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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賊)인가?
이 장 희*1)
[논문개요]
‘향원’은 맹자가 ‘덕의 적’으로 명명된 인물이다. ‘향원’의 어떤 특성이 맹자로 하여
금 그처럼 강도 높은 비난을 하게 되었는지를 궁구해 보는 게 이 논문의 목적이다.
선행 연구의 하나로 이혜경은 그 이유를 향원의 ‘위선성’에서 찾았다. 향원이 완
벽한 덕성을 갖추지 않은 자임에도 불구하고 군자처럼 굴었던 것이 비난의 표적이
라는 것이다. 이혜경은 흥미롭게도 이러한 맹자의 비난이 ‘마음의 윤리’라는 잣대에
기댄 불공정한 비난이라고 비판한다. 완벽한 덕성을 구현했다고 자부하기 힘든 많
은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을 어떤 면에서 더 높
이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학의 역사에서 맹자를 위시한 대부분의 주류 유학자
들은 ‘마음의 윤리’에 기대어 지나치게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강요한 것이 오히려 ‘위
선자’를 양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본 논문은 맹자 ‘향원장’에 대한 치밀한 분석을 토대로 이혜경의 이와 같은 해
석이 잘못되었으며 향원에 대한 맹자 비판의 핵심은 ‘위선성’이 아니라 ‘사이비성’임
을 강조할 것이다. 또 이러한 맹자의 비판 근저에 높여 있는 맹자 윤리학의 성격을
‘덕 윤리학(virtue ethics)’의 시각에서 파악하는 것이 맹자의 향원에 대한 비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주제분류: 중국철학, 윤리학
주 요 어: 맹자, 향원, 마음의 윤리, 결과주의, 덕 윤리, 위선, 사이비
* 경인교대 윤리교육과
80 사회와 철학 제24집
1. 들어가는 말
맹자 진심(盡心) 하 의 ‘향원장’은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장이다.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은 논어와의 관계다. ‘향원장’ 에피소드의 대부분은
논어에서의 이야기를 확장한 것이다. 논어에는 ‘광(狂)자’와 ‘견(獧)자’
및 ‘향원(鄕原)’에 대한 공자의 소략한 인물평이 나온다. 이러한 공자의 인
물평에 대해 만장(萬章)이 질문을 던지면 맹자가 보다 자세히 풀이하여 응
답한 것이 향원장 이므로, 맹자가 논어의 부분 부분에 상세한 주석을
단 장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맹자전체에서 이처럼 논어의 내용과 긴
밀하게 연결된 장도 흔치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점은 향원에
대한 평가이다. 향원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물이었기에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그를 ‘덕의 적[德之賊]’이라고까지 부르며 비난하는가?1) 맹자는 향
원이 특별한 잘못을 저지른 인물의 유형은 아니라고 한다. 불효(不孝)나
불충(不忠)과 같은 유가의 대표적인 덕목을 부정하고 거역한 사례를 들 수
없는 인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
물도 맹자를 통틀어서 드물 것이다.
이 글의 초점은 맹자의 향원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해석해야할 지에 맞
추고자 한다. 맹자의 향원에 대한 평가는 선진 유가의 윤리사상을 이해하
는데 귀중한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향원에 대한
평가의 의미를 밝히는 작업을 위해 우선 ‘향원장’에 대한 분석을 시도할 것
이다. ‘향원장’에 대한 여러 전통적인 주석을 참조하면서 전체적으로 이 장
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 정리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향원
에 대한 공자와 맹자의 평가가 지니는 철학적 의미를 조망하는데 흥미로운
잣대를 제공한 이혜경의 연구2)를 소개할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을 근간으
1) 논어에는 양화(陽貨) 장에서 “선생님께서, ‘향원은 덕의 적이다.’라고 말씀하
셨다.”라는 짤막한 구절이 나오며, 이에 대한 부가적 설명은 찾을 수 없다. “子
曰, 鄕原德之賊也.”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81
로 하는 유가 윤리를 ‘마음의 윤리’로 이해하는 이혜경은 향원에 대한 유가
의 비판에서 향원 보다 유가 자체의 문제점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러한 이
혜경의 관점이 지닌 문제점을 지적한 후, 대안적인 해석으로 ‘덕 윤리적’
해석이 향원에 대한 공자와 맹자의 평가를 이해하는데 보다 적절한 해석임
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할 것이다.
2. 향원장
이 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부분은 만장(萬章)이
논어에서 보이는 공자의 ‘광(狂)’한 자와 ‘견(獧)’한 자에 대한 언급을 중
심으로 맹자에게 그 뜻을 물어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부분에
서 ‘향원(鄕原)’이 등장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향원에 대한 공자의 평가와
광한 자와 견한 자에 대한 향원의 평가를 볼 수 있다. 마지막 부분에서 맹
자는 향원이 왜 ‘덕의 적’으로 규정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
이 장은 ‘광․견자’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향원’에 대한 이야기로 끝
을 맺고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장의 구성에 따라 맹자가 향원을 ‘덕
의 적’으로 설명하게 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1) ‘광견(狂獧)한 자들’
만장이 물었다. “공자께서 진(陳)나라에 계실 적에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
가? 우리 마을의 선비들은 광간(狂簡)하고 진취적이면서도 초심을 잃지 않
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진나라에 계시면서 어찌하여 노
나라의 광(狂)한 선비들을 생각하신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2) 이혜경, 향원을 향한 유가윤리의 비판은 정당한가? 철학사상 제39호, pp.
3-29.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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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의 인물을 얻어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광견(狂獧)한 자와 함
께하리라.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하셨으니, 공자
께서 어찌 중도의 인물을 얻기를 원하지 않으셨겠느냐마는, 반드시 그런 사
람을 얻을 수가 없기에 차선의 인물을 생각하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광한
사람인지 감히 여쭙겠습니다.” “공자께서는 금장(琴張)과 증석(曾晳) 그리고
목피(牧皮)와 같은 사람들을 광한 자라고 하셨다.” “왜 광한 자라고 합니까?”
