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壽命)이 있는 인연(因緣) / 이미애

[선수필문우회]

수명(壽命)이 있는 인연(因緣)

이미애

얼마 전 일이었다. 15년을 이웃으로 함께 해온 지인에게 상처를 받게 된 적이 있다. 중년의 둔덕에 선 나이로 그런 말 정도는 얼핏 넘어가도 될 것을 가슴 언저리에 남아 속수무책 정신까지 갉아먹는 걸 느끼고 참담했다. 참 말이란 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 인연의 끈을 내려놓을 만큼 살벌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상대가 별 생각 없이 뱉은 말이 내게는 송곳처럼 가슴에 꽂혀 후비고 이렇게 아파하고 있음을 그는 과연 알기나할까 싶기도 하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는 감정받이라는 말이 생겨나 사용되기도 한다. 결코 호의적인 의미의 말은 아닌 것이다. 자신이 분출하지 못한 감정을 지인이나 친구에게 토로하며 그 감정의 일부를 내려놓게 되며 무언의 보상이 뒤따르기도 한다. 예전의 우리에겐 일기장이나 다이어리가 자신만의 감정받이가 되어 어디에도 표현하지 못한 속엣말을 표출하기도 했지만 요즘엔 달라졌다. 감정받이란 트위트도 있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솔직담백하게 털어놓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공감을 끌어오기도 하며 탈출구를 찾아 스스로 노력한다. 또한 인터넷이나 SNS을 통한 자기상담고백 또한 서슴지 않는다. 부끄러워 어디에도 말하기 어려웠던 이야기들이 하나둘 공감을 이끌어내면 그건 이미 나의 고유 감정이 아니고 모두의 감정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살며시 발을 빼면 된다. 그저 동조하고 공감하고 너무 질퍽해 자신을 끔찍히 괴롭혔던 감정에서 헤엄쳐 나오면 된다. 대개 말수가 적고 편안한 친구나 지인일수록 마치 상담사와 상담하듯 자신을 표현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찌끼들을 털어놓게 만든다. 그러고 나면 고민은 적게는 절반으로 많게는 거의 대부분을 상대에게 넘겨주고 홀가분하게 그 감정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상대가 성숙한 인격의 소유자라면 그걸 가벼이 휴지통에 클릭해 버릴 만큼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이고 아니라면 자신 또한 악순환처럼 그 찌끼를 끼고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일중심의 사회에서 어느 순간 일생활균형 시대로 나아가면서 관계중심의 사회로도 불리기도 한다. 관계는 소통의 커다란 맥을 따라잡지 못하면 비켜나게 되고 아웃사이더로 전락해 일조차 감당해내지 못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된다. 일보다 더 지치게 만드는 것이 관계의 윤활유이기도 하다. 서로 공통분모가 있어야 관계의 고리는 부드러워지고 다가서기가 쉬운데 우린 너무 에둘러 걸어온 것만 같다. 가끔씩 시간이 나면 통계 조사하는 일을 덤으로 하게 되는데 이 일에는 묘한 설렘이 있다. 전혀 몰랐던 관계가 호구조사를 하면서 그 사람의 기본 데이터가 입력되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밑그림이 그려지게 되는 것이다. 편견을 가지고 봐왔던 사람도 이 일을 하면서 그 사람이 달라 보이기도 하고 아니면 예상한대로 그저 그런 사람도 있었다. 처음 본 사람과의 대화가 성격 탓에 선뜻 다가서진 못하지만 일이니까 용기를 내게 되고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길을 가보게 되는 것이다.10분 정도 소요되는 짧은 시간으로 상대와 나는 아주 긴밀하다할 만큼 가까워진 사이가 되기도 한다. 둘만의 비밀이 공유될 정도로 말이다. 참 희한한 직업군이긴 하다. 인연의 가치도 이 일을 하면서 느끼게 되었다. 어떤 인연은 이 일을 계기로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내기도 하고 어떤 인연은 물처럼 바람처럼 스쳐지나가 흔적조차 남지 않기도 했다. 여린 성격으로 감정의 골을 쉽사리 이겨내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가까운 지인이 위로한답시고 ‘인연에도 수명이 있다’라는 화두를 던져주었다. 이 말은 과연 진실일까. 그러고 보니 맘이 먼저 떠나니 인연도 자연스레 명을 다하게 되는가 보다. 순식간에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던 사이가 틀어지게 되자 어딘가에 박혀있던 모진 가시들이 툭툭 불거져 나와 불편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정말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말들이 내 안에 켜켜이 쌓여있었나 보다. 정말 인연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며칠 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15년간의 세월에 배인 정리(正理)를 뒤로하고 그냥저냥 지낼 수도 있긴 할 것이다. 마음이 되겠지만 말이다. 수명이 다한 인연을 연연해하며 붙잡고 있으려니 한없이 초라하고 추해지는 것 같았다. 생명이 다한 연(緣)의 끝자락에는 미련 없이 내려놓는 미덕도 필요할 것이다. 그래야 또 새로운 인연이 생겨날 테니 말이다. 이런 인연에 반해 꼭 회자되어야 할 인연이 있다. 유년시절부터 같이 자란 친구인데 그 친구는 해를 거듭할수록 아주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에게 연결된 보이지 않는 끈을 느끼게 만든다. 이런 게 실제 인연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곤 한다. 그가 다치기라도 하면 내 마음에 안 좋은 느낌이 짙어지고 그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왠지 그의 소식이 기다려진다. 하지만 주로 안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더 그리워지는 걸 느낀다. 더러 꿈에서라도 그의 안녕이 전해질 때면 인연의 굴레를 되씹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한 인연이라면 억지로 붙들래야 붙들리지 않을 것이고 놓으려 해도 놓여나진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