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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광군 소식지 스크랩 남도문학 1 번지, 그 찬란했던 영광의 문학-이 동 순-조선대교수
원기소(오영님 추천 0 조회 37 14.10.15 20: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영광. 호남의 이상향

   영광은 일제치하 서울의 변방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남의 이상향`이라 불리며 민족운동이 가열차게 진행된 고장이다. 백제불교의 도래지이며 바다의 염전과 굴비로 시장이 활성화되어 다른 고장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며 덕분에 일본과 서울로 유학을 떠난 학생들이 많았던곳. 유학생들은 방학이면 귀항하여 야학을 열고 문예와 연극과 음악과 체육을 지도하면서 문맹퇴치에 앞장섰고 민족의식을 키워 내기 에 바빳던곳, 철저하게 민족의식으로 무장한  지역이 바로 영광이였다.

   영광은 `호남의` 이상향`이었던만큼 이제는 다시 대한민국의 이상향으로 발돋음 해야할 때다.

영광이 지리학상으로는 호남의 변방이였을지 모르지만 `호남의 이상향`으로 불린것은 물산이 풍부해서만은 아니였을 것이다.그것은 영광의 정신에 있었다. 영광의 정신을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그것이 문화예술을 꽃피게 한 원동력이였다.영광이 남도문학 1번지가 될 수 있었던것 , 영광사람들의 개방성과 수용성과 역동성에 있다. 그 개성과 수용성과 역동성은 문학으로 꽃 핀것이다.

   영광은 시문학사에서 시인 조운의 고향으로 호명되는 곳이지만 사실은 많은 작가들의 고향이다.

시인 정태연,시인 조남령,시인 조영직,수필가 조희관,동화작가 정태병의 고향이 바로 영광이다.

이 작가들은 일제가 `영광공산당사건`으로 조작한 일명`영광체육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거나 재판을 받은 인물들이라는 점도 기억해야한다.일제치하에 순응하는 삶을 거부한 이들은 과연 `호남의 이상향`에살만한 자격을 가졌다.이에 찬란했던 영광문학을 짚어보고 작가들을 소계하여 찬란했던 영광문학의 부활을 꿈꾸기로 한다

2. 호남의 이상향에서 남도문학의 1번지로

   영광은 단연코 남도문학의 일번지다.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지금까지도 남도문학의 중심지는 목포라고 확신하고있다.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목포의 개항은 문화와 물품이 오가는 통로였기때문에 문화의 수입과 수출이 활발 할 수밖에없는 물적인 조건이  일찍 마련되였던만큼 목포눈 타 지역에비해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 학생들이 문학인이 되였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문사로 김우진(1897.9.19~1926.8.4;극작가로 <사의찬미>를 부른 윤심덕과 현해탄에서 동반자살로 29세로 생을 마감하였다)이 있다. 목포출신의 박화성이 소설가로 등장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그때 이미 영광은 조운을 시작으로 정태연과 조의현이 중앙으로 작품활동의 무대를 넓힌 상태였다.영광의 작가들은 많은 단체들에 소속되어 체계화된 민족운동을 전개하면서 동시에 작품활동을 한 것이기때문에 또한 특별하다.영광만큼 많은 단체들이 유기적으로 연대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한지역은

찾아보기 힘들다.그만큼 영광은 시대의 상록수로 푸르게 서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영광에는 영광청년회,영광학우회,영광유학생회,영광소년동맹,토우회,소성회,갑술구락부,영광교육협회,영광중학기성회,영광기독청년회,노동우예회,영광청년동맹,영광식산조합,불갑농민조합,법성포농민조합,한글회,법성포학부모회,추인회,백호단,인의단,법성포 소년단,과학연구회,운동구락부,등이 있었다,이 단체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연대하여 활동함으로서 현실을 직시하며  문제를 해결해 나감으로서 영광이 문학의 고장이 될수 있었다.

  영광에 이렇게 많은 단체들이 조직되고 운영되였던것은 시대적 소명에 혼신을 다한 영광인들의 진보적인이고 진취적인 기상에 있었다.민족의 운명을 등불이되고자 하였던 연대와 민족운동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곳이 바로 영광이였던만큼 이제 영광은 지난날의 찬란한 영광을 찾아야할 시점에 와 있다

그것은  호남의 이상향을 넘어  대한민국의 이상향이 되는 지름길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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