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으로 죽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평생 간직
1896년에 의병 김영주가 전사하자 임신 중이던 아내 남자현(1872~1933)은 남편의 피 묻은 옷을 받아들었다. 쟁쟁한 양반집의 딸로 자랐지만 궂은일을 마다않고 돈을 벌어서 삼대독자 유복자를 길러냈고, 시부모까지 먹여 살렸다. 효부로 소문이 나 지역에서 표창까지 받았다. 이렇게 20년 넘게 집안 살림을 맡았으나 마음은 사회 활동에 가 있었다.
전업운동가의 뜻을 이룬 계기는 1919년의 3·1운동이었다. 아들 김성삼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 마흔 일곱의 나이에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1920년대에 운동단체끼리 다툴 때 통합을 호소하는 혈서를 쓰기도 했고, 잡혀간 동지의 옥바라지와 석방운동도 펼쳤다. 13곳의 교회와 20곳 넘는 여성교육기관을 세웠다
남자현은 여성의 몸으로 무장투쟁에도 직접 나섰다. 전지현이 맡았던 영화 <암살>의 모델이다. 그는 1926년 서울에 잠입해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제거할 계획을 짰으나 미수에 그쳤다. 1933년에는 만주국을 찾은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을 시도했다. 권총과 폭탄을 숨긴 채 거지 할머니로 변장했지만, 미행하던 일본 형사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는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하다가 몸이 상했다. 풀려나 숨을 거둔 날이 1933년 8월 22일이다. 남편의 피 묻은 옷을 평생 간직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