“뜻이 높고 커서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지만, 그의 평소 행실을 살펴
보면 자신의 말을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자
께서는] 이러한 광한 자를 얻지 못하면, 더러운 짓은 하지 않는 선비를 얻어
함께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견한 자이니, 광한 자 다음가는 사람이다.”3)
만장이 처음 던진 질문은 공자가 왜 진나라에 있으면서 노나라의 광(狂)한
선비를 생각하여 돌아가겠다고 하였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은 논어
공야장(公冶長) 과 자로(子路) 에서의 공자의 발언4)을 취합한 내용을 토대
로 만장이 재구성한 것이다. 다시 말해 만장이 처음 던진 질문은 논어의
두 구절을 정확히 인용한 것이 아니다.5) 이에 대해 맹자는 만장이 인용하다
3) 맹자, 진심장 하 , “萬章問曰: 孔子在陳曰: 盍歸乎來! 吾黨之士狂簡, 進
取, 不忘其初. 孔子在陳, 何思魯之狂士? 孟子曰: 孔子不得中道而與之, 必也
狂獧乎! 狂者進取, 獧者有所不爲也. 孔子豈不欲中道哉? 不可必得, 故思其次
也. 敢問何如斯可謂狂矣? 曰: 如琴張̖ 曾晳̖ 牧皮者, 孔子之所謂狂矣. 何
以謂之狂也? 曰: 其志嘐嘐然, 曰古之人, 古之人. 夷考其行而不掩焉者也. 狂
者又不可得, 欲得不屑不潔之士而與之, 是獧也, 是又其次也. ”
4) 논어 공야장(公冶長) , “子在陳曰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不知所
以裁之.” 자로(子路) , “子曰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 進取. 狷者,
有所不爲也.”
5) 주희가 지적하고 있듯이 만장의 위 질문은 논어의 어떤 구절도 정확히 인용한
것이 아니다. 朱熹, 孟子集注, “此語, 與論語小異.” 공야장 에서의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실 적에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우리 마을의 선비들은 광간하
다.”와 자로 에서의 “광자는 진취적이다.”가 합성되었고, “초심을 잃지 않았다
[不忘其初]”는 찾을 수 없는 표현으로 주희에 따르면 “능히 옛 것을 고치지 못
하는 것[不能改其舊也]”을 의미한다.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83
만 자로 장에서의 공자의 말을 마저 가져온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있다.
공자가 오랜 주유 끝에 드디어 자신의 정치적 뜻을 접고 선생으로서의
삶을 결심하는 대목이 바로 진(陣)나라에서의 언급이다.6) 공자의 평가에
따르면 그의 고향의 젊은이들은 “광간(狂簡)하고, 학문과 문장은 빛나게 이
루었으나[斐然成章], 그것을 어떻게 마름질할지 모른다.”7) 노나라의 젊은
이들이 ‘광간’하고 ‘비연성장’하다는 것은 이들이 공자의 가르침을 받을 후학
으로서의 바탕과 재능을 갖추고 있음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러한 재질만으로는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데에 한계가 있으며 스승으로부터
‘마름질하는 방법’을 배워야 비로소 자신의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 따
라서 ‘광간’하고 ‘비연성장’하다는 것은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특
징들이다. ‘비연성장’은 대부분의 주석에서 문채나 겉모양이 제법 잘 꾸며져
있는 모습을 가리키는 것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광간’의 뜻과 직접적인 연
관성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8) 즉 ‘광간’하고 ‘비연성장’하다라고, 순접으
로 두 특징이 나열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공자가 귀하게
여긴 후학의 가장 특징적인 면모는 ‘광간’한 데서 찾아야만 할 것이다.
6) 주희는 공자가 더 이상 도(道)가 행해질 가망이 없는 세상에서의 주유를 끝내
고 후학들을 통해 도를 전승시키고자 결심한 대목으로 설명한다. 또 자로장에
서의 ‘광’한 자에 대한 언급과 연결하여 ‘광’한 자들이 중도를 얻지 못한 체 이
단에 빠질 것을 두려워하여 돌아가기로 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논어집주(論語
集註) 공야장 , “此孔子周流四方, 道不行而思歸之歎也. 吾黨小子, 指門人之在
魯者. 狂簡, 志大而吳於事也. 斐, 文貌. 成章, 言其文理成就, 有可觀者. 裁, 割
正也. 夫子初心, 欲行其道於天下, 至是而知其終不用也. 於是始欲成就後學, 以傳
道於來世. 又不得中行之士而思其次, 以爲狂士志意高遠, 猶或可與進於道也. 但恐
其過中失正, 而或陷於異端耳, 故欲歸而裁之也.”
7) 논어 공야장(公冶長) , “子在陳曰歸與歸與, 吾黨之小子狂簡, 斐然成章不知所
以裁之.”
8) 논어집주, “斐, 文貌. 成章, 言其文理成就有可觀者.” 양백준은 문채에 한정하
여 “文彩又都斐然可觀”으로 풀이하고 있다. 楊伯峻,論語譯注, 51쪽. 정현(鄭
玄)만이 “妄穿鑿以成文章”이라 하여 망령되이 왜곡하여 문장을 이루었다고 부정
적으로 풀이하고 있지만 이는 정수덕(程樹德)의 말대로 대부분의 주석가가 동
의하지 않는 해석이다. 정수덕, 논어집석(論語集釋) 一, 344-345쪽 참조.
84 사회와 철학 제24집
‘광간’에 대한 설명은 자로 에서 공자 자신이 직접 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광자(狂者)’ 뿐 아니라 ‘견자(狷者)’의 등장을 목도하게 된다.9) 공
자는 ‘중(中)’을 얻은 이들을 얻지 못하였기에 그 다음의 재질로 평가될 수
있는 이들로 ‘광자’와 ‘견자’를 꼽으며 이들의 특징을 ‘나아가 취하는[進取]’
태도와 ‘하지 않는 바가 있음[有所不爲]’으로 설명하고 있다. ‘광자’에 대한
공자의 직접적인 설명은 ‘진취(進取)’가 다인 셈이다. 이와 같은 소략한 설
명이 만장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의 인생행로를 바꾸는
데 배경을 제공하는 이들 ‘광자’는 도대체 어떠한 인물형인가?
만장은 맹자에게 보다 구체적인 ‘광자’의 예를 요구한다. 맹자는 ‘금장
(琴張),’ ‘증석(曾晳),’ ‘목피(牧皮)’를 그 예로 제시하는데 이들 모두 어떤
인물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금장은 좌전(左傳과 장자(莊子)에 같
은 이름이 보이지만 그 내용만으로는 동일인이지 또 어떤 인물인지를 확증
하기 힘들며,10) 목피의 경우 어떤 사료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증
석의 경우 논어 선진(先進) 에서 자로, 염유, 공서화 등과 등장하여 흥
미로운 발언을 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증석은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
이 있을 경우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쐬다가 시를 읊으면서 돌
아오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공자는 이를 가장 높이 평가하였다.11) 어떤
9) 정수덕에 따르면 논어에서의 ‘견(狷)’은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보이지
않는 자로서맹자에서의 ‘견(獧)’으로 읽어야 하며, 또 ‘간(簡)’은 ‘견(獧)’과
비슷한 음으로 서로 바꾸어 볼 수 있으므로 공야장 에서의 ‘광간’을 ‘광견(狂
獧)’으로 읽어야 한다고 한다고 한다. 정수덕, 논어집석 一, 345쪽 참조. 우
리는 정수덕의 견해를 받아들여 ‘간(簡)’에 대하여는 특별히 따로 논의하지 않
고 ‘광(狂)’과 ‘견(獧)’ 자(字)에 대한 논의에 집중할 것이다.
