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위씨 천년세고선집」을 엮은 동기는 지장록이다. 뭔가 석연찮았다. 우선 문중의 기록을 담은 책이라면 열성조 사문 및 소장, 전․기․서․발문, 충의록, 사우기 등의 편집순서가 소홀해 보였다. 또 이미 알려진 조상들의 유문 중 황제나 왕에게 올린 표문(表文)이나 상소문(上疏文) 등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서 찾아내 게재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유가 없지는 않지만 자연인의 행장과 묘갈명으로 내용을 채운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원감국사집(圓鑑國師集)과 조상들의 문집(文集)이었다. 원감집을 보려는 이유는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청전표(請田表) 원문과 유시(遺詩) 3편 이외의 글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영이재공(詠而齋公)의 문집에는 관북종친 가운데 처음으로 장흥을 방문한바 있는 정진공(挺振公)을 전송하는 시를 보고 싶었다. 다른 조상들의 문집에도 알려지지 않은 남북종친 간의 교류사실 등이 들어 있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먼저 덕운(德雲) 형님께「장흥문집해제」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문화원이1997년 12월에 발행한 문집에는 장흥출신 155인 중 우리 조상 26인의 문집해제도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해제를 보면 그 가운데 필요한 글이 있으리라 짐작했다. 예측은 적중했다. 여러 문집해제에는 관북종친들에게 주는 시들이 있었다. 문제의 글을 보기 위해서는 직접 문집을 구해봐야 했다. 덕운형님 상산(觴山)족장에게 부탁해서 어른들의 문집을 빌었다.
그것을 보면서 새로운 사실(史實)을 확인했다. 첫째, 원감국사의 아버지 휘 소(紹)는 '정승(政丞)'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1759년 최초의 족보를 발행할 때부터 줄곧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이라고 알았으나 국사가 연곡린(鷰谷璘)에게 보낸 편지(원갑집 p. 236)에서 확인됐다. 정승의 품계는 종 1품인 반면 원외랑은 정 6품 벼슬이다. 불교계․학계․문중이 모두 이 사실을 놓쳤던 것이다. 관계자들이 편지 속에 묻혀있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
둘째, 출가 이후 동생들과의 만남과 수창(酬唱)이다. 우리는 3형제가 과거에 합격한 뒤의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원감집에는 중제(仲弟)가 평양군수로 부임해서 정혜사에서 자면서 수창하고, 연경에 갔을 때 주고받은 시와 해주군수로 가서 병으로 타계한 사실이 적혀있다. 그리고 계제(季弟)는 지금 경남 양산(梁山)인 양주(梁州)군수로 근무할 때 감로사(甘露寺)에서 만나 지냈던 시가 확인됐다. 국사가 입적한 후 700여년만의 일이다.
그뿐 아니다. 조상들의 문집에도 관북종친간의 교류사가 적혀있었다. 영이재․서계․죽오․다암․춘파․춘헌․복재․계사․오헌․중와공 등 10인의 문집에는 모두 29수의 한시와 서신이 있다. 마치 끊어진 동맥이 이어져 다시 피가 다시 통하는 기쁨을 느끼게 한 발견이라면 지나친 호들갑일까! 이들 중 28수를 번역해서 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깝게도 1수는 입수는 했으나 번역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원문만 실었다. 원문만 봐도 어느 정도는 뜻을 헤아릴 수 있다.
백미(白眉)는 학촌공(鶴村公)의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다. 세고집에 관북조상들의 유고를 반영하고 싶어도 길이 없다. 학촌공의 능전지가 언뜻 떠올랐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니 규장각에 보관돼 있음을 확인했다. 자형(滋炯)소장에게 수고 좀 해주시라고 부탁 말씀을 드렸다. 직접 가서 복사를 해오셨다. 그것을 다시 복사해서 우송했다. 번역을 의뢰해서 붙이니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 어찌해서 이런 좋은 선조들의 기록을 지금까지 찾지 못했던가?
문중사란 원래 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세고선집(世稿選集)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수백수의 시나 여러 글 중에서 몇 수만을 골라 게재했기 때문에 애로가 많았다. 무성한 뒷소리를 줄이기 위해 편중을 없애려 정한 기준을 지켜려 노력했다. 되도록 개인의 문학적인 기록보다 공적인 부분을 가려 썼다. 그리고 되도록이면 많은 선조의 유문을 반영하려 했다. 그런 연유로 "뭔 그런 글을…" 하면서 토를 달 수 있을 것이라 짐작되기도 한다.
