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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선우회를 위한 법안스님 법문
2019. 2. 21 심행 정리
우선 날씨가 이렇게 차가운데도 불구하고 무술년 12월 봉은사 선우회 불자님들 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들어보니까 봉사를 많이 하신다고 들었는데, 다른 종교에 비해서 불교가 그런 부분에 조금 아쉬운 점이 많잖아요
그런데 봉사를 한다는 것은 이웃의 어려운 부분을 함께 나누는 거고 자기 자신의 어떤 복전, 공덕의, 선근의 씨앗을 뿌리는 겁니다. 길게 말씀드리면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봉은사 굉장히 바라밀행에 있어서 전형적인 하나의 모습 이라고 생각합니다. 봉사하는 모습을, 늘 해왔듯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여러분들이 회향할 때까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봉사하는 마음이, 여러분들 자신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고, 자신의 불성을 깨우치게 하는 심대한 그런 의미가 있고, 그것이 여러분들과 마주하는 인드라망의 존재들에게 화엄의, 장엄된, 아주 아름다운 그런 장엄의 모습으로 비추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이 인제 금년 12월이잖아요? 12월이라서 제가 무슨 얘기를 해 드릴까 하고 생각을 했는데, 저는 사실은 산중에서 오롯하게 수행하는 선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뛰어난 그런 교학승도 아니고, 나는 이런 평범한 절에서 소임 맡고 있는 그런 스님입니다.
간혹 인제 종단의 일을 조금 했고, 간혹 밖에 활동도 조금 했던 그런 경험이 있는데, 제가 인제 수행 생활을 가장 불자들한테 긴요하게 함께 나누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들을 좀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까 제가 잠깐 선근에 대한, 복전과 공덕을 쌓는 선근에 대한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 같아요. 선근은 사실 부처님의 화엄경에 대한 고유용어입니다. 사실은. 착할 ‘선’자 뿌리 ‘근’자인데, 착한 행동이라는 것은 나 밖에 대상한테 이로운 일을, 이로운 일이 이해관계의 이로운 일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모든 사람들 한테 보편성을 가지고 합리적인 그런, ‘선’의, 선으로 작동하는 그런 것이 사실은 선근입니다. 뿌리 ‘근’자를 쓰지요.
선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면, 마치 나무가 자라서 줄기도 굵어 지고 입도 좀 무성하고 늘 싱싱하고. 이 북한산에 오게 되면 소나무가 좀 싱싱해요. 푸른 소나무가, 다른 산에 비해서. 북한산 자체가 청년산이라 그럽니다, 여기가.
산도 나이가 있다고 그러잔아요? 여러분들 저기 청계산 의왕시 청계산에 가 보면 좀 편안해요. 그런 산을 육산이라 그래요. 바로 고기 ‘육(肉)자 써 가지고, 드러낸다. 노산이에요, 노산. 나이가 많이 먹은 산입니다. 편안하기는 한데, 힘이 없어. 편안 하기는 한데.
또 여기 관악산 같은 경우는 좀 가파르면서 조그만 바위들이 많아요. 유년산이라 그래요. 아주 나이가 어린 산. 이런 산(북한산)은 바위가 굵고 기운이 좀 강하고 청년산이라고 그럽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금선사 와 주셨는데, 금선사는 농산스님이 큰 원을 세워서 조선 후기에 자신의 몸을 던져서, 부처님 법을 다시 세우기 위해 구법망구하는 그런 어떤 수행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조선조의 왕이신 순조로 환생 하셨던 그런 기운이 아주 맑고 기운이 아주 깊은 그런 의미를 갖는 그런 도량 입니다.
12월달은, 우리가 늘 12월달 되면, 그럼 사람들이, 마지막 한달 달력이 남지않아요? 그러면 아, 금년도 벌써 12월인가? 그런 생각이 들지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게 더 빠르지 않아요? 속도가 더 빨라요. 마치 정말 화살촉까지 빠르다 말이에요.
우리는 이제, 우리가 같은 공간에 살면서 가장 고독하고, 외롭고, 공포스럽고, 불안한 존재가 돌아가신 망자요 망자. 죽음을 막 겪고 있는 사람. 그 망자는 대다수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질 않아요. 그리고 육신의 몸을 벗어 났다고 생각을 하지 않아요.
이 두가지 현상이 있거든요? 그 망자들한테 법문하는 대목 중 하나가 ‘석화광음 몽일장(石火光陰夢一場)’이라는 말이 있어요. 석화는 돌꽃. 돌꽃이 반짝하는 돌꽃이, 어두움을 밝혀주는 그 것이 마치 하룻밤 꿈과 같다. 우리 인생이 ‘석화 광음몽일장’이라 이거요.
마치 그 여러분들 매번 꿈을 꾸지 않아요? 꿈속에서는 자유자재로 할 수 없지요? 사실은. 그게 어떻게 되요? 꿈은 까르마의 작품이에요. 업에 의해서 꿈은 움직인다 말이에요. 이게 자기 마음대로 살지가 못해요. 보통 중생의 삶이라는 것은 업생으로 산다 그래요. 까르마, 뭐 애고 라고도 하고, 까르마라고도 하고, 업이라고도 해요, 보통. 업의 어떤 기운으로 따라서 산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걸 뛰어 넘어서 수행을 많이 한 중생은 원생으로 살아요. 원력으로 산단 말이에요. 늘- 나보다는 나 밖에 있는 대상을 위해서 생각한다. 그 나중에 제가 인제 마지막 귀결점이 동체라는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에 이제 우리가 12월을 맞이 해서는 한해가 이제 휘까닥 가잔아요? 일월달 해맞이를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2월 달이라. 며칠 있으면 해맞이에요.
오늘 잠깐 우리 스텝들과 회의를 했는데, 우리가 해맞이를,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해맞이를 하는데, 탬플스테이가 벌써 사람이 풀로 찼다고 이렇게 보고를 하는데, 금방 한거요, 해맞이를.
저희들이 비봉으로 올라 가거든요? 엊그제 같아요. 그런데 금방 열두달이 간 거라. 삼백육십오일이 이렇게 빠릅니다
한 생을 놓고 봤을 때, 우리가 요새는 100세까지는 살아요. 백세 인생을 봤을 때요? 백년인 거요, 사실은. 그래서 이 빠르게 가는 시간의 개념,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존재해야 될 것인가? 이게 사실은 인제 종교가 해야 할 역할 이기도 하고. 불교에서 어떤 주어진 진리에 대한, 뭡니까? 부처님의 음성이 우리한테 이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것을 늘 물음을 던지지 않아요?
제가 며칠 전에 보니까, 유반 하라리 라는 사람을 잘 아실 거예요 사피엔스 저자지요? 하라리 책이 그 사피엔스에 대한 책이 많이 나옵니다. 그이가 이스라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명상을 많이 하고 불교에 대한 굉장히 깊은 식견이 있습니다.
2050년 정도 되면 그 알고리즘이 더 이렇게 확대되어가지고 결국 우리가 로보트, 기계에 의해서 결국은 움직이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이 상태로 가게 되면. 지금의 변화의 속도는 일년이 과거의 천년 정도의 변화처럼 빨라요 아주 빠른 속도로 변하거든요?
여기서 2050년이면 앞으로 30년쯤 남았다고, 그때까지는 여러분들이 다 살아계실 것 같은데,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거에요. 응.
이미 그 로보트로 만들어진 인간이 우리를 거꾸로 지배할 수 있다는 거예요. 지금도 우리가 어떻습니까? 핸드폰으로 우리가 지배를 당하지 않아요? 정보에 지배 당하지요? 돈에 지배 당하지요? 그래서 하라리가 가장 포인트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하면 인류가 그렇게 가게 되면 재앙이다. 그랬을 때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냐?
요지는 늘 이성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 마음이 열린 상태다. 깨어 있는 상태로 가야만이 기계에 종속되지 않는다. 이게 마지막 귀결입니다. 부처님 말씀하신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사실은.
우리가 이제 12월을 맞이 해서 한해를 이렇게 돌이켜보는 것은, 되돌아보는 것을 ‘성찰(省察)’이라 그러지요? ‘성찰’. ‘성찰’할 때 ‘성’자가 살필 ‘성’ 자, 살필 ‘성’ 자예요. ‘찰’자도 살필 ‘찰’ 잡니다. 살필 ‘성’자는 작을 ‘소’자 밑에 눈 ‘목’ 이에요. 눈으로 자세하게 조그만 부분까지 세세하게 본다는 것이 ‘성’자에요. ‘성’ 자. 성찰은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보는거에요.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본다는 것은 어떤 겁니까?
우리가 신구의(身口意)로 업을 짓지 않아요? 우리가 행위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몸으로 하는 것은 겉으로 다 보여요. 입으로 하는 것도 내가 깨달을 수 있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은 잘 안 보이는 것이요. 마음이 생각을 일으켜서 생각을 어떻게 썼느냐? 그 부분까지도 한번 자세히 살펴 봐라. 그런 취지 같습니다. 그 성찰이.