10)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 편에 나오는 일화에서는 친구인 자상호(子桑戶)
가 죽어 상(喪)을 치르는 곳에서 노래를 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공자의
예(禮)와는 다른 차원의 예 개념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
는 ‘광(狂)한’ 자를 단순히 유학을 따르는 무리에 한정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보게 된다. 금장이 정말 장자에 나오는 인물과 동일인이라면 도가 계열의
인물일지라도 그 뜻이 크고 순정한 바가 있으면 ‘광자’로 간주할 수 있다고 맹
자가 보았다는 것인데 이를 확인할 길이 없다.
11) 논어 선진 , “子路曾晳冉有公西華侍坐子曰以吾一日長乎爾毋吾以也居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85
정치적 야심도 드러내지 않고 소박하게 삶을 즐기는 여유 자적한 태도를 공
자가 왜 높이 샀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며, 이에 따라 증석의 발언에 대
한 이해도 여러 갈래이다. 일반적인 해석은 다른 이들이 도가 행해지지 않는
세상에서 정치의 야심을 드러낸 반면 증석만은 선왕의 도를 지키는데 뜻을
둔 것으로 해석하여 공자가 이를 인정했다는 것이다.12) 이러한 해석은 다시
‘광자’로서 증석이 지목된 이유로 설명되기도 하기 때문에 순환 논증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더 설득력 있는 대안을 찾기도 힘들다.
이처럼 이 인물들의 성격을 통해 추론하는 것이 난망하다면, 우리는 논
어의 다른 구절에서 ‘광자’에 대한 해석을 유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꼼꼼
히 ‘향원장’을 분석한 바 있는 박성규는 태백 16장의 “광자이면서 직(直)
하지 못하다면 … 나는 모르겠다.”와 양화 8장의 “강(剛)의 덕목을 좋아
하면서 학문을 멀리하면 광(狂)의 폐단에 빠진다.”라는 대목을 가져와 광
을 직한 성품 및 강한 성품과 연결시킨다. 박성규는 “광자는 비록 중도(中
道)의 길을 온전히 실천하지는 못하지만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뜻을 크
게 가지고 중도를 향해 진취적 기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선비”13)이기 때문
에 중도의 선비 다음 가는 최고의 선비라는 평가를 얻는다고 본다.14)
이러한 논어에서의 내용을 염두에 두었을 맹자는 ‘광자’의 장점보다 그
한계가 무엇인지를 지적한다. ‘광자’는 뜻은 크지만 그 뜻을 실행해 옮기지
는 못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광자’의 다음 등급의 인물로
‘견자’를 소개한다.
그렇다면 ‘견자(獧者)’는 어떤 인물형을 가리키는 것일까? 논어에서는
공자가 “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有所不爲]”라고 말한 인물인데, 맹자는 “더
러운 짓은 하지 않는 선비[不屑不潔之士]”로 풀이하여 대답한다. 맹자의
則曰不吾知也如或知爾則何以哉… 點爾何如鼓瑟希鏗爾舍瑟而作對曰異
乎三子者之撰子曰何傷乎亦各言其志也曰莫春者春服旣成冠者五六人童
子六七人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夫子喟然嘆曰吾與點也.”
12) 동양고전연구회,논어, 159쪽.
13) 박성규, 공자․맹자의 향원비판 태동고전연구 17, p. 186.
14) 박성규, pp. 18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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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더 풀어 보면 ‘깨끗하지 않는[不潔]’ 것을 ‘불설(不屑)’하는 선비가 되
는데, 공손추 상 에서 ‘불설’은 의롭지 않은 군주나 조정을 위해서는 절
대로 일하지 않는 백이(伯夷)의 태도를 묘사할 때 사용된 표현이다.15) 이
러한 백이의 태도를 맹자는 ‘마음이 좁다[隘]’고 비판하며 군자가 따를 태
도가 아니라고 평가하는데,16) 여기서 우리는 맹자가 왜 ‘견자’를 ‘광자’보
다 다음 등급의 인물형으로 보았는지 추론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완전히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지만 ‘광자’는 강직한 성품을 바탕으로 높은 뜻을 추
구하기 때문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중도의 선비로 나아갈 수 있는 반면에,
‘견자’는 지나치게 몸을 사려 깨끗하지 않은 일에는 발도 담그려 하지 않는
결벽증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나아갈 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2) 향원
“공자께서는 ‘내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유감
스러워 하지 않을 자는 바로 향원이다. 향원은 덕(德)을 해치는 자이다.’라
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을 향원이라 합니까?”
“‘[광한 자는] 왜 저렇게 잘난 척하는가? 말은 행실을 외면하고, 행실은
말을 외면하는 데도 입을 열었다 하면 옛 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는가.’하
고 ‘[견한 자는] 어찌 혼자서만 도도하게 살아가는고?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세상과 어울려 사는 것이 좋은 것이지.’하면서 자신은 음흉하게 세상에 아첨
하는 자가 바로 향원이다.”17)
15) 맹자, 공손추 상 , “伯夷, 非其君, 不事, 非其友, 不友. 不立於惡仁之朝, 不
與惡人言, 立於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坐於塗炭. 推惡惡之心, 思與
鄕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 是故諸侯雖有善其辭命而至者, 不受
也. 不受也者, 是亦不屑就已.”
16) 상동, “伯夷隘, 柳下惠不恭. 隘與不恭, 君子不由也.”
17) 맹자, 진심장 하 , “孔子曰: 過我門而不入我室, 我不憾焉者, 其惟鄕原乎!
