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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밍족 [grooming, -族] : 패션과 미용에 많이 투자하는 남성을 일컫는 신조어. 마부(groom)가 말을 빗질하고 목욕을 시키는 데에서 유래했다.
그루밍이라는 단어는 더는 이국적인 말이 아니다. 주변만 보더라도 미용에 신경 쓰는 남성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들은 귀걸이, 팔찌 등을 차고 패션 잡지를 즐겨본다. 신상 아이템을 쇼핑하며, 유행에 민감하고 항상 패션에 신경 쓴다. 헤어 스타일링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심지어는 제모나 네일아트, 페디큐어까지 한다. 그리고 이 모든 패션의 완성은 ‘화장’에서 끝난다.
▲남자화장품 종류는 무궁무진해졌다. (출처:http://elvenking.tistory.com)
남자, 화장에 물들다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던 화장. 더는 여성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점차 화장하는 남자들이 늘고 있다. 'MEN'이라고 쓰인 남성전용 화장품 라인이 생겼으며, 남성전용화장품 전문브랜드도 인기다. 이제 백화점 1층에서 남자들이 전문가들과 상담하고 화장을 받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최근 통계 결과를 보면 그루밍족이 스쳐가는 유행이 아니란 사실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유로모니터 인터내셔널 조사 결과, 우리나라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남성 화장품 시장이며, 시장 매출액 중 21%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간 약 1조 원이 넘는 규모로 단순히 생각해 보면, 남성 화장품 5개 중 1개가 우리나라에서 소비되는 셈이다. 그리고 식약청은 최근 우리나라 남성의 10% 이상이 색조화장을 한다는 놀랄 만한 내용을 발표했다. 이런 유행을 좇아 요즘 홍대, 이태원 근처에는 남성 전용 피부관리, 상담을 전문적으로 하는 그루밍숍도 생겨나고 있다.
B브랜드 화장품 판매장을 운영하는 김은선(37) 씨는 “최근 남자분들이 매장을 많이 오세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화장품 종류나 이름도 모르는 남자들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제품 하나하나 찾으면서 꼼꼼히 비교합니다. 가끔 브러쉬, 펜슬을 추천해달라는 남자 손님들이 올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해요”라고 말했다.
▲이젠 남자 화장실에서 남자들이 화장을 고치는 모습도 목격할 수 있다
역사 속 화장한 남자 이야기
사실 화장의 역사를 보면 미용을 위한 화장이 꼭 여성의 전유물만은 아니었다. 신라 시대의 화랑은 전투에 나가기 전 항상 미용 화장을 하여 그 아름다움을 뽐냈다고 한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절, 루이 14세를 비롯한 왕족, 귀족들 역시 화장을 했다는 사실도 문헌에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런 남자들의 화장이 지금 와서 다시 주목을 받고, 또 그들이 화장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넌 조국만 지키냐? 난 내 피부도 지킨다
다수의 그루밍족이 화장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를 ‘취업 준비’와 ‘군 복무’로 꼽았다. 취업용 사진을 찍거나 면접을 앞두고 조금이나마 호감이 가는 인상을 연출하기 위해 화장을 시작했다고 한다. 군 복무의 경우, 잦은 외부 훈련 때문에 장시간 햇빛에 노출되고, 위장크림과 화생방 CS탄에 피부가 상해서 피부 관리 때문에 기초화장(로션, 스킨, 선크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특히 군인들은 남자의 생명인 ‘헤어스타일링’까지 할 수 없기 때문에 피부에 관심을 두는 일이 자연스러웠다는 후문. 이렇게 한 번 화장을 경험하고, 화장의 매력에 빠진 남자들이 바로 그루밍족이 되는 것이다.
최규선(23, 가톨릭대) 군은 “군대에서 처음 화장품에 관심이 생겼어요. 첫 휴가 때 만난 여자친구가 피부가 많이 상했다며 스킨, 로션을 선물해줬는데 그때가 시작이었죠. 피부 관리용품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웬만한 화장품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라며 그루밍족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남자의 변신은 무죄!
그루밍족은 자신이 화장하는 이유는 ‘나를 위한 투자’라고 말한다. 화장하는 남자 김호선(25, 단국대) 군은 “여자와 똑같은 심리라고 생각해요. 좀 더 잘생겨지고 싶은 마음으로 화장하는 거예요. 좀 더 깔끔하고 멋져진 제 모습을 보면 기분이 매우 좋죠”라며 화장하는 남자의 심리가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화장하는 남자들을 지지했다.
가로수길 그루밍숍 ‘루이스클럽’에서 만난 최종진(27) 씨는 “이젠 남자도 외모 경쟁력이 필요해요.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어떤 분야에서든 좀 더 호감을 주는 인상이 도움되지 않을까요?”라는 의견을 남겼다.