문제는 돈이다. 게재할 유고를 추려서 번역하려니 적지 않은 분량처럼 보였다. 누구에게 번역을 맡겨야 적게 들고 의미를 제대로 반영한 번역이 가능할까? 그런 대상을 찾는데 남전(南田)형님이 정말로 애를 쓰셨다. 여러 번 독촉한 끝에 번역이 완료됐다. 맡길 때는 많게 보인 번역본을 찾아 정리하고 보니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200자 원고지 1매당 7000원씩 계산하니 400만원이 훌쩍 넘었다. 이를 씨족문화연구소장인 자형족장께서 일단 대납했다.
출판문제가 최종현안이었다. 3가지 안을 상정했다. 하나는 자비로 발행하는 것이다. 이는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은 방법이다. 다음은 씨족문화연구소의 부담으로 발간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도문회나 대종회가 발행하는 것이다. 세고선집의 착상은 요람발행 때부터이나 觴山이 도문회장을 맡은 후 하산지(霞山誌)를 만들어 보자고 제의해서 본격적으로 착수한 과제였기에 그렇다. 그러나 결국「씨족문화연구」명의로 발행하되 소요비용은 도문회․대종회․장천계가 분담해서 이루어졌다.
○… 세고선집을 정리하고 발간하면서 문중의 과제를 많이 생각했다. 우리 장흥 위씨는 숫적으로 벌족한 씨족이 못된다. 그럼에도 객관적으로는 한미한 문중으로는 보이지 않아 보인다. 이렇게 보이기까지는 조상들의 보이지 않은 음덕이 분명 있을 것이다. 조상들의 유고 가운데「戒子書」나「遺書」가 유독 많은 것은 자손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른들의 정신이 강하게 묻어 있다. 조상들께서는 당신들이 이루지 못한 소망을 후손을 통해 성취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런 조상들의 소망에 부응해서 후손들은 나름대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관존민비 관념이 강한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국회의원이나 장관 한명 배출하지 못한 것이 장흥 위씨의 한계이다. 물론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꼭 전부는 아니다. 관존민비 사상은 조선시대의 고루한 사상이기에 21세기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이를 반영해서 우리 후손들은 여러 분야에서 고루 분포되어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멀지 않아 주목받을 인재가 배출될 것이다.
그런데 차제에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 있다. 조상들의 유물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가령 세고선집에 게재된 조상들의 유고 한 점만 보자. 대부분 후대에 문집을 출판해서 보존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육필(肉筆)은 한점도 없다. 고려시대의 명신 충렬공이나 불교계의 거성 원감국사는 고사하고 조선시대 조상들의 유필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삼족당 휘 세보 같은 경우는 시․서․화 3절이라 하나 글씨나 그림 한 점 없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런 사실을 보고 조상들께서 남긴 유물의 자료수집과 보존방법을 생각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종인들도 세상을 떠나면 그들의 글이나 글씨 등 유물은 구하기 어려워진다. 그게 바로 자료요 유물인 것이다. 국가기관에서는 각종 자료를 수집해서 체계적으로 보존관리하고, 명망 있는 문중들도 선조들의 유물을 다음 세대에게 고스란히 물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좀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름대로 방안 하나를 제시코자 한다. 우리 조상의 유고 가운데 문집이 있으면 그걸 2부 정도 복사해서 한부는 방촌 박물관 조상들의 유물관에 함께 보존한다. 다른 한부는 위씨의 성지인 하산사(霞山祠) 강당 백산재(栢山齋)에 보관함을 만들어 보존하는 것이다. 이는 만일 화재나 도난 등으로 유실되는 사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현재 활동하고 있는 어른들도 방명록이나 붓글씨는 휘호를 받아 보존하면 한다. 여러 종인들이 생각을 해보자는 것이다.
