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退溪小傳」 편집자 윤상홍 글 퍼옮(예안중 15기 카톡방 금창석동기 올린글 다운받음 2020.11.20)
<25회> 退溪小傳
新王과의 君臣之義
「도산기(陶山記)』를 읽은 사람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는 회갑을 넘어서부터는 속세와의
인연을 깨끗이 끊고 오직 자연 속에 파묻혀서 자연을 통해 우주의 철리를 숭상하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아오고 있었다. 그러기에 도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틈만 있으면 산수간으로 나다니기를 무척 즐겨하였다. 그리하여 62세 되는 해의 3월 3일에는 배를 타고 청계(淸溪)에 이르러 시냇가에 대(臺)를 쌓아놓고 청계대(淸溪臺)라 부르기도 하였고﹐ 또 귀암 이정(龜巖 李楨)같은 분이 찾아오면 며칠을 같이 지내면서 석간대(石澗臺)에서 학문을 토론
하기도 하였고, 이해 7월 기망(旣望、매월16일)에는 저 소동파(蘇東坡)의 적벽부(赤壁賦)를 본받아 풍월담(風月潭)에 노닐 계획도 세웠었다. 그는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며 심성(心性)을 깨끗하게 하는 동시에 육신적인 병마를 자연스럽게 물러가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퇴계가 제자들과 더불어 청량산에 자주 노닌 것은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60세에서 부터 65세에 이르기까지의 4,5년동안은 가장 마음 편하게 살아간 기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에는 몹시 꺼리는 일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직도(명예직이기는 했지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라는 관직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양심이 대쪽같이 바른 퇴계는 그런 것은 견딜 수 없는 정신적인 부담이었던 것이다.
퇴계는 생각다 못해 65세 되는 을축년 4월에 임금에게 글을 올려 동지중추부사의 관직을
해임시켜 줄 것을 청원하였다.
임금은 그 글을 읽어보고 다음과 같은 전교(傳敎)를 내렸다.
「과인은 항상 경을 기다리노라. 자리를 비워놓은지 여러 해이건만, 고집스럽게 물러가 한가로이 있기를 청하니 이것은 어진 이를 대우하는 나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 아닌가 하노라. 경의 뜻이 그토록 깊고 간절하기에 어쩔 수 없이 사임을 허락하노라.」
퇴계는 사직을 허락한다는 전교를 받고 크게 기뻐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죄송스러움을 금
할 길이 없었다. 하잘것없는 자기를 그처럼 아껴주시는 성은(聖恩)에 감격을 마지 못하면
서도 그에 대한 보답을 못하는 것이 가슴 아팠던 것이다.
이해 여름에 퇴계는 제자들에게 역학계몽(易學啓蒙)이라는 명강의(名講義)를 하였다.
그런데 감투를 완전히 벗어버린지 8달 밖에 안 되는 이해 12월에 임금은 또다시 다음과 같
은 전지를 내려 퇴계를 서울로 불러 올리려 하였다.
「내가 총명하지 못해서 어진 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모자라 전부터 여러 번 불렀으나 매양 늙고 병들었다하여 사양하므로 내 마음이 매우 편하지 못했다. 경은 나의 지극한 심회를 헤아려 서울로 빨리 올라와 주기를 바란다.」
임금이 명령을 내리면 누구든지 복종을 아니 할 수가 없는 그 시절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임금은 명령을 내려 퇴계를 강압적으로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마음이 절로 우러나서 상경해 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그것만 보아도 명종이 퇴계의 인격을 얼마나 존중했는가를 알 수 있으려니와, 벼슬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그처럼 벼슬을 주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아 명종은 퇴계가 옆에 있어 주어야만 안심하고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고 여겼던 것도 사실인 것 같다.
그러기에 임금은 특별전교를 내려 상경을 종용하면서 또다시 동지중추부사의 벼슬을 내
리는 동시에 만약 퇴계가 상경을 하게 되면 역마(驛馬)를 타고 오게 하라는 특별 분부까지
내렸다.
임금의 그와 같은 간곡한 부탁을 받고나니, 퇴계는 예의상 집에 남아서 사퇴만 고집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듬 해 정월에는 서울에 올라가 임금을 직접 배알하고 사퇴하려고 집을 떠났다.
