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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문학예술 신인상 당선 |
첫눈, 서설(瑞雪)을 보다
최 순 태
경북 포항의 강진으로 인하여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일주일 연기되었다. 이제까지 다른 이유로 시험이 미루어진 일은 몇 번 있었지만, 자연재해 때문에 시험이 제때 시행되지 못한 적은 없었다.
일주일 늦게 치러진 시험이 무사히 끝난 다음날인 11월 24일 대구, 경북 지방에 첫눈이 내렸다. 작년에 비해서 이틀 빨리 눈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보니 인근 초등학교 지붕에 눈이 쌓이고 하늘에서 눈이 소복소복 내린다.
원래 첫눈은 서설(瑞雪)이라고 한다. 즉, “상서로운 눈”이란 뜻이다. 시험을 치른 수험생 모두가 좋은 성적을 받게 되리라는 의미 같아서 덩달아 기분이 좋다. 아무쪼록 수험생 모두가 자기가 여태까지 공부한 만큼 성적이 나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눈이 내리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어린이들과 청춘남녀들이다. 흔히 연인들은 처음 눈이 내리면 서로 어디에서 만나자고 연락을 하여 데이트를 즐기고 밤새 걸어 다니며 추억을 쌓는다. 나는 젊은 시절 그런 기억이 없어서 아쉬웠다.
눈을 보면 김효근 작곡가의 가곡 “눈”이 생각난다. “조그만 산길에 흰 눈이 곱게 쌓이면 내 작은 발자욱을 영원히 남기고 싶소”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눈 덮인 한적한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시로 이루어진 명곡이다.
나는 이 노래를 겨울이 되면 즐겨 부른다. 작곡가님은 원래 대학 및 대학원에서 경제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강의를 하던 학자인데 작곡공모에서 이 곡을 발표하여 유명해졌고, 이외에도 “첫사랑”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나는 국가대표선수들의 겨울 훈련장소인 함백산을 등정했을 때 눈이 내리는 산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산길에서의 정취를 느껴보기도 하였다. 집에서 혼자 부를 때와 다른 감흥이 있었다.
어느 해에는 전형적인 과우지역이고 눈이 거의 오지 않는 대구에서 첫눈을 보지 못하고 직장에서 단체 야유회를 갔을 때 문경에서 첫눈을 맞은 적도 있었고, 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시작된 3월에 상주 갑장산에 올랐을 때 산중턱에서부터 눈이 내려 정상 부근에서 아름다운 설화(雪花)와 상고대(霜高帶)를 보는 색다른 경험을 하였다.
영국시인인 T.S.Eliot는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였다. 그만큼 4월의 날씨는 변화가 많기 때문이다. 어느 해인지 확실히 기억할 수 없지만 4월 어느 날 대구지방에 함박눈이 내렸다. 점심시간에 자동차운전면허증을 갱신하러 가던 길에 펑펑 내리는 눈을 흠뻑 맞은 일이 있었다.
연인들은 눈 맞으며 손잡고 걸어가면서 낭만을 느끼겠지만 내가 복무하던 강원도 홍천은 겨울이 되면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을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 우리 대대의 제설작업이 끝나면 인근 연대본부로 출동하여 일을 해야 하루의 일과를 마친다.
올해 첫눈을 보니 고향집에 계신 노모가 생각난다. 93세인 노인이 눈이 많이 오면 앞마당과 뒷마당이 넓은 우리 집의 눈을 어떻게 치울까 걱정이 태산이다. 같은 동네에 6촌 형님도 있고, 이웃 사람들이 도와주시겠지 라고 자위해 본다.
농촌에 눈이 내리면 온 동민들이 동원되어 농로를 거쳐 신작로까지 눈을 치워서 사람들의 통행을 쉽게 하고 동네 안길에 쌓인 눈을 치우는 제설작업을 하여 지금은 복개된 마을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도랑에 갖다 버려서 녹게 하였다.
겨울에 눈이 자주 내리면 그 다음에 농사가 잘된다고 하였다. 강수량이 풍부해져 다음 해 봄 농사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작물의 성장이 빠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농민들은 눈을 반긴다.
도시에 눈이 내려서 도로나 인도가 얼어붙으면 시청이나 구청에서 염화칼슘을 뿌려 눈을 녹인다. 그런데 너무 많은 양을 뿌려 낭비가 심하고,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타이어 손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적당량을 뿌리거나 환경오염이 덜한 소금물을 사용하는 것이 경제적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 고등학교에는 학교 뒤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다. 김천은 대구보다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이어서 학교 뒷산의 설경은 멋지다. 김천중학교에서 교감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사진작가이신 동문이 모교의 동산(松亭) 설경을 찍은 사진을 밴드에 올렸다.
