건져 내는 동안의 시간만큼, 그 만큼의 그리움을 숟가락으로 떠내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샤워기의 물줄기에 타일 사이 버티고 있던 것들이 힘없이 쓸려간다 하수구 구멍 근처에서 몇 번 소용돌이를 치는 동안, 건져낼 수 있지만, 건져내지 않았다 어미들은 거울과 벽 사이에서, 변기 뒤에서, 화장지 심 안에서, 틈에서, 안에서, 지켜본다, 거친 물줄기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것들의 더듬이를
새끼들이 끈질기게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도 살아남기를 바라며, 어미 없이도 아이들은 잘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더듬이로 말을 했다 사실 어미들도 죽을 자리와 살 자리를 모르기에,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을 뿐이지만
화장실 안은 물소리로 소란스러워 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울지 않았을 것이다
꺼내 입은 아버지의 정장을 벗지 못했다
유산 1
아버지의 내려앉은 뼈 꼭대기에는
해골바가지가 얹혀 있다
해골에는 반평생 앓아온 치통이 새겨져,
살점을 발라내는 이(齒)가 시렸다
손에 묻은 양념을 대충 휴지에 닦고
뼈를 집어 비닐봉지에 넣었다
어머니는 지금도 알을 낳고 있다
아버지의 입에 있는 것은
자기 아들의 뼈일 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이가 아프다는 핑계로
차마 닭을 먹지 않았다
밤마다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게
골골 앓는 소리를 내며
더위에 잠을 설쳤다
어머니가 낳는 것은
아버지의 알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 알에서 깨어난 새끼는
아침마다 울거나
밤마다 알을 낳거나
누군가의 앞에 뼈가 내려앉아
해골과 함께 쌓일 것이다
삼계탕이든 치킨이든
복날 더위에 뼈가 쌓인다
의경과 국민과 열차와 맥도날드의 상관관계
김 수경은 요즘 뉴스를 보지 않아 지금 진압하려는 시위에 대해 알
지 못한다
또 대통령이 뭐 한다고 했나 보지 뭐
김 수경이 진압복을 입으며 중얼거렸다
여당은 철도 파업에 안녕 못한 학생들이 관여하지 않았으면 했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이곳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하겠다면 하는 거지 뭐
유행에 민감한 야당은 안부를 묻는 것이 유행하자 서둘러 유행을 쫓았다 안녕들 하십니까? 안녕들 하시죠, 안녕하죠? 안녕… 어라? 매 년 하던 일이었네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인사가 전철처럼 매일 같은 구간을 돌아다녔다 안녕 못하신 학생들이 그 전철을 타고 시청까지 갔다
시청에서 의경들이 그들을 막았다 그들은 경찰에게도 묻는다
안녕이고 지랄이고 전역해야 이 꼴을 안 보지 김 수경이 악을 쓰며 대답했다
경찰이 만든 벽을 사람들은 뚫지 못했다 넘지 못한다면 돌아가라! 사람들이 옆에 있는 맥도날드로 들어가 옆문을 열자 종업원들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히 가세요
낮에 놀자 했더니 시청을 갈 거라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국가 중대사를 앞두고 놀자는 말이 나오냐던 친구는 집이란다
국가 중대사는 어쩌고 집이냐
가서 좀 있다가 왔어 왜
겨울에 물 맞으면 춥잖아
내일 노래방이나 가자 나랑 노는 게 인륜지 중대사다
여담이지만 집회가 끝나고 어느 높으신 분이 신문을 집어던지며 화를 냈다고 한다
맥도날드가 그래도 되는 거야? 적어도 맥도날드는 그러면 안 되지, 맥도날드는!