鄕原, 德之賊也. 曰: 何如斯可謂之鄕原矣? 曰: 何以是嘐嘐也? 言不顧行,
行不顧言, 則曰: 古之人, 古之人. 行何爲踽踽涼涼? 生斯世也, 爲斯世也, 善斯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87
공자의 발언으로 인용되고 있는 구절에서 우리가 논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이다.”라는 마지막 구절뿐이다.18) 향원
이 공자가 전혀 반겨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과 그가 덕의 적이라는 평가
사이에는 다소의 간격이 있어 보이지만, 공자가 향원을 가장 경계해야 할
인물의 유형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19) ‘광
자’와 ‘견자’는 비록 ‘중도의 선비’는 아닐지라도 공자가 인정하는 덕성을 지
닌 인물인 반면, 향원은 덕을 해치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20)
향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인물인지는 향원이 ‘광자’와 ‘견자’를 평가하는
발언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향원은 ‘광자’란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할
높은 뜻만 외치는 무능력한 인물이고, ‘견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를 파악 못하고 자신만 깨끗한 척하는 위선적인 인물로 평가하는데, 이런
향원을 두고 맹자는 그야말로 세상 시류에 아첨하는 비굴한 인물이라고 평
한다. 향원이 ‘광자’와 ‘견자’를 평가하는 태도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그
가 세속의 잣대 이외의 다른 삶의 척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可矣. 閹然媚於世也者, 是鄕原也. ”
18) 논어 양화(陽貨) , “鄕原, 德之賊也.”
19) 향원이 ‘광자’나 ‘견자’와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인물유형을 가리킨다는 점에 대해 주석가들 사이에 많은 이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황간(皇侃)이 장빙(張憑)을 인용하여 공자와 동향인 원
양(原壤)을 가리킨다는 해석을 내놓았으나, 하안(河안)이나 주희는 ‘향(鄕)’과
‘원(原)’을 마을이나 동네의 어떤 종류의 인물로 해석하며, D. C. Lau도 ‘동
네의 정직한 사람(village honest man)'으로 번역한다. 맹자의 설명에서도
향원을 어떤 특정 인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될 부분은 거의 없는 듯하다.
다음을 보라. 동양고전연구회,논어, pp. 248-249. D. C. Lau, Mencius,
p. 202.
20) 초순(焦循)은 순자(荀子)를 인용하면서 ‘덕에 해가 되는 것(害於德)’을 덕의
적이라고 일컫는다고 풀이한다. 맹자정의(孟子正義) 상, p.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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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덕의 적
만장이 말했다.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점잖은 사람[原人]’이라고
한다면 그는 어디서든 ‘점잖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
자께서 그를 일컬어 왜 ‘덕을 해치는 자’라고 하시는 겁니까?”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풍자하려 해도 풍자할 것이 없다. 유행하는 풍속에 동화
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면서도 충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인 것처럼 굴고
청렴결백한 듯이 행동하여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사고, 스스로는 옳다고 여
기지만 더불어 요순의 도에 들어서지 못한다. 그러므로 ‘덕을 해치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공자께서는 ‘같은 듯하지만 아닌 것’을 싫어하셨으니, 가라지
(피)를 싫어하는 것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아첨하는 자를 싫어하
는 것은 의(義)를 어지럽힐까 걱정해서다.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 자를 싫어
하는 것은 믿음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정(鄭)나라 소리를 싫어하는 것은
바른 음악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다. 자주색을 싫어하는 것은 붉은 색을 어
지럽힐까 걱정해서요, 향원을 싫어하는 것은 덕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다.‘라
고 하셨다. 군자라면 떳떳한 도로 돌아갈 뿐이다. 떳떳한 도가 바르게 되면
뭇 백성이 흥기하고, 뭇 백성이 흥기하면 사특함이 없어질 것이다.21)
주희는 ‘원(原)’을 ‘근후(謹厚)’함의 명칭이라고 한다.22) 다시 말해 향원
은 마을 사람들이 ‘근후’하다고 또는 ‘점잖다’고 평가하는 사람인데, 왜 공
자는 그를 비난하는가?23) 이러한 만장의 질문에 대한 맹자의 답변은 언뜻
21) 맹자, 진심장 하 , “萬子曰: 一鄕皆稱原人焉, 無所往而不爲原人, 孔子以爲
德之賊, 何哉? 曰: 非之無擧也, 刺之無刺也; 同乎流俗, 合乎汙世; 居之似忠
信, 行之似廉潔; 衆皆悅之, 自以爲是, 而不可與入堯舜之道, 故曰德之賊也. 孔
子曰: 惡似而非者: 惡莠, 恐其亂苗也; 惡佞, 恐其亂義也; 惡利口, 恐其亂信
也; 惡鄭聲, 恐其亂樂也; 惡紫, 恐其亂朱也; 惡鄕原, 恐其亂德也. 君子反經而
已矣. 經正, 則庶民興; 庶民興, 斯無邪慝矣. ”
22) 맹자집주, “原亦謹厚之稱而孔子以爲德之賊故萬章疑之.”
23) 공자 자신은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답변을 내놓았다. 논어 자로 , “子貢問曰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89
납득하기 쉽지 않다. 향원은 비난할 거리도 마땅치 않고 충직하고 신뢰를
주며 청렴결백하게 행동하여 많은 사람의 호감을 사는 인물이다. 그런 그
가 스스로를 옳다고 여긴다고 해서 왜 잘못일까? 하지만 맹자는 향원이
요순(堯舜)의 도(道)를 함께할 인물이 아니며 덕의 적이라는 평가가 자연
스러운 듯이 말한다. 아마도 이 말로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았음
을 스스로도 깨달았을 맹자는 공자를 다시 인용하면서 보다 자세히, 또 핵
심적으로 왜 향원과 같은 인물이 위험한지를 설명한다. ‘같은 듯하지만 아
닌’ 곧 ‘사이비(似而非)’이기 때문에 향원이 문제라는 것이다. 가라지(피),
말재주가 있는 자, 정나라의 음악, 자주색 등을 미워하는 이유와 향원을
미워하는 이유는 비유컨대 같다.24) 이것들은 모두 ‘같은 듯하지만 아닌’
‘사이비’로 진실로 가치 있게 여겨야 하는 것과 혼동을 주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고 공자가 미워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향원이 덕의 모범을 구
현한 자 곧 군자로 여겨질 수 있는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경계하고 미워하
는 것이다. 그러나 무릇 그가 진정 군자라면 시속의 흐름에 영합하고 겉으
로 보기에 군자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도(道)로 돌아가 ‘인의예지’의
덕25)으로 백성들을 지도하고 바르게 하면, 백성들은 이 군자의 덕에 감화
되어 어떠한 사특함도 없어질 것이라는 말로 이 장을 마감한다.