그렇게 한다면, 한해, 올 한해 무술년 한해만 그렇게 성찰할 거냐? 조금 더 한발 더 나아 가면, 삼년, 오년, 십년, 처음 태어 날 때부터 지금까지 한번 우리가 성찰해보자. 그걸 표현하면 ‘스캔’이라 그러거든요. ‘스캔’ 뜨게 되면 싹 나오지 않습니까? 자기가? 피 한 방울 가지고도 전체 DNA를 검사를 해가지고 뭐 암세포가, 그 어느 부위에 암세포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정도까지는 의학이 발달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듯이. 우리의 어떤 그 마음, 마음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까지도 우리가 자세히 한번 들여다 봅니다. 더 나아 가서는 과거생까지는 더 좋고. 최소한 12월을 맞이 해서, 단순하게 한해, 무술년에는 그냥 지나 갈 것이 아니라, 지난 세월을 한번 돌아다 보자. 돌아다 보는 것이 결국 뭐겠어요? 내가 제대로 존재 하고 있는지? 나의 과거의 시간이 허투로 보내지 않았는지? 또 그러면서 내가 까르마를 어떻게 지었는지? 이걸 한번 살펴보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그런 나하고 이해 관계랄지 어떤 일 속에서, 생활 속에서 우연치않게 만남 속에서 형성된 인연들이 있어요. 이 인연들이 굉장히평탄한 인연도 있고 가파른 인연도 있습니다. 가파르면 격한 인연도 있어요. 가파르고 격한 사람들 떠 올리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뭐겠어요? 수행자인데, 수행자는 그를 위해서, 내가 왜 그렇게 했을까? 라고 반문하는 것이지요. 왜 내가 그렇게 밖에 못했을까 부모님 마찬가지고 형제도 마찬가지고, 친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반문이 부끄러움을 일으키는 거라.
수행이라는 것은 참회로부터 시작하는 거에요. 자기를 들여다 보는, 자기 까르마의, 업의 무게가 어느 정도 무거운 지? 어떻게 어두운지? 어떻게 칙칙한지? 이것을 보는 거에요. 그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굉장한 그 뭡니까? 영적 권리입니다. 영적, 어찌 보면 능력이에요.
되돌아 보면서, 자기의 어떤 시간들 속에서, 자기하고 마주하는 일들이 굉장히 격하거나 거친, 거칠었을 때, 그랬을 때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냥 지나갈 것인가? 까르마는 결코 없어지지가 않습니다, 사실은. 업은 결코 없어 지지가 않아요. 우리가 업장 소멸이라고 하지만, 업장 소멸이라는 의미가 갖는 의미가 뭐냐면, 자기가 일정한 그런 까르마에 대한 무게라 든지, 어둠을 정확히 밝혀 안다면, 다시는 되풀이 하지 않겠다고 하는 거에요.
그리고 그런 까르마가, 일정의 인과로 인해서 왔다 하더라도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겁니다. 이게 업장 소멸 입니다. 그냥 없어지지 않아요. 마치 그냥 죄를 많이 지었다가 교회 하루 가면, 교회 가면 다 사해 준다. 그것은 방편으로, 교회 나오도록 하는 방편일 뿐이지 결코 그게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지장 기도를 하던 관음기도를 하던 업장 소멸 기도를 한다 그러 잖아요? 업장소멸하는 기도는 자기 마음이 그만큼 정화가 되어야 되요. 정화 할 수 있는 능력은 굉장한 어떤 역량입니다, 사실은.
개인적인 정화 뿐만 아니라 집단도 정화를 해야 됩니다. 우리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전 불교도 마찬가지에요. 이 정화를 하지 못하면 종교성을 상실하는 거예요. 종교는 정화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늘 쇄신 되고 늘 혁신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일일신 우일신 하는 거예요.
우리 마음이, 그 정화된 작동에 의해 가지고 마음이 점점 맑아져야 됩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결국은 우리가 마지막 눈빛이 땅에 떨어 질 때, 이것을 ‘왕양 각시시’라 그러는데, 마음이 땅에 떨어질 때 어떻게 돼요? 가벼운 사람은 위로 올라가는 거에요. 무거운 사람은 쳐지는 거에요. 그게 이치 아니에요?
어떤 사람은 그 뭡니까? 그 쪽푸라는 스님이, 그호주에 있는 유명한 스님이신데, 이 사람은 돈을 많이 가졌는데, 갈 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이걸 가지고 가고 싶은 거라. 저승으로 가지고 가고 싶은 거라. 이걸 어디다 놓고 갈까? 이렇게 생각하다가. 여러분은 어디다 놓고 싶어요? 이걸 선반에다 올려 놓았어요. 위로 올라 가니까 들고 올라 가려고, 선반에. 그런데 가고 나니까 그게 있는 거에요. 그래서 뒷 사람들이, ‘아, 이분은 올라 가지 못하고 밑으로 떨어 졌나 보다.’
이 가벼운, 우리가 가볍다는 것은 불교에서 방하착이라 합니다.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 가벼워야 만이 어떤 인연으로든지 쉽게 적응하는 거에요. 무거우면 가라 앉아 버려요. 마음을 비우고 마음을 열어야지, 마음을 열고 비우고 가볍게 해야 만이 정화가 되는 겁니다.
그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 마음을 여는 것,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정화의 기준이 되는데, 이 기본적인 전제는 뭡니까? 참괴심이에요, 참괴심. 부끄러울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미안할 줄 알아야 돼요. 참괴심으로부터 출발하는 거에요 .
참괴심으로 한다고 하면, 어떤 참회를 해야 해요? 통열해야 합니다. 아프게 참회해야 합니다, 아프게. 그냥 슥- 지나 가듯이, 주마간산 보듯이 참회해서는 안되고, 정말 아프게 참회를 해야 돼요. 통열하게 참회를 해야 됩니다. 우리 내면뿐만 아니라, 우리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 할지, 모든 구성원들이, 공동체 자체가 통열해야 돼요. 그래야만이 정화가 돼요
여러분 티벳, ‘사자의 서’ 보신 분 있을 거예요. 거기에 보면 그런 내용이 쭉- 나오는데, 돌아 가신 직후에 청명한 빛을 보지 않아요? 평소에 수행을 많이 하고 맑게 사신 분들은 청명한 빛이 오래갑니다. 우리가. 우리가 보통 삼일밤, 사일까지도 간다고 그러잖아요? 이 청명한 빛이? 그런데 업이 무거운 사람들은 짧게 휙 지나가버리는 거에요. 청명한 빛이 있어도, 청명한 것이 안 보이는 거에요. 다른 빛이 들어 와 버려 가지고 그 청명한 빛이, 그 빛에 가려버리는 거에요, 청명한 빛이 결국은.
그 빛은 법신불, 비로자나불인 거예요. 법신의 세계로 가는 빛이거든요? 그 청명한 빛이? 우리가 보통 인로왕보살이라 그러지요? 그 청명한 빛을 오랫동안 가지고, 청명한 빛과 함께, 청명한 빛이 온 마음으로 함께 충만 되게 가는 것, 그럼 결국은, 지금의 어떤 세계 보다도 훨씬 나아진 세계로 가는 거에요.
이 중요한 것은, 이 우리가 윤회를 한다 하더라도 사람이 동물로 떨어진다는 경우는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사람이 동물로 떨어진다고 한다면, 사람이 다음 환생을 동물적인 속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거에요. 포악함, 아주 간교하고 사악함, 이런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거예요. 그 경계선에 갔을 때 딱 가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용맹정진을 하거나, 아까 우리 처음 법회하기 전에, ‘부처님과 같이’ 라는 노래 했잔아? 그 노래를 내가 참 좋아하는데. 부처님처럼 사는 거에요.
우리는 종교성이 있는 어떤 수행 집단으로서, 다른 사람이 한 발 갈걸, 우리는 열 발 가는 거예요. 용맹정진 하는 거예요. 그러면 경계가 훨씬 더 많이 열리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한 생에 건너 뛰어야 하는 것을. 우리는 한 번에 열 생을 건너 뛰는 겁니다. 사실은. 이게 수행입니다. 사실은.
또 수행의 힘이 있으면 열생만 뛰어 넘습니까? 백생, 천생까지도 뛸 수 있지.이 금생에 확철대오를 하고, 깨달음의 세계, 경계에 들어간다고 하면, 우리가 이 경계에 대한 어떤 그 시간적인 개념을 확 초월하지 않아요? 백생, 일겁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용맹 정진하는 겁니다. 그래서 12월을 맞이 해서 참괴심을 갖는, 부끄러울 줄 아는, 그러면서 그 참괴심을 통해서 마음에 정화를 하고,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그런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에, 부처님 초기 경전, 근본 불교에 보면, 참회하는 방법을, 여러분 잘 알고 있듯이 포살(布薩)과 자자(自刺)로 합니다. 포살과 자자로. 포살은 대중 앞에서 자기들 허물을 고하는 거예요,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자기 허물을 숨김없이 고하는 거에요.