그루밍족? 아직까진 글쎄…
그렇다면 이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어떨까? 본 기자 직접 20대 남녀 306명(남: 108명, 여:198명)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인터넷 설문) 설문조사를 진행해 보았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남성보다 오히려 여성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남성의 경우 화장하는 남자에 대해 약 28%가 부정적인 응답을 보였는데, 여성은 약 38%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이어 호감이라는 응답은 고작 8%로 나타났다.
선호하는 남자 화장 정도에 대한 설문에서도 남성은 기초화장(스킨, 로션, 선크림 등)과 피부 톤 보정(BB크림, 파운데이션 등)을 선호했지만, 여성은 기초화장의 선호도가 압도적으로 높았다. 매일 화장을 하는 여자들이기에 남자들의 화장에 공감을 표할 것이라는 기자의 예상은 무참히 무너졌다.
설문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남성의 화장에 대한 구체적인 의견을 물었다.
황은비(24, 한국외대) 양은 “지나치게 외모에 신경 쓰는 남자는 별로라고 생각해요. 만약 남자친구가 저보다 더 미용에 관심 있다면 제가 더 피곤하지 않을까요”라며 부정적인 의견을 밝혔다.
윤태지(23, 이화여대) 양은 “남자가 밝은 톤으로 화장한 얼굴은 호감이 가질 않아요. 화장하는 남자에게 남성미가 안 느껴지는 것도 남자 화장이 싫은 이유 중 하나예요”라며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남자 화장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은 여성들의 공통적인 이유는 ‘남성미가 없어 보여서’, ‘화장한 티 나는 얼굴이 싫어서’, ‘남자가 지나치게 외모에 신경 쓰는 것이 싫어서’ 등이었다. 하얀 얼굴이나 짙은 눈썹 등 ‘화장한 얼굴’에 대한 부정적 생각보다는 ‘남자가 화장하는 행위’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인식이 많았다. ‘화장=여자의 전유물=남자가 하면 안 되는 것’이란 인식이 아직 사회에 전반에 깔렸다는 결론에 닿았다.
설문지에 남긴 의견들을 통해 이러한 여성들의 심리를 더 살펴보았다.
익명의 여성 응답자는 “남자가 BB크림 정도까지만 바르면 얼굴 톤도 밝아지고 잡티가 사라져서 화장한 얼굴을 보면 민낯보다는 호감이 생긴다. 하지만 남자가 화장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 호감은 분노와 배신으로 바뀌곤 한다. 이런 것이 이상한 건 나도 알고 있지만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
김가은(26) 양은 "남자가 화장했다는 자체가 싫다. 그런데 얼굴이 하얗고 깔끔한 것이 좋다. 그러므로 여자도 못 알아챌 만큼 티가 안 나면서 얼굴을 깔끔하게 화장하는 것을 추천. 하지만 이 것이 가능할까? Best of Best는 타고난 피부와 피부 톤을 갖는 것"이라는 응답을 해줬다.
반면 남자 화장에 호감을 보인 소수 여성의 의견으론 ‘자기관리를 잘하는 것 같아서’, ‘깔끔한 인상이 보기 좋아서’ 등이 있었다.
화장한 남자, 정말 비호감일까?
다음으로 화장 여부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남자의 사진을 봤을 때 어떤 상태의 남자에게 더 호감을 보이는가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동일한 설문대상)를 진행했다. 과연 머릿속에서 생각했던 화장한 남자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결과에 반영될까?
우선 모델 1명에게 다섯 단계로 구별한 화장을 진행했다. 모든 화장은 일상에서 하고 다닐 수 있을 만큼으로 제한했다. 그 뒤 순서를 섞어 호감도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했다.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는 남성의 화장에 대한 설문조사와 약간 다르게 나타났다. 민낯과 근소한 차이로 피부 톤 보정 화장을 한 얼굴이 1위. 기존 설문에서는 기초화장(스킨, 로션)이 가장 선호되었지만,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 것이다. 남성 화장에 대한 인식과 블라인드 테스트 결과를 종합해 보면, ‘화장으로 얻게 되는 깔끔한 인상은 긍정적이나, 화장했다는 행위는 부정적이다’란 아이러니한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밖에 그루밍 관련 설문에도 그 결과는 처참했다. 눈썹 다듬기 외에 다른 그루밍에 대해서 모두 비호감이라는 의견이 대부분. 결과를 보는 그루밍족이 얼마나 상심이 클지 상상이 안 된다. 미를 향한 그들의 도전에 심심한 위로를 표한다.
이번 조사에서 대부분의 사람이 남자 화장을 포함한 그루밍에 대해 인식이 그렇게 호의적이지는 않다는 결과를 얻었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향한 남자의 욕망은 죄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하다. 끝나지 않는 논란 속의 그루밍족. 화장하는 남자,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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