향원이 어떤 인물 유형을 가리키느냐에 대해26) 박성규는 ‘타락한 군자’
鄕人皆好之何如. 子曰未可. 鄕人皆惡之何如. 子曰未可也. 不如鄕人之善者
好之, 其不善者惡之.” 모든 마을사람의 평판은 믿을 수 없다. 선한 사람이 좋
아하고 선하지 않은 사람의 미움을 받는 것이 ‘선한 자’의 드러내는 훨씬 좋은
기준이다
24) 이 부분의 일부분의 표현을 논어에서 찾을 수 있다. 논어 양화 , "子曰
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
25) 주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주석에서 ‘경’은 ‘상(常)’으로 읽는데, 이 ‘상’을 맹자
정의에서는 ‘인의예지’로 풀이한다. 맹자정의상, p. 1033, “經, 常也. 反,
歸也. 君子治國家, 歸其常經, 謂以仁義禮智道化之, 則衆民興起而家給人足矣.”
26) 신정근은 향원을 소인의 극단적인 예로 본다. 군자가 철저히 사적 이기심과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공적으로 투명한 인간이라면, 소인은 자신의 사적 이익
을 챙기기 위해 자신을 드러낼 수 없는, 따라서 안과 밖이, 얼굴빛과 속마음
90 사회와 철학 제24집
로 해석한다. 향원은 “당시 현실 사회 속에서는 실제로 군자로 통하는 그
런 인물”27)이란 것이다. 박성규는 그 구체적 논거로 ‘향원장’ 말미에 갑자
기 등장한 ‘군자’라는 말을 든다. 이 ‘군자’가 주어인 마지막 문장은 전체
문맥에서 매우 어색할 수 있는데, ‘군자’를 향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
여 “떳떳한 도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는 것으로 해석하면 자연스럽게 전체
적인 맥락과 이어지게 된다는 것이다.28) 하지만 향원이 “군자와 무관한
제 3의 인물 유형이 아닌” ‘타락한 군자’로 해석되어야만 할 논거로서는 다
소 미약해 보인다. ‘향원장’ 전체에서 ‘군자’라는 용어는 사용되지 않았지만
‘광자’ ‘견자’ ‘중도의 선비’ 그리고 ‘향원’이라는 인물형을 다루는데 그 배경
에는 ‘군자’라는 인간상이 자리 잡고 있음을 가정하는 것이 그리 억지스러
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물형들을 논의하는 맨 마지
막에 무릇 ‘군자’라면 어떠해야할 지에 대한 일반적 진술이 자리 잡고 있다
고 해서 어색할 것은 없는 것이다.
향원이 ‘타락한 군자’인지 아니면 제 3의 유형인지가 ‘향원장’ 해석에 핵
심적인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중요한 것은 향원이 공자나 맹자의 윤
리관에 비추어 볼 때 가장 위험한 인물 중 하나로 그려지는 이유일 것이
다. 박성규는 향원을 ‘타락한 군자’로 이해할 경우 향원에 대한 비판은 “유
학의 선비와는 관계없는 그저 어떤 소인배나 덜된 군자 혹은 타락한 지식
인에 대한 비판에 불과한 것이 아니[며] … 세상에 도를 실현하겠다고 나
선 모든 유학의 지식인을 향한 심각한 가르침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던”29)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거와 이
유를 앞서 제시한 것 이상으로 제시하지는 않는다.30)
이 다른 사람이다. 향원은 이기적이고 사적인 목적을 위해 군자를 흉내 내는
대표적인 소인이라는 것이다. 신정근, 공자와 장자는 무아론자인가? 유교
문화연구 권15, 2010, pp. 27-56.
27) 박성규, p. 198.
28) 박성규, pp. 198-201.
29) 박성규, p. 203.
30) 박성규는 이 이외에 향원장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즉 향원장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91
3. ‘마음의 윤리’
향원이 어떤 종류의 인물인가에 대한 논의와 직접 관련 맺고 있으면서
도 더 근본적이라 할 수 있는 문제는 향원을 ‘덕의 적’이라고 비판하는 공
자나 맹자의 입장이 어떤 윤리적 입장에 근거한 것인가라는 문제일 것이
다. 이에 대해 이혜경은 향원을 향한 유가윤리의 비판은 정당한가? 31)라
는 글에서 향원에 대한 공자와 맹자의 비난은 그들이 추구하는 윤리적 입
장이 ‘마음의 윤리’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혜경은 “마음을 윤리적 판단의 대상으로 하는 유학을 ‘마음의 윤리’로
명명하고, 행위를 윤리적 판단의 대상으로 하는 윤리체계를 ‘행위의 윤리’라
고 명명한다.”32) 향원을 비난하는 공자와 맹자는 ‘마음의 윤리’에 기댄 것이
다. ‘행위의 윤리’의 잣대로 보면 향원은 긍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마음
의 윤리’는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무랄 데 없지만 ‘드러내지 않는 속내’가
따로 있는 사람”33)인 향원을 비난할 수밖에 없다면, 행위와 행위로 말미암
은 결과를 윤리적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행위의 윤리’의 관점에서는 ‘드러나
지 않은 속내’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나
무랄 데 없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향원은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혜경은 공맹 유학과 이를 계승한 주류 유학이 ‘마음의
윤리’를 근간으로 한 윤리체계라면, 순자와 정약용의 유학은 유가 전통 안에
이 맹자 텍스트의 가장 뒤에 자리 잡고 있고 논어에서도 향원을 직접 언
급하는 경우는 한 번뿐이지만 향원과 유사한 인물형에 대한 비판은 곳곳에 산
재해 있다는 점에서 공자와 맹자 사상에서 향원 비판이 갖는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순자 유좌(宥坐) 편과 공자가어 시주(始誅) 편
에 나오는 공자의 소정묘 처형 고사에서 나온 소정묘란 인물과 향원 사이의
유사성을 탐색해 보는 것도 향원이란 인물형에 대한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라
고 제안한다. 박성규, pp. 198-201.
31) 철학사상 제39호, pp. 3-29. 2011.
32) 이혜경, pp. 4-5.
33) 이혜경, p. 5.
92 사회와 철학 제24집
서 ‘행위의 윤리’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한다. ‘성선(性善)’에 기대
지 않는 순자는 ‘이기적인’ 마음을 전제로 ‘선(善)’을 또는 “선한 행위를 창출
하려”34) 했던 사상가라는 점에서, 또 인의예지를 내재적 덕성으로서가 아니
라 실천을 통해 실현되는 덕성으로 강조한 정약용은 “선이 성립하는 지점은
마음이 아니라 행위”35)라는 것을 강조한 사상가라는 점에서 이들을 ‘행위의
윤리’에 기댄 유가의 사상가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혜경은 또 향원이 ‘행위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긍정될 수 있을 뿐 아니
라 ‘마음의 윤리’라는 관점에서도 옹호될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성인군
자의 전일하고 완벽한 마음을 갖추지 못했지만 군자와 성인을 희구하며 노
력하는 보통의 유학도들은 “평생 향원일 수밖에”36)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는 것이다. ‘마음의 윤리’의 관점에 기댄 유학이 이상적인 성인군자의 상에
사로잡혀 향원을 비난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단계의 부정이며, 하고자 하는 의도와 하는 행위 사이의 간극이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보통 사람의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혜경은 이러한
편협한 ‘마음의 윤리’는 궁극적으로 ‘위선’이 ‘선’으로 나아갈 길을 막아버려
‘위선’을 더욱 증폭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비판한다.
