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7년 4월 <한국연극>에 연극치료 특집의 일부로 제가 쓴 내용입니다. 여기에 옮겨 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었는데 웹 상에서는 더 많은 분들이 접하실 수 있겠다 싶어 뒤늦게 퍼왔습니다.
연극치료를 가장 짧게 풀어 말한다면 아마도 ‘연극을 통한 치료’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는 보통 연극이라고 하면 특정한 대본을 일정 기간 동안 연습하여 보게 좋게 형상화한 다음 관객들 앞에서 보여주는 상연의 행위를 연상하곤 합니다. 그런데 연극치료에서 말하는 연극은 그보다 훨씬 넓어서 극적 현실 속에서 이뤄지는 모든 활동을 포함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죠.
참여자들은 얼음땡을 하면서 공간을 뛰어다니는 것으로 세션을 시작합니다. 신나게 아이처럼 놀면서 몸과 마음이 덥혀지고 나면 각자 그 집단에서 불리고 싶은 새로운 이름을 지어 가슴에 붙입니다. 춘향이, 봄바람, 심술쟁이, 노을언덕, 이런 식이죠. 그런 다음에는 공간을 빠르게 움직여 다니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자기를 소개합니다. 그 때 치료사는 실제 자기와 관계없는 이야기를 해도 상관없으며 얼마든지 거짓을 꾸며낼 수 있음을 참여자들에게 주지시킵니다. 서로의 얼굴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앉아 종이 테이프를 손가락에 감아 간단한 인형을 만듭니다. 인형이 완성되면 옆 사람과 둘씩 짝이 되어 자기가 만든 인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름이 뭔지, 몇 살인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디서 사는지, 필요한 게 뭔지 등등을 말해주고 짝의 질문에 답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면 한명 씩 돌아가며 짝이 만든 인형을 대신 소개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공간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인형에 어울리는 걸음걸이를 찾아봅니다. 특정한 걸음걸이를 선택되면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과 만나 상대의 걸음걸이를 정확하게 모방할 수 있도록 배웁니다. 그리고는 또 다른 짝과 만나 그에게서 새로운 걸음걸이를 배우고 그에게는 방금 전에 배운 걸음걸이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짝을 만나고, 그렇게 예닐곱 번쯤 걸음걸이를 교환하고 나면 집단 전체가 서로의 움직임을 익히게 되지요. 걸음걸이 주고받기를 마치고 나서는 마지막 짝과 두 인형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상상합니다. 물론 그 때의 인물은 걸음걸이에서 힌트를 얻어 살을 붙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그 이야기를 한 모둠씩 장면으로 만들어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관객 중에 본래 인형의 걸음걸이를 만들었던 사람이 있겠지요. 그 참여자가 원한다면 극중 인물이 되어 직접 장면을 살아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장면을 모두 본 뒤에는 그 경험에서 얻은 생각과 느낌을 그림으로 이미지화합니다. 그리고 그 그림들을 함께 보면서 쉐어링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합니다. (이 내용은 2005년 8월 한명희 연극치료 워크샵에서 진행된 것을 참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연극치료는 단순한 놀이로부터 몸을 움직여 표현하는 체현과 외부의 대상을 표현의 재료로 끌어들이는 투사를 비롯해 이야기를 만들고 연행하는 역할 활동에 이르기까지 극적 행위의 모든 범주를 아우릅니다. 그리고 이 다양한 극적 행위들은 다시 허구성 혹은 극적 현실이라는 특성으로 환원되어 연극치료의 본질을 형성합니다. 극적 현실은 일상 현실에 비해 참으로 자유롭습니다. 극적 현실 안에서는 시간의 제약도 없고 공간의 제약도 없습니다. 기억조차 선명치 않은 십 수 년 전 과거의 어느 날을 다시 불러올 수도 있고, 막연한 느낌만으로 존재하는 미래의 어느 순간을 조형해볼 수도 있으며, 이미 고인이 되어 현실에서는 볼 수 없는 누군가를 대면할 수도 있고, 내 속에 사는 여러 명의 나 중 어느 하나를 꺼내 만나 볼 수 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아닌 다른 존재, 남편이나 조물주나 먼지나 로미오가 되어 그의 눈으로 세상을 겪어 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라면’이라는 가정에 대한 믿음이 바로 극적 현실이 가진 자유로움의 원천입니다. 또한 극적 현실은 매우 안전합니다. 일상의 현실에서 자유로움은 흔히 도전과 비난을 감수할 때에만 얻을 수 있지만, 극적 현실은 아무런 댓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눈치보고 주저합니다.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날 우습게 보지 않을까, 이걸 선택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크게 상처받을 텐데, 아무리 화가 나도 부모님인데 드러내선 안 되지,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이렇게 하는 게 맞지......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의 모든 선택과 행동에 그에 걸맞는 책임과 결과가 따르고 또 그것을 쉽게 돌이킬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극적 현실 안에서는 함께 하는 참여자를 상해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허용되고 그에 대해 아무도 책임을 묻지 않으며 원할 때마다 새로운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괴상한 표정에 우스꽝스런 몸짓을 할 수도 있고, 상스런 말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를 비난할 수도 있으며, 만취 상태로 운전하는 것처럼 현실에서라면 절대 하지 않을 어떤 선택을 해 볼 수도 있고, 반란을 일으키거나 살인자가 되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손가락질을 받거나 경찰에게 잡혀갈 염려가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허구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때문이죠. 