가끔 이제 카톨릭 신자들이 이렇게 들어 보면, 템플스테이 할 때 보면, 고해성사를 할 때 고해성사를 할 게 없다 해요. 그래서 막 지어서 한다는 거예요. 고해성사 할 게 없을 수가 없잖아요? 왜 없겠습니까?
깊이 들어다 보지 않기 때문에, 성찰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너무나 많은 거에요. 우리가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보면, 자기가 살아온 과정 속에서 잘못한 부분이 너무 많은 거에요. 거꾸로 생각하면 너무 은혜로운 사람이 많아요. 나한테 나를 이렇게까지 만들어 주기까지의 인연들이 너무 소중하고 귀한 거예요.
그 인연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할 수가 없어. 거기에 우리가 거꾸로 상대방 한테 너무 위해적으로 했던 이게 너무 많은 거에요. 사실은. 그런데 그게 떠 오르지 않는다? 그럼 그 사람은 마음을 떠 있는 거예요. 가려 있는 거에요. 장막에. 이 어떤 큰 막이 있어서, 막이 그것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딱 막아놓은 거예요. 장막을 깨트려야 되는데, 그런 사람은.
헤르만 헤세가 그 유명한 사람이지 않아요? 알이 있습니다. ‘알을 깰 때는 아픔이 있다’고. 그 장막의 아픔을 깨야 되는 거에요. 그래야 들여다보는 거에요.그 장막의 아픔을 깨고 대중 앞에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래야만 자기가 훨씬 깊게 정화를 하는 거에요. 구체적으로 정화를 하는 거예요. 이게 자자의 힘이지요. 그런데 우리늘 늘 관성적으로 한다 말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진짜 한다면, 깊게 들여다보면서 자기 허물을 드러내는 거에요.
자기 허물은 다른 사람보다도 자기가 가장 잘 알아요. 허물을 바닥까지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수행의 힘입니다. 허물을 몰라. 까르마의 깊이나 무게를 몰라, 사실은. 이걸 아는 것은, 자기의 마음을 열고 내려 놓아야 되는 거예요. 가볍게 내려놓아야 돼요. 그래야 만이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게 진정한 포살인 거예요.
대중들은 따뜻하게 받아 주는 것. 자기의 정말 아픈 허물, 내면에서 바닥에서 있는 허물까지 고스란히 드러 내고, 대중들이 따뜻하게그것을 받아주고, 따뜻하게 대해 주는, 격려해 주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 순간 그 사람들은 다 충만된 삶을사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이 정화 된 것 만큼 나도 정화 되는 거예요
제가 이제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신문기자가 다람살라에서 오래 수행을 하다가, 다라이 라마 스님이 어느 날 출국을 하게 되면 몇 개월 동안 다니세요.그러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갔다 오시면 또 나와서 배웅을 해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배웅을 하는데 그 장면을 저한테 이야기를 하더라고. ‘아, 다라이라마 존자가 저럴때는 어떤 행동을 할까?’ 많은 사람들한테, 그 많은 사람들한테 다 눈길을 줄 수는 없잖아요? 수천 명이 모였는데?
그 마지막 자기가 다녀 오겠다고 인사를 하는데, 그 다라이 라마 성하가 이렇게 한발 한발 와서, 한 사람에게 가서 어떤 사람을 딱 포옹을 해 주셨어요. 그 포옹해준 사람이 자기가 보니까, 시골에서 올라온 아낙인데, 남루 하지만 깨끗하게 차림을 한 아낙이라. 다리를 이렇게 장애를 가지고 있고, 그런 그 젊은, 중년 여성을 가서 포옹을 해줬다는 거에요, 다라이 라마가.
그 수천명이 그 장면을 보고, 자기를 따뜻하게 안는, 무언가 자기 내면에서 충만 된 느낌, 고마움, 감사함, 은혜로움을 느끼는, 충만된 느낌을 느꼈다는 거에요. 찡했다는 거에요. 그 기다리는 마음, 바로 그거에요. 우리가 포살을 할 때는 바로 그렇게 하는 거에요.
내 자신이 고백을 했을 때, 대중이 따뜻하게 안아 주는 것, 받아 주는 것,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모두가 그 사람의 아픔, 고뇌를 드러 내어 가지고 정화 시키는 만큼 내 자신이 정화가 되는 거예요. 여러 사람이 정화가 되면, 나도 그만큼 정화가 되지 않습니까, 지금? 그것을 포살이라고 합니다. 그래 거꾸로 인제, 내 자신이 그걸 바닥까지 느낄 수가 없으면, 못 느낄 수도 있어요. 자기가 아무 잘못을 못 느껴.
제 경험치인데요, 제가 어떤 지인분하고 일본을 갔었어요, 세 사람이. 스님 이니까, 일반 제가자들이 저를 이렇게 모시고 갔는데, 3박 4일 갔는데. 나는 이틀동안 승복은 다려 가지고, 그리고 어떤 상황일 때는 내가 해야 할 일들이 있어요,사실은.
나는 그런데, 내가 해야 할 일을, 내가 주지스님이니까, 늘 주지스님으로서 어떤 그 대접만 받는 데에 나도 모르게 관성이 들은 거예요 나는 못 느꼈어요
나중에 이제 그 분들이, ‘아, 스님도 주지 병이 똑같으시구만요.’ 그게 충격 이었어요. 처음에는 굉장히 좀 불쾌하기도 하고, 충격이 있었는데, ‘야, 이게 놀라운 사실이구나!’ 내가 늘 대접만 받고 대우 만 받고 배려만 받고 산 거에요.
우리가 대접받고 배려받은 것보다도, 오히려 남을 더 대접하고 배려하는 이게 크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은 봉사를 많이 했으니까, 그게 몸에 배여서 그런데, 우리는 늘 대접만 받은 거라. 이걸 모르는 거라요. 그래서 내가 돌아와서, 아! 내가 정말, ‘나는 나름대로 산다고 했는데 나도 똑같은 이 관성이 박혔구나.’ 이걸 자기가 모르는 거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나 고마운거요.
그걸 나한테 일러주지 않았으면, 누가 나한테 그걸 지적을 해주는 사람이 드물잖아요? 이렇게 따끔하게 이야기해주는 것, ‘스님, 자세히 몇가지를 들더라고. 이경우는 이렇다. 들어 보니까 맞는거라. 자기가 해야되는데도 이럴 때 가만히 있는 거야 나는. 당연히 해 줄 것 같이.
이런 것을 모를 때 자기 도반이 챙기는 겁니다. ‘내가 보니까, 도반이 좀 이런게 있는 것 같다.’ 라고 했을 때, 딱, 그것을 때달아야 그것을 수용을 하는 거요. 그 사람, 지적해 준 사람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우리가 그게 부부싸움을 할 때, 처음에는 그냥 이성적으로 대화를 하다가, 나중에 찌르지 않아요? 바늘로. 자존심 상하도록. 관점을 찌르고 들어 가지 않아? 그러면 맞기는 맞는데, 안 받아 주어요. 니 말이 맞기는 맞지만, 속으로는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절대 거기에 대해서, 그것을 수용을 안 하는 거예요
그게, 상대방이 애정 어리게, 따뜻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으로 이야기 하는 거예요. 상대방 공격을 자기 무기로 삼는 거에요. 그게 아니라 상대방을 정말로 연민스러운 자비심을 가지고, 따뜻하게 그렇게 이야기 하면, 누가 그걸 못 받아주겠습니까? 우리가 따뜻하게 연민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지적하는 것이 수행의 힘입니다. 그게 자비의 힘이고요.
그것을 여러 도반들이 포살과 자자를 해야 합니다. 이게 부처님 계실 적에 율장으로 내려왔거든요. 그러면서 이제 부처님께서 포살을 할 때 참회를 받고, 훈계하는 그 비구승한테 해주는 겁니다
참회 받고 훈계하는 비구들에게 다섯가지 계를 줍니다.
첫째는, 때에 따라서, 그 시기에 따라서 말과 행동을 할 것. 적절한 말과 행동을 할 것.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이 항상, 우리 불자들은 이것은 굉장한,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항상 마음이 열려 있어야 돼요. 항상 마음이 열려 있어야, 깨어 있어야 돼.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말과 행동이, 깨어 있는 말과 행동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매여 있으면, 어두워 있으면 까르마의 행동과 말을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늘 마음이 열려 있고 깨어 있으라는 거에요.
두 번째는, 진실성이 있어야 된다. 늘 정직하게, 바르게 해라. 진실해라.
