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의 한자 풀이는 ‘두꺼비 나루’라는 뜻이다. 강 이름에 두꺼비 ‘섬蟾’ 자를 쓴 데에는 두꺼비에 얽힌 전설이 전해오기 때문이다.
때는 고려 우왕 11년(1385). 당시 모래가람으로 불리던 섬진강 하구로 왜구가 숨어들어 오고 있었다. 왜구들은 이맘때의 고려에 먹을 것이 많은 걸 알고 자주 침범했다. 특히 모래가람 일대는 땅이 기름져 매년 풍년이라 그들에게는 때마다 횡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두꺼비 울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왜구들의 배가 육지로 다가갈수록 괴상한 두꺼비 소리는 더욱 커졌다. 소스라치게 놀란 왜구들은 불길한 징조라고 여기고 뱃머리를 돌렸다.
사람들이 이 일을 알고 왜구들을 물리쳐 준 두꺼비의 공적을 기리고자 강의 이름에 두꺼비 ‘섬’ 자와 나루터 ‘진津’ 자를 넣어 섬진강이라 부르게 됐다. 섬진강은 이전에 모래가람, 다사강多沙江, 사천沙川, 두치강豆置江 등으로 불릴 만큼 고운 모래로 유명했다.
일제강점기 섬진강은 그 모래 때문에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일본은 광업권을 갖고 지금의 구례읍 오봉마을(구 금광촌)에서 사금을 채취해 갔다. 마구 들쑤셔진 강변은 모래가 유실되고 샛강이 생길 정도로 황폐해졌다. 1935년 여름 큰 홍수로 사금 채취가 중단될 때까지 강모래에 대한 일제의 착취는 계속 이어졌다.
이후 마을에서 농장을 운영하던 김수곤은 유실된 강변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금빛 같던 모래가 탐욕으로 휩쓸리고 강둑마저 허약하니 마을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는 더 이상 모래가 유실되지 않도록 강변에 곧은 대나무를 심었다. 역사의 부침 속에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심은 대나무 숲이지만 지금은 아름답게 자라나 강변의 벚꽃들과 함께 섬진강의 대표적인 볼거리로 자리매김했다. 전남 구례군 구례읍 원방리 대나무 숲길은 그런 역사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