이혜경의 흥미로운 이와 같은 독법을 검증하기 위해서는 우선 ‘향원장’에
서의 ‘향원’이 이런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적절한지부터 따져 물어져야
할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혜경이 ‘마음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맹자가 향원
을 비판하고 있다는 지적은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나기에 향
원은 “비난하려 해도 비난할 것이 없고 풍자하려 해도 풍자할 것이 없으
며,” “충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인 것처럼 굴고 청렴결백한 듯이 행동하여
여러 사람에게 호감을 사는” 인물이여서 이런 인물을 비난할 근거를 행위
적 측면에서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외적인 행위에서 비난할
거리를 찾지 못했는데도 그를 비난한다는 것은 곧 그의 내면에 대한 비판
34) 이혜경, p. 12.
35) 이혜경, p. 10.
36) 이혜경, p. 21.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93
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서 향원에 대한 비판의
근거가 되는 구절들을 살펴보자.
우선 향원은 ‘광자’와 ‘견자’의 행태를 비웃는 인물로 나온다. ‘광자’가 말
과 행실이 일치하지 않으면서도 높은 뜻을 말하고 ‘견자’는 혼자 도도한 척
하지만 세상과 어울려 살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향원은 평가를 내린다. 곧
세상과 어울려 사는 것이 좋다는 태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태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그를 ‘점잖다’고 평가하고 호감을 드러내지만,
“유행하는 풍속에 동화하고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평가를 맹자로부터는 받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자’와 같이 높은 뜻
을 천명하지도 않고 ‘견자’와 같지 옳지 않은 일에는 절대로 발을 담그지
않는 결백한 태도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다른 사람들의 호감을 살 정
도의 행동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스스로를 옳다고 여기는” 인물임이 그의
행동과 태도, 언행 등의 외적인 모습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인물인 것이다.
정말로 ‘외적 행위’와 ‘내면의 마음’을 엄격히 구분하여 따지고 들면 우리
는 타인의 ‘내면’을 알 도리가 없으며, 따라서 그가 두 마음을 가진 향원인
지 전일한 마음을 가진 군자 성인인지도 분간할 도리가 없다.37) 그렇기 때
문에 외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내면만으로는 향원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조
차도 가지기 힘들 것이다. 맹자가 향원을 비판한 것은 따라서 ‘엄연(閹然)’
한 태도 그 자체에만 기댄 것이기보다는 ‘광자’도 ‘견자’도, 더 나아가 ‘중도
의 선비’도 결코 아닌 향원의 행태 및 행위 전체를 겨냥한 것으로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의 겉과 속이 다른 ‘위선성(僞善性)’에 비판의 초점이 맞추
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군자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오인하기 쉬운 그의
‘사이비(似而非)’성이 비판의 핵심적인 대상인 것이다. 이혜경의 독법의 문
제는 이 ‘사이비성’을 외적 표현과 다른 속내를 가진 ‘이중성’과 같은 것으로
본 것인데, ‘사이비성’은 비슷하지만 아닌 유사성일 뿐 겉과 속이 다른 위선
37) 이 점을 이혜경도 지적하고 있지만 그는 “외적 표현들은 마음과 별도로 연출
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드러난 것만을 보면 똑같이 ‘선한 사람’”으로 여겨지
는 인물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있으며 향원이 바로 이처럼 외적 표현들을 마
음과 별도로 연출한 인물로 본다. 이혜경, pp. 6-7.
94 사회와 철학 제24집
적 이중성이 아님은 ‘사이비’를 언급하는 구절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공자께서는 ‘같은 듯하지만 아닌 것’을 싫어하셨으니, 가라지(피)를 싫어
하는 것은 벼싹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요, … , 정(鄭)나라 소리를 싫어하는
것은 바른 음악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다. 자주색을 싫어하는 것은 붉은 색
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이다.
‘가라지’와 ‘벼싹,’ ‘정나라 소리’와 ‘바른 음악,’ ‘자주색’과 ‘붉은 색’의 대
비는 일종의 진본과 유사본의 관계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향원을
싫어하는 것은 덕을 어지럽힐까 걱정해서”라는 것은 진본과 혼동을 주는
유사본에 대한 경계이자 혐오인 것이지 위선적 이중성에 대한 언급으로 보
기는 어렵다.38)
박성규로 하여금 향원을 ‘타락한 군자’로 해석하게 한 마지막 구절도 향
원 비판의 초점이 ‘사이비성’에 있음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 이 구절을
다시 잘 살펴보면, 앞의 향원의 ‘사이비성’에 대한 경계와 우려의 문장 다
음에 이 모든 논의의 배경이라 할 ‘사이비’가 아닌 진정한 군자에 대한 이
야기가 나온다. 곧 “군자라면 경(經)에 돌아갈 따름이다(君子反經而已矣).”
라는 언급이 그것이다. ‘반’은 주희의 경우 ‘회복[復]’으로 초순의 경우 ‘귀
(歸)’로 읽으며, ‘경’은 주희나 초순 모두 ‘상(常)’으로 읽고 있다. ‘복’과 ‘귀’
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상’이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문제인데, 주희는 ‘만
세에 변치 않는 상도[萬世不易之常道]’라 하여 ‘상도’의 내용을 적시하고
38) ‘사이비성’에 ‘이중적 위선성’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엄연
(閹然)’한 태도는 말 그대로 ‘내시 같이’ 무언가를 ‘가리고 있는 듯한’ 태도이고,
향원의 태도도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여지가 있기
는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이비를 곧 위선으로 읽는 독법은 위험하다.