그러나 예안을 떠나 예천까지 오자 병이 다시 도져서 서면으로 사직할 뜻을 올리고 풍기
에 머무르며 왕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후에 임금으로부터 전교가 내려 왔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경의 사표를 보니 내 마음 매우 섭섭하다. 사양하지 말고 몸을 잘 조리하여 여러 번 부르
는 나의 정성에 부응해 주기를 바란다. 상경시에는 조금도 불편이 없도록 연도(沿道) 각 고을에 특별 지시를 내려 놓았노라. 내의(內醫)를 내려보내니 진찰을 받아서 건강을 속히 회복하도록 하오.」
임금의 그와 같은 전교를 받고 병에 시달리던 퇴계는 안타깝기 짝이 없었다. 그리하여 풍기에서 예천으로 옮겨와 또 사표를 올렸다.
그러나 임금은 사표를 수리하기는 커녕 뒤미처 자헌대부공조판서(資憲大夫工曹判書)겸예
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승진 발령까지 내렸다.
퇴계는 사표가 수리되지 않고 오히려 승진 임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학가산(鶴駕山) 광흥사(廣興寺)에 들어가 몸조리를 하면서 또다시 다음과 같은 사표를 올렸다.
「신이 지난 번 무오년(戊午年)에 조정에 들어가 대사성의 직책을 맡은 일이 있사오나 신병이 극도에 달하여 서너 달 동안에 출근한 날이 겨우 4,5일밖에 없었사옵건만 전하께서
는 도리어 공조참판으로 승진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두 달동안에 애써 출근한 일
이 세 번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한웅큼의 힘도 남은 것이 없어서 부득이 성은에 보답을 못
하고 물러나 돌아왔사온데 이제 까닭없이 갑자기 승진을 시켜 주시니 자고이래로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사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께서는 신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고 살려주시와 신의 해골이나 고향에 묻히게 해 주시옵소서. 기어이 벼슬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시려거든 예전대로 중추부사의 명예직만 그대로 두어주시면 조금이라도 목숨을 늘려가며 해야 할 일을 다하고 죽음으로 돌아갈까 하옵니다.」
이와 같은 사표를 올린 뒤에 광흥사에서 봉정사(鳳停寺)로 옮겨와, 또다시 다음과 같은 사표를 올렸다.
「새로 제수하신 관직은 도리에 비쳐보거나 자격과 이력으로 보거나 하나도 받을 만한 처지가 못 되옵기에 시간이 지체될수록 죄가 깊어지는 것 같아 다시 사퇴의 뜻을 올리옵니
다.」
그와 같은 사표를 봉정사에서 올리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임금은 사표를 받아보고 한숨을 쉬며, 대신들에게 하루하였다.
「퇴계가 공조판서의 벼슬을 못 받겠다고 또 사표를 올렸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
소?」
대신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공조판서라는 벼슬은 오래 비워둘 자리가 못 되오니 퇴계가 취임을 못하겠다면 마땅히 다
른 사람을 새로 임명하여야 옳을 줄로 아뢰옵니다.」
「음 그러면 경들의 말대로 공조판서의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꾸기로 하겠소. 그러나
병에 차도가 있는대로 다시 올라오도록 하기 위해, 동지중추부사의 직함만은 다시 내려주
도록 하겠소.」
그리하여 퇴계는 공조판서의 벼슬만은 면할 수 있었으나 동지중추부사의 관직만은 끝내 벗
어버리지 못했다.
임금은 그와 같은 결정을 내리고 나자 퇴계를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져서 여러 유신
(儒臣)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현인을 불러도 오지 않는 것을 탄식한다.(物不至尊)」
라는 글제(文題)로 근체시(近體詩)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그러고도 사모하는 마음이 풀리지 않아서
「도산은 산수가 얼마나 좋은 곳이기에, 퇴계는 고향에 들어간 이후로 다시 상경할 생각조차 아니 하는고. 내 비록 도산에 직접 가 볼 형편은 못되나, 그림으로나마 꼭 구경하고 싶으니. 화가들을 도산에 내려보내 그 곳 산수를 그대로 그려서 나에게 보여 주도록 하라.」
하고 이름난 화가들을 예안으로 내려보내 도산 경치를 그림으로 그려 오게까지 하였다.
화가 몇 사람이 예안에 내려가 도산의 산수를 그림으로 그려왔다.
임금은 그림을 감상하며 퇴계를 새삼스러이 보고 싶어하다가, 예성군(礪成君)과 송인(宋寅(明宗時代의 名筆家)을 시켜 퇴계가 지은 「도산기」를 그림 위에 쓰게 하여, 그것을 병풍
으로 만들어 거처하는 방 안에 쳐놓고 아침 저녁으로 감상 하였다.
그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당시의 임금 명종이 퇴계를 얼마나 사모해 왔는가를 가히 짐작
할만 하다.
<25회>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