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
사람들은 <무無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때 그는 무엇인가에 혹은 어떤 일자一者가 있어야 함에 놀라움을 굼치 못한다. 그러나 <무란 있을 수 없다.>라는 문정을 분석해 보라. 그러면 우리는 결코 우리가 다루고 있는 것이 관념이 아니라 단어라는 사실과 여기에서의<무>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것이다.
<무>란 인간에게 특징적인 행위 및 제작의 영역에서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일상정인 용어이다.<무>는 우리가 찾고 있는것, 우리가 원하는것,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없음을 가리키고 있다. 실재로 우리의 경험이 우리에게 절대적 진공을 보여준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 진공은 한정되고, 윤곽을 지니게 되고, 따라서 어떤 것이 된다. 그러나 실재에 있어 진공은 없다.
우리는 오직 충만된 것만을 지각하고 또 개념화까지 한다. 한 사물이 사라지는 것은 다른 사물이 그것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상(捨象)은 대치를 뜻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상<捨象>을 말할 때란 대치함이 있어서 그 두개의 절반중 하나를 더 정확히 말한다면 우리의 관심을 끄는 두 측면 중의 하나를 고려할때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이미 지나간 대상(對象>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리고 그 대상을 대체한 다른 대상에서 멀리 떨어져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보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무(無>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은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흥미 밖에 있으며, 우리는 더이상 그곳에 없는 것, 혹은 그곳에 있었을지도 모를 것에 흥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따라서 부재(absence)나 무(neant)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rien) 같은 관념은 실재적이거나 우연적인 사상(捨象)의 관념과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사상(捨象)의 관념은 그 자체로 대치(代置)의 관념이 지니는 한 측면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이 실제적 삶에 있어서 우리가 사용하는 사유방식들이다. 사유가 실재 뒤에 쳐져서,현재 존재하는 것에 몰입하지는 않고, 필요할 때 과거에 존재하던 것 또는 존재할지도 모를 것에 밀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산업에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제작(製作)의 영역에서 창조의 영역으로 옮겨갈 때, 그리고 왜 존재가 있는가, 즉 어떤 것 혹은 어떤 사람이, 또 세계 또는 신(神)이 왜 존재하는가, 그리고 왜 무(無)는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자문해볼 때, 요컨대 형이상학적 제 문제의 불안에 직면할 때, 우리는 잠재적으로 어떤 불합리성을 인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모든 사상(捨象)이 대치이며, 사상(捨象)의 관념이 절단되어버린 대치(代置)의 개념에 불과하다면 모든 것의 사상(捨象)을 말한다는 것은 곧 대치 아닌 대치를 상정하는 것이다.
환언하건대 이것은 자기 모순이다. 모든 것의 사상이라는 관념은 둥근 사각형의 관념과 마찬가지의 존재---소리 ,즉 헛소리의 존재---를 지니고 있거나,아니면 만일 그 관념이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다면 , 그것은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에로 옮겨가는 지성(知性)의 운동을 번역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에서 지성은 자신이 방금 떠나온 것을 지금 자신 앞에 있는 것보다 더 좋아하며 「앞의 것의 부재(不在)」를 통하여 뒤의 것의 현존(現存)을 지시한다.
사람들은 전체를 상정해 놓고 그 부분들을 하나하나 사라지게 만들면서 그 부분들을 대체하는 것은 보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총괄하려고 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단순히 새로운 질서 속에 배열된 현존하는 것들의 총체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른바 이 절대적 진공의 표상이란 실제로는 사물의 충만성은 차치해놓고, 오직 자신의 불만족의 진공만을 고려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을 한 채, 무한히 부분에서 부분으로 뛰어넘는 정신이 지니고 있는 보편적 충만성의 관념이다. 이 말은 곧 무(無)의 관념이 단순히 한 단어의 관념이 아닐 때는 전체의 관념과 마찬가지의 물질을 함축한다는 것, 또 이에 덧붙여 사유의 작용을 동반한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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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무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핍이라든가 부재라든가 지성의 선호도일뿐 인거죠.이성으로 궁구한는 것은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이것을 허이면서 허가 아니고 무이면서 무가 아니라고 말할려면 역설을 넘어가야합니다.
요즘은 이런것 도 연구하나 봅니다. 칸트가 이율배반을 말하고 이 천년 동안 이것을 몰랐다는 게 놀랍다는 것이 결국 그들은
이 천년 동안 철학을 한 적이 없다는 것도 됩니다.
그런데 지금도 못하기는 마찬가지며 우리나라도 별로 다르지 않아요
이런 것을 이해 못 하면서 공이나 무아나 깨달음이나 각성, 원신갱생을 논하면 그것도 모르는 것이 뭔지 모르고 아는 것이 뭔지 모르는 것으로 지적 불철저함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