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가자. 가서 내 두 발로
다니면서 내 두 눈으로 보자’
오래 전부터 꿈 꿔왔던 곳…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내 시선을 온통 빼앗아가 버렸던
보로부두르의 부조들입니다…
세계 최대 불교유적으로 꼽히는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의 아침풍경. 아침 햇살이 퍼지는 가운데 마을에서는 아침안개가 피어오른다. 보로부두르 마을의 아침이 시작되고 있다. |
보로부두르 여행에서 돌아온 지 벌써 2주가 지났습니다. 여행 가방 속에 담겨 있던 빨래더미는 이미 세탁이 끝나 옷장 안에 들어갔고, 입장료 영수증이며 온갖 여행의 흔적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문득 ‘아, 내가 언제 여행을 다녀오기는 했었나?’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가운데 시간이 지날수록 또렷하게 되살아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내 시선을 온통 빼앗아가 버렸던 보로부두르의 부조들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막연하게 꿈을 꿔왔습니다.
보로부두르라는 곳. 그곳에는 아주 거대한 불탑이 있고, 둥근 종 모양의 탑 속에는 부처님이 단아하게 가부좌를 맺고 앉아 계시다는 소식을 오래 전부터 사진으로 봐오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어쩐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인도네시아가 2억5000만 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 가운데 80%가 훌쩍 넘는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고 있는 무슬림국가이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무슬림국가에 불교유적인 보로부두르라…. 어쩐지 이 조합은 뭔가 결정적으로 어긋나 있는 것만 같아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의 입소문만 믿고 가봤다가 그냥 빤한 불탑만 보고 오는 것 아닐까…하는 실망감이 지레 내게 엄습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미룰 수가 없었습니다. 오랫동안 일에 치여서 숨쉬기조차 곤란한 지경에 이른 탓도 있고, 무엇보다도 보로부두르에는 ‘경전’이 조각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서 그걸 눈으로 확인하고픈 강렬한 열망이 작동했기 때문입니다.
아침 햇살을 받고 계시는 종탑 속의 부처님. |
‘일단 가자. 가서 내 두 발로 다니면서 내 두 눈으로 보자.’
이렇게 결심한 뒤 구체적으로 여행계획을 세웠고 그리고 예약을 모두 마쳤습니다. 이번 여행은 평소와 달리 나름 거창한 목적을 세 가지 세웠습니다.
그 첫째 목적이 바로 보로부두르 답사입니다. 보로부두르가 만들어진 때는 8~9세기 경. 하지만 흙과 화산재 속에 파묻혀 있다가 1814년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의 부총독인 영국사람 토머스 스탠퍼드 래플즈가 발견합니다. 하지만 자바섬의 지배권이 영국에서 네덜란드로 넘어감에 따라 보로부두르는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고 하지요. 19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이 유적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탐험이 이뤄졌는데 아직까지도 보로부두르가 왜 이곳에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지, 그리고 탑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조각들에 대한 내용은 여전히 상당부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여행의 둘째 목적은 발리에 가보는 것이었습니다. 발리라고 하면 사람들은 무조건 신혼여행, 스파, 풀빌라, 해변…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게다가 몇 해 전에 매력덩어리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바로 발리의 우붓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은근히 발리에 가면 그녀처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환상을 품게 합니다.
이른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어난 동쪽 면의 부조들. |
그런데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도 특별하게 발리는 힌두교를 믿는 지역입니다. 따라서 이곳에는 아름다운 힌두사원이 아주 많이 있지요. 발리에 가서 줄리아 로버츠의 행선을 따라갈 건지, 아니면 힌두사원을 꼼꼼하게 답사할 것인지는 개인 취향입니다만, 해변을 산책하고 스파를 즐기며 먹고 마시는 건 먼 훗날로 미루고 일단 발리의 힌두사원을 방문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아울러 발리 토박이들의 마을에서 홈스테이를 하고, 커피 농장에서 맛난 발리 커피를 사오기, 즉 진짜 발리를 내 눈으로 보는 것이 이번 여행의 세 번째 목적입니다.