위선이라 말하기 위해서는 향원의 의도가 중요하지만 맹자의 초점은 향원의 의
도가 아니라 향원의 겉으로 드러나는 군자와의 유사성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향원이 어떤 의도를 가졌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향원으로 말미암아 군자됨의 기준이 흐려지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95
있지는 않으나 다음과 같은 초순의 풀이를 크게 탓하지 않을 것 같다.39)
군자가 나라와 가족을 다스림에 그 ‘상경(常經)’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컬
어 ‘인의예지’의 도로 이들을 감화시키면 백성은 흥기하고 가족은 모두 만족
할 것을 일컫는 것이다(君子治國家, 歸其常經, 謂以仁義禮智道化之, 則衆民
興起而家給人足矣).40)
군자가 ‘경’을 회복하거나 ‘경’으로 돌아가고 ‘경’이 바르게[正] 되면 서민
이 흥기하게 된다는 구절의 의미를 초순은 ‘인의예지’의 도(道)로 서민을 감
화시키면 서민이 흥기하고 만족할 것으로 푼 것이다. 따라서 ‘경’은 ‘인의예
지’의 도가 되는 셈이다. 군자가 ‘인의예지’의 덕을 회복하거나 또는 그 덕으
로 돌아가 백성을 감화시키면 백성이 그에 화답할 뿐 아니라 ‘사특(邪慝)’함
도 없어질 것이라는 구절로 이 장의 전체가 종결되고 있다. 군자의 덕을 바
로 세우면 백성이 화답하고 ‘사특’한 사이비가 발붙이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
로 읽는 게 합당할 것이다. 우리가 애써 다시 이 구절을 분석한 이유는 내
면적 덕성과 외부적 행위 또는 행위의 결과가 구별되지 않음을 보이기 위해
서이다. 내면적 덕성은 타인의 감화라는 외부적 결과로 나타날 때에만 진정
한 덕성으로 평가된다. 그렇기 때문에 향원은 아무리 겉으로 비슷한 행태를
보인다고 하여도 백성의 흥기를 이끌어낼 감화력을 가지지 못하며 이를 통
해 우리는 진정한 군자와 사이비 향원을 구별할 수 있는 것이다.
4. 덕 윤리학적 접근
‘마음의 윤리’로 향원에 대한 맹자의 비판을 해석하는 것이 부적절하게
39) 주희의 경우 맹자집주 진심장 하 의 해당구절을, 초순의 경우는 주26)을
보라.
40) 주 26)을 보라.
96 사회와 철학 제24집
여겨지는 이유를 ‘향원장’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혜
경의 제안은 단지 향원장에 대한 분석의 문제만이 아니라 유가 윤리를 바
라보는 적절한 시각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문제와 연
관되어 있다. 과연 유가 윤리를 ‘마음의 윤리’와 ‘행위의 윤리’로 대별하여
바라보는 것이 적절한지, 만일 적절하지 않다면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적절할지에 대한 문제까지도 고려해보게 하는 것이다. 필자는 공맹
윤리를 ‘마음의 윤리’로 환원시키는 것에 의구심을 가진다. 후대 유가의 흐
름은 차치하고라도 선진 유가, 그 중에도 공자와 맹자만을 두고 볼 때 이
들을 ‘내면의 동기’와 ‘행위 및 행위의 결과’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전자만을
중시한 사상가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마음의 동기’와 ‘행위의 결과’를 윤리적 판단과 평가
의 중심에 둔 대표적인 서양의 규범윤리학은 ‘의무론(deontology)’과 ‘결
과주의(consequentialism)’이다.41) 의무론적 관점에서 옳음은 행위의 결
과적 차원이 아니라 행위의 동기적 차원에 따라 결정되며, 결과주의적 관
점에서 옳음은 행위의 결과가 목표로 하는 사태를 얼마나 극대화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이렇게 보면 이혜경의 ‘마음의 윤리’는 ‘의무론’에 ‘행위의
윤리’는 ‘결과주의’에 해당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혜경은 ‘행위의 윤
리’는 결과주의의 가장 대표적 입장이라 할 수 있는 ‘공리주의’의 언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마음의 윤리’는 ‘의무론’의 범주로 설명하지 않는다. 마음
이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라는 것 이상의 내용을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
이다. 의무론의 경우, 예를 들어 대표적인 칸트 윤리학의 경우를 보면 보
편화 가능한 정언명법이 곧 나의 의무가 되고 그것에 따른 행위가 옳은 행
위가 된다고 한다. 이혜경의 ‘마음의 윤리’에서는 행위나 행위의 결과와 상
관없이 내면의 마음만이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라는 것 이상의 진술을 찾아
보기 힘들다. 어떤 행위로 드러나기 이전의 마음의 상태가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반성적으로 들여다보는 경우를
41) 현대 영미윤리학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윌리엄 K. 프랑케나의 윤리학과
근자에 나온 것으로 피터 싱어가 엮은 규범윤리의 전통을 참조할 수 있다.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97
제외하고는 성립하기 어렵다. 그보다는 그 행위가 어떤 마음의 결과인지를
통해 그 마음이 판단될 것이다. 행위로 드러날 때만 객관적인 판단의 대상
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각을 다소 전환하여 ‘마음의 윤리’를 ‘의무론’이 아니라 규범 윤리학의
또 다른 형태를 대변하는 ‘덕 윤리학’의 관점에서 접근해 볼 수도 있을 것
이다. 한편으로는 ‘마음’을 ‘품성’으로 이해할 때 ‘마음의 윤리’는 덕 윤리학
에 가까운 관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덕 윤리학에서도 ‘위선’은 유덕한
품성에서 비롯된 행태가 아니기 때문에 비판받을 것이다. 하지만 ‘품성’ 또
는 ‘덕’은 마음과 행위의 이분법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내 마음의 갈등과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선한 행위를 한 사람을 일
방적으로 탓하지도 않을 것이다. 훌륭한 덕성을 갖추기 위한 단계로서 충
분히 긍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42) 덕 윤리학은 개별 행위 각각이 독립적
으로 옳고 그른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의무론이나 결과주의를 비판하고 어
떤 품성을 지닌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에 초점을 둔 규범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혜경의 ‘마음의 윤리’라는 관점은 서양의 규범
윤리학의 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이론적 틀을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맹유학을 비롯한 주류적 유가 윤리를 이처럼 ‘행위의 결과’
와는 절연된 내면적 마음의 철학으로 한정짓는 것은 이들 윤리학에 대한
심각한 왜곡일 가능성이 있다. 이혜경이 ‘행위의 윤리’를 대변한다고 한 순
자와 정약용의 경우도 마음의 덕성은 무시한 채 결과적 행위의 선만을 도
모한 사상가로 묘사하는 것이 이들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아닌 것과 같다.
실천을 통한 사덕의 완성도 타고나면서부터 ‘선(善)’을 좋아하는 나의 곧은
마음의 실행임을 주장한 다산은 말할 것도 없고,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도
스승의 가르침과 예를 깊이 훈육함에 따라 성품의 변화를 도모한 사상가라
42) Louis P. Pojman은 덕 윤리에서 정확히 이런 심리적 갈등을 겪는 인물과
그렇지 않은 인물 사이에 전자를 더 높이 평가하며, 그 이유는 행위나 행위의
결과만이 아니라 행위자의 품성에 자리 잡은 마음을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 Louis P. Pojman, Ethics: Discovering Right and Wrong, pp.
