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의 매력
2024년 6월 8일 가산(嘉山) 류승구(柳承龜) 원로장로가 창고로 사용하던 공간을 ‘가산화실(嘉山畫室)’로 개조하고 조촐하게 개소식을 열었다. 노년의 시간을 그림과 벗 삼아 살고 싶은 그만의 꿈을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 축하객으로 참석한 죽헌(竹軒) 김진호(金鎭鎬) 선생이 설명한 한국화의 우수성을 들으면서 무한 자부심을 가진다.
한국화(韓國畵)는 1920년대부터 일제가 서양화와 구분한다는 명분으로 임의로 조성한 ‘동양화’라는 명칭을 주체적 입장에서 바꾼 명칭이다. 1960년대 이후 서구미술과 구별되는 전통적 재료와 양식 및 기법을 따르는 그림에 대해서 중국은 ‘국화(國畵)’로, 일본은 ‘일본화(日本畵)’로 부르는 데 반하여 피식민지를 경험했던 우리나라에서는 ‘동양화(東洋畵)’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등장한 것이다. 1966년 화가 박노수는 ‘신한국화’, 1970년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한국화’를 제기하였다. 1971년 김영기(金永基)는 ‘동양화’를 ‘한국화’로 개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부에 건의했고 1976년 6월 한국화와 서양화로, 혹은 회화 1, 회화 2로 구분하자고 했다. 이봉상은 한국인이 그린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 없이 모두 ‘한국화’로 통칭하자는 의견까지 제시했다. 이에 1981년 12월 문교부에서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1983년 개정된 미술교과서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된 이래 교육계에서는 동양화 대신 한국화를 사용했다. 이런 주장은 1980년 일제 잔재 청산과 주체성 확립의 조류와 밀착되어 더욱 큰 호응을 받았고, 1982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주최의 공모전인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도 ‘동양화부’ 대신 ‘한국화부’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또 1983년부터 매년 열린 현대미술초대전에서도 한국화를 사용하였고 1983년 개정된 새 미술교과서에서도 이 명칭을 공식적으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한국화는 두 가지 흐름에서 그 기원을 둘 수 있다. 하나는 3, 4세기 고구려시대의 고분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벽화이다. 이 벽화는 솜씨 있는 훌륭한 직업 화가의 손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적어도 7세기 중반까지 우리나라의 그림을 주도하는 큰 세력이었다. 사신도(四神圖), 인물화, 행차도, 춤, 씨름, 다도(茶道) 의식, 사냥 등 다양한 주제를 그림에 담았다. 이 그림이 그 뒤로 불교시대의 사찰 벽화나 민간에서의 무신도(巫神圖)로 명맥이 이어졌고 조선 후기의 민화, 부적, 풍속화로 나타났다. 두 번째는 수묵화(水墨畫)인데 한국화의 독자성을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미학적 근거다. 수묵화는 당나라 시대에 역사의 기원을 두고 있다. 백묘법(白描法, 짙고 엷음 없이 먹의 선으로만 그린 기법)으로 출발하여 성당기(盛唐期)에 발묵법(潑墨法: 먹물을 번지는 기법), 파묵법(破墨法: 먹의 바림(gradation)으로 그림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기법), 농묵법(濃墨法: 먹을 진하게 쓰는 기법), 담묵법(淡墨法: 물기와 먹이 번지고 어울리게 함으로써 효과를 보는 기법)이 가미되면서 발전하였다.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유생(儒生)들은 그 바탕이 된 경학(經學)을 공부하여 출세하였다. 글을 읽는 사대부에게 글씨를 쓰는 지필묵(紙筆墨) 없이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문인들은 펜 대신 묵과 잉크 대신 먹으로 먹물이 쉽게 스며드는 화선지에 글을 썼다. 그림도 똑같은 필기 수단에 의해 그려졌으니 우리는 글과 그림이 하나의 표현 양식으로 통일되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서양 사람은 글을 펜과 잉크로 사용했다. 그림은 다채로운 물감을 천으로 만든 캔버스에 사용함으로써 철저하게 글과 그림을 구별했다. 이처럼 옛날 선비들은 글을 읽는 것과 그림을 그리는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글은 곧 뜻을 전하는 문자이자 뜻을 새기는 그림이기에 서화일치(書畫一致)의 말이 생겼다. 이 시대 그림을 보면 대부분 글과 그림이 함께 나타난다. 산수나 사군자를 그려 놓고 그 여백에 그림의 뜻을 간단하게 요약해 놓았다. 이것을 화제(畫題)라고 하는데 학문의 깊이가 있는 선비의 글은 뜻이 깊어서 새기기 어렵다. 그 그림에는 옛사람들의 우주론적인 철학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글과 그림이 서로 의지하여 출발했다. 글씨를 쓰던 묵필로 간단한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던 묵필로 문득 생각나는 대로 글을 써넣었다. 수묵화나 문인화의 양식은 이렇게 정착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먹으로 그린 그림에 한두 가지의 채색이 가필되었고 먹 자체에 농담(濃淡)을 구분하여 강약의 리듬을 만들면서 서서히 그림의 우세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한편 문인화 양식에는 과거제도가 크게 기여했다. 이 제도는 고려 시대에 중국에서 도입하였으므로 중국인들의 고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이 기본이 되어 천문학, 지리학과 같은 자연철학의 상징인 산(山)이 그림에 많이 등장하고 특히 산수화에는 전설적인 산신이 자주 등장했다. 그러므로 한국화는 서양문물이 들어오기 이전부터 우리들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벽화나 수묵화의 총칭이다. 문인화는 먹의 그림이고 고분벽화는 채색 그림이다. 묵화(墨畫)는 문인사대부 지배층의 그림이고 채색화는 소외층인 장이(張李: 평범한 사람)의 그림이다. 그러나 이런 이분화는 우리의 전통적인 한국화의 의미를 축소할 소지가 있어서 경계해야 한다. 먹의 그림은 시간적이고 정신적인 것을 추구하는 그림양식이고 채색화는 공간적인 것, 삶의 구체적인 진실이나 규범을 제사하는 그림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 두 양식은 어떤 시대에나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한국화는 오랜 역사 속에서 동서양의 모든 그림을 다 담고 있는 미술 문화의 총체성을 담고 있는 우리만의 전통적인 미술양식이다. 가산 화실에서 새롭게 눈을 뜬 한국화에 진정 한국인으로서 진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낀다.
한국화의 소재는 대부분 자연이다. 산과 물, 나무와 꽃, 각종 짐승과 사람이 그림의 모델이다. 태초에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세상이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망가진 채로 오랫동안 인류의 역사를 이어왔다. 보기에 흉측한 면면들이 돌출되고 보는 이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다시 이 세상을 좋게 만들어 놓으셨다. 하나님은 다시 이 세상을 죄가 아닌 의로 여겨주셨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죄인이 아니고 의인으로 칭함 받는다. 망가진 세상이 새롭게 재탄생하는 역사의 순간이다. 한국화에서는 그런 세상을 아름답게 재탄생시켜 놓았다. 작은 화선지에 그려진 수묵화에 벽화처럼 채색을 입혀서 탄생한 한국화는 하나님이 만드신 태초의 세상처럼 보기 참 좋은 상태로 탈바꿈되었다. 진정 한국화는 창조주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창조의 신비가 담겨있는 한민족이 만들어낸 천상화(天上畵)다. 항상 그 그림의 주인공으로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닐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세기 1:31).
죽헌 김진호 선생의 축사