세 번째는, 유연하게 행동하고 말을 해라. 유연하게, 부드럽게, 아까 부부 싸움 할 때, 막 공격적으로 하는 그런 게 아니라, 늘 상대방에 역지사지란 말이 있지 않아요? 상대방 마음을 정확히 읽고, 그 마음을 따라서 해라. 그리고 상대방한테 유익한, 유익한 쪽으로 해줘라. 도움 되는 쪽으로 해줘라. 내가 유익한 게 아니라 상대방이 유익한 쪽으로 해라.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비심을 가지고 말과 행동을 하라. 그런 이야기 입니다.
그 원효스님께서는, 여러분들이 원효스님을 잘 아시겠지만, 원효가 한 생을 살면서 굉장한 어떤 스팩트럼이 깊고 크지요, 사실은. 육두품 출신이기도 하고, 또 당대에 가장 영민하고 명석한 선승이기도 하고, 수행승이기도 하고, 교학승 이기도 하고, 저술도 가장 많이 했습니다. 아직까지 세상 사람 중에 원효의 저술만큼 능가 하는 사람이 없어요.
가장 저술을 많이 한 사람이 원효하고 다산이거든요? 한국에서. 그만큼 저술을 많이 했어요. 지금 우리가 원효의 저술을 많이 확인을 못해서 그렇지, 굉장히 많은 저술을 했습니다. 원효가 여러 번 굴곡이 있잖아요? 그지요? 이제 여기서 길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원효는 어떻게 보면 한국불교 비구승단에 표본이지 않아요? 한국불교에서 가장 장엄하게, 아름답게, 멋있게 살았던 사람이 원효에요, 사실은. 원효의 삶을 우리가 떠올리게 되면 너무 숙연해지는 거예요. 아주 진지해 지는 거예요.
원효의 친구는 그 뭡니까? 땅꾼들, 남이 생각하는 그 무지랭이들이라고 하지요? 그 사람들이 원효를 경계하지 않고 친구같이 대하는 거에요. 이게 중요한 겁니다. 원효가 그냥 환속했다 하더라도 큰 스님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같이 대하는 거에요. 친구 같이.
제가 아는 거사 한분이 노숙자를 위해서 봉사를 하거든요? 내가 그 봉사 현장에 가 봤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거의 노숙자 수준으로 하고 있더라고, 수염도 기르고, 머리도 텁수룩하고, 세수도 안하고 있어. 신발도 쓰리파 있지 않아? 쓰리파 끌고, 반바지 입고, 여름인데, 완전 반 노숙자야.
그래 내가 딱 느낌이 오더라고. 아, 이 사람 참 마음에는 상당한 마음으로 헤아리고 함께 하는구나. 내가 느꼈어요. 그러니까 노숙자가 오는 거예요.
서울시에서 노숙자를 위해서 인제 그 목욕탕, 목욕을 하도록 해요. 몸이 맑아지면 마음도 맑아진다 말이에요? 그런데 안 오는 거야. 머쓱 해 가지고 안 와. 그런데 이 친구는 중고차 그 뭡니까 2톤짜리 중고차, 냉동 중고차를 우리가 권해서 샀어요. 하루에도 열 명 열 다섯 명씩 오는 거야. 서울시는 한 두 명도 안 와요. 그 비결이 뭐겠어요?
이 하는 사람이 거의 노숙인들을 친구같이 대하는거야. 노숙인들에게 가서 목욕도 하고, 같이 김밥도 먹고, 자기들이 인제 김밥 장사를 하겠다고 까지 노숙인들이 나온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눈높이를 맞춰야 돼요. 여러분들도 개 키워 보셨으면 잘 알꺼요. 고양이를 키워 보신 분들. 개는 어때요? 서서 오라면 잘 안 와. 서서 오라고 하면 잘 안 옵니다. 이렇게 앉으면 옵니다. 개가. 여러분도 느낌 있을 거에요. 자기들하고 눈높이가 맞아야 돼요. 그럼 편한 친구가 되는 겁니다.
원효가 위대하다는 것은 가장 낮은 사람한테 가장 편한 친구가 되는 거예요.그 사람이 경계 없이 대하는 거예요.
삼국유사에 보면, 대표적인 것이 사복(蛇福)품이 나와, 사복품이 나오지요. 사복, 사복은 뱀 ‘사’자에 복 ‘복’자인데, 사복은 어머니가 과부에요. 과부가 아이를 낳아 버렸어. 지금도 무슨 혼자 미혼모라 하면 뭐. 옛날 같으면 그 얼마나 천덕꾸러기, 핍박을 받았겠어요?. 아버지가 몰라 누군지를.
그런데 그 사복이 일곱 살 때까지, 한 열살때까지 못 일어 섭니다. 기어 다녀요. 그래 저주 받았다 그랬어요, 사람들이. 그런데 일어서서 활동하려니까 척추가 굳어져 버렸어. 지금 같으면 척추 장애 입니다. 저주 받은 여자가 아버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아이를 가져 가지고 저주 받았다.
어머니 마음이 어떻겠어요? 어머니 마음이 헤아릴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사복이 아주 머리가 영민해 가지고, 어머니가 그냥 남의 집에 가서 이렇게 무슨 허드렛일을 하게 되면 책 같은 것을 가끔 이렇게 샀대요. 품삯으로 대신.
그걸 가져와서 사복 한테 줘요. 사복이 머리가 아주 천재라 외워 버려요, 다. 아주 영리해요. 나중에 출가했다는 설도 있는데, 그 사복이 나중에 장년이 되어가지고 원효의 친구인 거에요. 원효의 친구.
여러분도 생각해봐. 아버지도 모르는 과부의 아들이에요. 장애인이야. 지금 장애인은 옛날 장애인하고 틀립니다. 옛날 장애인은 거의 사람 취급을 못 받았어요. 척추 장애 같은 경우에는 아무것도. 지금도 측추장애 있으면 출가를 못 해요.
제가 어렸을 때 아주 신심이 좋은 분이 출가를 해도 대우를 못 받았어요. 사회적으로도 그렇게 사각지대, 버림 받은 존재에요. 그런데 그 사복이 하는 대목이 나와요, 삼국유사 마지막 부분에 그게 나옵니다.
원효한테 ‘자네 나 좀 보세, 나하고 어딜 좀 가자.’고 그래. ‘어디를 가느냐?’ 했더니, ‘오늘 우리가 전생에 같이 수행할 때, 같은 절에서 수행할 때, 그 수행할 때 살았던 소가 오늘 죽었네.’ ‘소 장사를 지내러 가는데, 가서 자네가 그리 가서 장사하는데, 마지막 수계를 좀 해달라. 돌아가신 망자한테 수계를 해주라.’ 영가 수계, 영가 수계가 거기서 나옵니다.
그래서 원효가 갑니다. 그분이 누구냐 하면, 사복의 어머니에요, 사복의 어머니. 어머니를 수계를 하는데, 뭐 ‘생중하처 사중하처’ 쭉- 법문을 해요. 어머니 앞에서. 수계를 하는데, 사복이 나와서 ‘마지막에 이래. 뭐 그렇게 길게 할게 뭐 있는가? ‘생사고’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태어 나고 죽는 것이 고통이야. ‘ 그렇게 사복이 그 무덤이 쫙 갈라 졌다는 거에요.
저는 이제 뮤직칼 하는, 연출가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 사복을 이 시대의 역사물의 주인공으로 등장 해서, 이걸 반드시 뮤지컬로 만들면 정말 대박이 날 거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복이 그렇게 이 어머니 무덤이 쫙 갈라진다 그러잖아요? 갈라지면서 은하의 세계가 짝 펼쳐집니다. 사복이 싹들어갑니다 그러면 문이 닫혀 버립니다. 사복이 사바세계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걸로 끝나는 거에요. 너무 멋있지 않아요? 사복의 그때까지의 삶이라는 것은 얼마나 지난한 삶이에요? 사복의 어머니 삶이 얼마나 지난한 삶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그런 사복과 사복의 어머니가 자기 아주 절친한 도반이라는 거에요. 서로 말을 놓을 정도로 도반인데, 이게 위대한 거에요. 원효가. 원효는 그 당시에 상승 지식인이고, 법문 도 잘하고, 연설도 잘 하고, 심지어 무열왕이 위기의식을.
원효가 너무 똑똑하니까 세력화 될까봐 원효를 사실은 파계시킨 거예요. 무열왕에 의해서 파계가 됩니다, 원효는. 원효는 파계되지 않았으면 결국은 역모에 엮겨서 거의 죽었을 겁니다. 사실은. 그렇게 사가들이 평가를 합니다.
원체 원효가 그 당시 전쟁 이후에, 전쟁을 반대했잖아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이, 어떤 불교라는 세력화 해 가지고 원효가 왕에게 문제 제기를 하면 당장 문제가 되지요. 무열왕이 상당히 굉장히 격했던 사람이에요. 진골 출신 최초로 왕이 된 사람이잔아요?
그 요석공주를, 무열왕의 딸이란 말이에요? 아끼는 딸이였어요. 대야성 전투, 합천 전투에서 백제군 한테 요석공주의 남편이 전사 하지 않아요? 굉장히 아끼는 딸인데, 그 딸하고 원효를 엮어 준 거에요. 사실은.