자, 이런 거창하고 원대한 목적으로 남편과 함께 비행기에 오르는 시각은 2015년 7월11일 토요일 오전 11시. 인천공항에서 인도네시아 항공기를 타고 발리의 덴파사르 공항까지 간 뒤 그곳에서 다시 족자카르타행 비행기로 환승하면 보로부두르에 안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떠나는 전날 부지런히 원고를 쓰던 중에 동생이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멀리 메라삐 화산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계시는 보로부두르의 부처님. |
“언니, 뉴스 봤어? 지금 인도네시아 공항들이 화산재 때문에 폐쇄되고 있다는데… 내일 갈 수 있겠어?”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습니다. ‘아차’ 싶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화산의 나라일 뿐만 아니라 불과 며칠 전에도 시나붕 화산이 폭발했다는 엄청난 뉴스가 있었건만 그걸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설마 내가 가는 길에 화산폭발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생심이란 어쩔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불행도 자기는 피해갈 것처럼 생각하는 그 중생심! 어찌되었거나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다음 날 인천공항에서 발리가 아닌 자카르타로 떠나는 비행기에 오르게 됐습니다.
보로부두르로 가는 길은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화산재 때문에 발리 공항이 폐쇄되어 중간 기착지가 바뀌더니 이번에는 아예 인천공항에서 한 시간이 넘게 딜레이가 되어버렸습니다. 한 시간쯤 어떠랴 싶지만 자카르타 공항에 도착해서 약 90분 뒤에 족자카르타로 떠나는 비행기로 환승을 해야 했기에 마음이 좀 급해졌습니다.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자기들 때문에 비행기를 늦게 띄웠는데 우릴 모른 척 하겠어?’
탑승하기 전 그리고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에게 물어봐도 환승게이트에 가루다 인도네시아 직원이 안내해줄 테니 괜찮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공항에 내리고 보니 항공사 직원은 보이지 않고, 콧수염 기른 공항 직원이 여권에 도장 쾅 찍고 ‘트랜짓’하라는 몸짓만 요란합니다. 이미 시간은 지나버렸고, 남편과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줄을 서서 여권에 도장 쾅 찍히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냅다 뛰었지요. 어디로 가야하는지도 모르겠더군요. 그냥 ‘트랜짓’ ‘트랜짓’하고 외치며 작은 캐리어를 끌고 달리니 부딪치는 사람들마다 손가락으로 이리로, 저리로, 위로, 아래로… 열심히 가르쳐 줍니다. 아무튼 땀범벅이 되어 족자카르타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라탔습니다. 그런데 우리 두 사람이 거의 제일 먼저 탑승했더군요. 역시 한국인의 그 기민함, 재빠름은 알아줘야 합니다. 뒤이어서 인도네시아 현지인들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탔고, 마침내 비행기는 어둑해진 밤하늘을 날아올라 우리를 족자카르타 공항에 내려놓았습니다.
보로부두르 전경. 남서쪽 방면이 보수공사 중이라 안타까웠지만 이런 과정까지도 문화가 아닐까한다. |
아주 작은 공항이었습니다. 활주로에 내려서 캐리어를 끌고 공항 청사로 들어갔는데 그 어떤 입국수속도 없고, 그냥 빠져나가면 되었습니다. 애초 호텔에 픽업서비스를 부탁한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자동차 에어컨에 땀을 말리면서 동서남북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우리는 어둔 밤거리를 달렸습니다. 1시간을 훨씬 더 달려서 도착한 곳은 마노하라 호텔. 오직 보로부두르만을 위한 여행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호텔입니다.
체크인하기 무섭게 잠을 청했습니다. 내일 새벽. 햇살이 퍼지기 전, 그동안 사진으로만 봤던 종탑 속의 부처님 친견하러 가야하니까요. 인도네시아에서의 첫 번째 날은 그렇게 저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안개 속에서 보로부두르의 아침이 열렸습니다.
[불교신문3127호/2015년8월12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