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와 탐식」
이런 책은 처음이다. 너무 낯설고 어렵다. 한 구절?을 가지고 이렇게 촘촘하게 해석하는 것도 놀랍다. 머리가 멍하고 꽉 막혔다. 하늘까지 닿은 벽 앞에서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쳐다보다가 지쳐서 그 벽에 기대어 앉은 느낌이다. 어렴풋하게 몇 가지 질문만 떠오른다.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았나? 왜 신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다가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렸을까? 아버지만 아들에게 축복을 줄 수 있나? 어머니는 줄 수 없나? 딸들 이야기는 있나? 등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된 이삭이 어느 날 맏아들인 에서를 불러 말했다. “아들아, 네 아버지는 이제 늙었다.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그러니 너는 나를 위해 화살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사냥을 해서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만들어 가져오너라. 내가 그것을 먹고 죽기 전에 너에게 마음껏 축복하겠다.”
아버지 이삭은 큰아들 에서가 사냥해온 야생동물로 만든 음식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아버지가 한 아들에게 마음껏 하겠다고 하는 것은 ‘복을 빌어주겠다’(축복)이지 ‘복을 주겠다’(강복)가 아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빌어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처럼, 한 아들만 선택해서 축복하겠다고 선포한다.
편애를 나무랄 수는 없지만 편애의 이유를 물을 수는 있지 않을까? 이 사람은 더 사랑하고 저 사람은 덜 사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사랑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선택에 대한 질문이니까.
아버지의 사랑을 결정한 것이 아들이 해주는 음식이라는 이 문장이 가리키는 것은 음식 전반에 대한 아버지의 태도. 이를테면 음식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같은 것.
2.
그의 탐식 증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탐색의 대상이 될 만하다. 탐색은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들쑤셔서 찾아내는 작업이다. 발견된 조각이나 흔적이 실체를 파악하기에 턱없이 모자랄 때 이 작업은 때때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이삭은 청소년기에 치명적인 사건을 겪었다. 그의 아버지는 그를 제단에 번제로 바치려고 했다. 그 때 일이 떠오를 때마다 질문이 튀어나왔다. 신이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러,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지시하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정말로 자기를 죽였을까, 칼을 내리치고 불에 태웠을까.
그 사건은 엄청나게 큰 바위가 되어 그의 가슴을 눌렀다. 그의 충분하고 온전한 이해도 그 바위에 눌렸다. 그는 바위에 눌려 신음했고 고민했고 울었고 질문했고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먹었다. 무엇을 먹어도 허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그의 탐식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은 사랑이 없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굴레인 곳이어서 돌아갈 수 없는 곳, 달아나야 하는 곳이 되었다.
죽음을 경험하고 밤을 지새우고 산을 내려오는 그의 눈앞에 얼굴도 모르는 이복형이 집에서 쫓겨나는 장면이 마치 눈으로 본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죽음의 장소로 형을 내던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다. 쫓아낸 아버지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신의 뜻을 앞세웠을 것이다.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법과 도리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 법과 도리를 뛰어넘는 신의 섭리는 인간으로서는 물리칠 수 없는 것이고 물리쳐서도 안 되는 것이지만, 최선을 넘어설 수 없는 최선, 신의 섭리를 뛰어넘을 수 없는 법과 도리의 세계에 살 수 밖에 없는 인간이 그것을 넘어서고 뛰어넘으려고 할 때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성의 파괴 없이 그 넘어섬과 뛰어넘음이 가능한가. 넘어서고 뛰어넘는다는 것은 파괴와 훼손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최선을 넘어서는 최선에 의해 넘어선(파괴된) 인간의 최선, 신의 섭리에 의해 뛰어넘은(훼손된) 인간의 법과 도리는 어떻게 회복하는가. 현재를 잃은 채 현재를 어떻게 사는가. 인간을 파괴하고 인간을 어떻게 유지하는가. 회복 없이 인간이 인간으로 그러니까 죽은 채로 살 수 있는가. 그는 그런 질문에 시달렸다.
빈들을 자기 집으로 삼고 뛰어다니는, 야생의 짐승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이복형의 장막에서 이삭은 맛을 느끼지 못한 채 먹었다. 걷잡을 길 없는 마음의 혼란과 죽을 것 같은 고뇌 속에서도 음식에 대해 욕망을 느끼는 자신이 민망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가 인간이고 살아 있다는 분명하고 확실한 표시였다. 그는 현재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러나 허기가 가시고도 남을 만큼 충분히 많은 음식을 뱃속에 집어넣은 다음에도 그는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허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큰아들의 요리를 향한 아버지의 유난스러운 애정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해석은 그 음식이 오래전, 그가 번민과 고통 속에 찾아간 빈들에서 이복형이 해준 것과 같은 종류의 음식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들이 해준 야생동물 요리를 먹으면서 그가 먹은 것은 오래전에 그의 형이 해준 음식이었다. 음식을 먹은 것이 아니라 그때의 기억을 먹은 것이다. 그는 젊을 때 형이 해준 단 한 번의 음식을 늙어서 눈이 어두워질 때까지 평생 동안 먹었다.
이삭이 첫째아들을 사랑한 것은 첫째아들이 그의 형을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을 떠올릴 때 떠오르는 죄책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형의 권리를 빼앗고 따뜻한 집안에서 허허벌판으로 내쫓은 것 같아 괴로웠다. 그에게는 이것이 에서가 큰아들이라는 것보다 중요했다.