총성이 사라진 날
궁정동에서 대통령이 죽던 날 총소리가 서울 곳곳에서 울렸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던 밤에 이십대를 갓 넘은 아버지는 종로주점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통금시간을 피해 문을 잠근 주점에서 잠든 아버지는 그날 밤 얼마 전에 전역한 군대 꿈을 꿨다 민주화고 빨갱이고 관심 없던 아버지는 다음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비보(悲報)를 들으며 다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혀를 찼고, 대통령의 대가리와 심장에는 총구멍이 뚫려 있었다 아버지는 노동자도 자본가도 아니었기에 총구멍이나 최루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통령을 쐈던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야수와 같던 심정은 죽었지만 몇몇 사람들은 독재가 끝났다며 환호했다
아버지란 것에 정년퇴직 따윈 없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 퇴직금이고 사대보험이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 아버지는 노동자가 되었고 돈에는 대가리도 심장도 없어 총을 쏠 수 없었다 야수의 심정도 없었고, 총도 가지고 있지도 않았으며 사임당이고 세종이고 나발이고,
총소리만 귀에서 맴돌았다
옛날 사람들은 가끔 과거를 그리워하기에, 깜빡 잠들었던 아버지의, 총소리가 들리던 그날 밤, 통금 사이렌 소리와,문을 닫아걸던 주점 주인과, 친구들이, 죽어버린 야수의 심정과, 뛰지 않는 유신의 심장, 그날 밤 꿈을 꿨다
상고사(上古史)
1. 천하라는 말은 있으나 천하가 없고
사방이 비어 동서남북을 모르겠으니
이를 채워 넣음이 나의 뜻이로다
얻는 것은 곧 잃는 다는 뜻이나
잃는 것을 두려워하면 무엇도 얻을 수 없으니
죽음이 두렵다고 세상에 나오기를 꺼려하지 말라
2. 대나무가 여기저기 솟아 사람들은 너도나도 낫을 들고 대숲으로 향
합니다
곧 저 대나무의 끝이 붉게 변하겠지요 어머니
하지만 저는 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저희 고을에서 관에 끌려가 맞아 죽은 이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습
니다
이들이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옆 동리에는 세상에 나온 지 일 년도 안 된 아이가 굶어서 죽었답니다
이 아이가 왜 죽었는지 아십니까
어머니 저는 너무나 무섭습니다 저들도 무섭고
궐에 있는 임금도 대신 내관 심지어 무수리까지도
저들이 죽창을 드는 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살아남는 법임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먹을 것이 떨어지면 저들처럼
낫을 들고 대숲으로 향하겠지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 장면을
눈을 감지 않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돌아가 어머님을 뵈올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수상소감]
- 소용돌이 근처에 서며
최 경 훈
중학교 때 김지하 시인의 ‘오적(五賊)’을 읽고, ‘나도 이런 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그 후 김수영, 김남주, 함민복, 최금……이런 시인들의 시를 읽을 때면 제 시가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러나 등단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여기저기 공모전에 투고했고 수십 번 떨어진 끝에 이렇게 당선소감을 쓰게 됩니다.
함께 글을 쓰던 친구들이 포기하는 것을 지켜보며, 잠시 시를 놓으려고 할 때 <시와표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자랑했더니 드디어 됐냐며 축하해주더군요. 아버지는 곧바로 상금이 얼마냐고 농담처럼 물으셨습니다.
최종심 연락부터 당선 연락까지, 전화를 받을 때면 감사하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계속 튀어나왔습니다. 정말 생각지 못한 행운이었습니다. 버릇처럼 시를 써서 우편으로 공모전에 보내왔지만 연락이 온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제게는 이번에 받은 연락이 반가웠습니다.
제게 ‘등단’이라는 기회를 준 <시와표현>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돈 안 되는 일인지 알면서도 아들을 묵묵히 바라봐 준 아버지께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당선 연락을 받은 날 직접 말하고 싶었지만 남자끼리라 쑥스러워 말이 안 나오더군요.
처음 최종심 연락을 받았을 때도, 당선 연락을 받았을 때도, 새벽까지 잠을 못 잤습니다. 이젠 나 혼자 쓰고 마는 것이 아니라 ‘대중’에게 내 시를 내놓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가 읽어온 시인들처럼 되고 싶다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교차했습니다.
이 기대가 현실이 되도록 만드는 게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 걸음을 뗀 것이고 앞으로 배울 것도, 해야 할 것도 많습니다. 도와줘야 할 사람도 많을 것이고, 제가 도움 받을 일도 많을 겁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런 소감을 써보는 게 처음이라 뭐라고 적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은데 막상 쓰려니 머릿속에만 맴돕니다. 두서없이 말만 길어진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직 어린 제게 이런 기회를 준 <시와표현>의 모든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 말씀을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최경훈]
1991년 서울 출생. 2014년 서일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제5회 <시와표현> 신인상_심사경위]
<시와표현> 2015년 (하반기) 신인상에 다음과 같이 최종 3명의 작품 이 뽑혔다.