○…다음은「존재학회(存齋學會)」의 창립을 제의하고자 한다. 존재공은 장흥 위씨에겐 참으로 위대한 조상이다. 비록 벼슬은 옥과현감 이외 변변하게 하신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후손과 후학들에게 보석과 같은 90여권의 저술을 남기셨다. 그의 작품인 가사문학을 비롯해 사회개선방안과 경학사상은 우리 후손보다도 국내 여러 대학의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이미 존재공의 가사문학작품을 연구해서 여러 명의 학자들이 박사학위와 석사학위를 받았다.
공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을 비교해 보자. 다산은 공보다 35년 후에 출생했다. 그는 존재공이 돌아가신지 3년 후인 1801년 강진에 유배와서 18년간 약 5백여권의 저술을 남겼다. 90권은 500권에 비해 5분의 1도 안 된다. 다산은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으며 조정과 암행어사 그리고 외직을 두루 거친 당대의 인물이다. 이에 반해 존재공은 해일피해를 살피러 온 서영보 위유사의 천거로 왕을 만나 상소를 올리고 현감을 1년 남짓 지낸 것이 공직경험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다. 가장 두드러진 공통점은 당시 국가사회의 모순을 개혁하고자 하는 실학자란 점이다. 존재공은 정현신보(政絃新譜)․만언봉사(萬言封事)․연시조와 가사문학작품을 통해 사회의 실상과 개혁의 방법을 표출했다. 다산은 목민관의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비롯해 일표이서(一表二書)․흠흠신서(欽欽新書)등의 저술을 통해 밝히고 있다. 이들 사상은 방법상 다른 점이 없지 않지만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데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다산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크게 알러져 「다산학회」가 결성되고 그 학회를 통해「茶山學」이 정립된 상태이다. 그 후손들은 오래 전에「다산 학술재단」을 발족시켜 다산학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그럼 존재공은 어떤가. 일부 학자들이 뒤늦게「存齋學」에 탐닉해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고 있다. 다만 문중차원에서는 1875년 다암공(茶嵒公)이 문집을 만들고, 1986년 덕운(德雲)께서 장흥읍 충렬공원에 동상을 세운 이후 거의 아무런 사업도 않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문중에 선양사업을 뒷받침을 할 수 있는 재력이 없다는 점이다. 비근한 예로 옥과향교 앞뜰에는 역대 현감을 지낸 이를 추모하는 30여개의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그 많은 비 가운데 옥과주민들로부터 "선정을 베푼 현감이다"고 칭송을 받았다는 존재공의 비는 없었다. 후손들이 가난해서 비롯된 소치일 수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관심의 부족이다. 무슨 사업이고 "꼭 이루겠다" 는 각오가 있으면 그 일을 실현시킬 방법은 있게 마련이다.
이제라도 우리 후손들은 존재공의 선양사업에 눈을 떠야한다. 공이 남긴 유고를 보면 정말 대단한 학덕을 지닌 분임을 알 수 있다. 아직까지 유고의 번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선양사업의 현주소를 입증하고 있다. 우리가 미약하지만 힘을 합치면 큰일도 해낼 수 있다. 이를 위해 일단「존재학회」를 발족시키자. 여기에는 후손과 존재학에 관심을 가진 타성까지도 입회시켜 땅속에 묻혀있는 공의 학문을 연구하고, 선양사업을 추진할 모체로 삼았으면 한다.
(144-144일차, 마지막 회차, 11월 23일 목요일에 계속)
첫댓글 (144-143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43일차와 마지막 144일차(2일차에 걸쳐)에는 '저자(원산 위정철)의 편집후기' 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저자(원산 위정철)의 편집후기 2-1]/ 무곡
世 稿 選 集 序(세고선집서, 저자 위정철)
우리 조상들 가운데는 당대의 문장가들이 계셨다. 시조공은 중국에서 동래하실 때 시를 남겼다. 1030년대에 태어나셨을 것으로 짐작되는 충렬공(忠烈公)은 고려(高麗) 조정(朝廷)을 대표한 문장가였다."천년 세고선집"의 1천년은 공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산한 것이다. 원감국사는 불교에 귀의하여 주옥같은 한시와 가송을 남겼다. 그리고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기를 드신 판사공은 충절을 표현하는 시구가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숱한 시인묵객이 나왔다. 습독공(習讀公)은 출사를 포기하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등 같은 처지의 선비들과 어울려 수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장흥 군내 의병과 모곡을 독려한 괴봉공(魁峯公)은 친구들과 어울려 덧없는 인생을 노래했다. 그리고 관산에서 의주까지 90일을 걸어서 왕을 알현한 청계공(聽溪公)은 명나라 여(呂)장수와의 수창하고, 피난길에 부인의 타계를 토로하는 비통한 글을 남겼다.
