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어느 도시를 가나 중산궁위안(中山公园) 또는 중산루(中山路)가 없는 곳이 없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중산 쑨원(孙文)은 여전히 국부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쑹칭링(宋庆龄)은 단지 그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평가 받는 것은 아니다. 10년에 지나지 않은 결혼생활이 쑨원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끝나자 쑨원의 유지를 받들어 국민당 좌파로서, 종전 후 인민공화국의 창건에 기여하고 민권운동가로서, 여성운동가로서, 사회복지활동을 활발하게 했다. 마오쩌둥도 그녀를 존경해 마지 않았고, 1963년 이래 198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호우하이(后海)변의 저택에 살게 했다. 사후 명예주석을 추증하고 "쑹칭링퉁즈구쥐(宋庆龄同志故居)"로 꾸며 그녀의 생애를 돌아보게 하고 있다.
4월 17일 오후, 지하철 2호선 지수이탄(积水潭)에서 내려 한 블록을 동편으로 되짚어 구뤄시따지에(鼓楼西大街)를 따라내려오다 물어 물어 후통(胡同)을 통과해서 찾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 구뤄시따지에로 갈 것이 아니고 더성먼네이따지에(德胜门內大街)를 따라 내려오다 호우하이(后海)로 들어서면 될 것을.
쑹칭링 구쥐 앞에 있는 호우하이. 쑹칭링 구쥐 담벼락을 끼고 있는 후통. 후통은 골목이라는
말인데 위안(元)대의 도시설계의 산물이라 오늘날의
베이징은 이를 보존, 관광상품화까지 하고 있다.
쑹칭링 구쥐 정문. 입장료 20위안, 경로 10위안. 저택의 4,13~5.3까지 해당문화절(海棠文化节) 행사안내판이 붙은
자리는 청조 마지막 황제 푸이(溥仪)의 아버지 정원이었다. 구쥐의 일부.
전전시관을 따로 지어 생애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전시관 입구의 쑹칭링 대리석상.
쑹씨 가문의 3자매는 모두 쑨원과 관계가 있다. 아버지가 쑨원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친구 사이인 탓도 있고 일본 망명시절을 함께 겪으며 언니 아이링(爱龄)의 뒤를 이어 칭링이 쑨원의 비서를 맡아 일하다 혁명가와의 열정에 사로잡혔다. 쑨원은 본 부인과 3남매의 자식이 있고 나이차이도 29살이라 주위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네살 터울의 동생 메이링(美齡)이 쑨원의 국민당 계승자 장제스(張介石)와 결혼한다고 할 때 제일 심하게 반대한 사람은 칭링이었다고 한다. 장제스의 3번째 결혼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그를 분파주의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언니 아이링은 메이링의 결혼을 찬성하며, 황제 같은 권력자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했단다. 메이링이 화려한 언변과 미모로 미국을 위시한 국제정치계에서 보석같은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고...자매는 부르즈아의 딸로서 자란 환경과 교육 받은 내용이 비슷하고 모두 미국 유학까지 했지만 가는 길과 삶의 방식은 달랐고 냉전 이후에는 서로 만난 적도 없었다. 1981년 숭칭링의 임종이 다가오자 중국에서는 장제스의 사후 미국에서 살고 있는 쑹메이링에게 연락했지만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에 대한 세평은 이렇다: 쑹칭링은 나라를 사랑했고 쑹메이링은 권력을 사랑했다.
1937년 7월 7일 소위 77사변으로 중일전쟁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던 루거우차오(卢沟桥)를 찾아본 것은 4월 21일이다. 왕징에서 15호선 지하철로 출발해 왕징시(西)에서 13호선, 둥즈먼(东直门)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쳰먼(前门)에서 내렸다. 301루(路) 버스를 타기 위해서다.
쳰먼의 정식 명칭은 쩡양먼(正阳门)이라고 하는데 톈안먼광창의 제일 남단에 남북으로 마주 보고 한쌍이 서있다. 북편 가운데 中囯公路零公里点 표지판이 있는데 우리 세종로의 도로원표와 같은 것이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포장마차에서 빵을 샀다. 구경 중에 끼니때와 마주칠 것 같았다. 301루 버스를 타고 20정거장째인 시따오커우(西道口)에 내려 978루로 갈아타고 2정거장 째인 루거우신차오(卢沟新桥)에 내려 강을 따라 1km 정도 걸으니 오른편으로 완핑청러우(宛平城楼)가 보이고 왼편으로 역사의 현장인 다리가 나타났다.
다리를 걸어보려면 입장료를 내야하고 일반 20위안, 경로는 무료다.
댓닢에 싼 밥(竹叶饭)을 사서 빵과 겯들여 먹는 것으로 점심을 때웠다.
근처에서 야영훈련 중이던 일본군이 실종된 군인을 찾는다는 구실로 완핑청을 수색하겠다며 루거우차오 중국수비대에 총격전을 가하고 완핑청을 점령, 파괴함므로서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8년에 걸친 전쟁의 참화는 지속되었다. 현재의 완핑청은 복원한 것이다.
1189년 진(金나라 때 건설하여 보수를 거듭하며 오늘에 이른 다리로 길이 266.5미터, 높이 7.5미터다. 오른쪽 사진의 가운데 움푹 움푹 패인 것이 원래 돌판 그대로란다. 다리 난간의 사자형태 석물이 500여개에 달한다. 마르코폴로가 이렇게 아름다운 돌다리를 본 적이 없다는 찬사를 쏟았다지...
중국 리모델링의 열의에 차있던 췐룽이 남순을 다니던 길이기도 하겠다는 짐작에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친필 비각이 떠억 서 있다. 盧構曉月, 노구교의 새벽달.
성안에는 中國人民抗日战争纪念馆을 세워 일본의 침략과 항일전쟁의 전과정을 낱낱이 기록하여 후세에 알리고 있다. 입장료 무료. 자료를 읽어 보느라 기념관 관람에만 세시간 가량 걸렸다.
기념관 초입에 게재된 마오쩌둥, 덩샤오핑의 글씨. 마오의 것은 "경축항일승리 중화민족만세(慶祝抗日勝利 中華民族萬歲)로 읽겠는데 덩의 글씨는 다 못알아보겠다.
항일전의 여운이 흥분으로 남아 왕징에 돌아와서 버섯전골로 식사를 하며 처음으로 소주 한잔을 했다. 처음처럼(初饮初乐) 한병에 30위안.
첫댓글 친숙한 우리말 한자 이름이 아닌 완전 중국 본토 발음 이니, 아 ~골치아프다 `또 한편 존경스럽다.
그래서 노구교에는 1) 마르코 폴로 (서양사람들은 Marco Polo Bridge라고 하는 모양) 2) 건륭제 비
3) 중일전 시작의 역사현장 세 가지를 본다네요.
중국 지명 인명 제대로 공부하게 됩니다. 처음처럼을 初饮初乐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