이수니_「파란 틈」외 4편
고주희_「아마조네스의 부활」외 4편
최경훈_「소용돌이 속으로」외 4편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뽑기 위하여 심사기준표(완성도 상상력 진정 성 참신성 )를 만들었다. 공정성을 기하고자 블라인드 채점으로 원칙 과 절차에 의하여 공개적으로 하였다. 이수니 고주희 최경훈 후보자 를 하반기 신인상으로 결정하였다. 심사위원회는 공정한 심사를 위 하여 노심초사하였으며 앞으로도 엄정함을 유지할 것이다.
2015년 11월 30일
본심 심사위원_김종태 이성혁 권현형
[제5회 <시와표현> 신인상_심사평]
: 신선한 상상력과 치열한 내면의식
제5회 <시와표현> 신인상(하반기) 공모에는 50여 명의 응모자들이 약 500편의 작품을 보내주었다. <시와표현> 신인상 응모작 수가 늘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고무적이다. 응모작 중에서 최종까지 논의된 작품은 이수니의 「파란 틈」 외 4편, 최경훈의 「소용돌이 속으로」 외 4편, 고주희의 「아마조네스의 부활」 외 4편 등이다. 이 세 사람의 작품 모두 나름대로의 신선한 상상력과 치열한 내면의식을 통해서 선자들의 손에 끝까지 남아 당선의 영광을 얻어내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수니의 작품은 틈과 순간에 대한 묘사력이 뛰어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가령 「파란 틈」에서 시멘트 마당 틈에서 파란 풀 한 포기를 인식하는 순발력이 신선했다. 또한 그 마당의 틈을 “휘어진 실금을 이 끌고 온 선지자”, “난민의 비좁은 텐트 속”, “빗물이 스며드는 국경의 철조망” 등으로 비유하는 다채로운 상상력에 믿음이 갔다. 틈에 관한 상상력은 종이라는 소재로도 이어져서 “그 미세한 구김 속에는 누군가를 /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무게가 도사리고 있다”(「종이 한 장」) 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공간의 틈은 시간에서는 순간이다. “다급한 순간이 결심으로 바뀌고 정지하기까지 / 어떤 자리는 무언의 증거로 선명하다.”(「스키드 마크」)는 스키드 마크가 찍히는 순간에 대한 형상 화 역시 주목할 만하다.
고주희의 작품은 신화적인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조네스의 부활」은 전쟁의 아마조네스에 관한 신화를 재현하고 있는 작품 이다. 부족 안에서 남성들을 제거한 후 여성들이 모든 직책을 맡았던 아마조네스 부족 신화를 현재적으로 재해석해 내고 있는 점이 신선해 보였다. 「갈라테아」 역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에 관한 이야기를 새롭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고주희 시가 신화적 상상력에만 머물지 않고 내면의 위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나의 누드 속 와인」 같은 작품으로 나아가고 있는 점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가령 “혼자일 때 가장 묵직한 이불을 덮어쓰듯 /오크통을 엎지른 내 속의 검은 피”에 대한 인식이 나은 진정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최경훈의 작품은 가족에 대한 희화화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소용돌이 속으로」는 “실수로 꺼내 입은 아버지의 정장이 맞춘 듯 딱 맞았다”라는 진술과 “꺼내 입은 아버지의 정장을 벗지 못했다”라는 진술 사이에 놓인 아이러니를 통하여 가족적 질서가 지닌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새끼들이 끈질기게 세상이 멸망하는 날까지도 살아남기를 바라며, 어미 없이도 아이들은 잘 살아갈 것이다”에서 비장미까지 느껴지는 것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일 것이다. 「총성이 사라진 날」에 등장하는 현실 세계에 대한 야유 역시 가족 질서의 아이러니와 통하고 있다. “아버지란 것에 정년퇴직 따윈 없다 육십이 가까운 나이에 퇴직금이고 사대보험이고 말도 꺼내지 못했다”(「총성이 사라진 날」)라는 진술이 대통령의 죽음과 연결되는 부분 역시 아이러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아버지의 입에 있는 것은 / 자기 아들의 뼈일 지도 모르겠다”(「유산 1」)는 진술에서 부계적 권위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만다. 역사적 상상력의 특이한 전개가 최경훈 시의 한 표정과 개성이 되고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심사위원_김종태(記) 이성혁 권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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