17세기 18세기에는 본격적인 문학작품이 선조들로부터 나왔다. 삼족당(三足堂)은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평가 받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관대작과 종유했던 간암공(艮庵公)은 농민들이 겪고~
있는 가뭄과 전염병의 참상을 가사문학으로 고발하는 임계탄(壬癸歎)을 지었다. 그리고 장흥 위씨로는 처음으로 영조대왕에게 남도의 극심한 가뭄의 참상을 전하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라고 요구하는 상소(上疏)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수우옹(守愚翁)은 기봉(岐峯) 백광홍의 관서별곡(關西別曲)과 송강(松江)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이어 남해의 풍경을 노래하는 금당별곡(金塘別曲)을 지었다. 호남3대 실학자의 한 분으로 평가받은 존재공(存齋公)은 나라의 부패상과 개혁방안을 담은 정현신보(政絃新譜)는 물론 농가구장(農歌九章)․자회가(自悔歌)․권학가 등과 관료사회를 고발하는 귀중한 문학작품을 남겨 후손들로 하여금 긍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의 작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장흥 위씨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는 대동보에도 선조들의 작품이 제대로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중 차원에서 수집하고 정리하지 않아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지금도 선조들의 작품은 우리 후손이 아닌 다른 성씨의 학자들에 의해 계속 발굴되고 있다. 부끄럽지만 현실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작품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천년세고선집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내고,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작품이라도 집대성하자는 의미에서 기도(企圖)된 작업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앞 시대를 살면서 당신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노래하는 숨결을 느끼면서 합께 호흡하는 시간을 가진 것은 결코 헛됨은 아닐 것이다. 벌써 원감국사 형제분의 작품과 남북문중의 합보를 위한 서신교환 등은 적지 않은 소득이다. 조상을 바르게 아는 후손은 떳떳하다.
선조작품의 수록기준을 밝힌다. 첫째, 국서(國書)․표문(表文)․상소문 우선원칙을 적용했다. 봉건왕국 때 상전의 나라에 보낸 서신과 왕에게 올린 상소문은 저자의 지식 등이 응축돼 있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쓴 의지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사(歌辭)작품을 망라했다. 한시는 많아도 가사작품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셋째, 유서와 계자서(戒子書)를 게재했다. 조상의 후손에 대한 바람이 절절히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 문중을 위한 서찰(書札)을 다뤘다. 즉 남북종인 간의 합보를 위한 서신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전송(餞送)의 글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사우(祠宇)의 상량문 등이 포함되나 이미 각종 책자에 반영되어 있어 생략했다. 다섯째, 기행문을
반영했다. 이는 시대를 반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일반 시문을 게재했다. 사실 장흥 위씨 1천년 간의 글을 담고자 해도 대상자가 적으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천년세고선집을 만들면서 어려움은 유고수집이다. 홈페이지와 대종회 차원에서 각 지역 종친회에 알리고 개별적으로 부탁했어도 응답이 없었다. 다음으로는 번역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글도 읽을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 번역을 해야 하는데 비용이 버거웠다. 그래서 책이 나올 수 있게 여러 가지로 애써주신 위찬호 대종회장, 위성렬 도문회장, 위자형소장, 위정우간사, 덕운 형님 등 제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2007년 12월 26일
著者 謹識
천년세고를 편찬한 저자의 고견을 기록으로 남기셨네요. 씨족지성사의 탄생이 쉽지 않고 녹록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는 방증이겠죠. 이번 천년세고 밴드 게재도 이제 달랑 한 번 남았네요.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밴드게재 초기에 불어닥친 여러 외풍과 씨족원들의 무관심 등등으로 가슴 한 쪽은 씁쓸합니다. 중간하차 없이 끝까지 완주했으니 다행입니다. 씨족문화 창달을 위해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종친들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씨족지성사의 표준을 만드신 저자를 비롯해 144회를 노심초사 뚝심을 발휘하신 게재자 및 혈족이신 독자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벽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