교주의 묘소 주변 및 산소로 올라가는 돌계단, 교주 할머니가 거주하던 취백헌과 정걸재, 학교 설립 시 건축한 붉은 벽돌로 된 본관, 교주의 동상이 눈과 어울려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케 하여 천하 절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릴 때 눈이 오면 아이들은 비료 포대를 이용하여 눈썰매를 만들어 높은 곳에서 아래로 미끄러지며 눈에서 신나게 노느라 시간이 가는지 몰랐다. 요즈음 도시의 아이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네들로서는 상당한 부러움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마을 뒤의 산에는 꿩이나 산토끼가 많아 눈 쌓인 산에서 사냥을 한다. 동물들이 눈 때문에 거동이 불편해서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우리가 다가가면 재빠르게 도망을 가서 사냥이 마냥 쉽지는 않다.
공직생활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공무원연금공단에서 시행하는 퇴직 후 미래설계교육이 천안상록회관에서 시작되었다. 수업 중 갑자기 하늘에 눈구름이 형성되어 컴컴하게 되었다. 이윽고 사방에 눈이 내리더니 온 세상이 설원으로 변하였다. 눈이 귀한 우리 지방에서는 보기 드문 경치였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당시 부산의 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었던 룸메이트와 오랜만에 눈꽃을 감상하고 정신없이 휴대폰 카메라 버튼을 눌러댔다. 지금도 그때의 사진을 보면 그 때가 그리워진다.
천안은 중부지방이라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인 모양이다. 공직생활 중 업무 때문에 제3정부종합청사가 위치한 대전에 출장갈 일이 많았다. 대구는 화창하였으나 대전이 가까워지면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젊을 때는 첫눈이 오면 마음이 설레고 무언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또한 연인들은 서로 만나 눈을 밟고 맞아가며 그들의 사랑을 확인한다. 때로는 “눈이 내리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의 애정을 쌓아간다.
농촌에서는 겨울이 많은 눈이 내리면 길조라 하여 크게 반긴다. 눈으로 인하여 땅속에 물이 스며들어 땅을 비옥하게 하고, 저수지에 물을 가득 채워 이듬해 본격적인 농사철에 유용하게 사용된다.
그러나 지구의 온난화로 인하여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여 눈, 비 오는 양이 적어서 농민들은 애를 태운다. 이 모든 것이 인간들의 무분별한 욕심으로 환경오염이 되어 생긴 탓이다. 지금이라도 오염을 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모든 방안을 강구하여 하루빨리 예전과 같이 겨울에 춥고 눈도 많이 오던 시절이 돌아오면 좋겠다. 빠른 시일 내에 자연환경이 복원되어야 한다.
병무 담당 최주사
최 순 태
1987년 가을 나는 중구 남산4동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첫 근무를 하게 되었다. 남구 대명3동 계명대학교 맞은편에 위치한 남산4동은 인구가 25,000명이고, 직원이 25명이나 되는 관할지역이 넓은 큰 동이었다.
동사무소에 부임하고 나서 제일 처음 한 일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국민투표를 위한 선거인명부 작성이었다. 요즈음은 전산으로 선거인명부를 작성하지만 그 당시는 먹지를 대고 5장의 명부를 직접 손으로 작성하고, 선거인 성명은 반드시 한자로 기록을 하였다.
대구광역시의 인사발령으로 동사무소에 왔으나, 나의 보직은 없었다. 6개월간 무임소 공무원으로 출근부에 도장을 찍고 주민등록등본과 인감증명 발급 보조 등을 하다 우리 동의 직원이 구청으로 인사발령이 남에 따라 자리가 생겨 주민등록 등․초본 발급업무를 맡게 되었다.
내가 발령받은 동에는 고등학교 후배가 선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낮선 타향 땅에서 동문을 만나니 반가웠고 의지가 되었다. 그가 상급기관인 구청으로 발령이 나자 후배가 맡은 병무업무를 내가 담당하게 되면서 비로소 병무담당 최주사가 탄생하게 된다.
지금은 병무청에서 온갖 업무를 취급하지만 내가 동에 근무할 때는 국가사무인 병무에 관한 업무를 각 지방자치단체가 위임받아 하고 있었다. 그 업무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업무이다.