아무튼 그렇게 엮기로 해 놨는데, 원효가 쓴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 라는 것이 있어요, 원효의 저술 중에 하나가. 이렇게 나와요. 중생이 육근으로 여러 가지 번뇌를 만들어서 괴로워하지만, 근본 무명을 버리고 죄업의 체, 죄업의 어떤 본체지요? 본체가 없음을 관찰하게 되면, 합리적이고 유익한 인생을 살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면서 참회는 중생들의 삶과 살아있는 동작 하나하나에서 찾아야 한다. 참회가 모든 부처와 합일을 향한 수행의 힘이다. 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참회는 육도 중생을 위한 것이고, 모든 불 보살께 목숨을 들어서 귀의 하는 것이고, 중생에 대한 동체 대비심을 실현하는 것이다.
참된 나 자신의 개인적인 어떤 계약을 하는 것으로서 참회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 가서 나와 함께 있는 소공동체, 더 큰 공동체, 인류 전체가 늘 자정하는, 선차하고, 그것을 뉘우치고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렇게 해야만이 진전이 있는 것이에요. 사실은. 우리가 사는 전체 공동체를 정화 하는 것이 이 사바세계를 시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개인적인 삶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것이고,
참회 방법을 원효는 이렇게 이야기 해요. 부처님의 자비에 의해서, 의지해서 정성껏 지성껏 참회하되, 이미 지은 죄는 깊이 뉘우치고, 아직 짓지 않은 죄는 앞으로 짓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다음으로 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이게 중요합니다, 세 번째가.
죄의, 업을 짓는, 악업의 본성을, 체가 뭔지 이걸 정확히 최득하는 것, 생사의 꿈을 깨는 것이 진정한 참회다. 결국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아까 제가 여러번 반복했지만, 마음을 활짝 열고, 활짝 열린 마음이, 마음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정화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참회와 해탈, 참회와 깨달음을 일치시키는 것이 바로 진정한 참회 정신이라 이렇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괴로움이, 괴로움이 곳 번뇌라 할 수 있지요? 괴로움이 무명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무명의 상태에서 지각 활동을 하면, 그러니까 어둠의 상태에서 사물을 보고 판단하게 되면, 어두운 상태에서 지각의 대상에 대해서 탐욕이 생겨요. 중요한 것은 어두운 마음, 밝은 마음 밝은 마음으로 사물을 보면 악업을 지을 리가 없어요. 악업을 지을 리가 없어요. 어두운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니까 탐욕심이 일어나는 거예요. 거기에 삼독심이 일어나는 겁니다. 어두운 마음을 갖지 않고 밝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수행의 본체에요
이것을 이제 후대에 원효스님이 소를 했던 대승기신론, 아시지요? 여러분들. ‘대승기신론소’가 원효스님이 지으셨는데, 원효스님이 거기서, 대승기신론에서 ‘각심무심 심무초반’이라고 그랬어. ‘각심’은 깨달아진 마음. 우리는 본래 깨어 있는 마음을 갖고 있는 거거든요? 불성의 종자를, 여래장의 종자를 가지고 있는거다. ‘각심’이 처음 일어나니까, 그 마음에는 어떤 모양도 없더라 이겁니다. 어떤 사람은 또 달리 표현합니다. 마음을 깨달으니까 처음 모양이 어떤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전자가 맞습니다. 해설은.
각심, 깨어 있는 마음이 늘 어떤 사물을 대하더라도, 그러니까 밝은 마음 으로 사물을 대하면 절대 어둠이 끼어 들 수가 없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어두운 마음으로 사물을 대했을 때, 사람을 대하거나, 뭐 일을 대하거나, 어떤 사건을 대했을 때, 이해관계가 어두운 마음을 끌어 당기는 거에요. 끌어 들이는, 당기려고 하는 마음이 일어 나지 않아요? 끌어 들이는 마음이 자기 업을 만드는 거예요. 겹겹이 쌓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무지한 활동에서, 탐욕이 흘러 내리는 것을 우리는 ‘누(漏)’라고 합니다. ‘누’ 이것을, ‘누’ 는 더러울 누 자, 어두을 누 자, 삼수 변에. 이것을 인제 빨리어로 ‘아사바’라고 하는데, 번뇌라 합니다, 번뇌. 번뇌가 거기서 생기는 거에요.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이러한 ‘누’가 흘러 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누’가 흘러들지 않게 하려면, ‘누’가 흘러 드는 문을 지켜야 된다. ‘누’가 흘러 들어오는 문이 있잖아요? 우리가 무명의 마음으로 삶을 대하니까, 그 삶을 대하는 것 마다 탐욕심과 자기가 끌어 당기려는 힘이 자꾸 가는 거에요.
거기서 이제 까르마가 생기는데, 그 문이 바로 육문이에요. 육근 잘 아시지요? 안이비설신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뚱아리와 생각, 이 여섯가지 문이 들어오게 하는 거에요. 육문을 그래서 관리하는 거예요. 이걸 ‘수육문’ 이라고 합니다
‘누’가 흘러들지 않게 하려면, ‘누’가 흘러 드는 문을 지켜야 하고, ‘누’가, 번뇌가 우리가 우리가 자각 활동을 할 때 흘러 들어옵니다. 그럴 때면 지각 활동을 잘 지켜봐야 돼요. 늘 그런 대상을 잘 지켜봐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열려 있는 마음, 깨어 있는 마음으로 대상을 보게 되면 ‘누’가 흘러 들어 올 수 없어요. 여기서 이야기 하는 것은, 늘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 하라는 것, 수행은 늘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는 거에요.
그런데 우리가 절에 와서는 마음이 활짝 열릴 때, 환희심이 날 때, 그 때는 모든 걸 다 수용할 것 같아요. 그런데 어떻게 기분이 나쁘고, 뭔가 좀 자기한테 불리한 말이나 듣기 싫은 말을 잘못했다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은 저 생각을 할까? 바늘로 꽂을 자리가 없잖아요. 사실은.
못 떨어 지는 거야. 문이 활짝 열려 있으면 왔다가도 나가는데, 못 떨어지는 거야. 그런데 깨어 있는 마음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이게 수행이고 그걸 유지 하는 것만큼이 수행의 힘인거에요.
그걸, 마음을 열고, 마음을 밝게 열려 있는 상태에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 이것이 수행의 힘이거든요. 그걸 우리가 반야라고 그러지 않아요. 반야. 지혜라 그러잔아요?
인간의 진실한 생명의 본체를 깨달으면, 나타나는 근원적인 겁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다. 반야라고 그래요. 반야.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경하면 그걸로 사실은 법문이 완성이 됩니다. 지혜가 드러 나서 바라밀을 실천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봉사 많이 하지요? 바라밀행을 많이 닦지 않습니까?
자성이 본래 갖추어진 지혜를 불지견이라고 하는데, 이 불지견은 분별지가 아닌 무분별지를 이야기 합니다. 어떤 사물을 분별하고 계산하거나, 계교하는 기교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실상을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게 반야의 눈입니다. 실상을 그대로 보고 듣는 겁니다
우리가 이 종을, 우리가 범종을 치잖아요? 여러분들 그 일본 마쓰오 바쇼 라고 하이쿠신 아시지요? 바쇼는 그 승려이기도 하고, 아주 훌륭한 시인이십니다. 바쇼가 쓴 시에 보면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종을 치면 종소리가 들리잖아요? 소리. 그 아주 맑고 장중하고 깊은 소리만 내 안에 싹 들어 와야 되는데, 누가 칠까? 어디서 치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소리하고 내가, 정확히 있는 그대로 만나면 내가 소리가 되는 겁니다. 내가 없는 거요. 내가 소리가 되는 거예요. 소리와 하나가 되는 거에요. 그 소리는 뭘 의미 합니까? 부처님 법문을 듣는 소리잖아요
그 소리가, 내가 그것을 너무 은은하고 환희롭지 않아? 우리 범종을 조석 예불 때 치면, 저 이웃마을까지 들리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 한번도 시비 거는 사람이 없어. 범종 소리가 내가 들어봐도 좋은데, 물론 나는 또 내 안에 갇혀 있으니까 그렇게 들리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인들이 들어도 굉장히 장중하고 좋을 것 같아요.
그 소리를 들으면, 소리와 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법음 소리가 환희롭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옥에 있는 중생들까지도 다 구해 주는 소리 아니에요?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반야의 상태가 되면. 그래서 무분별지라 그래요, 분별 하지 않는다.
이 반야는 대승불교에서 공, 공이라는 표현을 해요. 공, 비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공성을 체득하는 것이 공부에 굉장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공성을 체득하는 것. 모든 존재는 비어 있는데, 여러분과 나와 사이는 공간이 있지요? 비어 있는 것. 그런데 여러분도 무아적인 존재고, 나도 무아적인 존재인데, 없는 것이야, 사실은.