그런 한편 그렇게 가짜인 극적 현실은 그 확연한 허구성에도 불구하고 일상 현실과 너무나 닮았다는 점을 또 하나의 특징으로 가집니다. 이것은 연극이 흔히 종합예술이라 불리듯 사람과 삶을 매우 다양한 채널로써 복합적으로 형상화해낸다는 데 힘입은 바 큽니다. 예를 들어 회화가 색채와 형태로 세계를 평면 안에 재현하고 무용이 무대와 음악을 배경으로 한 신체의 움직임으로써 삶을 다소 상징적으로 나타낸다면, 연극은 색채와 형태와 소리와 공간은 물론 인간의 몸과 언어를 비롯해 그들 사이의 관계까지를 표현의 매체로 확장함으로써 삶에 필적하는 환영성을 성취합니다. 그 환영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간혹 배우를 극중 인물로 착각하여 총격을 가한다든가 하는 사고를 불러오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거꾸로 연극이라는 환영이 가진 강력한 영향력을 방증하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 힘은 그것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수용한 사람들에 의해 역사 속에서 치유와 교육 계몽 및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 끊임없이 활용되어 왔으며, 그러한 전통이 2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과학적 근거와 접목되면서 연극치료라는 분야로 전문화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연극치료는 허구가 주는 자유로움과 안전함과 강렬한 환영에 그 치유의 뿌리를 대고 있습니다. 자유롭고 안전한 가상 현실 속에서 내면의 진실을 만나고 또 다른 삶을 리허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탤 것이 있습니다. 연극치료를 연극을 통한 치료라고 소개하면 곧이어 따라오는 질문, “그럼 사이코드라마와 같은 건가요?” 연극적인 방식으로 치료를 도모한다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연극치료와 사이코드라마는 그 형성 배경이나 진행 방식이나 진행자의 훈련 과정 또는 사용되는 메소드를 달리하는 개별적인 정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연극치료와 사이코드라마를 가르는 중요한 차이는 현실을 다루는 화법으로서, 사이코드라마가 현실을 거의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재현하는 직설적인 방식을 쓴다면 연극치료는 내담자가 자기 자신과 자신의 문제를 상징과 은유를 통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 표현하고 성찰하도록 하는 간접적인 방식을 취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에게 늘 무시당하는 느낌 때문에 힘든 내담자가 있다고 할 때, 사이코드라마라면 아마도 일상 생활의 장면에서 구체적으로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확인한 후 그 사람과의 에피소드를 사실적으로 재연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상대방과 역할을 바꾸어 연기해보거나 실제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마음 속에서 들끓었던 생각과 느낌을 분신의 입을 통해 쏟아 내거나 원하는 대로 장면의 진행을 바꾸어 보면서 내담자의 문제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면한 문제의 근원이 된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 유사한 방식으로 내담자의 행동 패턴을 변화시키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연극치료에서 치료사는 내담자에게 무시당하는 기분과 관련된 어떤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담자는 수줍어하고 자신감이 없으며 곧잘 스스로 보잘 것 없다고 느끼는 인물을 창조하여 그 인물이 무시당하는 기분을 느끼는 세 가지 사건을 만드는 거죠. 이야기가 만들어지면 다른 참여자들과 함께 장면을 연기한 다음 인물을 살면서 느낀 것들을 공유하면서 내담자가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내담자가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장면을 연기할 수 있겠지요. 연극치료는 이렇게 투사를 통한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접근을 요체로 합니다. 그러한 방식은 적나라하게 해부되는 자기 모습을 직면할 준비가 채 되어 있지 않거나 그것을 원하지 않는 내담자들에게 허구라는 거울을 통해 좀 더 안전하고 여유 있게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또 상징과 은유만이 줄 수 있는 다양한 통찰로 이끌어주기도 합니다. 연극치료를 소개하면서 흔히 듣게 되는 질문 중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그럼 연극치료는 배우들이 받는 건가요?” ^^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연극치료를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보면 배우들이 받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연극치료가 직업적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만을 대상으로 삼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연극치료는 정신병원, 낮 병동, 특수학교, 지역사회 기관, 교도소, 노인 요양원 등 다양한 환경에 있는 병들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마음에 상처를 입었거나 좀 더 성장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변화의 매체로서 기능합니다. 