징병검사 대상인 대한민국 장정의 호적부 발췌로부터 징병검사 지원업무, 예비군 자원 관리, 징병검사 및 현역입영, 예비군훈련 통지서를 교부하는 실로 방대한 업무였다.
그 당시 동사무소에 컴퓨터가 보급되기 전이라 4벌식 타자기로 모든 공문서를 처리 하였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온 나는 타자기를 다루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매일 같이 밀리는 업무를 처리하자면 타자기 사용법을 익혀야 했다.
다행히 우리 동사무소에는 여자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사회복지전문요원이 타자기를 능숙하게 다루었으므로 그녀에게 타자하는 방법을 배워 각종 병사관계 서류를 처리하였다. 몇 개월 연습을 하니 능숙하게 타자기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동에 병역 및 예비군자원이 많아 향토예비군 중대본부에서 병무보조로 단기사병(일명 “방위”) 두 명이 내게 배치되었다. 그 중 선임인 J상병은 후임인 S일병과 함께 나의 업무를 도와 차질 없이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동사무소를 거친 또 한명의 단기사병인 C는 내가 비산4동에서 죽전2동 으로 이사할 때 자진하여 이삿짐을 날라주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업무를 하던 중 중대본부 사병들과 함께 두류야구장에서 축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지금도 내 방에는 그때의 사진이 있다. 최근에 서문시장 4지구에서 내의 장사를 하는 J를 만나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한동안 담소를 나누었다.
병무업무를 하다 보면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있다. 그 중 남산4동 시절 이야기다. 어느 따뜻한 봄날 현역입영 대상자의 현역입영통지서를 교부하려고 당사자를 찾으러 거주지에 갔으나 대상 자원이 출타하여 난처한 지경이 이르렀다.
거주지 통장의 말을 들어보니 성주 수륜에 있는 고향에 갔다는 것이었다. 급히 출장 명령을 내어 시외버스를 타고 성주로 향하였다. 그 곳은 성주의 오지로서 고지대였다. 동네 사람들께 수소문 하여 그의 고향집을 찾았으나 잠시 전 다시 대구로 갔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대구까지 돌아와서 누나의 집에 머물던 입영대상자에게 통지서를 입대 하루 전 전달하고 훈련소에 입영시킨 일이 있었다. 동에서 병무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인사발령으로 구청으로 전보되어 여러 가지 업무를 보던 중 승진하여 관내에 대규모인 서문시장을 관할하는 대신1동으로 발령이 났다.
사무장님은 나에게 병무업무를 맡겨 두 번째로 병사업무를 맡게 되었다. 대신1동은 먼저 일했던 남산4동 보다 자원이 많지 않았으나 중대본부에서 병무보조로 1명의 단기사병이 파견되어 나의 업무를 도왔다.
병무업무는 엄격한 병역법 내지 향토예비군설치법의 적용을 받아서 도무지 담당자가 융통성을 발휘할 여지가 없었다. 따라서 대상자들이 법을 위반하면 즉시 경찰에 고발을 해야 하며 수시로 경찰서에 출두하는 일이 허다하였다.
고발을 하면 반드시 징역 내지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나의 업무는 병역 관계법령 위반으로 수많은 전과자를 양산하는 일이 주된 업무가 되어 때로는 심한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만일 나의 재량으로 위법사항을 묵인하면 어김없이 1년에 한번 병무청에서 실시하는 업무감사에서 불이익을 당하곤 하였다.
때로는 황당한 일을 당하기도 하였다. 두 번째 동에서 다시 업무를 볼 때 관내에 거주하는 예비군자원에게 훈련통지서를 전달하려고 단기사병을 보냈으나 주소지에도 고향에도 거주하지 않아 도무지 전달할 방법이 없었다. 훈련일이 다가왔으나 소식이 없어 참으로 난감하였다.
향토예비군법 위반자에 대한 고발을 하려고 공문을 작성하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출근하여 예비군 훈련대상자의 주민등록부를 보고 있던 내게 예쁘장하고 덩치가 큰 아가씨 한명이 찾아왔다.
내가 무슨 용무로 왔냐고 물어보니 그 사람은 내가 보던 주민등록부를 손으로 가리키며 가만히 웃음 지었다. 본인의 얼굴과 주민등록부 사진을 대조해 보니 남자가 여자로 바뀌었을 뿐 훈련대상자가 분명하였다.