그렇지만 또 실상으로 보면 또 현실은 있는 거니까, 이게 색이고 공이요, 공이고 색이라는 거에요. 없는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요. 사실은. 굳이 우리가 말로 따진다면, 공의 상태에 이르렀을 때,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 늘 비어 있다라는 것은, 무상과 무아, 연기를 이해 한다면 비어 있는 공을 체득할 수 있거든요?
무상은 시간적인 개념이, 늘 움직이고 변한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의 존재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가 없다.’ 그러지 않아요? 고정된 실체가 없어요. 사실은. 변화되기 때문에 어떻게 돼요? 어떠한 존재든지 변하면 없어져요. 없어지기 때문에 원래 실체가 없다. 다만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보이는 것은. 실재로 현상의 실체가 있는 것처럼 형상된 모습으로 보일 뿐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연기적 조건으로 인해서. 그런데 그 조건이 사라지면 없어지는 거에요
이게 지금 물 컵이잖아요? 그런데 이걸 이제 제가 물을 마시는 컵이잖아요?여기다가 잉크를 넣으면 잉크 컵이 되잖아요? 여기다가 새가 여기다가 오줌을 누면 어때요? 새 오줌통이 되는 거예요
어떤 조건에 따라서 이 컵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 전에 조건에 있었던 컵은 없어진 거에요. 그것을 뭐라고 해요? 무아라 그래요. 본래의 실체가 없는 것이다.조건에 따라서 이렇게 생겼다 저렇게 생겼다 바뀌는 겁니다. 불교를 명료하게 이해하려면, 무상과 무아, 연기, 공을 이해해야 된다, 그 말입니다. 이 연기를 이해를 해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돼요? 늘 공적이기 때문에 이 삶 자체는 연기적인 조건이 있다가 없어지는 거에요. 집착을 하지 않아야 돼요. 가질려고 하지 않아야 돼요. 가질려고 할 때 고통이 생기는 거예요. 가지려고 할 때, 그 것을 ‘고성체’라 합니다. 사성제에서 ‘고성체’라 합니다. 가지려고 하는 그 마음 이게 원인이라는 것을 ‘고집제’. 고통을 받는 것은 ‘고성체’고, 고통을 만들어내는 원인은 ‘고집체’라 그래요.
그럼 그걸, 고통을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이 뭐에요? 없애려고 하는 것이 수행이지 않아요? 수행하는 방법을 우리가 ‘멸성체’가 그럽니다. ‘멸성체’. 없어 진 것. 사라진 것,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 다만 고통이 사라지게 하는 방법이 ‘도성체’지요, ‘고성도체’, 고집멸도할때 ‘도체’지요? 이게 팔정도라 그러지요. 팔정도 자체가 인제 고통을 없애는 방법입니다.
이제 반야를 우리가 이해를 했다고 한다면, 반야의 어떤 뜻이, 열린 마음, 깨어 있는 마음, 분별하지 않는 마음. 그래서 지혜, 어떤 지혜, 그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활동 하는 것, 대상을 대자적으로 대하지 않고, 직자적으로 대하는 것, 이것을 우리는 바라밀이라고 그럽니다.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한테 들어오는 것, 나와 상대가 괴리된 존재가 아닙니다. 동체입니다. 하나 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동체 자비가 되어야 진정한 자비가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혜적인 자비가 되는 겁니다. 동체라는 것은 직자적 것입니다. 상대방의 아픔은 바로, 그 아픔이 내가 그대로 아픈 만큼 그대로 오는 것, 마치 어머니가 아이가 아프면 어머니가 아이만큼 아픈 것하고 똑같아요.
그러면 우리가 어떤 걸 아파 해야 될거냐? 한 가정에서 누가, 예를 들어서, 가장이 무슨 사업을 하다가 실패했다. 참 마음이 아프잖아요? 하루도 잠을 잘 수가 없어, 편안하게 잘 수가 없습니다. 또 갑자기 우리 아이가 건강이 악화되었다. 또 사고를 당했다. 그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이 몸에서, 이 몸에 가장,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 부위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이몸에서?
지금 이 시점이 중요해. 이 현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몸 부위가 어딜까? 이 중요한 답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현재 아픈 부분이 가장 중요한 거에요. 현재 아픈 부분이. 가슴이나 뇌가 아닌 거에요, 아픈 부분이. 아픈 부분을 치유 해야 만이 몸이 건강해지는 거에요.
자기 가정에서 지금 좋은 것은 놓아 두고, 아픈 사람 이 사람이 가정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거에요.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소외되고 가장 버림받은 그 사람들이 이 사회의 중심이 돼야 되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고통이 없어지면 사회가 평화로워 지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그대로있으면, 더 예산도 많이 들어가고, 더 마음을 써야 되고, 갈등이 커지는 거에요 사실은.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은.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바로 동체감입니다. 동체감. 그 동체감이 될 때 진정한 자비가 실현 되는 겁니다
불교는 바로 동체 자비의 사상이 가장 모토 입니다. 우리가 수행의 궁극적인 모토는, 예, 여러분 나누어 준 것을 한번 보시지요. 니까야, 다 가지고 계시지요? 같이 한번 합송 합시다. 니까야 초기 경전.
<니까야경 읽기>
팔정도를 이야기하는 건데요. 있는 그대로 생각하고, 보고, 그 다음에 견문 각지 하라는 거에요. 있는 그대로 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마음이 열려야, 깨어 있어야 돼요. 마음이 깨끗해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거예요. 탐욕, 무명이, 어두운 무명이, 그 무명의 마음으로 보면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없어요.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없어요.
여실지견이라고 하지요. 실상을 보는 것. 실상을 그대로 볼 때 사물이 그대로 습득이 되는 거예요. 실상 그대로 볼 때, 사람이, 상대방이 아플 때 아픈 마음이 그대로 나한테 들어 오는 거에요. 그 때는 무슨 시간 차가 없어요. 바로 들어오는 겁니다, 바로. 그걸 진정한 동체라 이럽니다.
그 다음장에 상윳다 니까야 보겠습니다
<니까야경 읽기>
우리가 가장 인간답게 사람답게 아름답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 가는 것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해요. 어둠에서 빛으로. 어둠에서 어둠으로 나아 가는 것은, 지금 우리가 과거 수 없이 겪고 있는 까르마에 대한 무게와 깊이와 죄가 더 가중되게 어두워 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가파르게 하는 경우도 있어요. 완만하게 가는 경우도 있어요.
어둠의 실체를, 우리가 어둠이 거두어 졌다, 어둠이 완전히 사라졌다, 번뇌의 불이 꺼졌다. 이걸 ‘니르바나’라 그럽니다. 완전히 사라졌다, 다시는 돌아 오지 않는다, 그걸 니르바나라 그럽니다. 그걸 ‘반열반’이라 그럽니다. 지금 우리는 어둠이라는 실체를 명료하게 인식할 줄 알아야 되는데, 깨어 있는 눈으로 보면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아까 처음에 포살할 적에, 아주 미세한 것까지 보라고 했지 않아? 마음에서 지어진 어떤 업장, 카르마 까지 보라 그랬지 않아요? 몸으로 짓는 업은 당연한 일이고, 생각과 마음에서 지은 것 까지도, 업장, 제칠식, 제팔식에서 지은, 잠재의식까지.
이 유리컵이 있으면요, 유리컵에 물을 부어 놓으면, 한달 두달 한 일년이 지나면 유리컵의 물이 어떻게 돼요? 위에 이 먼지가 딱 잡히잖아요? 이 유리컵이? 그런데 그 먼지만 싹 제거하면, 깨끗한 물일까? 중요한 건 먼지가 쫙 가라 앉거든요? 바닥에 단단하게 있는 거예요, 단단하게, 먼지가. 바닥에 있는 먼지를 봐야 되는 거에요. 바닥에 있는 먼지를 후벼 내는데는, 굉장한 아픔이 있어요. 아픔이 수반되요.
여러분들 솔개가 솔개가 얼마나 사는지 아시나요? 솔개? 솔개가 평범하게 살면 30년 40년 사는 거예요. 솔개가 그 정도 시기가 되면, 저 산꼭대기 올라가서 바위에 올라가 가지고, 자기 부리있지요? 부리. 부리하고 손톱, 발톱, 털을 싹 뽑아 버립니다. 완전히 털가리를 해요. 죽음의 경계의 아픔까지 갈 때까지 그렇게 합니다. 새로 나요, 새로 나면 딱 두 배를 삽니다. 70년까지 살아요, 솔개가. 솔개가 시사하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는 부처님 법을 갖고 지금 수행자로서 사는 거예요. 우리가 전반기에 살았던 솔개의 삶을 살았다면, 후반기에 살려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대변혁, 대혁신을 해야 돼요. 대쇄신을 해야 되요. 대정화를 해야 되는 거에요. 자기 까르마에 대한 부분들을 완전이 삭혀야 되는 거에요. 정화를 시켜야 되는 거예요. 그러려면 까르마의 실체를 정확히 봐야 해요. 까르마 실체를 정확히 봤으면, 이제 밝은 빛으로 가야 되거든요. 그렇지요?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 가야 돼요.