에서가 밖으로 쏘다닌 이유, 집을 지키지 않고 광야의 사람이 된 이유는 집에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추측을 뒷받침할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몹시 배가 고픈 상태로 사냥에서 돌아왔는데 마침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었다. 동생에게 죽을 좀 먹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동생은 장자의 권리를 넘기는 조건을 제시했다. 야곱은 장자의 권리를 자기에게 넘긴다는 맹세를 받아내고서야 형에게 죽을 주었다. 이삭이 받을 아버지의 축복을 동생이 가로 챘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야곱이 꾀를 부려 자기가 배고파 죽을 지경이 되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일부러 죽을 끓인 거라고 생각했다.
야곱에게는 허기와 탐식의 욕구가 없다는 것이다. 결핍과 균열, 고뇌와 혼란을 겪지 않은 자는 허기를 모른다. 버려진 경험과 죽음 속에 있어보지 않은 자는 탐식하는 자가 되지 않는다. 야곱에게 탐욕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탐욕과 탐식은 동의어가 아니다. 에서는 한 그릇의 음식을 먹기 위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주었지만 야곱은 한 그릇의 음식으로 형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 빼앗았다. 그는 음식을, 먹지 않고 자신의 탐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3.
이삭이 큰아들 에서를 사랑하는 것처럼 리브가는 작은아들 야곱을 사랑한다. 아버지가 형의 음식을 먹고 마음껏 축복하려고 한다. 어머니는 자기가 염소를 잡아 음식을 만들어줄 테니 그것을 아버지께 가져다드리고 형인 것처럼 속여서 축복을 받으라고 시킨다. 아버지 이삭은 자신이 가진 모든 감각을 통해 아들을 테스트했다. 그리고 이 모든 테스트를 야곱은 통과했다. 리브가가 뒤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에게서 본 것을 아들에게서 똑같이 보는 일을 못 견뎌했다. 탐식이라는 증상을 통해 표현된 영혼의 고갈, 무기력에 가까운 신중함, 이해하기 힘든 비현실적인 것에 대한 몰두, 혹은 삶에 대응하려는 의지의 결핍 같은 것. 이삭은 음식 때문에 한 아들을 사랑하지만 다른 아들을 사랑하지 않기 위한 조건을 만들지는 않았다. 리브가는 음식 때문에 한 아들을 사랑하지 않지만 다른 아들을 사랑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들 사랑하기가 조건적인 것처럼 어머니의 아들 사랑하지 않기가 조건적이다. 누군가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다른 누군가에 대한 미움을 부르는 일은 뜻밖에 흔하다.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불가피하게 다른 사람을 배제한다.
동생이 형을 흉내 내어 아버지로부터 축복을 받고 나간 다음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서 축복을 빌어달라고 한다. 동생에게 복을 빌어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빌어줄 복이 없다고 한다. 축복이 자원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먼저 온 아들에게 너는 너의 친척들을 다스리고 너의 어머니의 자손들이 너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라고 축복했다. 소리 내어 우는 에서에게는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이것은 예언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축복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모든 축복은 예언의 성격을 띤다. 그러나 모든 예언이 축복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니다.
에서는 자기를 두 번이나 속인 동생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만 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벼른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십년 이상을 더 살았다. 그 사이에 에서는 시간과 함께 원한으로부터 풀려났다.
동생이 그의 축복을 가로챈 운명의 날 큰아들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떼를 쓰며 울었고, 그 울음소리는 조건절을 가진 축복의 문장을 그 아버지로부터 이끌어 냈다.
“너는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른다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이 예언은 독자적인 예언이 아니고 본래의 예언에 추가된 것이다. 수정된 예언의 실현은 조건절이 지시하는 내용을 수행할 때만 가능하다. 에서는 덧붙여진 이 예언을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축복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애써 힘을 기름으로써, 즉 자기에게 일어났고 일어날 거라고 예고된 일들을 참음으로써 아우의 멍에에서 벗어났다.
첫댓글 성경 인물을 각색한 것이라, 박은희님에게는 생소할 수 있는 이야기일수도 있을 듯 합니다. 저도 식탐이 많은 편이라 음식 앞에서 자제력을 잃고 마구 먹다 너무 많이 먹어 소화제를 먹는 일도 있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음식으로 유혹한 야곱이 똑똑하다고 해야할지, 얄밉다고 해야할지, 수업시간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발제문 잘 읽었습니다.
박은희님이 읽으신 탐식과 허기가 궁금했어요. 기독교 신앙인이 아닌 독자의 눈에 읽히는 책 내용은 어떤 것일까, 싶었거든요.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 하시면서 매번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셔서 더 궁금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성경책을 읽어왔던 터라 너무 잘 알던 이야기들이었는데요. 그 잘 아는 이야기를, 이승우 작가가 "우리가 정말 잘 알고 있을까?"하고 새로 써낸 부분이 좋았어요. 성경책에서 생략했던 부분, 바로 그 틈을 파고들어서 한 명 한 명의 인물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게 놀라웠어요. 이삭이 가졌을 트라우마, 그것이 대를 이어가는 과정 같은 거 말이죠.
저도 조금만 더 파고들어 보면 좋겠는데 어렵다 싶은 부분들이 많았어요. 오늘 저녁에 만나서 얘기하면서 더 풀어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오늘 저녁에 선생님과 만나서 책 얘기를 할 시간이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