잠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까지 나는 남자에게 훈련통지서를 발부했는데 웬 여자가 왔을까? 궁금해 하던 내게 전후 사정을 얘기하면서 본인이 원래 남자였으나 성전환 수술을 하여 지금은 여자가 되었고, 따라서 훈련을 받으러 갈 수 없었다 한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남자들과 훈련을 받을 수 있겠는가!즉시 구청 병무 담당자에게 연락하여 이러한 일은 어떻게 처리하면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병무청이 지정한 병원의 진단서를 첨부하여 병역면제 신청을 하면 된다고 하였다.
달성공원 방향에 소재한 가라오케에서 일하던 대상자에게 연락을 하여 진단서를 가져오면 병역면제 신청을 올려 보겠다고 전하니 며칠 후 그가 진단서를 가지고 왔는데 병무청 지정병원이 아닌 일반병원에서 수술한 기록이었다.
더 이상 다른 병원의 자료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하여 그가 제출한 진단서를 첨부하여 병무청에 상신하여 병역면제 조치를 받아낸 기억이 있다. 그 외에 같은 업소에서 일하던 동일한 예비군도 비슷한 조치를 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을 볼 때 대한민국의 남자로 훈련소를 거쳐 병역의 의무를 완수할 때 까지는 건강한 남자였으나, 점차 성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 밤업소에 근무하며 남자가 아닌 여자의 삶을 살았을 그들의 삶을 생각하니 매우 안타까웠다.
이렇게 병무업무를 마치고 동사무소의 다른 업무를 맡게 되었으나 때마침 나의 후임으로 그 업무를 맡은 여직원이 출산휴가를 가는 바람에 휴기기간 동안 업무대행을 하게 되었다.
마침 병무청의 업무감사 시기라 하는 수 없이 감사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대본부 및 병무보조와 같이 내 나름대로 열심히 감사준비를 하였으나, 적지 않은 지적사항이 나왔다.
종전에 이야기 한바 있지만 병무업무를 취급하다보면 병역법 등을 위반한 사람들에 대한 사법당국 고발로 많은 전과자를 양산하는 일이 비일비재 하였으므로 당사자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법망을 벗어나려고 한다.
담당자인 내게 이야기 하소연 하였으나 내가 거절을 하자 상급자에게 직접 권력기관을 동원하여 압력을 가하는 등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병무업무는 동사무소와 예비군중대본부가 연결되어 있어서 중대본부의 협조가 필요했다.
병역의무를 완료한 현역이나 보충역은 전역 후 1달 이내에 반드시 향토예비군대원 신고가 필수이나 단 하루만 늦어도 고발되어 사법처리를 받으므로 중대본부의 예비군신고대장 변경이 필요했다. 이러한 일은 수없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 때 인연을 맺은 단기사병들은 하나같이 성실한 친구들이었다. 그 중 한명은 중앙로 염매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친구도 있고, 서문시장의 상인으로 열심히 사는 친구도 있다. 특히 서문시장에 갈 때는 J와 자주 만난다.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 반드시 병무는 거쳐야 하는 업무이다. 그만큼 국가안보는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지구상에서 남북이 분단된 유일한 국가이다. 요즈음 한반도 정세를 살펴볼 때 결코 가볍게 하면 안 되는 중요한 업무이다.
나라가 있어야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은 심히 걱정스럽다. 만일 전쟁이 나면 기꺼이 나라를 위해 싸우겠다는 사람이 적다고 한다. 과연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대한민국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싸울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나는 믿고 싶다.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이스라엘 청년들처럼 조국에 위기가 닥치면 나라를 위해 희생할 각오가 충분히 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 간절한 나의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나라도 튼튼해지고 북한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고 통일도 되지 않겠는가!
담배 일발(一發) 장전(裝塡)
최 순 태
내가 제일 처음 담배와 인연을 맺은 것은 나의 고향집 대문간이었다. 호기심에 아버지의 담배꽁초를 한번 피워봤으나, 연기에 취해 바로 재채기가 나서 곧 담배를 버린 기억이 있다.
본격적인 담배 피우기는 군대에 입대하여 제2훈련소를 퇴소하고 자대에 배치된 1977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보병으로 복무하였는데 훈련소와 거의 동일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고 50분의 교육이 끝나면 병사들은 이틀에 1갑 지급되던 짧은 궐련인 “화랑담배”를 물고 휴식시간이면 “담배 일발 장전”이란 구호 하에 뽀얀 연기를 일제히 뿜어댔다.