늘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경계가 온다 하더라도, 아! 이것은 과거 수행을 했던 것이다. 하고 감당을 해 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빛에서 빛으로 가는 거요. 그건 더 말할 것이 없죠. 사실은. 그 빛은 세상을 정말 아름답게 장엄하는 거예요.
어둠에서 빛으로 가게 되면, 그 빛으로 가는 한발 한발 한발이 여러분들이 이 추위를 뚫고 지금 금산사에 왔잖아요? 여기 법문을 듣고, 부처님 참배도 하고 그렇게 했지 않습니까
이 산, 절이라는 것은, 사찰이라는 공동체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사찰은 수행 공동체의 장인데, 사찰이 유지하기 위해서 사찰이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찰은 늘 열린 공간, 수행하는 사람한테는 열린 공간이 되야 돼요. 사찰을 유지, 존속시키기 위해서 사찰을 유지한다면 그거는 세속적인 것이잖아요.
그래서 사찰의 가장 큰 어른, 사찰의 주인은 누구일 것 같아요? 사찰의 주인은? 사부 대중? 중생? 아, 그것도 훌륭한 대답이야. 사찰의 주인은 부처님 입니다. 사찰의 주인은 부처님이라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공경하고 외호하는 대중이에요. 사실은.
그럼 사찰은 부처님의 세계가 충만 되어 있는 공간이어야 된다는 겁니다. 부처님한테 이해관계로 대하겠어요? 부처님이 이걸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겠어요? 그럴 수 없는 거예요, 사실은. 우리가 아까 ‘부처님처럼’이라는 노래를 불렀잖아요? 그렇게 부처님처럼 닮아 가는 거예요. 사찰의 주인은 부처님인 겁니다
금강경에 보면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라는 대목이 나오지 않아요? 만약에 모든 상을 보되, 그 상이 상이 아니라는, 상은 인연 조건, 연기적인 조건에서 생긴 상이라고만 보면, 바로 그 즉시 여래를 볼 수 있다. 제가 법회가 조금 길어 지는데, 괜찮은가요? (예)
톨스토이 책을 보니까 이런 내용이 나와요. 성지순례를 갔어, 두 사람이. 그 톨스토이가 19세기 분이니까, 그런 전제를 쓴 거죠. 툴스토이는 뭐 기독교인이니까, 그리스정교.
그런데 이제 순례를 가는데, 순례를 가려면 돈을 좀 모아야 되죠. 한참 배도 타고 가야 되고, 한참 걸어가야 되고, 마차도 타고 가야 되고. 그러니까 무슨 자기 집에서, 그냥 자식들도 아버지가 순례 간다고 하니까, 평생 한 번 가는 순례니까, 이렇게 돈을 모아서 주는 거예요. 자기 평생 모아 놓은 돈하고 같이 특별히 돈을 장만해서 갑니다.
지금은 우리가 1달러 1루블이 크지 않은데, 그게 옛날에는 굉장히 컷던가 봐요. 여러분, 그 1파운드가 굉장히 컸던가 봐요. 그런데 한 100 루블 정도면 굉장히 큰 돈이 었던가 봐요. 지금보다 화폐 단위가 컸었겠지만, 하여튼 그때 100루블이 지금 같으면 한 기백만원 이상 천만원 쯤 될 거야, 아마. 그렇게 자기 집안에 현금을 가져 있는 것을 다 모아서 가는 거예요.
두 사람이 같이, 나이가 초로의 노인들인데, 쭉 가다가 한참 가는데 목이 말랐어,두 사람이. 그런데 의견 차이가 생긴거야. ‘나는 목이 말라도 빨리 갈거네’ 이렇게 하는 사람하고, ‘나는 좀 목 좀 축이고 가야겠다. 그럼 잠깐 기다리라. 내가 저 보이는 집에 가서 좀 목 좀 축이고 오겠다’고 그렇게 갔어요.
집에 갔는데. 노크를 해도 사람이 대답을 인해, 안에 가 보니까, 어떤 사람은 누워 가지고 막 거품을 쏟고 있어, 그리고 똥오줌도 막 방에다 싸놓고 난리가 났어. 그리고 한 남자는 침상 위에서 그냥 천장만 보고 정신이, 넋이 나간 사람 같이 앉아 있고, 또 안에서는 아이들 소리가 나는데, 아이들이 밥 달라고 난리를 치고, 할머니는 속옷만 입고 있고. 이런 상황이에요. 이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거야. 이게.
그래서, 밥 달라니까, 밥을 먹은 지가 며칠 돼서, 굶어가지고, 그래서 자기가 가져간 식량 있잖아요 빵을 잘라서 주었어요, 아들한테. 자르고, 조금씩 잘랐는데, 잘라서 주고. 그러니까 물 좀 달라고 하니까, 저쪽에 우물이 있는데, 처음에 물 달라 했어. 그래서 우물이 있을지 모르니 아무튼 거기 가서 떠서 드시라고.
그런데 그 우물 먹기도 전에 이 사람은 빵 주는데, 이사람들은 물을 달라고 하니까, 가서 보니까 우물에 가서 물을 떠 다가 그 사람들을 부양하기 시작 했어요. 하루가 가고 조금씩 조금씩 나아집니다. 이 아이들이 조금 정상으로 돌아오고, 할머니도 좀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그 남자도 정상으로 돌아오고,
그러나 이제 어느 정도 정상으로 될만 하니까, 아, 이제 내가 빨리 떠나야겠는데, 그런데 이미 한 며칠 가버렸어. 친구하고 가기는 틀렸고. 이렇게 며칠 갔단 말이야? 막 갈려고 하니까, 이 사람들이 (자기가) 떠나버리면 먹고 살기 힘들잖아요?
전염병이 돌은거야, 이 마을에. 전염병이 돌아가지고 지방은 그렇게 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이웃에서 왔는데도 도망을 간거야. 그러다가 이 사람이 이제 다시 순례 길을 가려고 하는데, 아이들이 그냥 ‘할아버지 우리한테 밥을 주면서 우릴 도와주세요.’ 라고(하니까) 그 모습을 보고 못 가는 거야.
그래서 계속 부양 합니다. 그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말도 한 마리 다시 사 주고, 또 이제 그 집 땅을 저당을 지주한테 잡혔는데, 그 것도 다시 풀어서 목장을 다시하겠금 해 놓았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한참을 지나 버렸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지나 버린 거야. 결국은 순례를 못 가. 왔어, 돌아 왔어.
그런데 순례를 먼저 떠난 사람 있잖아요? 그 사람은 배를 타고 쭉 가서 순례를 했는데, 우리 그 쿠시나가라 가면 열반상 있잖아요? 거기도 아마 예수님이 누워있는 열반상이 있는가 봐요. 관옆에 다가.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아가지고 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밖에서 이렇게 보니까, 자기 친구가 저기 앞에 거기, 그러니까 예수님 앞에 있는 승단 앞에서 제일 앞에 서 있는 거야. 저사람이 어떻게 나보다 빨리 왔지? 그런데 친구를 만날 수가 없어, 너무 사람이 많아 가지고.
그리고 그 다음날 갔는데, 똑같이 친구가 있는 거야. 그런데 그 친구가 이렇게 하늘을 보고, 보통 뭐 기독교에서 주여! 그렇게 하지 않아? 빛이 쫙 내려 와, 친구한테. 참 희안한 일이다. 이 구렛나루 수염까지 똑 같은 친군데, 한 일주일 동안을 계속 그렇게 그런 상황을 본 거에요
그래서 순례를 끝내고 왔어요. 나중에 이제 그 사람을 기다린다고 했더니 못 만났어.다 나갈 때까지. 그 큰 성 같은 데를 나갈 때까지 못 만났는데, 결국은 집으로 돌아 왔어요 집에 돌아와서 보니까.
그 돌아오는 길에 그 집을 간 거예요. 친구가 순례 길 가다가 물 마시려고 했던 그 집을, 그 집을 친구가 가서 다시 들르게 된 거에요. 목이 말라 가지고. 그랬더니 그 아이들이 할아버지에게 너무 친절하고, 물 떠다 주고, 빵 주고 그렇게 대접을 하는 거예요
‘사실은 할아버지하고 똑같이 나이 드신 어른이 몇달 전에 여기를 왔다 가셨다. 그 할아버지 덕분에 우리가 살아났다. 너무 훌륭한 분 같다. 그 할아버지가 마치 하나님 같았다.’ 하는 거에요.
‘자기들이 그 동안에는 무지 몽매해 가지고 신앙생활을 못 했는데, 그 할아버지 인연으로 제대로 된 신앙을 하게 되었다. 너무나 고맙고 위대한 할아버지였다. 마치 이렇게 나이 드신 어른들을 보면 그 할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우리가 공경한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그래서 돌아왔어. 돌아 와서 보니까 자기 친구가 있는 거예요. 친구가 있어. 그런데 이제 그 친구 집은 평범하게 이렇게 순탄하게 갔는데, 자기 집은 뭐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망하고, 고난이 있었어.
