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기 외 1편
김분홍
안개가 도처에서 염문을 뿌리고 있다. 나는 안개를 걷고 있다.
우린, 끊임없이 집착하는 사이
그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는다.
만보기를 차고 가을이 온다. 가을은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떠나고 싶은 건 매일 밤 악몽에 지쳐서일까.
명분 없는 애정은 위태롭다.
나는 짙은 안개에 갇혀 있다, 나는 안개를 칼질한다.
안개 속에서 잘린 발들이 걸어 나온다.
바닥을 경청하는 발들.
풀을 벤다. 풀을 퇴비장에 방치한 아버지가 거름을 모은다. 걸음과 거름
이 뒤섞인다.
그가 걸음을 길에 내다 버린다. 걸음 위에 걸음이 쌓여갔다.
나는 도처에서 누군가의 알리바이를 채록하고 있다.
폭염의 입관
폭염에게 산소 호흡기를 씌워줄까 산소 호흡기를 쓰고 숨이 멎은
나처럼, 여긴 춥고 날카롭다.
어디선가 살쾡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천국과 이승의 경계에서, 산 자
와 죽은 자가 만나 사람에서 사람을 빼면 남는 건 육신인가 혼령인가.
알약을 먹고 뒤척이는 열대야의 밤. 알약을 삼킬 때마다 언젠가 알약이
나를 삼킬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염습사가 폭염의 머리를 빗긴다. 뜨거웠던 생을 세척하고 있는 손끝이,
기저귀에 짓무른 엉덩이를 삼베에 싸서 포장한다.
떠난 흔적만 있고 돌아온 흔적이 없는 담쟁이의 외출은 편도다. 누구나
가야 하지만, 아무도 가고 싶지 않은 마지막 여정.
울지 말아요. 나는 그림자를 지운 망자. 사망진단서 한 통에 폭염의 죽
음은 요약되고 국화꽃을 맞이하는 조문객. 매듭 풀린 폭염이 영정사진 속
에서 웃고 있다.
붉은 혀를 내밀고 노을로 산화해버린 맨드라미의 최후인 양, 몇 달 동
안, 물 한 모금 없이, 견딘 폭염의 유언은 무엇일까?
나는 폭염을 만질 수 있고, 폭염은 나를 만질 수 없고, 죽음은 단추를 채
울 수 없어 매듭으로 묶여 있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 관 밖의 나는 관 속의 나를 기웃거린다.
묶여 있던 죽음이 죽음을 푼다.
김분홍 2015년 국제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17년『 시현실 』가을호
첫댓글 안개가 뿌리는 염문에 분홍분홍 물들었어요. 분홍시인이 책임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