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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 씨족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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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본)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원산 위정철 저자(원산 위정철)의 편집후기 2-1
야운처사 위이환 추천 0 조회 38 23.11.21 08:1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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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3.11.21 08:14

    첫댓글 (144-143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43일차와 마지막 144일차(2일차에 걸쳐)에는 '저자(원산 위정철)의 편집후기' 가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저자(원산 위정철)의 편집후기 2-1]/ 무곡

  • 작성자 23.11.21 08:15

    世 稿 選 集 序(세고선집서, 저자 위정철)

    우리 조상들 가운데는 당대의 문장가들이 계셨다. 시조공은 중국에서 동래하실 때 시를 남겼다. 1030년대에 태어나셨을 것으로 짐작되는 충렬공(忠烈公)은 고려(高麗) 조정(朝廷)을 대표한 문장가였다."천년 세고선집"의 1천년은 공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산한 것이다. 원감국사는 불교에 귀의하여 주옥같은 한시와 가송을 남겼다. 그리고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기를 드신 판사공은 충절을 표현하는 시구가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는 숱한 시인묵객이 나왔다. 습독공(習讀公)은 출사를 포기하고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등 같은 처지의 선비들과 어울려 수창하였다. 임진왜란 때 장흥 군내 의병과 모곡을 독려한 괴봉공(魁峯公)은 친구들과 어울려 덧없는 인생을 노래했다. 그리고 관산에서 의주까지 90일을 걸어서 왕을 알현한 청계공(聽溪公)은 명나라 여(呂)장수와의 수창하고, 피난길에 부인의 타계를 토로하는 비통한 글을 남겼다.
    17세기 18세기에는 본격적인 문학작품이 선조들로부터 나왔다. 삼족당(三足堂)은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평가 받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관대작과 종유했던 간암공(艮庵公)은 농민들이 겪고~

  • 작성자 23.11.21 08:20

    있는 가뭄과 전염병의 참상을 가사문학으로 고발하는 임계탄(壬癸歎)을 지었다. 그리고 장흥 위씨로는 처음으로 영조대왕에게 남도의 극심한 가뭄의 참상을 전하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라고 요구하는 상소(上疏)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수우옹(守愚翁)은 기봉(岐峯) 백광홍의 관서별곡(關西別曲)과 송강(松江)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에 이어 남해의 풍경을 노래하는 금당별곡(金塘別曲)을 지었다. 호남3대 실학자의 한 분으로 평가받은 존재공(存齋公)은 나라의 부패상과 개혁방안을 담은 정현신보(政絃新譜)는 물론 농가구장(農歌九章)․자회가(自悔歌)․권학가 등과 관료사회를 고발하는 귀중한 문학작품을 남겨 후손들로 하여금 긍지를 갖게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후손들은 선조들의 작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장흥 위씨의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는 대동보에도 선조들의 작품이 제대로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중 차원에서 수집하고 정리하지 않아서 비롯된 현상일 것이다. 지금도 선조들의 작품은 우리 후손이 아닌 다른 성씨의 학자들에 의해 계속 발굴되고 있다. 부끄럽지만 현실이다. 언제 어디서 무슨 작품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 작성자 23.11.21 08:20

    천년세고선집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찾아내고,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작품이라도 집대성하자는 의미에서 기도(企圖)된 작업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앞 시대를 살면서 당신들의 마음을 표현하고, 노래하는 숨결을 느끼면서 합께 호흡하는 시간을 가진 것은 결코 헛됨은 아닐 것이다. 벌써 원감국사 형제분의 작품과 남북문중의 합보를 위한 서신교환 등은 적지 않은 소득이다. 조상을 바르게 아는 후손은 떳떳하다.
    선조작품의 수록기준을 밝힌다. 첫째, 국서(國書)․표문(表文)․상소문 우선원칙을 적용했다. 봉건왕국 때 상전의 나라에 보낸 서신과 왕에게 올린 상소문은 저자의 지식 등이 응축돼 있다. 그리고 죽음을 무릅쓴 의지의 결단이기 때문이다. 둘째, 가사(歌辭)작품을 망라했다. 한시는 많아도 가사작품은 희귀하기 때문이다. 셋째, 유서와 계자서(戒子書)를 게재했다. 조상의 후손에 대한 바람이 절절히 묻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넷째, 문중을 위한 서찰(書札)을 다뤘다. 즉 남북종인 간의 합보를 위한 서신과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전송(餞送)의 글을 말한다. 물론 여기에는 사우(祠宇)의 상량문 등이 포함되나 이미 각종 책자에 반영되어 있어 생략했다. 다섯째, 기행문을

  • 작성자 23.11.21 08:19

    반영했다. 이는 시대를 반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일반 시문을 게재했다. 사실 장흥 위씨 1천년 간의 글을 담고자 해도 대상자가 적으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천년세고선집을 만들면서 어려움은 유고수집이다. 홈페이지와 대종회 차원에서 각 지역 종친회에 알리고 개별적으로 부탁했어도 응답이 없었다. 다음으로는 번역 문제였다. 아무리 좋은 글도 읽을 수 없으면 소용이 없다. 번역을 해야 하는데 비용이 버거웠다. 그래서 책이 나올 수 있게 여러 가지로 애써주신 위찬호 대종회장, 위성렬 도문회장, 위자형소장, 위정우간사, 덕운 형님 등 제위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2007년 12월 26일
    著者 謹識

  • 작성자 23.11.23 07:44

    천년세고를 편찬한 저자의 고견을 기록으로 남기셨네요. 씨족지성사의 탄생이 쉽지 않고 녹록지 않은 과정을 거쳤다는 방증이겠죠. 이번 천년세고 밴드 게재도 이제 달랑 한 번 남았네요.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밴드게재 초기에 불어닥친 여러 외풍과 씨족원들의 무관심 등등으로 가슴 한 쪽은 씁쓸합니다. 중간하차 없이 끝까지 완주했으니 다행입니다. 씨족문화 창달을 위해 격려를 아끼지 않으신 종친들을 꼭 기억하겠습니다. 씨족지성사의 표준을 만드신 저자를 비롯해 144회를 노심초사 뚝심을 발휘하신 게재자 및 혈족이신 독자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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