다시 말해 내담자들이 연극치료를 통해 기쁨과 삶의 활력을 얻고, 상처를 회복하며, 질병과 장애로 인한 불편을 줄여나가고, 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나 해결책을 발견하며, 나아가 자유롭고 균형적이고 통합적인 상태를 성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연극치료가 주목의 대상이 된 것은 불과 10년 안팎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정신과 환자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사이코드라마 활동이 있어왔지만 앞서 언급했다시피 심리극은 연극치료와 하나로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논외로 하면 그렇습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연극치료를 재발견하고 체계화한 영미권의 경우에 연극치료는 어느 한 사람이 주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비슷한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연극을 치유적으로 활용하던 움직임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조직을 이루고 체계를 다지는 과정을 밟아 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와 닮아서 그 출발에는 일반인과 함께 연극을 하면서 연극이 예술적인 향유의 대상이 되는 것 외에도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을 갖고 있음을 체험한 연극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한 예로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극 공간-해”를 들 수 있습니다. “해”는 아우구스또 보알의 연극 철학과 방법론을 바탕으로 1998년부터 일반 청소년의 고민을 담아내고 관객과 함께 해결을 모색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소년원생, 노숙인, 탈북 새터민,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마음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로 만남의 범위를 넓혀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치료적 작업들이 축적되면서 좀 더 전문적인 연극치료에 대한 관심과 추구가 깊어갔고, 그에 대한 반응으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영미권의 연극치료를 소개하는 번역서의 출간과 함께 연극치료를 주제로 한 논문들이 씌여지면서 2002년에는 본격적으로 연극치료를 표방하면서 특수학교와 복지시설의 장애 아동을 주된 대상으로 작업을 펼치는 “한국연극치료연구소”가 설립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그 즈음 기존 의료 체계의 기계적이고 환원적인 경향에 반발하는 일종의 대체 의학으로서 예술치료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가파르게 증가하였고, 그러한 흐름을 타고 예술치료사를 양성하거나 예술치료를 학문으로서 가르치는 기관들이 여러 군데에 세워졌습니다. 하지만 연극치료는 미술치료나 음악치료에 비해 출발이 늦은 탓에 하나의 전공으로 세우기가 어려워 무용치료와 함께 공연예술치료로 묶이거나 표현예술치료로서 통칭되곤 했으며, 간혹은 사이코드라마와 연극치료를 혼동하여 사이코드라마의 인력으로 연극치료사를 양성하려다 실패한 사례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에 한국연극치료협회의 출범과 함께 연극치료사라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고 그와 더불어 일반인과 연극인들 사이에서 연극치료에 대한 관심이 빠른 속도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현재에는 발달장애 아동, 치매 노인, 소년원생, 탈북 새터민, 여성결혼이민자와 그 자녀들, 외국인 노동자, 노숙인, 가출 청소년, 정신과 환자 등 많은 기관과 개인들이 연극치료에서 도움을 받고 있으며, 또 다른 쪽에서는 연극치료를 두 번 째 커리어로 고려하는 연극인들이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채 10년이 되지 않는 짧은 기간 동안의 이러한 양적 팽창은 무엇보다 연극치료에 대한 잠재적 수요를 반영하는 결과라 보여 집니다. 우리나라에서 그것은 특히 발달 장애를 중심으로 한 장애 아동의 치료와 교육에서 상당한 반향을 얻고 있으며, 연극 인력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렇듯 급속한 성장의 이면에는 미처 말끔하게 풀어내지 못한 문제들이 놓여 있기도 합니다. 연극치료는 변화와 발전을 필요로 하는 모든 이들을 그 안에 아우르지만, 그럼에도 주된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심리적인 질환으로 고통받는 사람들 다시 말해 정신과 환자일 것입니다. 연극치료가 심리치료나 그 밖의 다른 치료를 보조하거나 그에 부수하는 매체가 아니라 독자적인 치료 분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정신병원을 비롯한 임상 시설에서의 작업이 크게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밖으로는 현재 진행되는 작업들에 대한 기록과 더불어 그 효과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연구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며, 내적으로는 어떤 대상과 어떤 환경에서도 두려움이나 모자람 없이 작업을 할 수 있는 충분히 훈련된 인력을 양성해내야 할 것입니다. 연극과 치료가 만나 이뤄지는 복합적인 분야인데다가 연극이 가지는 녹록치 않은 힘으로 인해 쉽사리 접근해서도 안 되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특성을 지닙니다. 그러한 연극치료의 위험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통제하여 오히려 큰 힘으로 쓸 수 있는 인력을 길러내기 위해서는 연극치료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연극치료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충분히 성숙했다고 보기 어려운 지금의 상태를 고려한다면, 각기 제 나름으로 분산되어 학습의 결과를 개별적으로만 축적하기 보다는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함께 나누며 서로를 견인할 수 있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보여집니다. 연극치료는 다른 어떤 치료 방식보다 함께 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며 바로 거기에서 치유의 동력을 끌어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담자와의 만남에서 뿐만 아니라 연극치료 분야의 성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