그 나중에 친구를 만나러 갔거든? 벌 키우는 벌통에서 친구가 일을 하는데, 친구가 뭘 저쪽 산을 보고 이렇게 아마 기도를 했던가 보지요? 똑 같은 장면으로, 빛이 이렇게 하늘에서 투시가 되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람은 그때사 느꼈어요.
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순례길에 가서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저런 바닥에 있는, 바닥에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성품의 종자가 어둠에 싸여 있을 때, 고통을 받을 때, 그 현장에서 함께 나눌 때, 하나님을 친견하는 것이다. 그걸 본 거에요. 제가 이 말하는 것은 똑같은 겁니다.
우리가 모든 생명의 존재는 부처님의 현현된 모습이에요 그 생명의 존재가 고통스러울 때, 아우성일 때, 우리한테 도움을 청할 적에, 우리가 기쁜 마음으로 도와줘야 됩니다.
여러분들 마하트마 간디 이야기를 잘 아시잖아요? 인도는 그런 풍습이 있는가 봐요. 아프면 정말 존경하는 분한테 가서 간호를 해 달라고 청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문화가 있는가 봅니다.
간디 한테 어떤 사람이 자기를 좀 이렇게 병원에 와서 간호를 해 달라고 청을 하는 거예요. 아무리 인도 문화라 하더라도 귀찮치않아요? 그게. 바빠 죽겠는데? 우리 보통 사람들 같으면, 보살님이 그렇게 하겠냐마는, ‘스님들도 계시는 데 왜 하필이면 나야?’ 그렇지 않으면 ‘좀 천천히 가면 안 될까?’ 이렇게 하잖아요? 전혀 쌩뚱 맞게 모르는 사람이 그런 부탁을 하면 마음 내기 쉽지 않지 않아요? 간디는 아주 기쁜 마음으로, 내가 선택받았다는 너무 축복스러운 마음으로 갑니다. 이 마음의 차이는요, 굉장이 큰 겁니다.
우리가 마음이 열려 있는 상태에서, 깨어 있는 상태이면, 그 사람이 하나인거에요. 나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에요. 그 사람의 아픔이 그대로 온 마음으로 나한테 들어 오는 거예요. 직자적으로 가는 거에요. 대자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게, 동체 자비심이라는 것은 직자적으로 갑니다. 계산하지 않고 이게 뭔가 좀 사량하지 않는 것, 생각이 깊어 지지 않는 것, 바로 아는 겁니다.
이게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 마음이 열려 있어야 돼요. 내 마음이 깨어 있어야만 돼요. 그래야만 하나가 되는 거야. 내 마음이 닫혀 있으면 갈 수가 없어요. 그 사람한테.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상을 여의어 해탈 성취하는 법을 보이는 것, 무주를 반야로 삼고, 반야를 성취해서 모든 번뇌를 파한다. 깨달음을 ‘정심(正心)이라고 하는데, 정심이 바를 ‘정’자, 바를 ‘정’자는 하늘의 진리에 머물러 있는 것.바를 정자 이렇게 한 일(一)자 밑에 그칠 지(止)자거든요? 하나 아래 머물러 있는 거예요. 둘이 아닌 것.
모든 진리는 하나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둘이 아니에요. 그래서 우리 불이문 쓰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원성으로 보면 절대 안 됩니다. 부처님과 내가 둘이 아닌 거에요. 내가 부처님의 인자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불성의 종자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 우리는 깨어 있는 마음으로 삶을 대할 때, 절하는 자세가, 죽는 순간 까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절하는 자세로 살아라. 이게 00스님이 하시는 말인데, 그만큼 겸손하게, 상대방은 고마운 은혜로운 존재인 거예요. 나를 이렇게까지 해준다는 건, 바로 정심이란 것은, 하나 하늘의 진리에 머물러 있는 것. 그 ‘정’자는 우주 세계 한 가운데 머무는 것이다.
용은, 용이라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거든요? 활동하는 것. 활동하는 것이, 본질, 이 ‘체’에 결합되어 반야 지혜를 체득하면 불이를 이룬다. 둘이 아닌 것을 이룬다. 이 유마하고 문수가 불이법문을 하는 부사의 해탈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불이 라는 것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면서,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더러움을 벗어나, 일반인에게 손해되지 않고, 영원하게 살며, ‘악’속에 있되, 악에 물들지 않고, 그것을 선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게 이제 불이 라고 그럽니다.
괴로움과 어려움을 구하는 자를 보살이라 하고, 상대방의 괴로워 하고 어려운 고난을 받았을 때 ,구하려고 하는 것을 보살이라고 표현한 거지요.
괴로움과 어려움을 손수 겪는 자를 대보살이라고 그런다. 나눔과 괴로움과 어려움을 나누는 것을 보살이라 그러면, 정말 마하보살, 마하보살, 큰보살은 손수 아픔을 그대로 자기 마음으로 겪는 거에요 그걸 대보살이라 합니다.
복덕을 지어서 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큰 답이다. 그 얘기다. 그리고 탐착하지 않고 유,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큰 대지혜다. 복덕이라고 하는 것은 선근를 짓는 거지요? 선근 을 지어서, 선근 을 짓되 선근을 지었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 것, 집착하지 않는 걸 공이라고 하지요?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을 대비라고 합니다. 대자 대비 할 때의 대비.
그리고 탐착. 어떤 것에 자기 것이라고 소유하고 그렇게 지나치게 주장하지 않는 것 탐착하지 않고, 현상, 드러나는 것 보이는 현상, 현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큰 지혜 마하 반야라 그럽니다.
자비 와 지혜를 구족해서 공과 유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바로 ‘중도’ 라 그럽니다. 중도행이라는 것은 자비 와 지혜 그러니까 대비와 대지를 구족한다 하더라도 ‘공’과 ‘유’에, 없는 것과 있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중도의 행이다. 팔정도가 바로 그것이지요. 우리가 아까 니까야를 읽었지 않습니까?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말이 있어요. 이건 이제 선근이라는 것은 선인, 선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선의 뿌리. 선을 짓는 원인, 이걸 줄여서 선근이라고 그러거든요? 불교의 수행은 선정적인 것이 수행의 가장 올바른 방법이 아니에요. 선정을 통해서 선근의 뿌리를 얼마만큼 깊이 심느냐에 따라서, 불교의 수행은 묘미가 있는 겁니다
선근의 뿌리가 아주 튼실해야 돼요. 건성건성 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아까 제가 마하트마 간디 이야기도 잠깐 했지만, 간디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그 뭡니까? 그 신발이야기 잘 알지요? 신발. 신발을 던졌잖아요 한쪽이 떨어지니까 마자 한쪽을 던졌지 않습니까 ?
우리같으면 한쪽을 던지는 것이, 기차가 한참 지나고 나서, 그게 잘 던졌을 걸, 이렇게 생각할 거 아니에요? 그이가 주워 놓았을까? 불안한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사람은 한쪽만 가지고 그냥 계속 탓만 하고 있을 거예요. 여러 가지 들지 않아요?
한쪽을 던졌다는 것은, 간디는 망설임이 없이 그 찰나에 바로 던지는 거에요. 이것은 뭐요? 마음이 열려 있기 때문이에요. 상대방이 쓰는 그 구두를, 신발을, 신을 사람 마음을 내가 바로 직시해버리는 거에요. 직자적으로 보는 거에요. 대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게 수행의 힘인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고통과 아픔이 있을 때, 그 아픔을 한참 있다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픔이 그대로 온 마음으로 자기에게 쑥 들어와야 되는 거에요. 쑥 들어 와야 돼. 이것이 동체 자비다.
우리의 동체 자비의 정신으로 수행을 한다면, 여러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드라망에서 그 추에 밝게, 보석같이 빛나는 그런 어떤 추가되겠지요. 그 추로 인해서 그 인드라망의 모든 추가 비치는 겁니다. 인드라망의 추는 어떻게 되요? 이 추가 여기를 비추고, 이 추가 저쪽을 비추잔아요? 우리가 저기 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는 것은, 이미 별이 사라진 것도 많아요. 일만년 동안 빛의 속도로 왔을 때 일광년이잖아요?
수십 광년전에 이미 투시를 했는 이 별이, 육안으로 식별할 때는 이미 사라졌는 것도 많아요, 사실은. 그런데 그 별이 보석 같이, 진주같이 우리한테 빛을 비추잖아요?
우리의 그렇게 동체 자비심으로 충만한 삶을 살 때. 우리의 아주 진주 같은, 보석같은 그런 밝음, 밝음의 거울이, 밝은 추가 모든 인드라망 추를 다 비추는 겁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보살적인 삶이다. 그렇게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