160-61.
98 사회와 철학 제24집
는 점을 상기할 때 유가 전통을 ‘마음의 윤리’와 ‘행위의 윤리’로 대별해 보
는 시도가 갖는 문제점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이혜경의 ‘마음의 윤리’와 ‘행위의 윤리’라는 개념을 통해 유가 윤리의 성
격을 온전히 파악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점은 향원에 대한 해석에서나
순자와 다산을 해석하는 시각에서 쉽게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시도는 유가 윤리를 거시적이면서도 현대적으로 조
망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유가 윤리가 지나치게 이
상주의적 인간상을 전제로 윤리적 요구를 한다는 점을 드러내는데 공헌을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사실 이혜경의 ‘마음의 윤리’라는 시각은 완벽한 덕
성의 소유자를 요구하는 유가 윤리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한다면 그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규범윤리학적 전통
에서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동기’와 ‘결과’의 이분법을 ‘마음’과 ‘행위’의 분
리로 가져와 전체 유가 윤리의 성격을 조망하려 시도하는 바람에 문제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윤리’와 ‘행위의 윤리’라는 시각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적 규범윤
리학적 시각을 우리는 앞서 잠깐 소개한 ‘덕 윤리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
을까 생각한다.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단일한 도덕 법칙을 찾기보다
덕을 갖춘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하는데 중점을 둔 사상으로 공자와 맹자
의 사상을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면 공맹의 윤리사상은 ‘덕 윤리학
(virtue ethics)’적 관점에서 해석되는 것이 적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43)
‘마음의 덕성’이 ‘옳은 행위’로 나타나고 나아가서 그 행위의 결과로써 타인
을 감화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유가 윤리의 체계는 덕 있는 사람의 행
위가 옳은 행위라고 주장하는 덕 윤리학적 시각과 부합하는 것처럼 보인
다. 또 이런 덕 윤리학적 시각에서 바라볼 때 향원을 극도로 경계한 공자
43) Julia Driver는 우리가 어떤 행위를 선택해야 하느냐는 물음에 직면할 때 추
상적인 윤리적 원칙보다는 자신이 존중하는 인물, 예를 들어 간디나 마더 테
레사 같은 인물이 이런 상황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 지를 생각해보는 경향을
지적하면서 덕 윤리의 기본적인 지향성을 설명하고 있다. Julia Driver, Ethics:
the fundamentals, p. 136.
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99
와 맹자의 의도를 보다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향원이 ‘덕
의 적’인 것은 그가 도덕법칙을 준수하지 않았거나 다른 속내를 가지고 완
벽히 덕스러운 행위를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라, 군자의 덕성을 지닌 인물
과 혼동을 가져올 수 있는 ‘사이비’이기 때문이다. 덕 윤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덕 있는 사람이란 표준을 혼란스럽게 할 ‘사이비’야 말로 덕 윤리학의
토대를 뒤흔들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적이기 때문이다.
5. 나가는 말
공자와 맹자가 향원을 왜 덕의 적으로 지칭하는지를 살펴보면서 우리는
공자와 맹자 유학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향원이 덕
의 적인 이유는 향원이 ‘타락한 군자’이거나 ‘마음의 윤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위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향원이 사람들로부터 공맹 유학의 이상적 인
간형인 군자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군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
한 일반인들은 “충직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인 것처럼 굴고 청렴결백한 듯
이 행동하는” 향원을 호감을 가지고 바라 볼 뿐 아니라 이 향원이 군자가
아닌가 여기게 된다. 옳은 행위가 무엇인지를 정해주는 유일한 표준이 특
정한 행위 준칙이거나 법칙이 아니라 유덕한 사람 그 자체의 판단에 의존
하는 공맹 윤리학의 특징에 비추어 볼 때 진정한 군자가 아니면서 군자처
럼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사이비’ 군자인 향원이 ‘덕의 적’으로 경계되고 비
판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중도의 선비’가 지닌 유
연성과 상황에 적절한 ‘시중(時中)’을 따르는 태도가 ‘광자’의 높은 뜻도 없
고 ‘견자’의 철저한 자기검색도 없이 세상에 영합하는 향원의 태도와 혼동
되기 쉽다는 것을 공자와 맹자는 누구보다 잘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
시 말해 시중의 윤리를 구현하고 있는 군자야 말로 도덕의 표준이기 때문
에, 어떤 하나의 추상적인 도덕 원칙으로 환원될 수 없는 인격적 완성자로
서의 군자의 판단이 가장 근본적인 규준이기 때문에, 향원과 같이 군자처
100 사회와 철학 제24집
럼 여겨지는 사이비 군자야말로 도덕의 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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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원(鄕原)은 왜 덕(德)의 적(敵)인가?(이장희) 101
Why is the Village Honest Man the Enemy of Virtue?
Lee, Jang-Hee
【Abstract】
A ‘village honest man’ is called ‘the enemy of virtue’ by Mencius.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central features of the village honest
man that lead Mencius to criticize him so harshly.
Lee Hye Kyong has attributed the criticism to the ‘hypocrisy’ of the
village honest man. Although he has not perfected his virtues, the village
honest man pretends to be an ‘examplary person(君子),’ and that's the
reason Mencius attacked him. Interestingly, Lee does not endorse
Mencius's criticism. She, rather, criticizes Mencius; an ordinary person
who strive to be virtuous is more likely to be like the village honest
man, and hence it is more proper to encourage him or her rather than
to devalue him or her. According to Lee, the mainstream Confucianism
adopt the ethical standard from the viewpoint of ‘the ethics of mind,’
and this standard is almost beyond attainable for ordinary people. And
in turn this lofty standard easily makes one to be a hypocrite.
Based on the careful examination of the chapter, ‘the Village Honest
Man,’ in the Mencius, this paper will show that Lee's analysis is
mistaken for the core of Mencius's criticism lies not in ‘hypocrisy’ but
in ‘that which seems but is not.’ And it also shows that Mencius's
ethical thought can be best characterized and understood in terms of
‘virtue ethics.’
102 사회와 철학 제24집
Key words: Mencius, the village honest man, the ethics of mind,
consequentialism, virtue ethics, hypocrisy, that which
seems but is not
논문접수일: 2012년 9월 7일 논문심사일: 2012년 10월 2일 게재확정일: 2012년 10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