나는 자대 배치 후 처음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담배를 피우게 된 계기는 지극히 간단했다. 요즈음 군대는 그렇지 않지만 내가 군대생활 하던 시절에는 고참병들이 담배를 못 피우는 졸병에게 강제로 흡연을 강요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다. 이런 이유와 훈련의 고달픔을 이겨내려고 담배와 친구가 되었다.
군대생활 중 15일간 휴가를 받아 고향집에서 지내다 귀대할 즈음 소대원들에게 줄 선물을 골라야 하는데 이때 제일 인기가 좋은 선물은 장초(긴 담배)였다. 내가 귀대하면서 전우들에게 몇 개씩 나누어준 민간 담배는 재빨리 동이 났다.
33개월의 병영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복학을 하고 난 뒤에도 흡연은 계속되었다. 고향에서 부쳐오는 용돈으로 담배를 사서 피우다 보니 비용이 만만찮았다. 용돈이 떨어지면 하숙집의 룸메이트에게 얻어 피우다 때로는 핀잔을 듣기도 하였다.
담배는 기호품인지라 쉽게 흡연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담뱃값을 아낄 궁리를 하다당시 버스토큰박스에서 팔던 까치담배를 사기로 하였다. 낱개로 파는 까치담배는 단가가 조금 비쌌다. 그러나 별수 없이 그 담배를 애용했다.
방학이 되어 집에 돌아오면 담배도 마음대로 피울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하루에 피우는 횟수를 줄이고 흡연을 참기 어려울 때는 아버지가 한 보루(12갑) 사 놓은 담배 한 갑을 꺼내어 피우기도 하였다. 나중에 아버지께 들켜서 혼이 난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담뱃값을 아끼려고 별로 질이 좋지 않은 청자담배를 피웠는데 그것을 철없는 내가 피우고 말았으니 지금 생각하면 미안할 따름이다.
학교 졸업 후 대구에서 공직생활을 할 때 비로소 고급 담배를 피울 여유가 생겼다. 나는 담배를 아주 많이 피우지는 않았다. 담배 한 갑을 사면 다 피우는데 이틀이나 사흘이 걸렸다. 흡연이 나의 기관지에 별로 좋지 않아 가래가 찬 까닭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내가 대구광역시 중구청에서 대신1동 동사무소로 인사발령이 났다. 동사무소의 사무장님은 상당히 엄격한 분이었고,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담배 피우는 직원들을 상당히 싫어했으며, 일하는 중간에 담배를 피우려고 밖에 나가거나 입에서 담배냄새가 나면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하였다.
심지에 추운 겨울에 사무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피울 것을 명하여 골초들은 사무실 밖이나 건물 옥상에서 추위에 떨면서 한없이 담배연기를 내 뿜어야 했다. 급하게 피우다 보니 도무지 담배 맛이 나지 않았다.
직원들은 이러한 대접을 받으면서 담배를 계속 피워야 하나 한탄하다가 하나 둘 담배를 끊기 시작하였다. 나도 이 대열에 동참하면서 나의 10여년에 걸친 흡연 행각은 끝이 났다.
담배를 끊은 뒤 몇 달간 그동안 기관지에 쌓여있던 흡연으로 인한 시커먼 가래가 계속 몸 밖으로 나오다가 일정한 기간이 지나자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이후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간혹 담배를 피운 적은 있으나, 예전처럼 맛이 나지 않았다.
나는 남들처럼 금단증상이 심하지 않아 은단이나 사탕을 먹는 일은 없었다. 대신 다른 사람이 담배를 피울 때 나는 담배연기가 내 코에 다다르면 매캐한 냄새가 상당히 거슬렸다.
오늘날 모든 공공장소나 사무실은 금연 장소로 지정되어 애연가들이 마음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의 건강도 고려해야 하지만 엄연히 흡연하는 사람도 있는 현실을 볼 때 흡연권도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담배를 피워본 나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약 14년간 피운 담배를 끊으니 우선 몸 상태가 좋아지고, 아침에 일어나면 상쾌했다. 치아가 누렇게 되지도 않았다. 담배는 백해무익이라 하지 않는가? 그러나 궐련 하나를 입에 물고 하얀 연기를 내뿜을 때 온갖 시름이 다 가시는 기분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제일 잘한 일은 담배를 과감하게 물리친 일이다. 청년기에 담배를 피우다 장년이 되면 건강에 신경을 기울이게 되고 서서히 금연하게 된다. 장년의 금연은 증가하는 반면 청년층의 흡연은 계속 늘고 있어서 걱정이다.
이러한 나의 걱정도 기우가 아닐까! 나이가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알아서 금연을 하게 될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건강은 본인이 돌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